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마니아의 5가지 징후 


단언컨대, 저는 추리소설 마니아가 아닙니다. 창작을 조금씩 하지만 취미 수준이고, 마니아라 불리기엔 일단 독서량이 절대 부족합니다. 지금까지 국내외 작품 수백 편은 읽은 것 같은데 그 정도로는 어림없습니다. P씨, H씨 등 주위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 이 정도는 돼야, 마니아구나~, 할 수 있겠더라는….

 

 
  

1. 미스터리 이외의 책들은 가라

(자신이)미스터리 마니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는 그야말로 사시사철 미스터리만 읽어야만 합니다. 미스터리 이외의 것은 책도 아닙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나오면 당장 읽지는 못하더라도 사야만 하고, 막 나온 신간을 순식간에 읽은 후에는 시리즈 다음 작품을 빨리 번역, 출간해 달라고 출판사 홈페이지를 통해 재촉합니다.


이 정도까지는 좋습니다. 문제는 미스터리를 읽지 않는 평범하고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친구가 마치 바보처럼 답답하고 따분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재밌는 추리소설을 왜 읽지 않는 거야!

따져볼 것도 없이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친구는 할 일도 많고 취미도 많습니다. 사진도 찍고 요리도 배우고 여행도 다니겠지요. 그러니 마냥 추리소설만 읽어대는 친구가 얼마나 바보 같고 답답하고 따분하게 여겨질까요. 다만 말을 하지 않을 뿐이죠.


그렇다고 마니아들끼리는 사이가 좋을까요…? 어림없습니다. 서로 좋아하는 작가가 다르고 누군가가 절판된 책을 구했다고 자랑질하면 배가 살살 아파옵니다. 나한테 없는 책이라면 뼈마디까지 쑤시지요. 아름다운 우정이라는 것은 소설 속의 천재적 명탐정처럼 현실에는 없는 허구의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도 마니아들만의 특징이라고 할까요.



2. 레어템, 기필코 득템하리라!

마니아가 되면 투자 가능한 돈 대부분을 수집품에 때려 넣습니다. 부자들은 스포츠카나 미술품, 도자기 같은 값비싼 물건에 손을 뻗치곤 하죠. 이런 분들이 추리소설처럼 소박한 것에 관심이 없어 천만다행입니다. 그들과 희귀 아이템 사 모으기 경쟁이 붙는다면 생각만 해도 부들부들 떨리니까요.


낡고 쉽게 구할 수 없는 책이라 더 가치있는...(P씨 제공)


책이란 것이 그다지 비싼 물건은 아닙니다만(물론 상대적이지만) 추리소설 마니아에게는 그다지 싸다고 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이 역시 상대적입니다). 용돈이 남아 추리소설 구입에 쓴다…는 정도라면 당신은 건전한 수준입니다. 점심 한 끼를 굶고, 사람들 만났을 때 커피 한 잔 덜 마시고, 학생이라면 참고서 사는 대신 책을 산다……까지 가면 슬슬 주의가 필요합니다. 어느덧 사람도 만나지 않고 심지어는 애인마저 멀리 하고 신간이 나왔다하면 구입하기 시작합니다. 읽을 시간은 없어도 우선 사놓기는 해야만 합니다. 언제 절판될지 모르니까요.


조금 더 나아가면 아직 구하지 못한 책을 찾아 나섭니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다 사야만 하고, 절판된 책이라면 반드시 구해야만 합니다. “요즘 재출간됐잖아?”하는 상식적인 주위 이야기는 덧없는 조언에 불과합니다. 과거의 것 그대로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기필코 손에 넣어야 합니다. 연간 수백 권이 나오는 판국에 옛날 책까지 구입 대상으로 삼으면 그 비용은 살림살이에 지장을 줄 지경에 도달합니다. 특히 인터넷 서점에서는 이른바 ‘레어 아이템’이라는 딱지만 붙으면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가격이 올라가버리는 실정이라 소문을 내지 않고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정도급의 마니아는, 웬만한 노력으로 회복하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갑과 통장에는 싸늘한 바람만 불고 남는 것은 커뮤니티나 카페 등에 찍어서 올린 인증샷 뿐.

 

 

3. 방은 좁고 책은 넘치더라

마니아가 되면 방이 점점 어수선해지고 좁아집니다. 책은 쌓이는데, 집이 고무풍선처럼 죽죽 늘어나는 것은 아니니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마니아라면 일단 손에 넣은 책을 처분하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학교 다녀왔더니, 군대 갔다 왔더니 책이 사라졌더라 하는 슬픈 이야기는 자신이 원해서 한 일은 절대 아니지요. 책은 장마철에 소리 없이 늘어가는 곰팡이처럼 증식합니다. 그렇다고 “어, 책이 늘었어? 그럼 집 한 채 더 짓거나 더 큰 집으로 가지.”라고 할 정도의 재벌도 아닙니다. 여유 수납공간과 서적 구입 빈도를 따져본다면 언젠가 찾아올 ‘운명의 날’은 초등학생도 예측 가능하겠지만 그런 것은 전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마니아 증상 중 하나입니다.

