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 소개의 마지막으로 일본 쪽의 책들을 소개합니다. 추리소설의 인기가 높은 나라여서인지 오래 전부터 여러 저자에 의해 꾸준히 출간되고 있습니다. 번역가이자 문학연구자였던 야나기다 이즈미(柳田泉, 1894-1969)가 1938년 출간한 <수필 메이지 문학(随筆 明治文学)>에서 번역문학과 탐정소설 출판 역사를 다루었으니, '역사책의 역사'도 꽤 오래된 셈입니다. 서구 역사서와는 달리 일본 역사서는 잡지 연재를 엮은 책이 눈에 많이 뜨입니다.



* 에도가와 란포(江戸川乱歩, 1894~1965)는 여러 방면 - 창작, 평론, 전문지 출간, 협회 창설 등- 에서 일본 추리소설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는데, 역사서 방면에서도 <탐정소설 40년(探偵小説四十年)>(1961)으로 한 획을 긋고 있습니다. 란포는 1949년 잡지 <신청년>에 <탐정소설 30년>이란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는데, <신청년>이 폐간되자 다른 잡지 <보석>으로 옮겨 <탐정소설 35년>으로 제목을 바꿔 1956년까지 12년 동안 연재했습니다. 그라고 1961년 단행본으로 나올 때 4년 남짓 동안의 일을 덧붙여 <탐정소설 40년>으로 출간되었습니다. 30년, 35년, 40년은 그가 작가로 나선 이후의 세월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사실 <일본 미스터리 사전>(2000) 등에서는 이 책을 역사서로 분류합니다만, 본인이 '기록체 자서전'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자기 중심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고 일본 추리소설의 역사 전체를 다룬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약간 애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인기작가였으며 오랫동안 추리문학계의 중심에 있었던 그의 회고, 즉 작가로서의 인생 자체가 일본 추리소설의 역사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습니다. 

<탐정소설40년>. 1970년 에도가와 란포 전집으로 재출간.


* 일본 추리문학계에서 평론가로 활동했고 제1회 에도가와 란포 상 수상자(수상작은 <탐정소설사전>(1955). 당시는 신인작가 공모상이 아니었습니다)이기도 한 나카지마 가와타로(中島河太郎, 1917-1999)의 <일본추리소설사(日本推理小説史)> 역시 잡지 연재물을 엮은 저작입니다. 1959년 <별책 퀸 매거진>에 4회 연재 후 폐간되어 <보석>으로 옮겨 다시 연재하여 1권이 1964년에 출간되었는데, <보석>을 비롯해 <추리계>, <추리문학>, <환영성> 등 연재한 잡지마다 폐간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뒷부분은 책으로는 나오지 않았는데, 1990년대 들어와서야 도쿄소겐사를 통해 두 권이 더 출간되었습니다(1994년 2권, 1996년 3권). 1950년대 이전까지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약간 아쉽지요. 일본의 작품뿐만 아니라 초기 외국 추리소설 수용사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본추리소설사>(1964)


* 읽는 재미만으로 따지자면 야마무라 마사오(山村正夫, 1931~1999)의 <추리문단전후사(推理文壇戦後史)>를 최고로 꼽을 만합니다. 17세에 추리소설가로 데뷔했고, 탐정작가클럽(일본추리작가협회의 전신)의 유일한 20대 작가였을 정도로 일찌감치 선배 작가들과 교류한 덕택에 이런 생생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책도 역시 잡지에 연재한 것을 엮은 것인데, 모두 네 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명 작가들의 일화를 통해 2차대전 이후 일본 추리문학계의 흐름을 그리고 있습니다. 1권은 1973년, 2권은 1978년, 3권은 1980년, 4권은 1989년에 나왔으며 다행히 연재한 잡지 <소설추리>가 건재한 덕택에 옮겨다니는 수난은 겪지 않았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작가들이란 정말 별난 사람들이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것 같을 정도로 다양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습니다.


<일본추리문단전후사> 1~4권


* 문예평론가인 이토 히데오(伊藤秀雄, 1925~)는 <메이지의 탐정소설(明治の探偵小説)>(1986), <다이쇼의 탐정소설(大正の探偵小説)>(1991), <쇼와의 탐정소설(昭和の探偵小説)>(1993), <근대의 탐정소설(近代の探偵小説)>(1994) 등 일련의 초기 추리소설 역사를 다룬 책을 집필했습니다. 이들 중 <메이지의 탐정소설>은 1987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평론부문상을 수상했지요. 이들 중 <근대의 탐정소설>은 앞의 세 권을 집약했다고 볼 수 있는 책인데, <일본의 탐정소설>(유재진 외 옮김, 도서출판 문, 2011)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판이 나와 있습니다. 다만 작가와 작품해설 위주라 좀 딱딱한 편이고, 서구 작가 이름 표기에 다소 오류가 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네 권중 <다이쇼의 탐정소설>이 빠졌습니다 ㅠㅠ


* 하세베 후미치카(長谷部史親, 1954~)의 <일본 미스터리 진화론-이 걸작을 놓치지 마시라(日本ミステリー進化論-この傑作を見逃すな)>(1993)은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일본 추리소설의 현재를 다루고, 2장에서는 일본 추리소설의 과거 역사를 다룬 다음 3장에서는 일본의 대표적 작가 27명과 그들의 대표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 전체에서 역사 관련 부분인 1, 2장은 1/3 정도로(약 150페이지), 간단하게 읽을 만합니다.

* 군더더기 없이 간결, 명확하게 일본 추리소설의 역사를 알아보는데는 야마마에 유즈루(山前 譲, 1956~)의 <일본 미스터리의 100년(日本ミステリーの100年)>(2001)이 최고입니다. 처음부터 문고판으로 나온 작은 책이지만 크기와 달리 내용은 대단히 알찹니다. 1901년부터 2000년까지 100년간 1년 단위로 끊어 추리문학계 및 사회적 사건 연표, 해당 년도의 우수한 작품 추천, 각종 수상작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으며 1년도 빠짐없이 흐름을 깔끔하게 정리한 내용 덕택이 이것 한 권만 읽으면 일본 추리소설 역사를 거의 꿸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고하라 히로시(鄕原宏, 1942~)의 <이야기 일본 추리소설사(物語日本推理小説史)>(2010)도 제목처럼 일본 추리소설 역사를 '이야기'처럼 엮어간 책입니다. 잡지 <소설현대>에 연재한 글을 묶은 것으로,  일종의 문학사(文學史)이면서도 논문이나 학술서 분위기가 아닌, 딱딱함 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24장)인 '쇼와에서 헤이세이로'에서는 일본 추리소설의 역사가 아주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각 장마다 참고문헌이 따로 나와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색인이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역사서들이 있고,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은 정말 부럽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어서 이에 못지 않은 책이 나오길 기대할 따름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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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추리소설의 역사도 1백년을 넘어섰습니다. 1908년 연재를 시작한 이해조의 <쌍옥적>을 기준으로 한다면 108년쯤 된 셈이지요. 이해조에서부터 해방 전까지의 우리나라 추리소설 역사 연구는 학계에서 많이 진행되어 발표된 논문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의 작가나 작품 연구는 상대적... 아니 절대적으로 드물고, 그런 기본적 요인 때문에 외국처럼 추리소설의 태동부터 현재까지 전체적인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역사서는 아쉽지만 아직 없습니다. 다만 추리소설 입문서 등을 보면 '한국 추리소설 역사'가 가끔 나오긴 합니다만, 대개 김내성으로 시작되었다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이야기는 자세한 설명 없이 얼버무려지고 김성종과 1980년대 이후 이야기로 흘러가니, 우리나라에는 마치 30년 가까운 거대한 공백기가 있었던 것처럼 여기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는 우려도 듭니다. 당연히 공백기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고, 1950~70년대에도 추리소설이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후세의 누군가가 찾아보질 않았고, 연결고리가 없던 탓에 지금 잊혀졌을 뿐이지요(그 시기의 자료를 모으고 있는데, 제법 시간이 걸리는 일이긴 합니다). 이 이야기는 추후에 하도록 하고, 우리나라 역사서를 소개하겠습니다. 전체 역사가 아닌 특정 기간에 대한 연구이긴 합니다만.


