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아 보이면서도 다른 것

누구나 할리우드에서 6주일 이상 살게 되면,
갑자기 치료가 불가능한 정신병에 걸린다고 한다.
 <트럼프 살인사건(The Four of Hearts)>(1938) - 엘러리 퀸


어느덧 활자(책)보다 영상(영화)이 강세를 보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마음먹고 일정을 잡아야 하는 행사였지요. 그나마 개봉영화는 많지도 않아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었지만, 컬러 TV의 등장, 비디오․케이블 TV의 보급, 인터넷의 보편화, 그리고 이제는 DMB 등 기술 발전을 통해 말 그대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영화감상을 할 수 있습니다. 초기 영화 중 하나가 열차 강도를 소재로 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영화는 범죄를 소재로 한 것이 많았는데, 범죄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대중소설인 추리소설은 역시 대중성을 추구하는 영화로 옮기기에 매우 적합한 듯합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영화관계자들이 추리소설을 열심히 읽는 독자라고도 합니다(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작가가 영화와 관계를 맺는 데는 작품 자체에 작가가 관여할 때, 즉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거나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 가장 많습니다.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경우는 일일이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라서 원작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볼 때가 흔하지요. 좀 오래된 기록입니다만, 1993년판 영화관련 기네스북을 보면, 가장 많이 영화에 등장한 인물은 다름 아닌 명탐정 셜록 홈즈였습니다. 영국 작가 코난 도일이 창조한 전설적 인물 셜록 홈즈는 1900년부터 1993년까지 무려 211편의 영화에 등장해 2위인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159편)과 3위 프랑켄슈타인의 괴물(115편)을 여유 있게 앞서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숫자에서 눈치 챌 수 있듯 홈즈가 등장하는 영화라고 해서 모두 코난 도일의 원작 소설을 토대로 한 것은 아닙니다. 인기가 있으면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유명한 주인공의 이름을 걸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지요. 이런 일은 드물지 않은데, 예를 들어 얼 데어 비거스의 찰리 챈 시리즈는 장편 여섯 개에 불과하지만 영화로는 1931년부터 1949년까지 20년 남짓 사이에 무려 43편이 제작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영화로 제작된 찰리 챈 시리즈

‘만약…’이라는 말은 언제나 여운이 남지요. 로스 맥도널드의 루 아처 시리즈도 어쩌면 007과 같은 인기 시리즈가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사립탐정 루 아처(Lew Archer)의 이름이 루 하퍼(Lew Harper)로 바뀌고 제목도 <움직이는 표적>에서 <하퍼>가 된 이유는 주연배우 폴 뉴먼의 성공작들이 모두 H로 시작되었기 때문(<허드 Hud>, <허슬러 The Hustler> 등)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각본을 맡았던 -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 - 윌리엄 골드먼이 밝힌 바에 따르면 사실무근이라고 합니다. 아처 시리즈를 영화 시리즈로 제작할 계획을 세운 영화사는 아처의 이름을 계속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으며, 맥도널드가 그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에 당시 각색을 맡았던 골드맨이 아처와 발음이 비슷한 하퍼로 바꾸었다는 것이지요.


주인공은 매력적이지만 오락영화로 만들기에는 줄거리가 무거운 편이었던 아처 시리즈는 이런 이유로 <하퍼>와 <The Drowning Pool>등 두 편만 제작되는데 그쳤습니다. 골드먼은 아처 시리즈의 최고 걸작으로 인정받는 <소름>에 애착을 가지고 각본도 썼지만, 뉴먼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 제작되지 않고 창고 어딘가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수백, 혹은 1천 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을 각색하는 동안 많은 부분에서 원작과 달라지기 때문에 원작을 읽은 독자뿐만 아니라 작가도 불만이 없을 수가 없겠지요. <재키 브라운> <표적>등 호평 받은 영화의 원작자 엘모어 레너드는 영화계가 잡으려고 경쟁을 벌이는 현역 최고 작가 중 하나지만, 그의 첫 각본이자 자신의 작품을 직접 각색한 <The Moonshine War>가 제작되던 1970년에는 큰소리칠 입장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디트로이트의 디킨스' 엘모어 레너드

촬영 현장에 처음 나간 그는 프로듀서나 감독이 걸핏하면 각본을 즉석에서 바꾸는 모습을 보고 당황했고, 주연 배우 패트릭 맥구헌이 ‘자신의 대사가 엉망이 되니 기분이 어때요?’하는 질문에 대답도 못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영화화 과정에서는 대개 이런 일이 벌어지는 만큼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다. 판권을 팔았으면 그걸로 끝이다. 영화는 내 작품이 아니다’라는 제임스 엘로이의 태도가 훨씬 편할 것 같네요.

  유명한 추리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쓰거나 다른 사람의 작품을 각색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탐정 필립 말로우를 탄생시킨 하드보일드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는 역시 위대한 하드보일드 작가 중 한 사람인 제임스 케인의 <이중 배상(Double Indemnity)>(1943)을 훌륭하게 시나리오로 만들어 호평을 받았으며,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의혹의 전망차> 역시 여성 추리작가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의 데뷔작인 <낯선 승객>(1950)을 그가 각색한 작품입니다. 히치콕 감독의 또 다른 걸작 <새>는 로맨틱 서스펜스 작가 대프네 뒤 모리에의 단편 소설을 경찰소설의 대가 에드 멕베인이 각색한 것이지요.

  작가의 활동은 원작이나 시나리오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위대한 작가는 그 시대를 다룬 영화나 혹은 전기 영화, 다큐멘터리에 실명으로 등장합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저명인사였던 코난 도일의 전기 영화는 제작된 적이 없지만, 그와 미국의 유명한 마술사인 해리 후디니의 친분은 워낙 잘 알려져 있어 <위대한 후디니(Great Houdini)>(1976), <젊은 해리 후디니(Young Harry Houdini)>(1987), <후디니(Houdini)>(1998) 등 후디니의 전기 영화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유명 작가가 실명으로 나오는 영화로는 1926년 발생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실종 사건을 다룬 <애거서(Agatha)>(1979), 하드보일드 작가 대쉴 해밋과 그의 동반자적 존재였던 여성 극작가 릴리언 헬만의 이야기를 다룬 <줄리아(Julia)>(1977), <대쉬와 릴리(Dash and Lilly)>(1999)등이 있으며, 좀 독특한 소재의 영화로 빔 벤더스 감독의 <해미트(Hammett)>(1982)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탐정 출신 추리작가 조 고어즈가 해미트의 사립탐정 시절을 그린(물론 허구이죠)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해밋을 연기한 프레드릭 포러스트는 10년 후 제작된 <시티즌 콘(Citizen Cohn)>에서도 해미트로 등장합니다.

