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퀼  푸아로(Hercule Poirot)

 

19세기에 추리소설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이후 전 세계의 작품에 등장한 탐정들의 숫자는 좀 과장을 보태 한강 백사장의 모래만큼이나 많지만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인물로 범위를 좁히면 대략 백 단위로 줄어들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도 명성과 인기를 동시에 얻은 주인공을 꼽으라면 아마도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가 될 것이다. 마치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것보다 한국에서 인기 얻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궤변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 소개되려면 우선 번역되어야 한다는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에서 푸아로를 연기한 앨버트 피니


이런 점에서 에르퀼 푸아로라는 인물은 무척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1920년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에서 선보인 포와로는 무척 독특한 외모(160㎝를 간신히 넘는 작은 키, 대머리에 가까운 달걀형 머리, 잘 손질한 콧수염과 흥분하면 고양이 같이 빛나는 녹색 눈동자)의 소유자로, 그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대부분 번역되었고, 덕택에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팬들을 가지게 되었다.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 표지

 

벨기에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푸아로는 브뤼셀 경찰에 재직하고 있던 1904년께 스코틀랜드 야드의 재프 경감과 합동수사를 펼치며 국제 위조화폐사건을 해결했고,1909년에는 프랑스 경찰과 함께 국제적 범죄자를 체포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경찰에서 퇴직한 직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그의 모국 벨기에는 전쟁에 휩싸였고 푸아로는 친구들과 함께 영국으로 피난하며, 이때 머무르게 된 에섹스주 스타일즈 저택의 노부인에게 신세를 지게 된다. 훗날 그 노부인이 살해되자 푸아로는 예전 벨기에에서 알게 된 영국인 친구 아더 헤이스팅즈 대위의 도움을 얻어 사건을 해결하면서 영국에서 탐정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희노애락의 감정표현이 요란하고 별난 외모와 과장된 몸짓 때문에 우스꽝스럽게 보일 때도 있는 푸아로는 런던에서 한때 헤이스팅즈와 함께 사립탐정사무실을 개업했다. 항상 자신만만하며 자신의 뛰어난 ‘회색 뇌세포’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진 그는 헤이스팅즈가 아르헨티나로 떠난 후에는 집사와 여비서를 두고 일한 적도 있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취미는 머리 염색과 호박을 재배하는 것.

 

TV 시리즈에 등장한 푸아로(오른쪽. 데이빗 수셰이가 연기)

그는 ‘질서와 방법’을 중시해 사건을 추리해 나간다. 물적 증거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직감을 더 중요시하며, 사건 관계자와의 대화에서 얻은 자료를 ‘회색 뇌세포’로 분석해 범인의 심리를 통찰해낸다.


나이가 들어 관절염으로 걷지도 못하고 휠체어에 탄 모습으로 등장한 마지막 사건 ‘커튼’에서 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푸아로의 명성은 너무나 높아 뉴욕타임스에서는 그의 부고 기사를 실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기사에는 푸아로의 나이가 120세로 나와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푸아로는 한때 죽었다가 살아난 셜록 홈스와는 달리 20년 이상 새로운 작품이 나오질 않았다. 작가인 크리스티가 그의 유산 상속자에게 포와로의 후속편을 더 이상 쓰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긴 바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98년 푸아로가 등장하는 ‘새로운’ 작품이 발표되었다. 책으로 발표되지 않았던 라디오 드라마 대본을 소설화한 ‘블랙 커피’라는 작품이 바로 그것. 이 대본은 크리스티 본인이 직접 썼으며, 크리스티의 전기 작가인 찰스 오스본이 소설화해 두 사람의 공저(共著)로 되어 있다. 약 70년 전인 1930년 방송되었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블랙 커피’는 평단과 독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스포츠투데이 2000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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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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