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이건 내가 맡은 최초의 사건이거든."
-셜록 홈즈
<글로리아 스콧 호>(1893) / 아서 코난 도일

사람이 어떤 일을 하게 되는 데에는 - 그것을 어릴 때부터 바라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얼떨결에 택하게 되었든 간에 - 누구든지 크건 작건 사연이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추리소설 속에는 어지간한 인간승리 드라마를 능가할 만큼 기구한 사연을 가진 주인공도 등장합니다(물론 허구의 인물이니만큼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 작가들이 노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요). 그들이 어떤 과거를 지니고 있으며 어떤 연유로 범죄와 싸우는 직업을 택하게 되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에드거 앨런 포가 창조한 오귀스트 뒤팽은 대단히 품위 있고 명석한 두뇌의 귀족이지만 집안이 몰락한 탓에 무너질 듯이 낡아빠진 하숙집에 친구와 함께 살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뚜렷한 직업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사건을 해결하고 사례금을 받기도 하죠. 뒤팽은 불과 세 편의 단편에만 등장했으며 범죄 수사를 직업으로 삼지도 않았지만 포가 40세로 요절하지 않고 좀 더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했다면 다른 어떤 모습을 보여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의 에밀 가보리오가 발표한 세계 최초의 장편 탐정소설 <르루즈 사건>(1866)에 처음 등장한 르코크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뒤 비천한 일을 하며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인 타바레에게서 범죄자가 되거나 아니면 범죄를 막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후 프랑스 경찰 범죄수사국에 투신해 과거 어둡던 시절에 익혔던 여러 가지 수법을 이용해 범죄를 수사하게 됩니다.

'르콕 탐정' 표지

반면 같은 프랑스 작가인 모리스 르블랑이 창조한 인물 아르센 뤼팽은 르코크와 비슷한 결손 가정 출신이지만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뤼팽의 아버지는 격투기의 달인으로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그 기법을 가르치는 방랑자였고 어머니인 앙리에뜨는 자상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고 하네요. 그러나 뤼팽이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사기죄로 갇혀 있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뤼팽이 범죄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이때 범죄자의 가족인 어머니가 사회로부터 받은 냉대에 대한 반발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편, 셜록 홈즈는 우연찮은 일로 자신의 재능을 심각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가 왓슨에게 회고한 바에 따르면, 홈즈는 대학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가 놀라운 관찰력과 추리력을 발휘해 그의 아버지의 신상에 대해 정확하게 짚어 냅니다. 그리고는 잠시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란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사실과 거짓을 간파하는 게 자네에긴 식은 죽 먹기로군. 그게 바로 자네가 갈 길일세’라는 찬사를 듣지요(<글로리아 스콧 호>에서). 자신의 능력을 한낱 취미 정도로만 생각해 오던 홈즈는 추리력을 이용하는 것이 어엿한 직업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이 때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홈즈는 이들 중 누구일까요? '글로리아 스콧'의 삽화(시드니 패짓의 그림)

20세기 초반까지 등장한 천재적인 탐정은 대체로 이렇게 타고 난 재능을 직업으로 살린 인물들이었지만, 가스등에서 전기등으로 변하고 마차가 자동차로 변하는 시대가 되면서 차츰 판도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즉 적어도 두뇌 면에서 천재라기보다는 보통 사람 수준의 주인공들이 나타난 것이죠.

특히 귀족 등 신분 격차가 유럽보다 덜하던 미국에 등장한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웬만큼 지성을 갖추었지만 성격이 원만하다고 하긴 어려운 인물들이었습니다. 대쉴 해밋은 워낙 과작(寡作)을 한 터라 등장인물의 사생활이나 과거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뒤를 이은 레이먼드 챈들러나 로스 맥도널드의 주인공은 비교적 자세한 경력이 알려져 있습니다. 챈들러가 창조한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는 원래 지방검사국 소속의 경찰이었지만 상관의 부당한 명령에 복종할 수 없어 사표를 던지고 한결 자유스러운, 하지만 권력은 없는사립탐정이 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로스 맥도널드가 창조한 사립탐정 루 아처 역시 말로우와 비슷한 경력을 지녔습니다. 아처 역시 지방검사국 소속 경찰이었으나, 경찰들의 부패를 참지 못해 사직하고 탐정의 길로 나섭니다.

