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도 때로는 휴식이 필요하다

추리소설을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휴가중인 형사는 절대 무리하지 않습니다.
- 밥 이든
- <중국 앵무새>(1926) / 얼 데어 비거스

 

어느덧 여름입니다.

일년 사계절 중에서도 유독 휴가철이라고 불리는 계절이기도 하죠. 나머지 계절이 휴가를 즐기기에 모자랄 것은 없겠지만 뜨거운 한여름보다는 못하기 때문일까요.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데다가 설날이나 추석 등의 명절 연휴가 있어서 보통 직장인들의 여름휴가는 일주일에서 열흘 남짓 정도지만 외국, 즉 서구의 여름휴가는 훨씬 긴 편입니다. 요즘은 별로 쓰이지 않는 것 같은 바캉스라는 단어도 원래 제법 긴, 즉 최소한 한 달 이상의 휴가를 의미한다는데, 서구 쪽은 이렇게 기간도 긴데다가 타국으로의 여행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덕택에 유명한 휴양지나 이국적인 장소를 무대로 한 추리소설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그런 덕분에 명탐정들은 휴가지에서마저 골치 아픈 일과 마주치곤 했지요. 요즘은 무선인터넷이나 스마트폰 같은 문명의 이기(혹은 족쇄일지도?) 탓에 휴가를 떠나서도 일한다는 분도 적지 않은 것 같은데, 잠시만이라도 범죄로부터 떨어져 쉬고 싶어 하는 명탐정들에게도 그런 비슷한 일은 예외 없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인공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임에 틀림없겠지요. 사건이 없으면 명탐정도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요.

과거를 돌이켜보면 휴가는 작품 속의 탐정들보다 추리소설 초창기의 작가들에게 더 필요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의 작품이 성공하면 많은 돈을 벌어 인생의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요즘 작가들과는 달리 별로 수입이 좋지 않았던 옛날 작가들은 고생만 하다가 요절한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19세기의 프랑스 작가 에밀 가보리오는 신문에 매일 연재를 했는데, 하루치 연재 분량이 거의 짧은 단편 분량과 맞먹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부담이 만만치 않았고, 결국 과로로 인해 40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약’이란 말은 언제나 허망하긴 합니다만, 만약 그가 쉬엄쉬엄 글을 쓰면서 오랜 기간 동안 글을 쓸 수 있었더라면 영국보다 프랑스에서 추리소설 선풍이 먼저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에밀 가보리오

탐정들 중 가장 긴 휴가를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셜록 홈즈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작가인 코난 도일은 명탐정 홈즈 시리즈를 쓰는데 지친 나머지 홈즈가 범죄의 화신 모리어티 교수와 스위스의 폭포에서 격투를 벌이다가 함께 떨어져 죽은 것으로 끝나는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홈즈 팬들의 반발이 너무 크자 도일은 생각을 바꿔 홈즈가 운 좋게 폭포에 빠지지 않고 혼자 살아남은 것으로 설정했으며, 공백 기간인 1891년부터 1894년까지 티벳과 페르시아, 이집트 등을 여행한 뒤 유럽을 거쳐 런던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하여 후속 작품과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3년 동안의 공백은 나중 홈즈의 모방 작품을 쓴 작가들에 의해 갖가지 이야기, 즉 티벳에서 설인(雪人)의 정체를 밝혔다거나 유럽에서는 여배우 아이린 애들러와 눈이 맞아 아들을 하나 두게 되었다는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들이 문자 그대로 쏟아져 나오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다양한 홈즈 배우들

애거서 크리스티는 여행을 무척 즐긴 데다 고고학자 맥스 맬로윈과 결혼한 덕택에 젊은 시절에는 1년의 1/3 정도를 탐사․발굴 여행으로 보냈습니다. 크리스티는 이러한 잦은 여행을 바탕으로 하여  <오리엔트 특급 살인>(1934), <메소포타미아의 살인>(1936), <나일 강의 죽음>(1937), <백주(白晝)의 악마>(1941)등 휴양지나 해외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작품을 여러 편 썼습니다. 이들 작품들의 기본적 특징을 들자면 대부분 엘큐울 푸아로가 등장하는데, 크리스티의 또 다른 주인공 미스 마플은 워낙 마을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국, 그것도 중동까지 보내기는 어려웠겠지요. 그렇지만 미스 마플은 <카리브 해의 죽음>에서 서인도 제도의 카리브 해에서 휴가를 즐기다가 누군가의 죽음과 마주칩니다. 사건 수사로 돈을 버는 사람도 아닌데 참, 복도 없지요.