* 오혜진의 <1930년대 한국 추리소설 연구>(어문학사, 2009)는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 작업하여 출간한 저서입니다. 제목 그대로 1930년대를 중심으로 식민지시기 조선의 추리소설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논문 형식이라 '재미있게' 읽기는 좀 어렵습니다만, 우리나라 추리소설 역사 관련서적이 드물던 시기에 나왔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일부 내용에 오류가 있고(이를테면 작품 제목 - 도일의 단편 <색마와의 격전>이 <색마와의 혼전>으로 되어 있습니다-이나, 번안 작품을 창작물로 판단-박노갑의 <미인도>, 최유범의 <약혼녀의 악마성> 등 것 등), 학술서이면서도 색인이 없다는 것은 가장 큰 아쉬움입니다. 




* 최애순의 <조선의 탐정을 탐정하다: 식민지 조선의 탐정소설사>(소명출판, 2011) 역시 책의 부제에서 보이는 대로 식민지시기 조선의 탐정소설을 다루고 있는데, '학술지에 발표했던 8편의 논문을 수정 보완'해 한 권의 책으로 묶은 책입니다. 새롭게 밝혀낸 자료가 많고 바로잡은 부분도 많아(즉 그만큼 선행연구에 오류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단히 유용하고, 논문 형식입니다만 그다지 딱딱하지 않아 관심 있는 분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만합니다. 다만 개별 논문을 묶은 책이라 시대의 흐름을 꿰는 역사서로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 박진영의 <번역과 번안의 시대>(소명출판, 2011)은 5백 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두께를 과시(?)하는 우리나라 근대소설사를 다룬 저작입니다. 1900년대~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신소설부터 외국 소설의 번역/번안 출간에 이르기까지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해외 추리소설의 도입과 정탐소설의 등장 또한 제법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수록된 서지정보 또한 큰 도움이 되는 자료입니다. 이 시기의 우리나라 추리소설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추천할 수 있는 책입니다. 



* 대중서사장르연구회에서 엮은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3: 추리물>(이론과실천, 2011)은 20세기 초반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 추리소설 역사의 흐름을 다룬 저작입니다. 특히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와 TV 드라마 등 '추리서사'를 지닌 다양한 분야까지 아우르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참여 필자들만 18명이라, 650페이지에 이르는 베개만한 책이지요. 그런데 이 저작은 1945년 이전의 연구는 대부분 '소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만(8편중 8편), 1950년대 이후로 넘어가면 소설을 다룬 연구는 9편중 4편으로 절반에도 못미칠 정도로 줄어듭니다. 그만큼 해방 이후의 추리소설 역사 연구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요. 다만 이런 아쉬움이 있긴 해도 우리나라 추리소설의 흐름이나 문화적 위상 등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습니다.



소개할 책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역사서'라고 할 만한 책들은 일단 이 정도만 눈에 띄는군요. 혹시 빠뜨린 것이 있다면 알려주시길...


우리나라와 일본의 역사서를 한꺼번에 다루려 했는데, 일본 쪽은 다음편으로 미루겠습니다.ㅠㅠ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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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 참고도서 중 먼저 소개할 분야는 추리소설사(史), 즉 역사책(General Histories)입니다. 

어떤 순서가 좋을까 생각해보다가 딱딱한 것부터 먼저 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역사책부터 시작합니다.



추리소설 역사책이란, 설명이 굳이 필요없겠지만 추리소설의 역사에 대해 다루는 책입니다.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읽으면 되는 거지 무슨 역사까지 따져보나 싶기도 하지만,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를 누가 처음 썼는지, 어떤 작가가 등장해서 발전시켜왔는지, 또 우리나라 최초의 작품은 무엇인지 이것저것 궁금증이 생기기 마련이고 학술 연구에도 도움이 되니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문헌입니다. 우선 서양쪽부터. (단, 여기 소개하는 책들 이외에도 더 있습니다만, 일단은 제가 가진 책만 소개를...)


* 1941년 출간된 하워드 헤이크래프트(1905~1991)의 <Murder for Pleasure: The Life and Times of the Detective Story>는 가장 유명한 추리소설사 중 하나입니다. 번역판은 없습니다만 <오락을 위한 살인>이라는 제목으로 종종 언급되는 책이지요. (출간년도는 에드거 앨런 포가 <모르그 거리의 살인>을 발표한 1841년에서 딱 1백년째 되는 해입니다. 같은 해 엘러리 퀸은 1백년간의 걸작 단편들을 엮어 <101년간의 오락>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습니다)  줄리언 시먼스가 <블러디 머더>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 작가들에게 치우친 면이 있고, 또 개정판도 나오지 않아 오래된 감이 있지만, 포에서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의 영미권 추리소설의 역사서로는 여전히 좋은 책입니다. 또한 책의 후반부에는 추리소설 법칙과 비평 이야기, 추리소설의 미래, 추리소설 관련 퀴즈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30년이 지난 1972년, 영국 추리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줄리언 시먼스(1912~1994)가 <블러디 머더: 추리소설에서 범죄소설로의 역사 Bloody Murder: From the Detective Story to the Crime Novel>(김명남 옮김, 을유문화사)를 발표합니다. 서구 추리소설사로서는 <오락을 위한 살인>과 쌍벽을 이루고 있지요. <오락을 위한 살인>이 2차대전 전까지의 역사를 다룬 것에 비해 두 차례 개정판(1983, 1993)까지 나오면서 1990년대 초반까지의 서구 추리소설 역사를 한층 더 폭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기쁘게도 훌륭한 번역판이 나와 있으니 어렵지 않게 구해 볼 수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왼쪽부터 한글 번역판, 원서, 일본어 번역판)


* 마틴 프리스트먼이 엮은 <The Cambridge Companion to Crime Fiction>(2003)은 여러 필자(대부분 대학 교수)들이 집필에 참여한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역사서입니다. 내용은 18세기 범죄소설, 뉴게이트 캘린더, 포에서 체스터튼에 이르는 단편추리소설, 프랑스 추리소설, 황금기, 사설탐정, 스파이소설, 스릴러, 전후(戰後) 미국 경찰소설, 전후 영국 범죄소설, 여성 탐정, 흑인 작가, 영화와 TV, 탐정소설과 문학 등입니다. 




* 프랑스에서도 추리소설 역사책이 많습니다(제가 읽지 못할 뿐이지요...). 페레이룬 호베이다(1924~2006)의 <Historie du roman policier>(1965)는 도입부에서부터 추리소설의 원조가 중국의 디 공(公)이라는 참신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중심의 역사가 아닌, 프랑스 작품들을 많이 언급하면서 새로운 각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번쯤 볼 만한 책입니다. 호베이다는 본업이 문학평론가는 아니고, 이란 출신의 외교관이라는 독특한 경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1940년대 외무부에 들어간 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1948년 소르본 대학에서 국제법 박사학위를 받았고, 1970년대에는 이란 주 유엔대사를 역임했습니다. 아마도 유학시절에 추리소설을 관심을 가졌던 것 같네요. 번역판은 없고, 프랑스판 대신 일본어판을 구해서 보았는데, <추리소설의 역사는 아르키메데스에서 시작되었다>라는 독특한 제목으로 출간되었네요.


* 일본인이 쓴 프랑스 추리소설 역사서도 있습니다. 마쓰무라 요시오(1918~1992)의 <괴도 대 명탐정: 프랑스 미스터리의 역사 怪盗対名探偵 フランス・ミステリーの歴史>(1985)입니다. 18세기 신문연재 소설에서 현대 추리소설까지 거의 프랑스 작품 위주로(다만 일본에 번안된 작품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이어지는데, 추리소설 전문지 <환영성(幻影城)>에 연재했던 짧은 글들을 확장시킨 저작입니다. 1986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평론부문 수상작이지요. 묘한 공통점이랄까, 페레이둔 호베이다처럼 마쓰무라 요시오 역시 외무부에 들어가 외교관으로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추리소설의 역사는 아르키메데스에서 시작되었다>(왼쪽), <괴도 대 명탐정>


* 이탈리아의 역사서도 소개합니다. 스테파노 벤베누티와 지안니 리조니 공저 <Il romanzo giallo: Storia, autori i personaggi>(1980)인데, 이탈리아어는 까막눈이라 영어 번역판 <The Whodunit: An Informal History of Detective Fiction>을 구해서 보았습니다. 역시 추리소설의 기원에서부터 시대적으로 영미권과 프랑스 추리소설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으며, 마지막 장은 에드워드 D.호크가 쓴 2차대전 이후 영미권 역사가 차지하고 있습니다(아마 영어 번역판에만 있는 것 같습니다). 앞에 언급한 책들과는 달리 거의 매 페이지마다 사진과 삽화가 있어서 눈을 즐겁게 해 줍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의 추리소설은 중요하게 다루질 않아 좀 아쉽네요.


