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걸인(乞人) 

최유범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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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걸인 하나가 길 옆에 서 있는 푯말(里程標)에 기대어 앉아 한가롭게 사기 골통대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의 뒤로는 나무사이로 산길이 비스듬히 뻗쳐 있고 길 왼편으로 언덕 위에는 숲 사이에서 흰 지붕이 내어다 보인다.

그 걸인이 문득 몸을 돌이키노라니까 언덕 위에 있는 집들 가운데 제일 높은 집 들창에서 무엇인지 이상한 광선이 번쩍 비치고는 이어 사라진다.

“망원경인 모양인데… 대체 저 사람은 망원경을 가지고 무얼 찾누?”

이렇게 그 걸인은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계를 꺼내보니 5시 50분이다.

조금 있다가 누가 등 뒤의 산길을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푯말 옆으로 지나갈 때에 걸인은 그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회색 옷을 입고 바짝 말랐으나 든든하게 생긴 노인이다.

“이상한 노인이다”고 걸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한참 있노라니까 등 뒤에서 자전거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자전거를 타고 오든 젊은 사람은 걸인 앞에 와서 내린다.

“여보게 심부름 좀 아니 들어 주겠나?”

“힘들시 안할 일이면”하고 걸인은 천연스럽게 대답한다.

“뭘… 힘든 일은 아니야… 저 S까지 갔다 올 거야.”

“S라니 어데요?”

“저―기 산울타리가 있지?”

“예”하고 걸인이 바라보니 아까 그 노인이 가던 곳이다.

“그리해서 곧장 돌아나가면 바로 S야 … 거기 가면 ‘붉은 사자(獅子)’라는 술집이 있는데 그 주인한테 이걸 좀 주어 달라구.”

“소중한 물건인가요?”

“아―니, 영수증을 모아둔 거야… 이걸 그 주인한테 전하면 은전 한 푼 삯으로 줄 테니 받으라고… 그렇지만 가다가 풀어보면 안 돼.”

걸인은 꾸러미를 받아 가지고 걸어갔다.

등 뒤에서 그 청년은 소리를 쳤다.

“이것 봐― 산울타리를 돌아가― 그래서 수풀 새로 10리쯤 가면 되는 거야. 응, ‘붉은 사자’ 알았지?”

“네 알았습니다.”

걸인은 산울타리 옆으로 돌아가 낙엽이 쌓인 좁은 길로 걸어갔다. 청년은 발자국 소리가 그치기까지 귀를 기울이고 서서 있다.

“이렇게 간단하게 해야 하는 게야. 저 녀석이 죽으러 가누만.”

하고 투덜거리면서 시계를 꺼내 본다. 그리고 나서 여송연 한 개를 꺼내어 절반을 잘라 한 도막을 길가 풀밭에 버리고 한 도막을 피어 문다. 여송연이 거진 다 탔을 때 그는 피우던 토막을 길바닥에 버리고 발로 싹싹 부비면서 중얼거린다.

“이게 증거다. ― 또 아까 같은 거지가 지나가다가 집어가지 않아야 할 텐데… 뭘 그럴 리야 없겠지.”

그는 이렇게 일부러 증거를 만들어 놓고 나서 자전거에 뛰어 올라 달리기 시작하였다.

한 5리쯤 가서 열어 제친 대문이 있고 그리 들어서면 짙은 숲이 있다. 좀 더 들어가면 판장 울타리가 있다. 그 청년은 자전거에서 내려 판장 하나에 손을 대니 쉽사리 부서진다. 그는 그 구멍으로 들어가 다시 판장을 봉해 놓았다.

저―편으로 적은 길이 보인다. 문득 그는 몸을 움칫하였다. 나뭇잎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아까 네거리에서 걸인 옆을 지나가든 그 회색양복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그 청년은 피스톨을 꺼내어 겨누었다.

“탕―”

노인은 네 활개를 벌리고 앞으로 퍽 엎으러졌다. 청년은 총구멍에서 연기가 아직 나오는 피스톨을 넘어진 노인 옆에 내던지고 오던 길로 달아나 버린다.

여기는 ‘붉은 사자’라는 술집.

