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기계를 능가하는 사람들


"3년 전에 칠순 고개를 넘었는데, 그때 나는 결심했습니다. 이제는 메그레 경감이나 그밖에 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입장에서 사는 것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다짐했지요. ‘나는 내 이름으로 220편의 장편소설을 썼고, 필명으로 150편을 썼다. 이제부터는 나 자신의 입장에서만 살기로 하자.'”
                                                           조르주 시므농 - 허버트 미트갱과의 인터뷰(1976)

영국 작가 다알(Roald Dahl)의 단편 <위대한 자동 문장(文章) 제조기 The Great Automatic Grammartizator>에 나오는 ‘자동 문장 제조기’라는 것은 소설의 성격, 주제, 형식, 등장인물, 길이 등을 지정해 놓으면 자동으로 집필을 시작해 인쇄까지 마쳐 주는 환상적인 성능을 가진 기계입니다. 이런 기계를 만들어 낸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은 창작, 즉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상 속의 기계처럼 완벽한 수준에는 못 미치더라도 한때 플롯 휠(Plot Wheel), 플롯 카드(Plot Card) 등 작가의 창작을 도와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도구가 나온 적도 있었고 컴퓨터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등장인물, 배경, 주제를 적어 넣으면 소설을 만들어 주는 프로그램이 나오기도 했지만, 베스트셀러 작가가 ‘저는 이런 창작 보조 도구를 사용해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은 없습니다(혹시 도움을 받았더라도 내놓고 말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발표하는 작품 숫자만 보면 혹시나 그런 글 쓰는 기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궁금한 생각이 들 만큼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 추리작가가 있긴 합니다.

'스릴러의 제왕' 에드거 월러스


추리소설은 규칙이라는 양날의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규칙대로만 한다면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지켜야만 하는 규칙 때문에 참신한 작품을 쓰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골치 아픈 추리소설을 쉴 새 없이 발표하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닌 작가들은 대중소설이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하던 20세기 초반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영국 대중소설계의 선두주자였던 에드거 월러스(Edgar Wallace)는 30세에 첫 작품을 낸 후 57세라는 과히 많지 않은 나이로 작고하기까지 27년간 170권이 넘는 장편 소설과 수많은 단편, 30여 편의 각본을 남겼는데, 장편 소설만을 따져 봐도 연간 여섯 편을 쓴 셈이지요. 한때 영국의 서점에서 팔리는 책 네 권중 하나가 그의 책이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아 ‘스릴러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전성기에는 4일 만에 각본 하나를 쓴 다음 그 주말에 장편 소설 하나를 탈고할 정도로 쉴 새 없이 펜을 휘둘렀다고 전해집니다(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플롯 휠'이라는 도구를 고안한 사람도 바로 월러스입니다). 더글러스 톰슨(Douglas Thompson)의 <추리소설의 거장들(Masters of Mystery)>(1931)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남아 있습니다.

한창 집필중인 월러스를 찾는 장거리 전화가 오자 비서가 받았다. “월러스 씨는 지금 막 소설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좋아요! 다 쓸 때까지 전화 끊지 않고 기다리겠소.”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활동한 작가 프레드릭 데이(Fredric Van Rensselaer Dey)는 1891년부터 닉 카터(Nick Carter)라는 탐정이 등장하는 작품 1천여 편을 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훗날 조사에 따르면 소문보다는 적은 6백여 편으로 밝혀졌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숫자이지요. 닉 카터 시리즈는 추리소설다운 치밀함이 다소 부족한 활극입니다만, 1886년 처음 등장한 이래 1백년이 넘도록 시리즈가 이어져 왔습니다. 다만 수많은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쓰는 바람에 대부분의 작품에는 작가의 이름 대신 ‘닉 카터의 저자(The Author of 'Nick Carter')’ 혹은 ‘유명 작가(A Celebrated Author)’라고 쓰여 있습니다.

월러스나 데이가 주로 잡지 연재를 통해 작품을 끊임없이 발표할 수 있었던 20세기 초반이 지나자 잡지보다는 단행본의 판매가 우세해졌습니다.

‘추리소설의 여왕’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이 붙어 있는 영국의 여류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는 바로 이 시기인 1920년에 등장했습니다. 그녀에게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물론 걸작 추리소설을 썼다는 점에도 있지만 ‘크리스마스를 크리스티와 함께’라는 선전문구가 수십 년 간 이어지도록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다른 여성 작가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작품을 남겼다는 것도 큰 이유입니다.

이정도는 되어야 많이 썼다고 하겠죠 - 애거서 크리스티


원래 변호사였던 미국 작가 얼 스탠리 가드너(Earl Stanley Gardner)는 여가시간을 이용해 12년간 1백여 편의 단편 소설을 싸구려 잡지에 발표해 왔습니다. 당시 그는 오후 11시쯤 귀가해 하루 4천 단어 정도 - 대략 단편 하나 정도 분량입니다 - 의 원고를 쓰고 새벽 3시쯤 잠자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는 작업 방식을 크게 바꿉니다. 1933년 변호사 페리 메이슨(Perry Mason)을 처음 등장시킨 장편 <벨벳 손톱 사건(The Case of the Velvet Claw)>은 직접 글을 쓰지 않고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비서에게 불러줘서 간단히 타자를 마친 후 그것을 토대로 완성했는데, 이틀 남짓 걸렸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절약한 그는 이듬해부터 전업 작가가 되어 1933년부터 1970년 작고하기까지 37년간 페리 메이슨 시리즈 82편을 비롯해 130여 편의 장편과 다수의 단편을 남겼는데, 장편만을 따져 보아도 연평균 세 편 이상을 쓴 셈이지요. 이로 인해 한때 그는 대신 써 주는 작가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오해까지 받곤 했습니다.