빔 벤더스 감독의 '해밋'

  여건이 되면 작가가 영화에 출연도 합니다. 코난 도일은 역시 이쪽에서도 선구자로 <5백만 달러 위조 계획(The $5,000,000 Counterfeiting Plot)>(1914), 또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한 <잃어버린 세계(The Lost World)>(1925) 등 두 편의 무성영화에서 실명으로 등장합니다. 변호사 출신 작가 얼 스탠리 가드너는 TV 시리즈 <페리 메이슨>에서 판사 역으로 출연했는데, 재판 과정에 익숙한 그로서는 근엄한 얼굴로 앉아있는 검사 연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 같다. 조연으로 등장한 이들과는 달리, 화끈한 사립탐정 마이크 해머 시리즈를 쓴 미키 스필레인은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들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시리즈 다섯 번째 영화 <걸 헌터>(1963)에 직접 해머로 등장했습니다. 스필레인은 TV 시리즈인 <형사 콜롬보>에도 등장했는데 여기서는 살해당하는 소설가를 연기했지요.
  다큐멘터리 픽션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범죄소설 <인 콜드 블러드>를 남긴 트루먼 캐포티는 귀여운(?) 아저씨 같은 외모와는 달리 <5인의 탐정(Murder by Death)>라는 코믹 미스터리 영화에 출연해 명탐정들을 골탕 먹이는 인물을 연기했습니다. 유명 희곡작가 닐 사이먼이 각본을 쓴, 싸구려 추리소설들을 야유하는 듯한 이 영화에서 캐포티가 연기한 괴상한 인물 라이오넬 트웨인은 탐정들이 너무 영리한 나머지 겸손함을 잃고 독자들을 기만한다고 질타하며, 결국에는 수백만의 독자들이 복수할 것이라고 외칩니다.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은 영화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에서 종종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커다란 체격에 강렬한 인상을 지닌 그는 ‘스티븐 킹의 영화에 가장 많이 출연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자신’이라는 퀴즈가 있을 정도로 자주 출연했기 때문에 영화를 볼 때 그를 찾아내는 것도 또 다른 재미 중 하나이죠. 킹은 출연뿐만 아니라 <맥시멈 오버드라이브>의 감독을 맡은 적도 있는데,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이젠 감독 역할에 관심을 끊은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그러니까 2009년 말 재미있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영화 <이중 배상>에 각본을 썼던 레이먼드 챈들러가 깜짝 등장하는 장면이 있었다는 것이죠(지금은 DVD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챈들러입니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세계의 수천만 명이 보았을 터인데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던 것도 놀랍지만, 프랑스와 미국의 연구자가 거의 같은 시기에 발견했다는 건…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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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8.25 2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93년까지 만들어진 홈즈 영화가 211편이면 지금은 그보다도 더 많겠군요, 다 보고 싶습니다. 제가 영화로 보고 싶은 추리소설 걸작은 존 딕슨 카의 <벨벳의 악마>, 야마구치 마사야의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 김내성의 <마인>입니다.



우리도 앞에 나서고 싶다

“팡토마스.”  - “뭐라고 했어?”
 “팡토마스라고 했지.” -  “그게 무슨 뜻인가?”
 “아무 뜻도 아니야… 모든 것을 뜻해!” -  “도대체 그게 뭔가?”
 “아무도 아닌 동시에 누구이기도 하지!” -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뭘 하는데?”
 “공포를 퍼뜨리지!”

 <팡토마스(Fantômas)>(1911) 마르셀 알렝, 피에르 수베스트르

추리소설의 필요조건은 범죄, 탐정, 그리고 사건의 논리적 해결인데, 19세기 중반에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무척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고 형식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작품도 많이 등장했지만 거의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은 거의 모든 작품에 범죄와 범죄자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악역이란 무척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악당은 대체로 하나의 작품에 등장해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되면서(혹은 응분의 처벌을 받으며)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깊은 인상을 줄 수는 있어도 인기를 얻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지요.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모리어티 교수는 악당이면서도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모리어티 교수는 ‘범죄의 나폴레옹이며 런던이라는 대도시의 나쁜 짓 절반, 미궁에 빠진 사건 거의 전부에 관련된 인물로 천재이며 철학자이고 이론적 사색가’로 대담한 홈즈마저 공포에 떨게 만든 유일한 인물이었지요. 도일은 홈즈 시리즈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는지 이런 무시무시한 강적을 만들어 낸 후 단편 <최후의 사건>에서 홈즈와 모리어티 교수가 스위스의 폭포에서 떨어져 죽는 것으로 끝맺었는데, 결국은 팬들의 항의로 홈즈를 다시 살려낸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범죄의 나폴레옹' 모리어티 교수


모리어티 교수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이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모리어티의 이름은 19세기 말의 그저 그런 범죄자였던 조지 모리어티(George Moriarty)에서 따 온 것으로 보이며, 인물상 자체는 미국의 전설적인 괴도 애덤 워스(Adam Worth)라는 것입니다. 독일계 유태인 애덤 워스는 뉴욕의 전설적인 금고 털이이자 은행 강도로 그가 저지른 범죄만 해도 5만3천여 건에 달합니다. 런던 경찰국의 로버트 앤더슨 경은 그의 솜씨에 경탄한 나머지 ‘범죄의 나폴레옹’이란 별명을 붙일 정도였습니다.

