파일로 밴스 (Philo Vance)

 

미스터리 작품에 등장한 주인공들을 대상으로 가장 박식한 탐정, 가장 현학적인 탐정, 가장 고상한 취미를 가진 탐정, 가장 게으른 탐정을 꼽는다고 하면 독자들마다 각각 다른 답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부문에서 평점을 매긴 후 종합점수를 낸다고 하면 아마도 미국의 아마추어 탐정 파일로 밴스가 1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무척 높다(미리 밝혀두자면 ‘파일로 밴스’는 본명이 아니다. 사건의 기술자인 S.S.반 다인에 의하면 ‘그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이름을 밝힐 수 없어 임의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추리소설 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인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파일로 밴스는 처음 등장했을 때 34세의 젊은 사나이로, 여러 명문학교(이튼․하버드․케임브리지․옥스퍼드 등)를 졸업한 수재로 학식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취미 이상의 전문지식(고고학, 미술, 클래식 음악 등)을 지니고 있다. 1차 대전 중 육군 중위로 참전했고, 전쟁이 끝난 후 미국 고고학회, 뉴욕 시립도서관 평의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종신 이사직을 맡는 등 젊은 나이에 이미 여러 개의 직함을 가졌으며, ‘폴로의 기법’ ‘이집트 상형문자의 모음(母音)’ ‘방사능의 원자 구조’ ‘명(明) 왕조의 도기(陶器)’ 등 다양한 저서를 집필했다.

 

파일로 밴스가 처음 등장한 작품 <벤슨 살인사건>


그러던 중 숙모가 작고하면서 막대한 유산을 남겨주자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한 일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면서, 뉴욕 이스트 38번가의 낡은 아파트를 개조해 호화롭게 꾸미고 동서양의 미술품을 수집해 가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가족은 없는 독신으로, 친구이자 사건 기록자인 반 다인, 집사 겸 요리사 칼리와 함께 살고 있다.


다양한 직함만큼이나 취미도 다양한데, 미술품 감상을 비롯해 고전음악 감상, 열대어와 개의 사육 등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대학 시절 펜싱부 주장이었으며, 골프와 격투기에도 일가견이 있을 만큼 운동신경이 뛰어나지만 걷는 것을 몹시 싫어해서 뭔가 탈 것만 있으면 겨우 100m라도 걸으려고 하지 않는 별난 면도 있다.


밴스가 범죄 해결에 뛰어들게 된 것은 어쩌면 우연이다. 어느날 아침 ‘뉴욕 최고의 게으름뱅이’ 밴스가 때 아니게 일찍(일찍이라 해도 아침 9시였지만)일어나 있었고, 그 때 그와 친분이 있었던 지방검사 존 F X 마컴이 찾아와 살인사건 현장에 가 보자고 제의한다. 그보다 얼마 전 밴스는 사교클럽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한번쯤 현장에 나가보고 싶다던 말을 했었고, 지방검사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 결국 밴스는 첫 번째 사건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을 시작으로 마컴이 뉴욕의 지방검사로 재직했던 4년 동안 많은 난(難) 사건을 ‘취미 삼아’ 풀어나가게 된다.


밴스는 물적 증거보다 정신분석적 연역법을 중시한다. 용의자들의 심리상태를 정밀하게 고찰한 후 그 중에서 범인을 찾아내는 것. 범인을 체포하기 힘들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고도의 심리적 전술을 사용해 자신의 손을 대지 않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냉정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케닐 살인사건>. 윌리엄 파웰이 파일로 밴스를 연기했다.

 

마컴이 검사 직에서 물러난 직후 밴스는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이탈리아 피렌체 교외의 별장으로 떠났으며,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밴스는 독자들에게서도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편이다. ‘이 이상의 천재적 탐정은 없다’에서부터 ‘너무나 완벽한 인물이라 도무지 사람처럼 느껴지질 않는다’에 이르기까지 호불호(好不好)가 뚜렷하다. 등장한 지 80년이 되어 가는 요즘은 과거와 같이 많은 팬들에게 사랑 받기가 쉽지 않겠지만, 단편들이 판을 치던 시절 장편 시대를 열어 젖히면서 새로운 붐을 일으켰다는 점만으로도 기억에 남겨놓아야만 하는 주인공이다.

 

(스포츠투데이 2000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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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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