혹시 쌓인 책들이 머리를 향해 덮치면… (일본모험소설협회 초대회장 나이토 진의 서재…로 보이는 곳)


시리즈는 꼭 채워 넣어야 하고, 마음에 드는 작가의 작품은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습니다. 한가해 보이던 책장이 차츰 메워지더니 어느덧 2중, 3중으로 겹쳐지고 급기야 책이 바닥에 쌓이기 시작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는 작고 가벼운 문고판이 없는데다가 요즘은 크고 묵직한 양장본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이런 상황이 거듭되면, 이제는 물리적인 위험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책 한 권의 무게는 대략 500그램. 한두 권이면 가벼워 보여도 그것이 수백, 수천 단위로 넘어가면 웬만한 가구들보다 무거워집니다. 이사 갈 때 이삿짐센터 아저씨들 눈총을 가장 많이 받는 물건이지요. 1천 권이면 500킬로그램, 2천 권이면 1톤. 이쯤 되면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이 부실공사는 아니어야 한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헹, 그럼 나는 아직 멀었네, 맘 놓고 더 사야지’ 하시는 분들, 그런 분들이 바로 잠재적인 마니아입니다.



4. 연쇄살인? 그 까이꺼~

험한 이야기를 많이 읽어 간덩이가 부어서일까요. 이런저런 강력사건들이 시시해보입니다.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우리 사회를 벌벌 떨게 했던 연쇄살인범 뉴스가 쏟아져도 그냥 무덤덤하고 잠시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한니발 렉터 박사와 비교해보기도 합니다.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범행 현장. 이런 사진을 보고 무감각하면 곤란한데^^; (경향신문 자료사진)


시선도 좀 삐딱해집니다. 모녀가 불타 죽은 안타까운 화재 사건을 보더라도 보험금을 노린 남편 소행이 아닐까하는 의심의 눈초리부터 날립죠. 그리고 비슷한 반전을 사용한 작품들을 떠올려봅니다. 주위에서 안다면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고 분명 손가락질 할 겁니다. 이따금 현실과 소설을 착각해 망상에 사로잡힙니다.

일상생활을 추리 트릭과 연관시키는 증상도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고층빌딩에 매달려 외벽 청소하시는 분들(죄송해여^^;)을 보면, 흠 킬러라면 저런 식으로 침투하는 방법도 괜찮군, 나름 흐뭇해합니다. 집에 찾아온 친척들은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들의 제목- 연쇄살인, 죽음, 범죄 등등- 을 보면서 감탄(사실은 질겁)을 합니다. 이거 혹시 병일까요?



5. 창작의 길, 일단~은 도전!

기타 배우면 밴드 만들어 공연하고 싶고, 커피 배우면 근사한 카페 열고 싶듯 추리소설을 즐겨 읽다보면 어느 순간 몸 안에서 꿈틀대는 창작 욕구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마니아의 궁극 지향은 창작입니다. 특히 최근에 읽은 책이 크게 실망스러웠다면 에계계, 이 정도 수준이라면 나도 한번? 그러다가 머릿속에서 참신한 트릭이라도 하나 번쩍하면 단편 하나쯤은 가볍게 뽑아낼 것 같습니다.


자, 슬슬 발동이 걸립니다. 추리소설도 문학인지라 일단 작법 책부터 사기 시작합니다. 왕 선생님의 <유혹하는 글쓰기>는 기본으로 읽어 주시고, 전상국의 <당신도 소설을 쓸 수 있다>같은 책도 훑어봅니다. 문장력 향상을 위해 글발 좋은 순문학 작가들 책도 탐독합니다. 이야기는 느리고 자극은 없잖아! 당연히 추리 마니아인 당신 취향엔 순문학 소설들이 안 맞습니다. 그래도 공부라 생각하고 부지런히 책장을 넘깁니다. 유명한 작품 필사도 해봅니다.


혹시 창작을 위해 이런 종류의 책 읽지 않으시나요?


살인사건을 다루려면 전문지식도 필요하겠죠. 법의학, 해부학 개론서들. 월간 <수사연구>같은 전문잡지도 찾아보고요. 이런저런 책들이 방안에 또 늘어납니다.ㅠ

이제 넘치는 창작 욕구를 주체할 수 없습니다. 글쓰기 전용 노트북도 하나 장만하고 문예 강좌도 등록을 합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견학 기회라도 있으면 회사에 결근계를 내고 뛰어갑니다.