현실 세계의 '범죄의 나폴레옹' 애덤 워스


그는 1902년 사망하는데, 유명한 핑커튼 탐정 사무소의 윌리엄 핑커튼은 그의 죽음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지적인 사나이들의 범죄는 그가 죽음으로써 끝났다. 이제 미국에는 거물 도둑이나 위조범은 더 이상 없다.” 그러나 워스는 지하 세계를 지배하거나 살인과 관련된 적도 없었으며, 실제 교수는커녕 그만큼의 지성을 갖추지 못했던 점에서 과연 모리어티 교수의 모델일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G.K.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에 등장하는 프랑스인 플랑보는 거구에 대담무쌍한 성격으로 교묘하게 짜여진 범죄를 저질러 왔습니다. 다른 집 앞에 놓인 우유병을 자신의 고객 집 앞으로 옮겨놓는 방법으로 젖소 한 마리 없이 우유회사를 경영했으며, 가짜 우체통을 만들어 우편환을 가로챌 궁리를 하는 등 기발하고 장난스러운 일을 벌였다. 플랑보는 브라운 신부와 처음 만난 <푸른 십자가>(1911) 사건 이후 여러 차례 신부와 마주치며 개심해 사립탐정이 되어 신부의 조수 겸 경호원 역할까지 하게 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금세기 최고의 지능적인 괴도였던 플랑보우가 사립탐정이 된 후에는 그냥 힘만 좋은 거한이 되어 두뇌는 거의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데, 너무 똑똑한 신부와 함께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일까요?

신부로 변장한 플랑보(왼쪽) - 영화 '브라운 신부'에서


<레드 드래건>, <양들의 침묵>, <한니발>로 이어지는 토머스 해리스의 사이코 스릴러 시리즈는 유능한 수사관 윌 그레이엄과 클라리스 스탈링, 그리고 연쇄살인범인 ‘붉은 용(Red Dragon)’ 프랜시스 달러하이드(Francis Dollarhide)와 ‘버펄로 빌(Buffalo Bill)’ 제임 검(Jame Gumb) 등 인상적 인물이 등장하지만 정작 형무소에 갇혀 있으면서 작품 주변부를 맴돌던 한니발 렉터가 가장 유명해 이 시리즈는 <한니발> 3부작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한니발 렉터 -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악당들은 종종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19세기 말, E.W.호넝은 A.J.래플즈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을 썼습니다. 래플즈는 유명한 신사인 한편 ‘아마추어’ 금고털이라는 부업을 가진 사나이로, 사람을 다치거나 하는 일 없이 주로 보석을 훔쳤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가 호넝은 사회정의의 수호자 홈즈의 작가인 코난 도일의 처남이었습니다. 영국 요크셔 출신의 추리작가인 호넝은 약한 시력과 건강 때문에 고생하다가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해 건강을 회복한 후 영국으로 돌아와 코난 도일의 여동생인 콘스턴스 도일과 결혼하고 코난 도일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래플즈는 프랑스의 괴도 뤼팽의 선배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래플즈 이래 가장 유명한 인물은 역시 모리스 르블랑이 창조한 아르센 뤼팽이겠지요? 홈즈가 명탐정의 대명사라고 하면 뤼팽은 도둑의 대명사라고 할 만큼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주인공입니다. 장 폴 사르트르가 “암흑가의 시라노(Cyrano)”라 일컬은 이 괴도 신사는 강인하고 배짱 좋으며 머리까지 뛰어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물건을 훔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처럼 해치우는 놀라운 사나이입니다. 가끔 탐정 노릇을 할 때도 있는데 워낙 범죄에 대해 달통한 덕택으로 웬만한 악당들을 가지고 놀다시피 합니다.

래플즈나 뤼팽은 정의의 편에도 종종 서는데 반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악당으로만 남는 진짜 ‘나쁜 녀석’들도 있습니다. 묘하게도 프랑스인들은 반(反)영웅을 좋아하는 것인지 주인공으로 등장한 악당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뤼팽보다 약간 늦게 등장한 팡토마스(Fantômas - 프랑스 이름이지만 뒤의 ‘s’ 발음을 붙인다는군요)는 그런 대표적 인물입니다. 마르셀 알랭과 피에르 수베스트르의 작품에 등장하는 팡토마스는 ‘현대의 메피스토펠레스’ 또는 ‘공포의 대왕’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그의 목표는 ‘사람들을 공포로 떨게 만드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긴 했지만 범죄자로서의 자신의 직업을 더욱 숭배한 그는 모든 종류의 사회규범을 무시하면서 범죄를 저지르려 하였으며, 항상 더욱 더 도전적이며 끔찍하고 황당무계한 새로운 범죄를 저지르려 하였습니다.

악당 팡토마스(가운데)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여성 작가 패트리셔 하이스미스도 프랑스의 분위기에 젖은 탓인지 악당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썼습니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톰 리플리는 강도도 아니고 범죄조직의 우두머리도 아니지만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람 죽이는 일을 망설이지 않는 사악한 인물입니다.

현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인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와 로렌스 블록은 각각 두 사람의 대표적 악당 주인공으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웨스트레이크는 살벌한 악당 파커 시리즈와 운수 나쁜 도둑 도트문더 시리즈, 블록은 서점 주인이자 도둑인 버니 로덴바와 우울한 살인청부업자 켈러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데, 이들은 작가의 정의파 주인공들보다 오히려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번역된 작품이 <뉴욕을 털어라> 하나뿐이로군요.

운수 나쁜 도둑 일당을 이끄는 운수 나쁜 도둑 도트문더(맨 왼쪽, 로버트 레드퍼드).


그러나 추리소설이 범죄소설로 변해가는 현재 상황에서 이제는 100% 정의의 주인공은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미국의 대표적 추리작가 엘모어 레너드의 작품에서는 등장인물들을 명쾌하게 선악으로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 모험(Rum Punch)>, <악어의 심판(Maximum Bob)> 등의 작품에는 약간 악한 사람, 많이 악한 사람이 등장하며 착하기만 한 사람의 역할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현실적인 면이 현대의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아닌가 싶군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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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8.17 2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근 도진기 작가님의 <정신자살>에 나오는 이탁오 박사를 보니 한국판 조커(배트맨에 나오는)가 따로 없더군요, 막판에 이탁오 박사의 광기가 좀 더 강렬하게 표현되었다면 더 좋았겠지만요, 한국 추리소설에도 매력적인 악당이 많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이건 내가 맡은 최초의 사건이거든."
-셜록 홈즈
<글로리아 스콧 호>(1893) / 아서 코난 도일