이정도는 되어야 많이 쓴 거죠 - 얼 스탠리 가드너(왼쪽)


프랑스에도 가드너와 맞먹을 만큼 빠른 속도로 글을 쓰는 작가가 있었습니다. 벨기에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한 조르주 시므농(Georges Simenon)은 메그레(Jules Maigret) 경감이 등장하는 작품만 장편 77편, 중․단편 35편 등 1백여 편 이상을 남겼습니다. 20세에서 30세 사이에 신문에 1천여 편의 단편을 발표하며 빠른 글 솜씨로 정평이 나 있던 그는 메그레 경감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1931-32년의 2년 동안 스물두 편을 썼습니다(우리나라 기준으로 볼 때 일반적 장편 길이에는 못 미치는 분량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한 달에 한 편 이상 발표한다는 것은 대단합니다). 그는 ‘현대 프랑스 문단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진실로 소설가다운 소설가’라고 앙드레 지드로부터 격찬을 받았을 정도로 추리소설적인 측면보다 인간 내면을 깊이 있게 파고든 문학적인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57개 국어로 번역되어 40여 개 국가에 출판되었고 세계적으로 7억 권 이상이 팔렸다는 것이 그 증명일 것입니다.

이정도는 되어야 많이 썼다고 할 수 있죠 - 조르주 시므농


장편소설에 비해 단편소설은 단순히 짧다는 이유만으로 쓰기 쉬운 것이라고 짐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단편을 많이 써 본 작가들은 물리적인 수고 면을 제외하고는 기발함, 구성 등 여러 면에서 절대 장편소설보다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나마 추리소설 전문 잡지가 줄어들면서 단편만 전문으로 쓰는 작가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에드워드 D.호크(Edward Dentinger Hoch)는 평생 꾸준하게 단편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1973년부터 미국의 추리소설 전문지인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 Ellery Queen Mystery Magazine>에 매월 하나 이상의 단편을 계속 발표했는데(2007년 5월호에서 단 한 번 빠졌습니다), 2008년 초 세상을 떠나기까지 34년간 수록된 그의 작품 수는 450편이 넘습니다(잡지의 숫자보다 작품의 수가 많은 이유는 그가 필명으로 한 달에 두 편을 실은 적도 여러 번 있기 때문입니다). 우등상보다 개근상이 더 가치가 높다는 말도 있는데, 호크에게는 특별 개근상이라도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서구의 전업 작가들은 아무리 빨라도 보통 1년에 한 작품 이상은 발표하지 않는데, 이것은 작가의 능력 부족이나 퇴보라기보다는 출판 시장을 고려한 작가나 출판사의 신중한 정책 덕분이지요. 한 편만 성공해도 부와 명예가 쏟아져 들어오니, 굳이 급하게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아직 일본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음번에는 서구 작가 못지않게 많은 작품을 쓰는 일본의 작가들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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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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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얼룩끈 2010.11.11 15: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작이란 작가로서는 꿈 중의 하나입니다. 걸작 하나만 제대로 남기기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양과 질 모두 인정받기는 더욱 힘들죠. 한국 문학사상 최고 다작가는 누구인가 궁금합니다.

    • 추리닝4 2010.11.15 1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 유명한 작가들이라 더 부럽다는^^; 한국 최고 다작가는 누구인지 나도 궁금. 순문학 작가들이야 장편을 자주 안내니 혹시 무협쪽? 한작품을 기본 5권씩들 써시니^^

  2. 카메라이언 2010.11.12 0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아, 감탄했습니다. 특히 책탑보는 순간 부러움이 울컥. 아아, 다음 편에는 마쓰모토세이초옹 이야기가 나오겠네요. 두근두근두근두근. 무지하게 기대되요, 꺅!

  3. 이야기꾼 2010.11.12 13: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쩝...부러울 따름입니다.

    저정도는 써 줘야 아, 좀 썼구나...할텐데 말이죠...

  4. myungworry 2010.11.14 16: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쓰고 쓰고 또 쓰면 못 쓸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쓰고 산만 높다 하더라..(뭔 소리인가요?) 기계의 도움이었든 조수의 도움이었든, 아무튼 개근상 받은 것만해도 대단한 작가들이네요.

  5. 허니문 차일드 2010.12.08 15: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애거서 크리스티 대단하군요. 늘 꾸준히 활동하시는 작가분들을 보면 정말 그 어떤 것보다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준비가 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암튼 대단하네요.^^

  6. 지나가다 2016.03.01 0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연히 다작 작가를 검색해서 즐겁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