루 아처는 '루 하퍼'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영화에 등장했습니다(폴 뉴먼이 연기).

20세기 중반의 미국 작가들은 경찰에 대해 뭔가 불신감을 품고 있었는지 이런 패턴은 자주 반복되었지만, 70년대 이후 약간씩 변화가 생겨났는데, 훗날 등장한 여성 하드보일드 탐정들의 경력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지요. 현대 미국 여성 하드보일드 계의 양대 작가인 수 그래프튼과 새러 패러츠키의 인물들이 대표적. 그래프튼의 주인공 킨지 밀혼은 20세에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일선에 배치되었지만 규칙에 얽매이는 생활이 싫어 퇴직하고 탐정 면허를 얻어 개업합니다. 한편 패러츠키의 주인공 V.I. 워쇼스키는 원래 변호사였으며 역시 변호사인 동료와 결혼했지만 자신의 이상(理想)과 어긋나는 법조계와 여자의 자립심을 무시하는 남편에게서 모두 결별하고 사립탐정이라는 직업을 택했습니다.

한편 기구한 사연을 가진 인물을 꼽으라면 영국의 여성 작가 P.D.제임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사립탐정 코델리아 그레이를 선정할 수 있을 겁이다. 태어난 후 불과 한 시간 만에 어머니를 잃는 것으로 시작된 힘든 어린 시절을 거친 그레이는 고생 끝에 케임브리지 대학 진학을 눈앞에 두었으나 방랑 생활을 하던 아버지의 요청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세계 각국을 유랑하지요. 아버지가 로마에서 사망한 후 런던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직 경찰 버니 프라이드의 탐정 사무소에 들어가 탐정에게서 필요한 기술을 배워 공동 경영자가 되지만 그것도 잠시 뿐. 프라이드가 불치의 암으로 고민하다가 자살하는 바람에 그레이는 불과 22세의 나이로 사립탐정사무소의 소장이 됩니다.

드라마로 제작된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주인공이 탐정이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반드시 첫 작품에서 밝혀지는 것만은 아닙니다독자들이 주인공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될 만큼 인기가 생겨야 작가도 다음 작품에서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하지요. 왕년의 홈즈가 그렇게 소개되었지요. 사실 대부분의 작가는 등장인물, 특히 주인공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배경을 만들어 놓습니다. 다만 너무 한꺼번에 드러내 놓기에는 어색하기도 하니까 조금씩 조금씩 꺼내놓는 겁니다(물론 코난 도일은 그렇게 계획적으로 쓴 것 같진 않습니다만). 최근 들어서는 위에 열거한 특별한 사연들이 너무 가식적으로 보이는지 어찌 보면 너무 평범한 계기가 소개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H.R.F.키팅의 주인공인 인도 봄베이 경찰의 고테이 경감은 어린시절부터 경찰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인물이고, 자넷 에바노비치의 여주인공 스테파니 플럼은 직장에서 해고된 후 말 그대로 돈은 필요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용의자를 소환하는 일을 하게 되는, 어쩌면 이웃의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상황이 등장합니다. 추리소설은 시리즈가 많은 만큼 탐정들이 어떻게 일을 시작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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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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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7.28 2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탐정이 된 사연..., 저도 연구중입니다. 극적일수록 더 좋겠지만 제가 전에 KBS <이야기 발전소>에 들고 갔던 작품은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의문사를 목격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경찰이 된 소년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지만 이러한 이야기라면 다음 편을 만들기가 어렵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