사람이 어떤 일을 하게 되는 데에는 - 그것을 어릴 때부터 바라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얼떨결에 택하게 되었든 간에 - 누구든지 크건 작건 사연이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추리소설 속에는 어지간한 인간승리 드라마를 능가할 만큼 기구한 사연을 가진 주인공도 등장합니다(물론 허구의 인물이니만큼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 작가들이 노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요). 그들이 어떤 과거를 지니고 있으며 어떤 연유로 범죄와 싸우는 직업을 택하게 되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에드거 앨런 포가 창조한 오귀스트 뒤팽은 대단히 품위 있고 명석한 두뇌의 귀족이지만 집안이 몰락한 탓에 무너질 듯이 낡아빠진 하숙집에 친구와 함께 살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뚜렷한 직업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사건을 해결하고 사례금을 받기도 하죠. 뒤팽은 불과 세 편의 단편에만 등장했으며 범죄 수사를 직업으로 삼지도 않았지만 포가 40세로 요절하지 않고 좀 더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했다면 다른 어떤 모습을 보여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의 에밀 가보리오가 발표한 세계 최초의 장편 탐정소설 <르루즈 사건>(1866)에 처음 등장한 르코크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뒤 비천한 일을 하며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인 타바레에게서 범죄자가 되거나 아니면 범죄를 막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후 프랑스 경찰 범죄수사국에 투신해 과거 어둡던 시절에 익혔던 여러 가지 수법을 이용해 범죄를 수사하게 됩니다.

'르콕 탐정' 표지

반면 같은 프랑스 작가인 모리스 르블랑이 창조한 인물 아르센 뤼팽은 르코크와 비슷한 결손 가정 출신이지만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뤼팽의 아버지는 격투기의 달인으로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그 기법을 가르치는 방랑자였고 어머니인 앙리에뜨는 자상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고 하네요. 그러나 뤼팽이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사기죄로 갇혀 있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뤼팽이 범죄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이때 범죄자의 가족인 어머니가 사회로부터 받은 냉대에 대한 반발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편, 셜록 홈즈는 우연찮은 일로 자신의 재능을 심각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가 왓슨에게 회고한 바에 따르면, 홈즈는 대학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가 놀라운 관찰력과 추리력을 발휘해 그의 아버지의 신상에 대해 정확하게 짚어 냅니다. 그리고는 잠시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란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사실과 거짓을 간파하는 게 자네에긴 식은 죽 먹기로군. 그게 바로 자네가 갈 길일세’라는 찬사를 듣지요(<글로리아 스콧 호>에서). 자신의 능력을 한낱 취미 정도로만 생각해 오던 홈즈는 추리력을 이용하는 것이 어엿한 직업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이 때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홈즈는 이들 중 누구일까요? '글로리아 스콧'의 삽화(시드니 패짓의 그림)

20세기 초반까지 등장한 천재적인 탐정은 대체로 이렇게 타고 난 재능을 직업으로 살린 인물들이었지만, 가스등에서 전기등으로 변하고 마차가 자동차로 변하는 시대가 되면서 차츰 판도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즉 적어도 두뇌 면에서 천재라기보다는 보통 사람 수준의 주인공들이 나타난 것이죠.

특히 귀족 등 신분 격차가 유럽보다 덜하던 미국에 등장한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웬만큼 지성을 갖추었지만 성격이 원만하다고 하긴 어려운 인물들이었습니다. 대쉴 해밋은 워낙 과작(寡作)을 한 터라 등장인물의 사생활이나 과거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뒤를 이은 레이먼드 챈들러나 로스 맥도널드의 주인공은 비교적 자세한 경력이 알려져 있습니다. 챈들러가 창조한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는 원래 지방검사국 소속의 경찰이었지만 상관의 부당한 명령에 복종할 수 없어 사표를 던지고 한결 자유스러운, 하지만 권력은 없는사립탐정이 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로스 맥도널드가 창조한 사립탐정 루 아처 역시 말로우와 비슷한 경력을 지녔습니다. 아처 역시 지방검사국 소속 경찰이었으나, 경찰들의 부패를 참지 못해 사직하고 탐정의 길로 나섭니다.

루 아처는 '루 하퍼'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영화에 등장했습니다(폴 뉴먼이 연기).

20세기 중반의 미국 작가들은 경찰에 대해 뭔가 불신감을 품고 있었는지 이런 패턴은 자주 반복되었지만, 70년대 이후 약간씩 변화가 생겨났는데, 훗날 등장한 여성 하드보일드 탐정들의 경력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지요. 현대 미국 여성 하드보일드 계의 양대 작가인 수 그래프튼과 새러 패러츠키의 인물들이 대표적. 그래프튼의 주인공 킨지 밀혼은 20세에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일선에 배치되었지만 규칙에 얽매이는 생활이 싫어 퇴직하고 탐정 면허를 얻어 개업합니다. 한편 패러츠키의 주인공 V.I. 워쇼스키는 원래 변호사였으며 역시 변호사인 동료와 결혼했지만 자신의 이상(理想)과 어긋나는 법조계와 여자의 자립심을 무시하는 남편에게서 모두 결별하고 사립탐정이라는 직업을 택했습니다.

한편 기구한 사연을 가진 인물을 꼽으라면 영국의 여성 작가 P.D.제임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사립탐정 코델리아 그레이를 선정할 수 있을 겁이다. 태어난 후 불과 한 시간 만에 어머니를 잃는 것으로 시작된 힘든 어린 시절을 거친 그레이는 고생 끝에 케임브리지 대학 진학을 눈앞에 두었으나 방랑 생활을 하던 아버지의 요청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세계 각국을 유랑하지요. 아버지가 로마에서 사망한 후 런던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직 경찰 버니 프라이드의 탐정 사무소에 들어가 탐정에게서 필요한 기술을 배워 공동 경영자가 되지만 그것도 잠시 뿐. 프라이드가 불치의 암으로 고민하다가 자살하는 바람에 그레이는 불과 22세의 나이로 사립탐정사무소의 소장이 됩니다.