* 독일의 추리소설 역사서로는 발트라우트 보엘러(1920~2004)의 <Illustrierte Geschichte der Krimimalliteratur>(1984)가 있는데, 여기서는 영어 번역판인 <The Literature of Crime and Detection: An Illustrated History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1984, 브루스 캐시디 재편집)을 소개합니다. 헤로도투스에서부터 중세 유럽, 16~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리소설의 역사를 조망하며, 영미권과 프랑스 추리소설의 흐름이 주종이지만 독일을 비롯한 유럽과 소련의 작가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도 흥미로운 사진과 삽화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 에르네스트 만델(1923~1995)의 <즐거운 살인: 범죄소설의 사회사 Delightful Murder: A Social Historie of the Crime Story>(1984)는 우리말로 출간된 첫 역사서인 것 같습니다. 번역판이 출간된지 벌써 15년이 넘었네요(이동연 옮김, 이후출판사, 2001년). 맑스주의 경제학자가 범죄소설의 역사를 썼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문학적인 흐름보다 사회적 흐름에서 본 추리소설의 발전과정을 분석했다는 참신한 면을 가진 저작이지요. 



* 펄프 잡지의 역사를 다룬 <Danger is My Business: An Illustrated History of the Fabulous Pulp Magazines 1896-1953>(1993)은 미국 펄프잡지의 권위자인 리 서버의 저작입니다. 펄프 잡지의 탄생과 펄프 시대의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화려한 칼라 화보와 함께 다루고 있는데, <블랙 마스크>등의 추리소설 잡지이외에도 SF, 판타지 잡지까지 모두 소개하고 있습니다.



서구쪽 역사서는 조금 더 있습니다만 '커피테이블 북'이라는 분야에 포함시켜야 해서 이 정도로 줄이고, 다음으로는 우리나라와 일본 추리소설 역사서를 소개하겠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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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많이 읽다 보니 책도 많이 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참고도서(Reference Book, 일본에서는 '주변서(周邊書)'라고도 표현하더군요)도 그럭저럭 책꽂이의 자리를 꽤 차지하고 있네요. 예전부터 참고도서에 대해 한번쯤 소개하고 싶었는데 게으름 때문에... ㅠㅠ



영화를 많이 보면 평론이나 주변 이야기들을 알고 싶어지는 것처럼, 추리소설도 작품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이야기도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도움이 되는 것이 이런 책들이지요. 참고도서는 다양한 분야로 나눌 수 있는데, 예전 <계간미스터리>에 관련 글을 간략하게 쓴 적이 있어서 다시 여기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 작가론(作家論)․평론(評論)

작품에 대한 평론들을 엮은 책. 한 명의 작가를 다루기도 하고, 여러 작가의 작품에 대한 평론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작품 평론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기와는 다르다. 작가와의 인터뷰도 이 부류에 속한다. 


● 전기(傳記)  

이른바 위인전(偉人傳)으로 익숙한 ‘전기’는 -반드시 위인(偉人)의 범주에 넣기는 어려워도 - 추리소설가의 생애를 기록한 저작이다. 남이 쓰기도 하지만 본인이 쓰는 자서전도 드물지 않다. 코난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 등의 유명 작가들은 여러 사람이 다양한 방면으로 조명하기도 하며, 때로는 서간문(書簡文)을 엮은 책도 있다.


● 서평집․작가의 에세이

서평집이나 에세이집은 특히 일본에 무척 많은 편이다. 추리소설가들이 소설 이외에도 글을 쓸 지면이 많은 덕분에 몇 년간에 걸친 추리소설 관련 이야기나 잡문(雜文)들을 엮을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거의 모든 책에는 작품 해설이나 서평이 들어가 있는데, 이런 글들이 집약되어 출간된다.


● 추리소설 역사서

문자 그대로 추리소설의 역사서. 넓은 의미에서 추리소설의 통사(通史)를 다루기도 하며, ‘하드보일드’나 ‘여성 작가’등 특정 분야의 역사를 다루기도 한다. 한국 추리소설의 통사는 아직 나온 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의 조사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 조만간 나오리라 기대된다.


● 미스터리 사전, 작가 사전

추리소설에는 다양한 용어와 트릭이 나오며 등장인물들도 유명하다. 또한 작가들의 수도 엄청나게 많은데 이들을 사전식으로 정리한 미스터리 사전이 있으며, 작가만을 따로 묶어 만든 사전이 있다. 간단한 개요 설명으로 이루어진 소사전(小辭典)이 있는가 하면 저작 목록까지 자세하게 첨부된 대형 사전도 있다.


● 가이드북

서점에는 무척 많은 작품이 깔려 있지만 독자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 도움이 되는 것이 가이드북이다. 주제별 분류, 작품 성향, 작가 특징 등 다양한 설명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으며, 베스트셀러에 끼지 못해 가려져 있던 좋은 작품을 소개해 주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매년 연감 형식으로 출간되기도 한다.


● 특정 주제를 다룬 책

추리소설에서 다루어지는 ‘밀실’이나 ‘암호’, ‘소녀 탐정’ 등 다양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한 저작. 특정 부문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된다.


● 추리소설 작법

글 쓰는 추리소설가 지망생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지만 최근의 작법 책은 딱딱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쓰여 있어 작가가 될 생각이 없는(!) 독자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 커피테이블 북

커피 테이블 북(Coffee Table Book)이란 탁자에 올려놓고 손님들이 슬쩍슬쩍 살펴볼 수 있도록 화보 위주로 구성된 양장본 책을 일컫는다(물론 반드시 탁자 위에 올려놓을 필요는 없지만…). 가격은 비싼 편이지만 흔히 볼 수 없는 사진이나 삽화 등이 실려 있으며 내용도 대개 그리 복잡한 편이 아니라서, 심심할 때 책꽂이에서 꺼내 볼 만한 책들이다.


● 미스터리 서지학

지금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추리소설이 출간되었는데, 누구의 어떤 작품이 언제 어디서 출간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연구자뿐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중요하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해 어느 정도 자료를 얻을 수 있지만 본격적인 서지 조사는 대부분 이러한 단행본에 의존해야 한다.  

(계간미스터리 2011년 여름호에서)


물론 이 분류는 편의적이므로 권위는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처음 읽은 참고도서가 무엇이었는지 곰곰 생각해보니, 아마도 <세계의 명탐정 50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도 추리퀴즈 분야에서 이름 높은 후지와라 사이타로(藤原宰太郎, 1932~)가 1972년 출간한 이 책은 당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것 같습니다(제가 가진 책은 1977년, 62판으로 되어 있네요).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 해문출판사에서 이가형 선생 번역으로 출간되었는데, 그때 구입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중에는 제목이 <세계의 명탐정 44인>으로 바뀌고 - 일본 탐정이 빠졌더군요 - 판형도 세로줄에서 가로줄로 바뀌었던데, 그건 따로 구하질 않았습니다. 원서와 번역서를 비교해보면, 페이지까지 모두 일치합니다(번역판 삽화에는 어느 정도 수정이 있었는데, 어린이를 대상으로 판매하는 책이었으니 납득이 됩니다^^). 


이 책은 50명의 탐정이 50개의 사건을 해결하는 추리퀴즈 책으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고도서로 볼 수 있을지 약간 아리송하지만, 사건 현장을 보여주는 삽화 외에도 탐정의 약력, 얼굴 일러스트도 있어서 한동안 제게는 탐정 사전의 역할을 했습니다. 처음 읽을 때만 해도 아는 탐정이 별로 없었는데, 자유추리문고 등이 나오면서 '아, 이 작품에 이 사람이 나오는구나' 하고 반가워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네요. 