마니아라서 추리물을 잘 쓸 수도 있고, 못쓸 수도 있다는 말을 합니다. 전자는 일단 독자에게 먹히는 코드를 체득하고 있고, 후자는 작품 수준에 대한 냉정한 자기검열 때문이겠죠. (테마로 읽는 미스터리<10>에서도 언급했지만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암튼, 마니아라면 완성을 했던, 중간에 접었던 컴퓨터 어딘가에 창작 원고 하나쯤 저장돼 있을 겁니다. 행여 결실이 시원찮아도 큰 돈은 안 드는 일이라 다행입니다.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걸려서 이루어지는 창작의 기쁨! 다만 남의 혹평을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한 사람은 다음 작품에서 처절하게 고통 받는 피해자로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마니아가 되고 싶으십니까?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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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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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블레이드 2010.12.06 23: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엇비슷하게 쌓여있던 적이 있었죠. 어머니의 처분협박이 최고조에 달할 찰나 모 출판사와 맺은 출간 계약서를 보시더니 한 말씀 하시더군요. <책장 사러가자> 전 눈치 없이 말했습니다. <그냥 책을 더 사게 돈으로 주세요> 여러분, 책등으로 머리 맞아본 적 있나요? ㅜ.ㅜ;;;;;

  2. 카메라이언 2010.12.07 02: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하하하 보다가 자지러졌어요, 이 시간에. 저 책장 아니, 저게 책장이라고 해도 되나. 크핫핫핫 아우 쓰러져. ㅠㅠㅠ 아우 이 기준 웃겨서 쓰러지겠어요. 으핫핫. 잘 보고 가요. (그나저나 쿠죠 탐 나네요.)

  3. 레이 2010.12.07 13: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마니아의 이야기는 흥미롭군요. 글도 재밌어서 웃으면서 봤습니다.
    나이토 님의 서재...지진이라도 일어나면 그야말도 책 무덤...-_- 보기만 해도 불안합니다. 부럽기도 하군요.
    (저도 쿠죠 탐 나요. P님, 배아파요.)

  4. 갈매 2010.12.07 17: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사진 장난 아녀요.. 곧 쓰러질 것 같아. 어케 저기 서 있지~ ㅎㅎㅎ

    전 검색하다가 재미난 거 발견. 코난 도일이 시도 썼네요~
    http://wonderingminstrels.blogspot.com/1999/08/guards-came-through-sir-arthur-conan.html
    심심하면 읽어보세요~~

    • 추리닝4 2010.12.08 1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미뇽도 작정하고 방안에 한번 쌓아보심이.. 캬캬캬 .. 근데 나는 왜 시를 봐도 좋고 싫고 판단이 안서지. 둔해서 그런가 ㅠ

    • 갈매 2010.12.09 0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사할 때 3m 책장에 있던 책을 고스란히 담아서 다시 정리해넣는데. 이중으로 쌓은게 많아 불가. 결국 아저씨들이 책을 그대로 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쏟아놓고 가버렸는데. 거의 저 꼬라지였어요.
      한달 넘게 정리. 아직도 집 현관문 앞에는 책박스가 척척 쌓여있다는.

      시는.. ㅋㅋ 영시라서? ㅎ

      저는 이거 다시 읽어보니 가만히 보니 저, 3번 뿐 아니라 4번 해당되는 듯. 뭐 물론 저는 추리소설 마니아는 못됩니다만. 책 일반으로 옮겨 생각하면 그렇단 말이죠.

      요즘엔 재미난 이야기나 인물을 보면 이런 인물은 딱 추리소설 캐릭터로 들어가면 좋겠어, 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조만간 5번을 시도할 지도??
      그치만 내러티브를 만드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

    • 추리닝4 2010.12.09 15: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 지대로 보셨소. 어찌 영시의 깊이를 알까 ㅠ
      혹시, 앤 패디먼이 쓴 <서재 결혼 시키기>란 책 알지 모르겠는데, 아마 현관 앞 박스 속 책들도 다른 근사한 사람의 책들과 함께 넓고 깨끗한 서가에 꽂히는 날이 올거야. 책 주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말야ㅎㅎ
      글구 5번을 시도하는 날이 언능 오길..^^

  5. 허니문 차일드 2010.12.08 10: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조짐이 보입니다. 저 책장에 한번 파묻히고 싶네요. 보기만 해도 넉넉한 기분이 아주 따봉입니다. 늘 책과 함께 한다는 건 즐거운 것임에 틀림 없군요. ^^

  6. 이야기꾼 2010.12.08 1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모두 다 해당되는 전...
    이미 마니아? ^^;;;

  7. 메두사 2011.07.06 16: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카지마 후타리를 검색하다가 여기까지 흘러왔습니다. 아니 이런 사이트가? +_+
    둘러보다가 이 포스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행히 창작의 욕구까지 일어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책을 사모으는 욕심은 줄어들지가 않네요.
    아직 읽어야 할 것도 산더미인데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나 구하지 못했던 책, 그리고 시리즈 같은걸
    계속 사모으고 있습니다. 요새는 좀 뜸하지만요(돈이 없어서 흑흑)
    얼마전에 오카지마 후타리의 컴퓨터의 덫을 선물받았습니다. 나름 스스로 레어템이라며 좋아하고 있어요. 저 혼자만..ㅋㅋ

  8. 2014.03.01 00: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