드라마로 제작된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주인공이 탐정이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반드시 첫 작품에서 밝혀지는 것만은 아닙니다독자들이 주인공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될 만큼 인기가 생겨야 작가도 다음 작품에서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하지요. 왕년의 홈즈가 그렇게 소개되었지요. 사실 대부분의 작가는 등장인물, 특히 주인공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배경을 만들어 놓습니다. 다만 너무 한꺼번에 드러내 놓기에는 어색하기도 하니까 조금씩 조금씩 꺼내놓는 겁니다(물론 코난 도일은 그렇게 계획적으로 쓴 것 같진 않습니다만). 최근 들어서는 위에 열거한 특별한 사연들이 너무 가식적으로 보이는지 어찌 보면 너무 평범한 계기가 소개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H.R.F.키팅의 주인공인 인도 봄베이 경찰의 고테이 경감은 어린시절부터 경찰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인물이고, 자넷 에바노비치의 여주인공 스테파니 플럼은 직장에서 해고된 후 말 그대로 돈은 필요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용의자를 소환하는 일을 하게 되는, 어쩌면 이웃의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상황이 등장합니다. 추리소설은 시리즈가 많은 만큼 탐정들이 어떻게 일을 시작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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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7.28 2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탐정이 된 사연..., 저도 연구중입니다. 극적일수록 더 좋겠지만 제가 전에 KBS <이야기 발전소>에 들고 갔던 작품은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의문사를 목격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경찰이 된 소년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지만 이러한 이야기라면 다음 편을 만들기가 어렵겠지요.


이제는 자리를 잡았을까

길리스피 서장 : "당신 같은 흑인에게 버질이란 이름은 멋진 이름은 터무니없군.
                    자네가 온 곳에서는 자네를 뭐라고 부르나?"
버질 팁스 : "팁스 씨라고 부릅니다."
- <밤의 열기 속에서>(1926) / 존 볼

서구의 고전 미스터리, 20세기 초반 작품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백인 -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른바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앵글로색슨 계열의 신교도 백인) - 들입니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유럽이나 미국에선 어쩔 수 없었던(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차례 세계 전쟁이 벌어지고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가 생긴 미국에서는 WASP 이외의 소수민족 주인공들의 입지가 차츰 커져가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경찰 조직에 소속된 인물이 등장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적으로 소수민족의 지위가 향상되자 사립탐정들도 나타났습니다.
그 자신 이탈리아 이민의 후예인 작가 에드 맥베인은 <87분서> 시리즈에서 재치 있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시리즈의 주요 인물로 이탈리아계 스티브 카렐라 형사를 내세우긴 했습니다만, 이 시리즈는 독특하게도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질 않습니다. 그의 동료 형사들인 유태계의 마이어 마이어, 흑인 아서 브라운, 백인 코튼 호우즈 등 다양한 인물들이 각각의 작품 속에서 사건 해결의 주역으로 나서는 것이지요. 여러 계층 출신의 다양한 인종 형사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실력을 발휘하며 활약한 덕택으로 시리즈에 주인공의 이름 대신 <87분서>라는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집단적인 주인공 체제는 독자에게 어필하기 어려운 탓인지 맥베인 이후 뚜렷한 성공작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에드 맥베인

동양계를 제외하면 미국에서의 소수민족은 흑인, 인디언, 유태인 등이 있는데, 이들 세 민족은 1970년대 이후부터 추리소설 속에서 주인공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흑인 주인공을 살펴볼까요? 선구자로는 에드 레이시가 <흔들리는 방>(1959)에서 등장시킨 투생 무어(Toussaint "Touie" Marcus Moore)가 있지만, 존 볼이 <밤의 열기 속에서>의 주인공으로 탄생시킨 흑인 형사 버질 팁스와 어네스트 타이디먼의 <샤프트(Shaft)>에 등장하는 사립탐정 존 샤프트(John Shaft)가 본격적인 흑인 주인공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영화 '밤의 열기 속에서'에 등장한 버질 팁스(왼쪽, 시드니 포이티어가 연기).

패서디나 경찰국 소속의 팁스는 점잖고 논리적인 두뇌를 갖춘 살인사건 전문형사인데 반해 할렘 출신의 사립탐정 샤프트는 유능하지만 ‘검은 마이크 해머’라고 불릴 만큼 매우 거친 사나이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이 두 형사는 책으로도 호평 받았지만 같은 제목으로 제작된 영화가 모두 성공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에드 레이시, 존 볼, 어네스트 타이디먼은 공교롭게도 모두 백인이로군요.

존 샤프트(왼쪽, 리처드 라운드트리가 연기) - 영화 '샤프트'에서

물론 흑인 주인공을 내세운 흑인 추리작가도 있습니다. 강도죄로 교도소에 복역하던 중 대쉴 해밋의 작품을 읽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체스터 하임즈는 코핀 에드 존슨과 그레이브 디거 존스, 흔히 관(棺)짜는 에드와 무덤 파는 존스라는 살벌한 별명으로 불리는 콤비 형사가 등장하는 시리즈를 발표, 흑인 추리작가의 원조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90년대 들어서는 유태계-흑인 혼혈 작가 월터 모즐리가 2차대전 직후를 배경으로 흑인 사립탐정 이지 롤린즈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발표했는데 클린턴 대통령 자신이 애독자라고 선언할 만큼 대중적인 면과 작품성 양쪽에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흑인 추리작가협회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월터 모즐리

한편 애당초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던 인디언은 오히려 흑인보다 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바호족이 살던 오클라호마에서 태어난 토니 힐러맨은 나바호 혈통을 이어받은 경찰 조 리프혼 서장과 짐 치 경사가 등장하는 시리즈를 발표하고 있는데,  작품에는 한때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았던 그의 인디언 민속과 신앙에 대한 지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토니 힐러맨

이외의 인디언 혈통을 가진 주인공으로는 빌 밸린저의 <스파이> 시리즈 주인공 CIA 요원 조아퀸 호크스(Joaquin Hawks), 브라이언 가필드의 작품에 등장하는 나바호족 출신 고속도로 순찰대원 샘 워치맨(Sam Watchma) 등이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거의 같은 백인으로 보이지만 WASP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유태인 탐정도 그다지 흔하진 않습니다. 이들도 70년대 들어와서야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로저 L.사이먼(Roger L. Simon)이 쓴 『사람의 덫(The Big Fix)』(1973)의 주인공 모우지즈 와인(Moses Wine)이 그 대표적 인물이죠. 60년대 학생운동을 하다가 좌절한 히피 출신 이혼남 와인은 대마초를 상용한다고 공언한 첫 번째 인물이며 현실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어 젊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작가 사이먼은 현실감을 더하기 위해 와인의 사립탐정 면허 신청서를 만들어 책에 실었는데,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이름이 면허증에 쓰여 있어 눈길을 끕니다.