거의 동시에 <세계의 위인은 명탐정>도 나왔는데, 이 역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만 여긴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들만 등장하는 문자 그대로의 퀴즈북이라 참고도서의 범주에 넣긴 어렵겠습니다.


후지와라 사이타로는 20여년이 지난 1993년에 <속(続)・세계의 명탐정 50인>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번역되질 않았습니다. 



(그러고보니 퀴즈북도 참고도서의 하나로 끼워넣어야 할 것 같은데... 별난 책들도 있으니 나중에 따로 소개하겠습니다)


어쨌든 <세계의 명탐정 50인>은 어느 소년을 추리소설이라는 어둠의 세계로 이끌어 간 못된(?) 책이었습니다. ㅠㅠ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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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효과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전문 의사조차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을 

 미스터리 작가에게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미스터리를 과학하면>(1994) - 유라 사부로

 

 

얼마 전 TV 뉴스에 나온 주사 맞는 장면을 보면서, 문득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1970년대에 나왔던 추리소설 중 하나인 ‘원한의 빨간 꽃’(저자 이상갑)이라는 작품입니다. 지금은 구하기도 힘들어서 기억하시는 분도 별로 없을 듯합니다만.


제목만으로 짐작하시긴 어렵겠지만 이 작품은 어린이용, 정확하게는 ‘한국소년소녀추리모험소설선집’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시리즈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기껏해야 중학생 이하의 독자를 대상으로 했을 텐데 내용은 무척이나 살벌했습니다. 그냥 어린 주인공이 등장해 비폭력적인 괴도와 머리싸움을 벌인다… 이런 것이 아니라 살인, 그것도 잔인한 방법의 살인이 여러 차례 벌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잡지에 실린 광고입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도...

 


책이 없어서 정확한 기억이라고 장담은 못하겠습니다만 대략 시작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갑니다. 최충헌의 노비 만적이 난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하는 장면이 도입부이죠. 만적(아니면 노비 중 하나)이 처참하게 죽으면서 ‘빨간 꽃’ 운운하는 저주와 모종의 해결 실마리를 남깁니다.
그리고 무대는 현대 - 아마도 1970년대쯤이겠죠 - 로 넘어갑니다. 주인공은 젊은 여자인데(아쉽게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 이제부터 웃지 마시길, 제가 지어낸 것 아닙니다 - ‘선우걸작’이고, 그의 동료들 이름은 ‘고만두’, ‘이거야’(별명 문어대가리), ‘구린내’(별명 홍콩), ‘조여희(별명 불여우)’ 등 다양합니다. 선우걸작은 도둑인데, 동료들의 배신으로 형무소에서 죽었던가 뭐 그랬던 것 같네요.


어쨌거나 ‘빨간 꽃’의 저주가 무엇이냐 하면, 선우걸작 부녀는 평상시엔 선량한 사람이었다가 팔뚝에 빨간 꽃 모양의 반점이 나타나면 갑자기 범죄자로 변합니다.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혹은 헐크처럼 다른 사람이 되는 거죠. 빨간 꽃은 매우 불규칙적으로 나타나서 예측불허입니다. 그래서 ‘저주’였겠지만…(잠깐 검색해보니 만적의 난은 1198년이던데, 6백년이 흐르는 동안 저주가 어떻게 이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기억이 나질 않네요). 그런데 문제는 주인공이 ‘빨간 꽃 상태’에서의 기억을 다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악당인 고만두라는 인물이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고 다니죠. 연쇄살인은 다 이 인간의 짓입니다. 동료도 거침없이 죽이죠.
앞에서 주사기 이야기를 해 놓고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이 작품에서 본 살인방법은 어린 나이의 시각으로는 너무 잔인해서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거야(아니면 구린내였던가?)가 병원에서 마취제를 맞고 꼼짝 못하고 있을 때 고만두가 나타나 정맥에 공기 주사를 놓아 죽이는 것이었죠. 말 그대로 눈 뜨고 죽는다는 것이 무척 끔찍하게 여겨졌습니다(위의 사진에 나온 시리즈 대부분을 다 읽었습니다만, 이러한 충격 탓인지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작품뿐이네요).

 

주사기는 언제나 무섭군요


그런데, 이런 살인 트릭은 일본의 작품에서도 가끔 쓰였는지, 의학박사이자 법의관 생활도 잠시 했던 추리소설가 유라 사부로(由良三郞: 1921-2004) 박사(우리나라에 '운명교향곡 살인사건'이 번역된 바 있죠)도 <미스터리를 과학하면>(1994)이라는 책에서 이에 대해 글을 쓴 바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의사로서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살인방법이라는 것이죠.


대강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실제로 정맥에 공기를 집어넣어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나 자신이 실험해 본 결과 체중 3kg정도 토끼의 정맥에 10cc 정도의 공기를 집어넣자 급격한 경직을 일으키면서 죽었으나, 1cc 정도로는 죽지 않았다. 토끼의 1cc는 체중으로 환산하면 사람에게는 20cc정도가 된다. 임상의사 선배는 정맥주사 때 실수로 작은 공기방울을 주입하기만 해도 사람은 즉사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만약 그것이 맞다 해도 사람과 토끼는 반응이 다르지 않을까. 여기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지금까지 아무도 인간의 정맥에 공기를 주사하는 실험을 한 사람은 없다.”

 

사람 정맥에 200cc 공기를 넣으면 죽을 것 같긴 합니다만… 200cc라면 쉬운 일은 아닐 것 같군요.


이처럼 추리소설에는 당장 보았을 때 그럴듯하게 보여도 실제로는 써먹을 수 없는 살인 방법이 많습니다. 유라 사부로 박사가 같은 책에서 언급한 것 중 하나는 광견병에 대한 것입니다. 어느 방송국에서 드라마 제작 전 의학적 고증을 위해 문의를 해 왔는데, 플롯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어느 형무소에서 탈옥한 두 명의 죄수가 들개에게 물려 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고, 다른 하나는 산으로 도망친다. 추적하던 경찰이 조사한 결과 두 사람을 문 들개는 광견병에 걸린 것이 판명된다. 사건은 단순히 탈옥수 추적이 아니라 광견병 확산을 막아야 하는 중대한 문제가 된다. 광견병 증세가 나타난 탈옥수는 사람들을 물어뜯으면서 광견병을 확산시키고 주변은 대공황에 빠지는데…’


여기까지 듣던 유라 사부로 박사는 ‘잠깐, 문제가 있습니다’하고 제동을 겁니다. 첫 번째로 개가 광견병에 걸렸는지 확인하는 데는 4주 정도 걸리며(이것은 요즘 빨라졌을 수도 있겠죠), 두 번째는 광견병은 금방 발병하는 것이 아니라 대략 2개월의 잠복기가 있으며 길면 1년 이상일 수도 있고, 마지막으로 개는 타액선을 통해 광견병 바이러스를 옮기지만, 사람은 광견병에 감염되면 타액선이 마비되기 때문에 사람을 물어도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유라 사부로의 추리소설 '고증' 관련 저서. 오른쪽의 <미스터리를 과학하면>은 번역되길 바랍니다.

 

 

이와 같이 소설가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복잡해지고 어려워집니다. 

 

현실에서는  무용지물인 살인 트릭을 그럴 듯하게 사용하는 작가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기시 유스케가 있네요. 단순한 무기 – 즉 칼이나 활, 혹은 둔기 등을 사용하는 방법이 아닌 나머지 살인방법은 ‘위험하니 집에서 따라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굳이 할 필요도 없을 정도입니다. <13번째 인격>이나 <신세계에서> 등에 나오는 초능력 살인방법은 따라 하라고 권해도 할 수 없을 것이고, <유리 망치>의 살인방법은 - 읽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 특정 장소와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 그런 복잡한 방법을 택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심지어 작가는 <푸른 불꽃>에서 ‘실제로 효과가 없으니 따라 해도 소용없다’는 후기까지 남기고 있을 정도이니까요.