이집트를 관광중인 애거서 크리스티(오른쪽)

영국의 여성작가 조이스 포터가 만들어 낸 괴짜 주인공 윌프레드 도버 경감은 주인공 치곤 무능한(?) 편이지만, 다른 명탐정들과 마찬가지로 사건을 피해가지 못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도버 4 – 절단>(1967)에서 런던 경찰청의 도버 경감은 여름휴가를 떠나는 도중 하필이면 아내가 자살하는 사람을 목격하는 바람에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사건을 맡게 됩니다. 무척 심통을 부리던 도버 경감은 그의 직속 부하도 휴가를 떠나다가 현장에 끌려오다시피 나타난 것을 보고 위안을 삼으면서 심술궂은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죠. 

역시 영국의 여성작가 크리스티애너 브랜드의 <위험한 여로>(1955)는 제목에 걸맞게 아름답고 환상적인 카프리 섬이라는 이탈리아 근처의 여행지에서 관광객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수께끼 같은 살인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주인공 코크릴 경감은 휴가를 즐기러 나왔다가 연속적인 살인사건과 마주칩니다. 말레이에서 태어난 브랜드는 인도를 거쳐 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영국에 왔는데, 제법 긴 동남아시아에서의 생활 덕택인지 이국적인 배경을 묘사하는데 훌륭한 솜씨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티애너 브랜드의 '위험한 여로'

휴양지를 무대로 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주로 유럽 작품들 쪽이 많고, 미국 작품들 쪽이 적습니다. 그나마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미국의 하드보일드 탐정들이 휴가를 즐기는 장면은 본 기억이 없네요. 동료들이 많고 정기적인 수입이 있는 경찰들은 교대로 휴가를 즐길 수 있지만 혼자서 사무실을 꾸려 나가야 하는 사립탐정들은 그럴 정도의 여유가 있을 정도로 형편이 좋지는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존 D.맥도널드의 작품에 등장하는 탐정 트래비스 맥기는 ‘버스티드 플러쉬(Busted Flush)’라고 하는 길이 16미터의 요트를 거주지로 삼으면서 바람 부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휴가날짜를 잡을 필요도 없습니다. 보통 때 플로리다의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맥기는 악당들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바다와 맞서야 할 때도 있지만 재산을 모으는데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에 첨단 문명 바깥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트래비스 맥기의 배 '버스티드 플러쉬'

그런데 90년대 이후에는 변화가 온 것 같기도 합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신성한 관계>나 마이클 코넬리의 <트렁크 뮤직>을 보면, 주인공들이 사건을 해결한 뒤 휴양지에서 마음을 식히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더군요. 요즘 작가들은 탐정(혹은 형사)에게도 복지혜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멀리 휴가를 갈 틈이 없으면 생전 가보지 못한 곳을 배경으로 한 흥미진진한 작품을 읽으며 기분을 전환하는 것이 어떠신지요. 좋은 책 몇 권으로 한여름의 더운 날씨가 계속될 때에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피서 방법으로서도 으뜸이 아닐까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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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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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7.09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휴가지에서의 살인 사건 역시 추리물에서 아주 중요한 배경이 될 수 있지요, 개인적으로 그러한 작품으로 크리스티의 <나일강의 죽음>과 <백주의 악마>를 좋아합니다. 저도 책을 펴면 곧장 바다 냄새가 날 정도로 생생히 휴양지 풍경을 묘사한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