로저 L.사이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은 스크린에서만큼은 차츰 허물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즘은 거의 도식화되다시피 한 ‘정치적 공정함(Politically Correct)’ 때문에 백인들만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영화들은 거의 없으며, 흔히 버디 무비라는 불리는 두 명의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액션 영화에는 대체로 백인과 흑인 콤비가 등장합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다 보니 소설을 영화화 할 때도 원작에는 백인이었던 인물이 흑인으로 둔갑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잘 알려진 영화 중에서 예를 들자면, 존 그리셤의 <펠리컨 브리프>에서 주인공 다비 쇼를 돕는 신문기자 그레이 그랜섬이 있습니다. 그는 소설 속에서 운동 부족으로 다리가 허옇다는 농담을 듣는 백인이었지만 영화에서는 미남 흑인배우 덴젤 워싱턴이 그 역을 맡았습니다. 덴젤 워싱턴은 <본 콜렉터>에서 제프리 디버가 창조한 링컨 라임 역도 맡은 바 있는데, 링컨 라임 역시 원작에서는 백인입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떠오르는 태양>의 주인공 존 스미스는 영화에서 이름도 흑인 티가 나는 웹 스미스로 바뀌었고 흑인 배우 웨슬리 스나입스가 연기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백인에서 흑인으로의 변환은 ‘정치적 공정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시의 흑인 스타 배우를 투입해 흥행 실적을 올리려는 의도가 훨씬 크다고 여겨집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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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무언 2011.07.19 13: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양인은 반대로 백인화되기도 하지요. 21의 경우 실화의 주인공은 동양인이었지만 영화에선(...)

  2. 평시민 2011.07.19 19: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리소설 작가들은 인종 문제에 관한 편견은 적은 것 같아 좋습니다. "중국인은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지 마라"라는 말을 남긴 녹스도 있지만요.

  3. 그럼에도 2017.01.01 15: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흑인과 히스패닉, 유대계야 이제 서구권에서 흔하게 받아들여지지만
    과연 동양계는 언제쯤 벽이 허물어질까요?

    동양계는 21세기 오늘날까지도 그 비중이나 캐릭터성 면에서 결코 주류가 아닌
    작고 뚱뚱한, 대머리, 변태, 별종, 수다쟁이 혹은 재미없는, 눈치없는, 이상한 오컬트 문화에 심취했거나 무술을 하는,
    재능은 있되 비호감인 너드거나 호감은 가되 유약한 인물들이 대부분이죠.

    이건 마치 한국이나 일본 작품에서 다른 유색인종들을 메인스트림에 껴주지 않는 것과도 마찬가지긴 합니다만.
    아마 얼마나 걸릴지가 아니라 동양인에 대한 편견과 제약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들도 때로는 휴식이 필요하다

추리소설을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휴가중인 형사는 절대 무리하지 않습니다.
- 밥 이든
- <중국 앵무새>(1926) / 얼 데어 비거스

 

어느덧 여름입니다.

일년 사계절 중에서도 유독 휴가철이라고 불리는 계절이기도 하죠. 나머지 계절이 휴가를 즐기기에 모자랄 것은 없겠지만 뜨거운 한여름보다는 못하기 때문일까요.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데다가 설날이나 추석 등의 명절 연휴가 있어서 보통 직장인들의 여름휴가는 일주일에서 열흘 남짓 정도지만 외국, 즉 서구의 여름휴가는 훨씬 긴 편입니다. 요즘은 별로 쓰이지 않는 것 같은 바캉스라는 단어도 원래 제법 긴, 즉 최소한 한 달 이상의 휴가를 의미한다는데, 서구 쪽은 이렇게 기간도 긴데다가 타국으로의 여행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덕택에 유명한 휴양지나 이국적인 장소를 무대로 한 추리소설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그런 덕분에 명탐정들은 휴가지에서마저 골치 아픈 일과 마주치곤 했지요. 요즘은 무선인터넷이나 스마트폰 같은 문명의 이기(혹은 족쇄일지도?) 탓에 휴가를 떠나서도 일한다는 분도 적지 않은 것 같은데, 잠시만이라도 범죄로부터 떨어져 쉬고 싶어 하는 명탐정들에게도 그런 비슷한 일은 예외 없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인공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임에 틀림없겠지요. 사건이 없으면 명탐정도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요.

과거를 돌이켜보면 휴가는 작품 속의 탐정들보다 추리소설 초창기의 작가들에게 더 필요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의 작품이 성공하면 많은 돈을 벌어 인생의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요즘 작가들과는 달리 별로 수입이 좋지 않았던 옛날 작가들은 고생만 하다가 요절한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19세기의 프랑스 작가 에밀 가보리오는 신문에 매일 연재를 했는데, 하루치 연재 분량이 거의 짧은 단편 분량과 맞먹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부담이 만만치 않았고, 결국 과로로 인해 40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약’이란 말은 언제나 허망하긴 합니다만, 만약 그가 쉬엄쉬엄 글을 쓰면서 오랜 기간 동안 글을 쓸 수 있었더라면 영국보다 프랑스에서 추리소설 선풍이 먼저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에밀 가보리오

탐정들 중 가장 긴 휴가를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셜록 홈즈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작가인 코난 도일은 명탐정 홈즈 시리즈를 쓰는데 지친 나머지 홈즈가 범죄의 화신 모리어티 교수와 스위스의 폭포에서 격투를 벌이다가 함께 떨어져 죽은 것으로 끝나는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홈즈 팬들의 반발이 너무 크자 도일은 생각을 바꿔 홈즈가 운 좋게 폭포에 빠지지 않고 혼자 살아남은 것으로 설정했으며, 공백 기간인 1891년부터 1894년까지 티벳과 페르시아, 이집트 등을 여행한 뒤 유럽을 거쳐 런던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하여 후속 작품과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3년 동안의 공백은 나중 홈즈의 모방 작품을 쓴 작가들에 의해 갖가지 이야기, 즉 티벳에서 설인(雪人)의 정체를 밝혔다거나 유럽에서는 여배우 아이린 애들러와 눈이 맞아 아들을 하나 두게 되었다는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들이 문자 그대로 쏟아져 나오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다양한 홈즈 배우들

애거서 크리스티는 여행을 무척 즐긴 데다 고고학자 맥스 맬로윈과 결혼한 덕택에 젊은 시절에는 1년의 1/3 정도를 탐사․발굴 여행으로 보냈습니다. 크리스티는 이러한 잦은 여행을 바탕으로 하여  <오리엔트 특급 살인>(1934), <메소포타미아의 살인>(1936), <나일 강의 죽음>(1937), <백주(白晝)의 악마>(1941)등 휴양지나 해외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작품을 여러 편 썼습니다. 이들 작품들의 기본적 특징을 들자면 대부분 엘큐울 푸아로가 등장하는데, 크리스티의 또 다른 주인공 미스 마플은 워낙 마을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국, 그것도 중동까지 보내기는 어려웠겠지요. 그렇지만 미스 마플은 <카리브 해의 죽음>에서 서인도 제도의 카리브 해에서 휴가를 즐기다가 누군가의 죽음과 마주칩니다. 사건 수사로 돈을 버는 사람도 아닌데 참, 복도 없지요.