현실이야 어쨌거나 독자를 잘 설득시키는 것, 이런 솜씨가 뛰어나야 일급 작가가 될 수 있겠죠. 플롯이 재미있고 그럴 듯하다면, 독자도 알면서 기분 좋게 속아넘어가 줄 것입니다. (C:)

 

P.S. <원한의 빨간 꽃>은 사실 창작인지 번안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오래 되어서 제목도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프랑스 혁명 혹은 그런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빨간 꽃' 저주, 그리고 저주가 풀리는 장면이 거의 똑같은 외국 작품을 보고 "이거 베낀 것 아닌가?"라고 한 기억이 있어서… 번안이 아니라면 여러 작품을 짜집기했을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완전한 착각일 수도 있겠죠. 혹시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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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추리여왕 2013.04.12 00: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랜만의 업데이트네요, 반갑습니다. ^^ 소설을 읽다보면 트릭에 치중한 나머지 현실적인 감각이 없는 경우를 가끔 보는데,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너무 터무니 없는 경우는 좀 안타깝기도 하죠. 그것에 대해서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명탐정의 규칙에서 아주 적절히 비꼬아놓았죠. ㅎ
    앞으로 좋은 이야기 또 많이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


잔잔하면서도 격렬한 선율

"내 취향에는 이탈리아나 프랑스 음악보다는 독일 음악이 더 맞아.
독일 음악은 내면 성찰의 느낌이 강하지."
- 셜록 홈즈
<붉은 머리 연맹>(1891) - 코난 도일



클래식 음악이라고 하면 좋아하는 분도 많지만 거리를 두고 있는 분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들으면 좋긴 하지만 흔히 듣는 가요나 팝송보다 어쩐지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너무 길어서 지루하기도 하고이런 저런 이유로 이른바 대중음악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긴 하지요.


그럼 클래식 음악추리소설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역시 어울리는 것 같지도 않고 연관성도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추리소설의 등장 초기부터 배경이나 소품으로서 만만찮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추리소설의 대중화를 성공시킨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는 음악과 미스터리를 연결시킨 시조(始祖)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시리즈의 첫 작품인 <주홍색 연구>를 보면 홈즈가 장차 하숙집 룸메이트가 될 왓슨에게 집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해도 괜찮겠느냐는 질문을 하는 장면이 있고, 단편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붉은 머리 클럽>에서는 사건을 수사하던 도중 사라사테(스페인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의 연주회에 찾아가 행복한 표정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왓슨에 따르면 홈즈는 문학이나 철학에는 거의 지식이 없고 관심도 없는 반면 열성적인 음악 애호가이자 수준급의 바이올리니스트이며, 뛰어난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바이올린을 연주중인 홈즈


심지어 홈즈는 오페라에도 등장했습니다. 작가인 도일이 홈즈 시리즈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1893년 단편 <마지막 문제>에서 홈즈가 폭포에 떨어져 죽은 것으로 처리하면서 시리즈를 중단하자, 이듬해인 1894년 작곡가인 리처드 모튼과 H.C.배리는 <셜록 홈즈의 유령>이라는 오페라를 만들어 세상을 떠난 홈즈를 유령으로 만들어 출연시켰습니다.

그렇다면 홈즈를 창조한 도일은 음악에 대해 전문가였을까요? 대개 바이올린은 턱 밑에 대고 팔로 받쳐 들고 연주하죠. 그런데 <주홍색 연구>에는 홈즈가 안락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옆으로 눕힌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마치 기타를 치는 것처럼 말이죠. 이건 가능하긴 해도 일반적인 연주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낭랑하고, 우울하고, 몽환적이고, 또는 명랑했으니 보통 솜씨가 아닌 것은 틀림없습니다. 도일이 설마 바이올린 연주에 대해서 전혀 몰랐을 리는 없으니 무척 변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네요(뜬금없이 입으로- 이빨로 기타를 연주했던 지미 헨드릭스가 머리에 떠오르는군요).

홈즈의 후배 탐정들도 여전히 고전음악을 즐깁니다. 콜린 덱스터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스 경감은 스트립쇼를 종종 찾아가는 통속적인 취미도 있지만 평상시에는 집에서 <니벨룽의 반지><발퀴레> 등 바그너의 음악을 즐겨 듣습니다. 덱스터의 작품에 등장하는 바그너의 음악은 등장인물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지만, 미국 작가 카터 브라운의 작품에서는 놀랍게도 살인 흉기로 쓰였습니다. 오디오 광()인 탐정 알 휠러가 등장하는 <찰리의 방법>에서, 악당은 스테레오 음향 설비가 된 밀폐된 방에 피해자를 가둔 채 볼륨을 최대로 높인 바그너의 음악을 틀어놓는다는 기상천외한 살인방법을 사용합니다. 이런 방법이 실제로 가능할지 의문스럽지만, 오래 전 중국에서 커다란 종() 속에 사람을 집어넣고 종을 울려 고문하거나 죽였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신빙성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


추리작가 중에는 작곡가로 활동한 사람도 있습니다. 오래 전 <즐거운 살인>(1948)이 국내에 소개된 영국 작가 에드먼드 크리스핀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크리스핀은 23세 때 소설가로 데뷔해 유머 넘치는 고전적 미스터리 장편 9편을 발표했으며(그 중에는 오페라 무대를 소재로 한 <백조의 노래(Swan Song)>(1947)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오르간 연주자였으며 오페라와 레퀴엠(장송곡), 영화음악 등을 남긴 작곡가였습니다.

악보를 다듬는 에드먼드 크리스핀


추리소설을 발표한 음악인도 있는데, 1923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의 공식 첫 공연 <라 보엠>에서 미미 역을 맡았던 퀴나 마리오(Queena Mario)가 집필한 <오페라 하우스의 살인(Murder in the Opera House)>(1934), <살인이 메피스토를 만나다(Murder Meets Mephisto)>(1942), <죽음이 델릴라에 떨어지다(Death Drops Delilah)>(1944) 등 세 작품은 모두 자신의 경험을 살려 뮤지컬을 소재로 한 추리소설입니다.

퀴나 마리오


퀴나 마리오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으며 세인트루이스에 이름을 딴 도로가 생길 만큼 유명한 소프라노 헬렌 트라우벨(Helen Traubel)<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살인(The Metropolitan Murders)>(1951)을 발표했지만 전문가들은 이 작품이 대필(代筆)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클래식을 소재로 한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소개되었습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안녕, 드뷔시>와 오쿠이즈미 히카루의 <손가락 없는 환상곡>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겠군요. 80년대에 유라 사부로의 <운명 교향곡 살인사건>이 번역된 적도 있는데, 은근히 클래식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클래식 음악이 중요하게 이용되는 작품이 있습니다. 일찍 작고한 이갑재의 <로맨틱한 초상>이 있고, 김성종의 <피아노 살인>에도 클래식 음악이 나오지요.

익숙해지는 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지만, 들을수록 좋은 것이 고전음악입니다. 다만 요즘 일부러 음악을 들은 지가 꽤 오래되어서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이 좀 쑥스럽긴 합니다만(: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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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2.02.02 2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갑재 님의 요절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로맨틱한 초상>은 정말 오디오와 클래식에 대한 그 분의 깊은 지식이 물씬 묻어나는 작품인데 말이죠.


자칫하면 헛갈리는 수가 있습니다

"범죄자 하나보다 더 불필요한 것은 가짜 증인이다."
- 맥윌리엄 씨
<That Yew Tree's Shade>(1954) - 시릴 헤어

'이름은 같지만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의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는 사자성어는 자주 보셨을 겁니다. 이렇게 단어가 존재하는 만큼 드문 경우는 아니고 직접 현실에서 가끔 마주치기도 하죠. 옛날에는 전화번호부에서 이름이 같은 사람을 찾아본 적도 있었는데, 요즘 인터넷에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세상에, 같은 이름이 이렇게 많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좋은이름은 필요하지만 새로운이름을 짓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회사나 상표 같은 것은 이름을 등록하기도 하지만, 사람의 이름에는 특허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설 제목도 마찬가지라서 독점권이 없으니 먼저 나오는 쪽이 임자라기보다는 유명한 쪽이 임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소설을 비롯한 영화나 노래에서는 동제이작(사전에 이런 단어는 없습니다만)이 나오기도 하죠.
하긴 추리소설의 역사도 오래되었고 작품 수가 수십만 권을 넘어가는 상황이니 같은 제목의 작품이 나오는 것이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닐 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들어볼까요. 지난 가을쯤 서점에 갔다가 신간 코너에 <최후의 증인>이 있어서 , 김성종 선생님의 작품이 또 재출간되었구나하고 슬쩍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 그것은 일본의 신진 작가 유즈키 유코의 작품이었습니다. 설마 하고 살펴보니 원제도 똑같은(물론 일본어지만) <最後証人>이었지요. 줄거리만 살펴보건대 내용은 전혀 비슷한 곳이 없어 보입니다. 
김성종 선생님의 작품은 일본에도 번역되었는데, 유즈키 유코의 작품 출간보다 1년 빠른 2009년이었습니다.