“여보게 팍―스 자네한테 은전 한 푼 갚아 주네”하고 아까 자전거를 타고 숲속에서 노인을 쏘아 죽인 그 청년이 주인에게 하는 말이다. 주인은 어리둥절한다.

“은전 한 푼? 웬 거야?”

“웬 거지가 내 피스톨을 가져왔지?”

“아―니.”

“허! 그 웬일일가?! 다른 게 아니라 자네 집에 있는 심부름 하는 아이가 손재주가 있다길래 내 피스톨에 새긴 이름을 깎아달라고 웬 거지한테 자네에게로 보냈는데…”

“아―니 거지라곤 보지도 못했어.”

이렇게 걱정삼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마침 문밖에서 동리사람들이 요란하게 떠들면서 술집 앞으로 가까이 온다.

“레이필 영감이 죽었다. 어떤 거지가 죽였다.”

자전거 타고 온 청년과 술집 주인은 문 앞으로 뛰어나왔다.

“엥! 우리 아저씨가 돌아가셨어!?”

청년은 짐짓 놀래는 체하고 부르짖었다.

“시체 옆에 걸인이 쭉 웅크리고 앉은 것을 산지기가 발견했다나, 숲 속에서 말이야… 지금 저기 순사도 와.”

“허― 그가 큰일 났군.” 하고 청년은 군중 속에 섞여 갔다.

“자네는 뭘 그리 걱정하나? 자네 아저씨하고 그리 좋아 지내지도 아니했으면서…”하고 한 사람이 놀려 준다.

저편에서 여러 사람과 같이 순사가 달려온다. 순사는 청년을 보고 인사를 한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하고 청년이 순사더러 물었다.

“모릅니다. 지금 가서 조사를 해 보아야지.”

“산지기는?”

“산막에 있다지요. 시체도 우선 산막에 두어 두었고.”

“거지 놈은?”

“역시 그 집에다 가두어 두었답디다.”

여러 해 동안 아까 죽은 그 노인과 자전거 탄 청년의 숙질간에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노인은 사냥을 좋아하고 술을 먹기는 하나 그 기상은 어디까지든지 신사적이었었다. 그러나 조카 길버트(자전거 탄 청년)는 아주 고약한 악당이었다.

얼마 전에 아저씨와 싸우고 그 집에서 쫓기어 났다가 추근추근하게 다시 들어왔었다. 그는 최근 아저씨가 마누라를 얻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하는 날이면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이 훅 날아가 버린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한 계책을 세웠다.

그날 아저씨가 S까지 가는 기미를 알고 길버트는 언덕 위에 있는 집에서 망원경으로 자기의 도구로 쓸 걸인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즉 걸인에게 피스톨을 주어 보내는 체 하고 실상은 자기가 죽여 놓은 뒤에 그 죄를 걸인에게 둘러씌운 것이다.

산막집에 당도하였다.

순사가 밖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커다란 산지기가 문을 열었다.

“나리 오셨습니까… 기다렸습니다.”

“들어가도 좋은가.”

“네 들어오십시오.”

순사를 따라 길버트가 들어가려고 하니까 산지기가 가로 막는다.

“안됩니다. 경찰서에서 오신 이가 조사를 하기 전에는 아무도 아니 들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외조카야!”

“네 그런 줄 알지만 아무도 들이지 못합니다.”

“흥 잘한다. 두고 보자 이제는 내가 이 산의 주인이야”

산지기는 들은 체도 아니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한 10분 기다리노라니까 산지기가 문을 열어준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들어오십시오.”

방 한가운데는 둥근 탁자가 있고 그 위에는 피스톨과 아까 그가 걸인에게 준 꾸러미가 놓여 있다. 그 옆에 순사가 앉아 있다. 길버트는 불안스럽게 좌우를 둘러보았다.

“아저씨는 어디 모셨습니까?”

산지기가 말없이 손가락으로 문을 닫은 옆방을 가리켰다. 순사가 조용히

“이걸 아시겠습니까?”하고 피스톨을 가리킨다.

“네. 내 피스톨입니다. ‘붉은 사자’의 주인에게 보내라고 거지를 주었습니다.”

순사의 얼굴은 무섭게 변한다.