이집트를 관광중인 애거서 크리스티(오른쪽)

영국의 여성작가 조이스 포터가 만들어 낸 괴짜 주인공 윌프레드 도버 경감은 주인공 치곤 무능한(?) 편이지만, 다른 명탐정들과 마찬가지로 사건을 피해가지 못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도버 4 – 절단>(1967)에서 런던 경찰청의 도버 경감은 여름휴가를 떠나는 도중 하필이면 아내가 자살하는 사람을 목격하는 바람에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사건을 맡게 됩니다. 무척 심통을 부리던 도버 경감은 그의 직속 부하도 휴가를 떠나다가 현장에 끌려오다시피 나타난 것을 보고 위안을 삼으면서 심술궂은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죠. 

역시 영국의 여성작가 크리스티애너 브랜드의 <위험한 여로>(1955)는 제목에 걸맞게 아름답고 환상적인 카프리 섬이라는 이탈리아 근처의 여행지에서 관광객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수께끼 같은 살인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주인공 코크릴 경감은 휴가를 즐기러 나왔다가 연속적인 살인사건과 마주칩니다. 말레이에서 태어난 브랜드는 인도를 거쳐 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영국에 왔는데, 제법 긴 동남아시아에서의 생활 덕택인지 이국적인 배경을 묘사하는데 훌륭한 솜씨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티애너 브랜드의 '위험한 여로'

휴양지를 무대로 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주로 유럽 작품들 쪽이 많고, 미국 작품들 쪽이 적습니다. 그나마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미국의 하드보일드 탐정들이 휴가를 즐기는 장면은 본 기억이 없네요. 동료들이 많고 정기적인 수입이 있는 경찰들은 교대로 휴가를 즐길 수 있지만 혼자서 사무실을 꾸려 나가야 하는 사립탐정들은 그럴 정도의 여유가 있을 정도로 형편이 좋지는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존 D.맥도널드의 작품에 등장하는 탐정 트래비스 맥기는 ‘버스티드 플러쉬(Busted Flush)’라고 하는 길이 16미터의 요트를 거주지로 삼으면서 바람 부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휴가날짜를 잡을 필요도 없습니다. 보통 때 플로리다의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맥기는 악당들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바다와 맞서야 할 때도 있지만 재산을 모으는데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에 첨단 문명 바깥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트래비스 맥기의 배 '버스티드 플러쉬'

그런데 90년대 이후에는 변화가 온 것 같기도 합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신성한 관계>나 마이클 코넬리의 <트렁크 뮤직>을 보면, 주인공들이 사건을 해결한 뒤 휴양지에서 마음을 식히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더군요. 요즘 작가들은 탐정(혹은 형사)에게도 복지혜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멀리 휴가를 갈 틈이 없으면 생전 가보지 못한 곳을 배경으로 한 흥미진진한 작품을 읽으며 기분을 전환하는 것이 어떠신지요. 좋은 책 몇 권으로 한여름의 더운 날씨가 계속될 때에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피서 방법으로서도 으뜸이 아닐까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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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7.09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휴가지에서의 살인 사건 역시 추리물에서 아주 중요한 배경이 될 수 있지요, 개인적으로 그러한 작품으로 크리스티의 <나일강의 죽음>과 <백주의 악마>를 좋아합니다. 저도 책을 펴면 곧장 바다 냄새가 날 정도로 생생히 휴양지 풍경을 묘사한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하나를 잘 하면 다른 것도?

자, 이제부터 원고지를 꺼내 추리소설을 쓰기로 하자.
그러나 어디까지나 여러 번 충고한 대로 한낱 부업으로서 말이다.
- <부업으로서의 추리소설>(1989) / 노 원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직업은 매우 다양합니다. 에드거 앨런 포가 창조한 최초의 탐정 뒤팽은 ‘몰락한 귀족 집안의 자제’라고 완곡하게 돌려 설명하고 있지만 지금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고학력 실업자’이겠지요. 이후 등장한 주인공들 중에는 탐정, 경찰 등 범죄를 다루는 것이 직업인 인물들도 있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처럼 살던 마을을 좀처럼 떠나지 않는 할머니라던가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같은 성직자 등 다양한 직업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인물들을 만들어낸 작가들은 원래 무슨 직업을 가졌을까요?
아마도 어릴 때부터 작가를 지망한 문학 지망생들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소름끼치는 작품 <사이코>를 쓴 로버트 블록은 그런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미국의 고전적 공포물 작가 H.P.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아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17살 때 펄프 잡지에 첫 작품이 실리며 일찌감치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성년이 된 후에는 광고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가진 채 작품을 써 오다가 <사이코>의 성공에 힘입어 전업 작가가 되었습니다.

로버트 블록(1917-1994)

이렇게 블록처럼 차근차근 작가의 입지를 다져 나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반드시 이렇게 순탄한 길을 밟아온 작가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반드시 고생한 것은 아닐지라도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 못지않게 원래 직업도 다양했습니다.
우선 범죄와 늘 마주치는 법조계 인사가 추리문학계로 여럿 투신했습니다. 이들 법조계 인사들 중에는 변호사가 가장 많은데, 최고참을 꼽으면 <월장석>(1868)의 작가인 영국의 윌키 콜린즈이며, 그 뒤를 ‘엉클 애브너’ 시리즈의 멜빌 데이비슨 포스트가 이어갑니다. 변호사 페리 메이슨 시리즈의 작가 얼 스탠리 가드너는 그가 소설 대신 변호사 업무에 전념했다면 미국 역사에 남을 뛰어난 변호사가 되었으리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유능했으며 현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중 하나인 존 그리셤 역시 변호사 출신입니다. 또한 하버드 출신의 스콧 터로우나 한때 지방검사국에 근무했던 리처드 노스 패터슨 등은 현직 변호사로 활동 중인 작가들입니다.