워낙 제목이 간결하고 강렬하니 저라도 써 보고 싶은 제목이기도 합니다. 일본 아마존을 검색해보니 같은 제목의 작품은 아직 없더군요. 그러니 써도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최후의 증인' 발간기념 사인회 광고


문득 궁금해서 미국 인터넷 서점 아마존을 검색해보니 <Last Witness>(혹은 <The Last Witness>)라는 제목은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미스터리쪽으로만 좁혀보아도 조엘 골드먼, 질리앤 호프먼, K. T. 로버츠, 존 매튜스, 리처드 몽고메리, K. J. 에릭슨, 조셉 배론, 레이프 실베르스키 & 올로프 스베델리드등의 여러 작가가 같은 제목의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1994년에 나온 추리소설 서지목록인 앨런 J. 휴빈의 <Crime Fiction II>에도 같은 제목의 작품이 두 편이 있으니, 세계로 범위를 넓히면 엄청나게 늘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증인이 너무 많다

지난 2006년부터 올해까지 번역된 작품의 목록을 뒤져보니 동제이작이 몇 편 나오는군요. <고백>(존 그리샴/The Confession, 미나토 카나에/告白), <소문>(고이케 마리코/うわさ, 오기와라 히로시/), <실종자>(오리하라 이치/失踪者, 도바 순이치/蝕罪), <약탈자>(퍼트리샤 콘웰/Predator, 막심 샤탕/Predateurs), <헤드헌터>(미셸 크리스피/Chasseur de Te'tes, 요 네스뵈/Hodejegerne)등인데, 원래 제목도 거의 같습니다. 사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일반명사이니 남의 제목이 멋있어서 베꼈다고 하기는 어렵지요.

비슷한 제목도 있습니다. <잘린 머리 사이클>(니시오 이신),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노리츠키 린타로),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미쓰다 신조) 잘린 머리트리오가 있고,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피에르 바야르), <누가 제노비스를 죽였는가?>(디디에 드쿠엥), <누가 조지를 죽였는가>(레오니 슈반), <누가 하비 버델 선생을 죽였나>(엘렌 호란),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이스마일 카다레)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형제들이 있습니다.

이런 단순한 제목은 그렇다 치지만, 가끔 복잡한 제목이 겹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콜린 덱스터의 <옥스포드 운하 살인사건>의 원제는 <The Wench is Dead(‘여자(혹은 계집아이, 하녀)는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휴빈의 저서를 살펴보면 같은 제목이 덱스터의 작품 이외에도 두 편 더 있습니다(프레드릭 브라운과 루스 페니송이라는 작가가 썼네요). 이런 독특한 제목이 우연일까요? 역시 검색을 해 보면 16세기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The Jew of Malta>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좀 생소하지만 영어권에서는 유명한 작가인 만큼, 그의 작품을 인용했을 가능성이 무척 커 보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콜린 덱스터의 책이 번역되어 있지만, 원제로 기억하는 분은 별로 없을 것 같긴 합니다만.

콜린 덱스터


두툼한 <Crime Fiction II>를 뒤적이면서 비슷한 제목을 대강 살펴보니, ‘The Man with로 시작되는 제목은 1백 편을 넘깁니다. 조금 더 뒤져보니 ‘Murder at으로 시작되는 제목은 3백 편이 넘고, ‘Murder in으로 시작되는 제목은 5백편, ‘The Case of로 시작되는 제목은 무려 8백 편이 넘습니다(사실은 세어보다가 지쳐서 대충 계산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러고 보니 ‘Murder’로 시작되는 제목은 셀 수도 없겠군요. 우리나라에 나온 작품도 정확한 집계는 어렵습니다만, '… 살인사건'은 엄청나게 많을 것 같습니다. 때때로 제목이 어째 비슷하다 생각하셨더라도 비슷한 제목이 이렇게 많을 줄 아신 분은 별로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추리소설가가 창의적으로 누굴 죽이고 또는 속이고(물론 작품 속에서) 하는데 애를 씁니다만 제목은 오히려 단순할 경우가 많지요. 외국 작품의 제목까지 챙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고… 외국의 사실 복잡한 제목은 독자도 기억하기 힘드니 상업적인 측면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외국(특히 영어권) 작품 중 똑같은 제목을 보면 상상력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똑같은 제목이라도 상관없다는 배짱인지그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연예인들은 유명한 선배 때문에 자기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많은데, 작가는 자신의 자식같은 작품 이름을 쉽사리 바꿀 수는 없나봅니다. 하여튼 좋은 제목은 이제 웬만큼 다 나왔으니, 혹시 비슷한 제목이 나오더라도 너그럽게 넘어가주어야 할 듯합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포스팅을 못했는데, 2011년 마지막날 턱걸이 하는군요.
새해 소원성취하시길 바랍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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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2.01.02 23: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동제이작 하니 생각나는데 얼마 전 나온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신작 제목이 <주홍색 연구>더군요. 고전에 대한 오마주로 일부러 같은 제목을 붙였겠지요.


해피엔딩에 작별인사를

"행복한 결말은 없어요 … 다만 행복한 사람들만 있을 뿐이지요."
- 에밀리 폴리팩스
<Mr. Polifax on th China Station>(1983) - 도로시 길먼

많은 사람들이 ‘추리소설의 결말은 해피엔드일 것이다’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추리소설의 장점으로 내세우는 것 중 대표적인 사례가 ‘권선징악의 교훈’이라는 것인 만큼 이러한 생각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일본의 어느 경제학자는 ‘권선징악’보다는 ‘범죄라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어리석게 잡히면 벌을 받는다’, 즉 ‘바보 짓 하지 말라’는 쪽이 훨씬 강하다고 하더군요).
‘해피엔드(happy end)’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소설, 극, 영화 따위에서 주인공이 잘 되는 것으로 끝맺는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건전한 해피엔딩의 대명사로 금방 떠오르는 작가는 딕 프랜시스입니다. 모험소설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그의 경마 미스터리에서는 주인공이 악당에게 위협은 물론 물리적인 폭력을 당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습니다만, 불굴의 의지로 역경을 거쳐 나와 마치 밝은 햇살을 보는 것과 같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곤 합니다.

딕 프랜시스

하지만 많은 추리소설의 결말은 언제나 해피엔딩일까요? 범죄가 벌어지고 사건을 무난히 해결한다고 해서, 꼭 그것이 해피엔딩이라고 하긴 어렵습니다. 일단 범죄의 피해자가 되면 사건이 해결된다고 해서 행복해지기는 어려울 겁니다. 몸의 상처야 나을지언정 마음의 상처가 쉽게 나을 리가 있겠습니까. 탐정, 경찰, 혹은 그 누군가가 나서서 범인을 잡아주긴 합니다만 피해자가 돌아오진 않으니까요.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에서 결말 부분은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또 이런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다른 방향도 있지요. 이를테면 국가 원수가 저격을 당했는데 주인공인 경호원이 총알을 몸으로 막았다고 해 보죠. 자신의 임무는 완수했지만 중상을 입고 생명이 오늘 내일 하다가 가까스로 살아난다면 이걸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소설이니까 하하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습니다만…)
여기까지는 좀 삐딱하게 본 해피엔딩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에드거 앨런 포 이후 코난 도일의 홈즈를 통해 추리소설은 황금시대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명탐정의 대명사이자 전지전능한 인물처럼 보이던 홈즈가 의외로 실패를 자주 했습니다. 단편 첫 작품인 <보헤미아의 스캔들>에서부터 고객(?)의 의뢰를 완수하는데 실패하고 있지요. 그럭저럭 넘어가긴 했지만, <다섯 개의 오렌지 씨>에서는 의뢰인의 신변 보호마저 실패하고 맙니다. 이런 작품을 거쳐 코난 도일은 역사상 최고의 언해피엔딩(unhappy ending) 작품을 발표합니다. 그는 홈즈 시리즈를 끝내기 위해 스물세 번째 단편인 <마지막 사건>에서 ‘범죄의 나폴레옹’ 모리어티 교수와 함께 셜록 홈즈를 스위스의 폭포에 떨어뜨려 버립니다. 시신이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명백히 죽었다는 것이죠(… 물론 홈즈는 누구나 다 아시는 것처럼 다시 돌아옵니다만). 이렇게 추리소설의 언해피엔딩은 일찌감치 있었던 것입니다.

