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든 자와 푸는 자, '은밀한 메시지'

 



1993년, 재일교포 작가 레이라(麗羅: 한국명 정준문)는 장편 <청구사보(靑丘四寶)의 비밀>에서 수수께끼 하나를 독자에게 던졌습니다.

‘청구사보의 청룡향로에는 ‘양월탈상득(良月脫相得)’, 백호도침에는 ‘향녀사이지(向女四而智)’, 주작매병에는 ‘견옥해화알(犬玉解和閼)’, 현무주자에는 ‘망영신당궤(亡迎神當匱)’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스무 자를 미즈사와 유미는 ‘양견향망월(良犬向亡月) 옥녀영탈해(玉女迎脫解) 사신상화이(四神相和而) 당득알지궤(當得閼智匱)’, ‘즉 좋은 개는 지는 달을 향하고, 옥녀는 탈해를 맞으며, 네 신이 서러 어우러져 이제 알지의 궤를 얻다’로 풀이했습니다. 이를 힌트로 해서 고려 대학자 김부식이 숨겨놓은 신라 천년 왕조의 재보가 있는 곳을 맞춰 보십시오.’

작가는 독자에의 도전을 위해 작품 끝에 있어야 할 ‘수수께끼 풀이’를 하지 않고 현상 공모를 했습니다. 그런데 응모자는 무려 1천2백 명이나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정답은커녕 비슷하게 맞춘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렇듯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 그것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남들의 눈에 띄어도 쉽게 알아볼 수 없을 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암호입니다.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위의 문장만 가지고 이 암호를 푸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 한번 도전해 보시길. 답은 이 글의 끝에 있습니다.

암호의 역사는 기원전 450년 경 그리스 인들이 사용했던 스키테일(Scytale)이라는 도구에서 알 수 있듯 대단히

스키테일

오래되었습니다. 당시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는 굵기와 길이가 같은 두 개의 둥근 나무봉(스키테일이라고 합니다)을 만들어 하나는 본부, 다른 하나는 파견 지역의 장군에게 주었습니다. 뭔가 전달할 내용이 있으면 이 나무봉에 가느다란 종이 두루마리를 겹치지 않도록 감은 다음 그 위에 글씨를 쓴 후 종이를 상대에게 보내면 됩니다. 만약 종이를 풀어서 보거나 같은 굵기가 아닌 나무봉에 감으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잦은 전쟁으로 혼란기였던 16-17세기의 유럽 각국에서는 암호에 대한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지배자가 수시로 바뀌면서 적과 동지의 관계도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시대, 어디에 첩자가 있을지 모르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반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 평범한 편지가 언제 어디서 반역의 증거물이 될 수도 있던 시절에 암호는 필수적이었겠지요.

현대 추리소설의 선구자 포우는 암호 소설의 원조이기도 합니다. 단편 <황금 풍뎅이>에서 명탐정 뒤팽 대신 등장한 미국 청년 윌리엄 레그랜드는 황금빛 풍뎅이를 잡기 위해 주운 양피지에 보물을 숨긴 장소를 알려주는 괴상한 암호가 적혀 있는 것을 알아내고 친구와 하인의 미치광이 취급을 무릅쓰고 열정을 불태웁니다. 문자 그대로 작가와 독자와의 두뇌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암호 추리소설은 후배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줘 추리소설의 초기인 20세기 초반에는 뛰어난 후속 작품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황금 풍뎅이>의 암호풀이를 거의 모방한 듯한 코난 도일의 단편 <춤추는 인형>을 비롯해 르블랑의 <기암성>, 멜빌 데이비슨 포스트의 <대암호>, 오스틴 프리먼의 <금고>, 에도가와 람포의 <2전짜리 동전(二錢銅貨)>등이 암호 풀이의 독특한 맛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암호 제작기 '에니그마'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암호 제작방법은 기계를 이용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대단히 복잡해졌습니다. 군용으로 쓰이는 암호는 일개 천재의 머리로는 해독(解讀)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특히 독일이 제작한 암호 제작기 에니그마(Enigma)가 만든 암호문은 연합군이 입수하더라도 해독을 할 수가 없어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 난공불락의 암호 제작기를 둘러싼 이야기는 무척 많지만 그 중 추천하자면 로버트 해리스의 <에니그마(Enigma)>(1995)를 들 수 있겠습니다.