“이 꾸러미는?”

“이건 아저씨 것입니다. 속에 금시계가 들었어요. 오늘 소포로 부치려고 한 것입니다. …엉!?”

깜짝 놀라 길버트는 뒤로 물러섰다.

옆방 문이 갑자기 열리며 죽은 줄 알았던 아저씨가 나오는 것이다. 옆에는 그 거지가 서서 있고―.

길버트는 잠시 멍―하고 섰다가 갑자기 달아나려고 하는 것을 산지기가 꽉 껴안았다.

노인의 눈에서 노여운 불길이 쏟아 나오며 야단을 쳤다.

“이놈의 자식 네가 나를 죽이려고 들어! 그리고 다른 사람까지… 이 배은망덕한 도적놈의 자식!”

“그렇지만 아저씨…”

“잔말 말아 이놈의 자식! 괜히 살인미수 죄로 붙잡아 가게 할 테야… 그렇지만 천도가 무심치 않아서 살아났다. 네가 이놈 네거리에서 만난 그 거지가 정말 거지였다면 지금쯤 나는 수풀 속에 죽어 넘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천행으로 죽질 아니 했어… 네가 네거리서 맛난 그 걸인은 이 세상에서 제일 머리가 밝고 민첩한 양반이야… 그이는 곧 네 간계를 간파하고 네 계책을 뒤틀어 놓은 거야… 왜? 알고 싶어? 못된 놈의 자식 같으니라고! 그이가 숲 속으로 나를 쫓아와서 그래서 이야기를 하고 나서 그이가 내 옷을 입고 나처럼 변장을 하고 너한테 피스톨을 맞았어. 그이는 여러 번 피스톨 과녁이 되었지만 이 자식아 너같이 겨냥할 줄 모르는 자식은 처음이라더라.”

노인은 끝에 가서 이렇게 조롱까지 하였다. 그 걸인은 노인의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뭘요. 그런 어두컴컴한 숲 속에서는 피스톨은 잘 맞지 않는 법이니까요.”하였다.

그 말이랄지 어성이 아까 네거리에서 만났던 그런 야비한 것은 전연 없고 어데서 나왔는지 아주 점잖았다. 그리하여 길버트는 한 번 더 놀랐다. 걸인은 말을 계속하였다.

“그러고 당신 조카는 보니까 아무래도 수상해요. 눈가에 망원경 대었던 자국이 남았지요. 구두에 먼지도 아니 묻고 자전거 바퀴에도 먼지가 앉지 않았는데 아주 멀리서 온 것처럼 하거든요. 그러고 큰길로 가면 S까지 아주 가까운데 일부러 멀고 좁은 길로 나를 가라는 것이 수상해요. 그러고 피스톨도 원체 잘 쏠장 싶지도 아니했고…”

“이놈아 너는 명색이 무어야? 망할 자식 같으니… 누구야 너는?”하고 길버트가 욕을 하였다.

“나요? 나는 섹스턴 블레이크라는 사람입니다”하고 유명한 명탐정은 고요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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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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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rtemix 2010.10.08 0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묘하게 읽히는 맛이 있네요.
    분명 옮김이라는 걸 봤는데도, 읽으면서 그냥 1920-30년대 조선이 배경이겠거니 하다가 뒤에 외국 이름들이 나와서 그제야 '참, 해외 단편이지' 했는데..
    근대기 문장과 추리소설이 묘하게 뒤얽혀서 흥미진진하게 읽히는데요.
    작가가 누군가 해서 잡지 이미지를 봤는데, 섹스턴 블레이크는 시리즈의 이름인거고, 이 시리즈의 저자는 명확하지 않은 건가요? 궁금하네요. ^^

  2. 추리닝4 2010.10.08 15: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앞에서도 소개했지만 섹스턴 블레이크라는 한 사람의 주인공을 가지고 무진장 많은 작가들(2백명 이상)이 무진장 많은 작품(4천편 이상)을 썼습니다. 좀 무책임한 답입니다만, 작품 게재 당시 원제목은 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의 어떤 작품을 번역했는지 알아내질 못했네요. 원문 대조할 만한 곳도 없어서 아직까지는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