홈즈와 모리어티 교수의 마지막 격투

잠깐 다른 관점에서 볼까요. 악당이 주인공인 경우에는 그의 성공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아르센 뤼팽이 처음 등장한 작품의 제목은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였으며, 체포되는 것으로 끝납니다. 자, 아시다시피 범죄자가 체포되는 것은 해피엔딩입니다만 그가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어쩐지 슬픈 분위기에서 끝나고 맙니다. 이어진 작품에서는 교도소에서 탈옥한 뒤 수사관들을 끊임없이 골탕 먹이고 끊임없는 범죄 행각을 벌이며 그만의 해피엔딩을 즐기고 있지요. .
주인공이 없는 작품에서도 언해피엔딩이 벌어집니다. 이를테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는 절해고도의 외딴 섬에 모인 열 명이 차례로 목숨을 빼앗깁니다. 그들의 죽음에는 과거의 죄악에 대한 징벌이라는 요소도 있고, 탐정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동정하기도, 혹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등장인물이 모두 죽어가는 것만큼(그게 혹시 자연사라면 모를까요) 끔찍한 결말은 없을 겁니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등장한 하드보일드에서는 자기파괴적인 주인공이 종종 등장하죠. 얽히고설킨 사건을 가까스로 해결하지만 주인공이 얻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특히 필립 말로우 같은 시니컬한 인물은 빠져도 될 일에 쓸 데 없이 뛰어들어서(?) 고생만 하다가 몸은 골병이 들고 챙기는 것은 없는 밑지는 장사만 하지요. 말로우가 “이번 사건은 해피엔딩이로군. 짭짤하게 건졌지.”하고 싱긋 웃으며 혼잣말 하는 장면은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궁지에 몰린 필립 말로우 - 영화 '빅 슬립'에서


이미 눈치 채신 계신 분도 많겠지만, 제목으로 쓴 '해피엔드에 작별인사를'은 우타노 쇼고의 <해피엔드에 안녕을>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단편집에는 사소한 계기로 인해 어이없는 불행을 맞이하는 인생이 꼬여버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지요. 이보다 훨씬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는 작품도 많습니다만 그런 작품의 제목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잃을 수 있으니 이쯤에서 입을 다물겠습니다.

우타노 쇼고


허구에서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되겠지만, 그게 현실에서 벌어진다면 속이 뒤집힐  일이지요. 존 그리셤의 논픽션 <이노센트 맨>을 보면 정의도 얼마든지 패배한다는 현실을 가슴 아플 정도로 보여줍니다. 누명을 뒤집어쓰고 오랜 시간 고통을 받던 사람의 결백함이 밝혀진 직후 불치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불굴의 의지로 거대한 악을 물리치는 한 사람의 무용담을 즐기는 것이겠지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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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11.02 1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도 모두 언해피엔딩이지만 그래도 악역을 맡은 이들은 모두 죽으니 다행이지요, 그런데 최근에 본 걸작 스릴러 영화들은 대부분 악역의 승리로 끝나니 참 아쉽더군요.


병원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닌...

수술대에서 환자가 죽었을 때 모든 의사들이 그 자리에 얼어붙는 것은 아니다.
<녹색은 위험>(1944) -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의학 미스터리란 무엇일까요?
의사가 등장하는 작품? 병원이 배경인 작품?

그저  ‘의사가 등장하는 작품’이라고 하면 범위가 너무 넓어지겠죠. 이런 식이라면 등장인물의 직업만으로 새로운 분야가 만들어질 판이니 제외해야 하겠습니다. 셜록 홈즈의 모험담을 기록한 왓슨은 엄연한 의사이자 작품의 매우 중요한 인물이지만 홈즈 이야기를 ‘의학 미스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병원이 배경인 작품’이라고 하는 것도 어렵겠지요. 그냥 사건의 장소일 뿐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정의하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상투적이고 애매모호하지만) ‘의학’에 관련된 미스터리를 ‘의학 미스터리’라고 하는 것이죠. 그럼 의사가 주인공이고 병원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를 다루는 것만 있느냐… 물론 또 그건 아닙니다. 요즘은 누구에게나 익숙해진 법의학자들도 엄연한 의학자이니까요. 정의를 내리다가 날이 샐 판이니 이쯤에서 얼버무리도록 하지요^^(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견해일 뿐 아직 무슨 규칙이나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각설하고, 의학 미스터리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의학 미스터리라고 생각할 만한 작품이 있지요. 작가가 의사(출신)이며, 의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의학계의 비밀을 다루고, 병원이나 의학 연구소 등이 주요 배경이 되는 작품입니다. 이런 조건에 딱 맞는 작품을 쓴 사람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로빈 쿡이 대표적입니다. <코마>로 시작된 그의 작품은 1990년대 초반 번역되면서 의학 미스터리의 선풍을 몰고 왔습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좀 뜸해졌습니다만….

로빈 쿡


<코마>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감독을 맡은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마이클 크라이튼입니다. 로빈 쿡과 마찬가지로 하버드 의대를 졸업한 의사 출신 작가 마이클 크라이튼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위급한 경우에는> 역시 병원의 의료사고를 둘러싼 의학 미스터리입니다. 로빈 쿡이 꾸준히 의학 미스터리를 써 온 반면 마이클 크라이튼은 의학뿐만 아니라 나노기술, 유전공학 등 당대의 첨단 과학을 소재로 삼아 썼다는 차이가 있군요. 그의 <넥스트>는 유전공학을 다루고 있는데, 이걸 이쪽 범주에 넣어야 할지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 비슷한 시기(1990년대 초반)에 마이클 파머의 의학 미스터리도 번역 소개되었는데, 우리나라에 자리 잡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요즘은 여성 작가 테스 게리첸의 작품이 소개되고 있는데, 메디컬 스릴러라고 부를 정도로 피가 낭자하고 엽기적인 장면이 수시로 등장합니다.

2천년대 들어 소개된 일본의 가이도 다케루도 현역 의사(병리전문의)이자 작가입니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공모전을 통해 등단한 그는 범죄라기보다는 오히려 현대 일본의 의료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Ai(Autopsy imaging, 사망시 화상병리진단)가 ‘사인(死因)불명사회인 일본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며 사회제도로 도입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으로 시작된 도조 대학을 무대로 다구치와 시라토리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인물이 활약하는 시리즈는 유머가 흐르면서도 진지함이 깔려 있는 의학 미스터리의 수작입니다.

초등학교에서 1일 교사로 나선 가이도 다케루

잠깐 세월을 거꾸로 올라가 볼까요?
영국의 의사였던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은 법의학자이자 변호사인 존 이블린 손다이크 박사가 등장하는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CSI의 고조할아버지뻘쯤 되는 법의학 미스터리의 원조이자, 이른바 도서 추리소설의 선구로서 역사에 남을 작품이지요.

손다이크 박사

그동안 국내에는 단편들만 소개되었다가 반갑게도 장편 <붉은 엄지손가락 지문>이 올해 초반 번역되었습니다. 발표한 지 1백년이 넘은 작품이라 어쩌면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문이 사건의 증거로 막 채택되던 무렵의 초창기 과학수사를 살펴보시고 싶으신 분에게 추천합니다. 퍼트리셔 콘웰의 케이 스카페타나 캐시 라익스의 템퍼런스 브레넌 같은 전문가들이 손다이크 박사의 후계인 셈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입니다. 즉, 사악한 의사가 있습니다. 딱 떠오르시죠? 그렇습니다. 독특한 식성(!)을 지닌 한니발 렉터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연쇄살인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는 유능한 정신병리학자이기도 합니다. 상담하던 환자를 잡아먹은 일도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만… 의사가 범인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만 미리 알려드릴 수도 없고, 또 의학 미스터리도 아니니까 이 이야기는 여기서 접지요.