상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면 사실상 암호나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2차대전 때 미군은 나바호 인디언을 동원해 그들의 언어로 만든 통신용어로 교신했습니다. 일본군은 통신을 감청했으나 내용을 해석하는 데는 실패했지요. 포우의 <모르그 거리의 살인>에서 명탐정 뒤팽은 이와 비슷한 상황과 마주칩니다. 살인 현장에서 들린 목소리에 대해 증인들은 모두 외국인이라고 - 프랑스 사람은 스페인 사람의 음성으로, 네덜란드 사람은 프랑스 사람의 목소리로, 영국 사람은 독일 사람의 음성으로, 스페인 사람은 영국 사람의 목소리로, 이탈리아 사람은 러시아 사람의 목소리라고 -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증언에 따라 그 어느 나라의 말도 아니었다는 것을 파악한 뒤팽은 살인범이 예상 밖의 존재라는 것을 간파합니다.

암호 기법은 크게 치환법(transposition)과 대용법(substitution)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며, 에도가와 란포는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1) 할부법(割符法) : 고대 그리스의 스키테일 방식

2) 표형법(表形法) : 간단한 도형만으로 표시하는 방법.

3) 우의법(寓意法) : 시(詩), 노래, 주문 등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방법

4) 치환법(置換法) : 글자, 단어의 순서를 바꾸거나 끼워넣어 뜻을 알 수 없게 하는 방법.

5) 대용법(代用法) : 글자, 단어 등을 숫자나 도형으로 바꿔 뜻을 알 수 없게 하는 방법.

6) 매개법(媒介法) : 특정 책, 악보 등을 매개로 쓰는 방법

컴퓨터가 대중화되면서 암호 기술은 철벽에 가깝게 발전했습니다. 컴퓨터로 암호화된 문서 파일을 탐정의 지식만으로 해독하는 것은 요행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입니다(영화에서 순식간에 암호를 푸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요컨대 종이 등 어떤 표면에 남아 있는 기호의 해석이 아니라 컴퓨터 공학자들의 정밀 기술이 된 셈이지요. 이런 탓인지 요즘은 차츰 암호 추리소설이 쇠퇴하는 추세이긴 합니다만, 다빈치의 작품 속에 숨겨진 의미를 풀어내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2003)가 대히트하면서 암호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했습니다.

강의중인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영화 '다빈치 코드'에서


다만 아직 남아있는 것은 이른바 ‘다잉 메시지(Dying Message)’, 즉 치명상을 입은 피해자가 숨이 끊어지기 전에 남겨 놓은 마지막 단서입니다. 만약 피해자가 범인의 이름을 남겨 놓으면 범인이 가장 먼저 눈치 챌 터이니 들키지 않기 위해 알듯 말듯 아리송하게 남겨 놓아야 하죠. 그러다 보니 이것을 알아채는 일은 암호를 푸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잉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작가는 엘러리 퀸입니다. 그는 <X의 비극(The Tragedy Of X)>(1932)에서 이것을 처음 사용했는데, 사건에서뿐만 아니라 탐정 드루리 레인의 입을 빌려 다잉 메시지의 심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처럼 죽기 직전의 비할 바 없는 성스러운 순간, 인간 두뇌는 한없이 비약합니다.”

퀸은 장편 <샴쌍둥이의 비밀(The Siamese Twin Mystery)>(1933)등을 비롯해 여러 편의 작품에서 이런 트릭을 사용했습니다.

외국의 암호 추리소설은 암호 구성이 우리말이 아닌 탓에 외국어에 아주 유창한 사람이 아니라면 풀기 어렵고(라틴어나 고대 문자 같은 것을 술술 해석할 수 있는 독자는 드물겠지요), 다잉 메시지를 사용하는 경우 흔한 일은 아니지만 단어 자체에 2중적 의미를 가졌을 경우 번역을 했을 때 숨은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가 있어 독자로서는 암호 풀이에 도전하기 어려운 약간의 아쉬움이 있긴 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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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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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손선영 2010.10.06 22: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와~ 흥미롭게 읽고 갑니다. 암호는 항상 흥미로워요^^

  2. 무슨메세지? 2010.11.01 1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궁굼한게있어서조언부탁드려도될까요? 숨긴 메세지 푸는 문제인데 도무지 알수가 없어서요. 간단히 요약하면.. 한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녀의 직장은 의문에 범죄조직에 조직원으로 죽음?을 예감하고 태어날 딸을 위해서 4개의 테이프를 남김.(1~5/6~10/11~15/16~20,숫자는 딸의 나이에 해당하는 메세지)
    11~15,16~20 2개 테이프는 메세지와 함께 공백이 많음, 1~5.6~10 2개 테이프는 녹음이 되지 않은 공테이프../ 딸의 10살까지 해당하는 2개의 공테이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참고로 어머니는 죽지 않았다고 의심이 갑니다.메세지 내용은 자식을 사랑하는 모성애가 담긴 말 (11살 생일 축하한다.. 좋아하는 남자 친구는 있니?.. 이런식) 딸의 나이는 18살임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