무서운 의사, 한니발 렉터

의학 미스터리에 넣어야 할지 고민이 되는 작품도 있습니다. 엘러리 퀸의 <네덜란드 구두의 비밀>이나 크리스티애너 브랜드의 <녹색은 위험> 등은 병원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다루는 고전적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의사가 아니긴 합니다만, 충분히 의학 미스터리로 꼽아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최근에 번역된 <비트 더 리퍼>는 궁지에 몰린 의사의 이야기입니다. 추리소설에 흔히 나오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만, 그 의사는 전직 살인청부업자였다는 점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지요. 이 작품에도 의료계 이야기가 나오긴 합니다만, 딱 잘라서 의학 미스터리로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재미는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논픽션 의학 미스터리를 두 편 소개합니다. 하나는 <의학 탐정>, 다른 하나는 <위험한 저녁식사>입니다. 두 작품 모두 의사들이 마치 탐정처럼 질병이나 증상의 원인을 밝히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버튼 루셰가 1947년에 발표한 <의학 탐정>은 이쪽 분야의 고전으로(아쉽게도 번역판은 절판상태입니다), <위험한 저녁식사>의 저자 조너던 에드로는 십대 시절 그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시대가 흘러갔을지언정 두 책의 스타일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합니다. 소설과는 달리 특별한 악당이나 범죄가 없긴 합니다만 어지간한 추리소설 못지않게 흥미진진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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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10.21 2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사가 나쁜 일에 손을 대면 세상 누구보다도 무서운 범죄자가 되지." <얼룩끈>에서의 홈즈의 대사가 생각납니다. 물론 이 작품도 의학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의사인만큼 완전범죄 꾸미기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의사 범죄자 하니 <007 네버 다이>에 잠시 나왔다가 본드에게 죽는 악당이 나옵니다. 법의학 박사의 신분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자살이나 사고로 위장한 살인을 할 수 있고, 명사수이며, 각종 고문에도 능한 이로서 높은 사람들의 의뢰를 받아 전세계를 돌면서 업무(?)를 수행하는 암살자이죠, 전에 저도 그런 악당을 한 번 기획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악한 남자보다 훨씬 위험한...

모든 여자들은 마음 속에 방탕함을 가지고 있다.
 <도덕론>(1735) - 알렉산더 포프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악녀들을 이야기할 때면 떠오르는 경구(驚句)가 두 개 있습니다. “범죄의 뒤에는 여자가 있다”와 “여자를 먼저 쏘아라”라는, 여성들에게는 틀림없이 기분 나쁠 살벌한 문장들이지요.

영화 'Deadly is the Female'

현실 사회에서야 어쨌든, 추리소설에서만큼은 적어도 ‘범죄 뒤의 여성’이 거의 필수적 요소입니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남자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의 심리적인 배후에는 어떤 식으로든 간에 대부분 여성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물론 여성들이 범죄조직의 두목이라는 단순한 의미는 아닙니다^^). 게다가 요즘 작품들에서는 직접 범죄자로 등장하는 여성들도 많아졌습니다. 다만 여성이 사이코 연쇄 살인마로 나오는 경우는 공포소설 이외에서는 보기 힘든데, 이것은 FBI의 사건사례 분석 결과 연쇄살인범의 대부분이 20~30대의 백인 남성이라고 하는 점에서 납득이 가는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예외도 없는 것은 아니어서, 여성작가 첼시 케인은 미모의 연쇄살인범 그레첸 로웰을 등장시키는 3부작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아름다운 얼굴 뒤에 숨겨진 살인본능… 엇박자처럼 보이지만 뭔가 끌어들이는 힘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작가 첼시 케인(물론 왼쪽).

한편 “여자를 먼저 쏘아라”라는 말은 서독의 테러 진압부대에서 신입 대원에게 내려진 지시사항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성 테러리스트들을 연구한 같은 제목의 책이 국내에도 번역된 적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여성 테러리스트들은 사람을 총으로 쏘는데 망설임이 거의 없으며, 남성들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또한 수십 명을 죽인 여성 테러리스트들이라고 해서 광기 어린 인간인 것도 아닙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이 평범한 모습을 가진 그들의 정신 상태는 지극히 정상적이며, 테러 행위 자체를 임무수행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팜 파탈(Femme Fatal)’이라는 단어는 소설보다는 영화의 선전문구에 힘입어 낯익게 된 것 같습니다. 좀 아쉽다면 어느덧 ‘팜 파탈 = 악녀’의 공식이 되어버린 것이죠. 사실 그렇게 좁은 의미가 아니라 ‘운명의 여인’ 정도로 생각하면 될까요.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매력을 지닌 여성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운명의 여인’이라는 말은 남성의 이상형과 동의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격렬한 욕망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거짓말도 잘 하지요. 또한 묘하게도 미인이 많습니다.
추리소설에서는 남성을 파멸로 몰고 가는 여성이지만 반드시 사악한 여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단순한 여자 범죄자를 팜 파탈로 볼 수는 없습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현실적인 만큼 도둑이라는 불확실한 직업을 선택하는 경우가 드물기도 하지요.
과거에도 여성 범죄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추리소설에서 ‘팜 파탈’이라는 요소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작품이 탄생한 시기와 맞물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쉴 해밋의 <몰타의 매>에서는 브리짓 오쇼네시라는 매력적인 여인이 탐정 샘 스페이드를 복잡한 사건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운명의 여인, 브리짓 오쇼네시(메리 애스터가 연기했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에서는 덩치 큰 은행 강도 무스 말로이와 그의 옛 애인 벨마 때문에 탐정 필립 말로우가 꽤 고생을 하지요. 얼 스탠리 가드너의 <벨벳 손톱 사건>에서는 변호사 페리 메이슨이 의뢰인인 버타 부인의 거짓말 때문에 살인 혐의를 받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미지의 여인 때문에 사건 속에 휘말리고, 목숨까지 위협받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묘하게도 하드보일드 탐정들에게는 - 일부 가난한 탐정들을 빼고는 - 흔히 착실한 여비서를 거느리고 있어서 작품에 등장하는 악녀들이 한층 더 사악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수많은 작품을 남긴 여성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는 여성들을 악역으로 만드는데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미리 알려주는 결과가 되므로 작품들을 언급할 수는 없지만, 남자들만을 범인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지 않은 수의 작품에서 악한 여인들을 볼 수 있는데, 그녀의 작품 중 법정 미스터리인 단편 <검찰측 증인>에서는 ‘운명의 여인’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다른 운명의 여인 크리스틴(마를레느 디트리히 분)-영화 '검찰측 증인'에서

90년대의 작품 중에서 기억에 남는 악녀로서는 스콧 스미스의 <심플 플랜>에 나오는 행크의 아내, 어디서나 볼 수 있을 평범한 여인인 사라가 떠오르네요. 그녀는 직접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고 범죄에 가담하지도 않았지만, 부지불식간에 사건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자신도 모르게 모든 사람을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악녀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무서운 것은 그들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지요.
매력적인 악당도 많지만, 악녀는 더욱 매력적이고 어디서나 돋보일 겁니다. 그런 매력이 없다면 남의 운명을 바꿀 수도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녀들은 언제라도 누군가를 파멸시킬 수 있는 위험한 존재인 만큼 소설 속에서만 만나는 것이 좋겠군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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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9.30 1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매력적인 팜므파탈은 강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죠, 글쎄요, 윌리엄 아이리쉬의 <환상의 여인>에 나오는 그 환상의 여인은 팜므파탈일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지나가다 2011.10.02 11: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평시민님// 환상의 여인은,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참고인을 의미할 뿐 결코 팜므파탈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원제도 phantom lady이지요. 결코 fantastic lady라던가 attractive lady 같은 게 아닙니다. 이 블로그의 내용과는 무관한 댓글을 다신 것 같아 한마디 적어봅니다.

  2. 평시민 2011.10.03 22: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잘못 알았군요, 하지만 저는 이상하게 추리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수수께끼의 여인 하면 '환상의 여인'이 먼저 생각납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