윌키 콜린스 (1824-1889)

한편 직접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이나 탐정 출신 작가도 있습니다. 하드보일드 작가 대쉴 해미트는 유명한 핑커튼 탐정사에 14년 동안 근무했으며, 해미트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 <해미트>의 작가 조 고어즈도 3년간 로스앤젤레스의 탐정 사무소에서 재직했습니다. 경찰 출신 작가로는 영국의 존 웨인라이트와 미국의 조셉 웜보가 대표적인데(웨인라이트는 22년, 웜보는 14년 근무), 이들은 천재나 영웅 대신 인간적인 경찰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형사 크리스티 오패러를 창조한 여성 작가 도로시 유낙도 경찰 근무 경력이 10년 이상이라고 하네요.

경찰 출신 작가 조셉 웜보(1937-)

제임스 본드, 007라는 불멸의 스파이를 창조한 이언 플레밍은 2차대전 중 해군 정보부대에서 복무했기 때문에 첩보임무가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플레밍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007 시리즈를 쓰기 시작했는데, 60년대에 3백만 달러 이상의 거액을 벌어 들였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입니다.

전설적인 탐정 셜록 홈즈를 만들어낸 코난 도일이 의사였다는 것은 웬만한 추리소설 팬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도일 이후의 의사 출신 작가로는 영국의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이 있습니다. 의사이자 박물학자이며 토지 측량원 등 다양한 재능을 가진 그는 건강이 나빠져 의사 생활을 그만둔 후 홈즈의 인기에 영향을 받아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주인공으로 검시관인 손다이크 박사를 내세운 그는 <노래하는 백골>에서 범인이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을 처음부터 보여준 후 “범인이 누구인가”보다 “범인이 어떻게 잡히는가”에 중점을 두어 도치서술형 추리소설(일반적으로 도서 미스터리라고 불리죠)을 창안했으며, 또한 과학수사를 강조했습니다. 의사 출신 작가로는 하버드 의대 출신의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로빈 쿡, 마이클 파머, 일본의 가이도 다케루 등이 있는데, 그들은 의학적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추리소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가이도 다케루 (1961-)

여성 검시관이라는 흔치 않은 직업의 케이 스카페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퍼트리샤 콘웰의 약력을 보면 작가가 되기 전 검시실에서 근무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검시관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고 사무직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녀가 실제로 메스를 잡진 않았을지라도 검시실의 분위기를 충분히 묘사할 수 있을 만큼 자세히 파악하고 있음엔 틀림없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비디오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며 엄청난 양의 영화를 본 다음 영화감독의 싹을 키웠던 것으로 유명한데, 제임스 해들리 체이스는 백과사전 세일즈맨, 서점 직원으로 일하다가 하드보일드에 흥미를 느껴 많은 양의 펄프 잡지들을 탐독한 후 6주 만에 탈고한 <미스 블랜디쉬의 난>으로 순식간에 성공의 길을 걸었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폭력 묘사로 논란도 일었지만 삽시간에 5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체이스를 서점 직원에서 작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여배우 밀레느 드몽조를 앞에 두고 집필중(?)인 체이스. 글이 써질까요?

트릭이 추리소설의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면 트릭을 생명으로 삼는 마술사라면 추리소설을 잘 쓸 수 있지 않을까요? 1938년 <Death from a Top Hat>으로 데뷔한 클레이튼 로슨은 마술사인 그레이트 멀리니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는데, 작가 자신도 그레이트 멀리니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오른 마술사였으며 마술에 관한 책을 집필할 정도로 조예가 깊었습니다. 일본에도 마술사 출신 작가가 있습니다.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 작가인 아와사카 츠마오(泡坂妻夫)는 일본 마술계의 큰 상인 이시다 덴가이(石田天海)상을 받았으며, 문장(紋章)화가로도 활동하고 있어 어떤 것이 본업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군요.
직업이라고 하기는 좀 뭣하지만 범죄자 출신 작가도 있습니다. 이들은 예전에 소개한 바 있기 때문에 일화 한 토막을 대신 소개하겠습니다. <Jackrabbit Parole>(1986)을 복역 중에 집필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캐나다 출신의 스티븐 리드가 1999년 6월 브리티시 콜롬비아에서 은행 강도 현행범으로 체포되었습니다. 16살 때부터 1백 40여 차례 이상의 은행 강도 행각을 벌이며 1천5백만 달러를 훔친 리드는 항상 스톱워치를 들고 1분 30초 내에 달아났기 때문에 ‘스톱워치 갱’이라는 별명이 붙은 강도단의 두목이었습니다. 1980년 30세로 체포된 리드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자 87년 출감 후 대학에서 문예창작 강의를 하고 영화나 TV에도 출연하며 다채로운 활동을 벌여왔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다시 범행을 저지르다가 잡힌 것입니다.

2008년의 스티븐 리드

과거의 솜씨나 경력은 화려했을지 몰라도 약 20년 만에 다시 은행을 털기에는 시대에 너무 뒤떨어진 인물이 된 것 같습니다. 복역한지 18년 만인 2008년에 석방되었다고 합니다만… 역시 경험을 살려 책을 한 권 더 쓰는 것이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훨씬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군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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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7.02 10: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들의 전직이 그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게 마련입니다. 체스터 하임즈 역시 전과자 작가로서 뉴욕 뒷골목이나 할렘을 생생하게 묘사하기로 유명하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마벨의 사랑>도 보고 싶습니다.


누구도 알기 어려운 비밀

세상은 거짓말장이로 가득 차 있다.
- 에버라드 도미니
<The Great Impersonation>(1920) 에드워드 필립스 오펜하임

 

추리작가들은 죽음, 수수께끼, 음모, 시기, 질투…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소재를 중점적으로 다루어야 하지만, 그들의 평상시 생활은 여느 사람들과 그리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론 작품이 엄청나게 많이 팔려 돈이 많아진다면 생활수준은 당연히 높아지겠지요. 또 요즘은 독자가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된 터라 해외의 스타급 작가들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매스컴의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작가의 신간 안내나 인터뷰 기사가 문화면에 실리는 것 못지않게 작가가 사기를 당했다든가 표절로 제소됐다거나 혹은 바람을 피우다가 이혼소송을 당했다는 기사도 실리곤 하죠. 게다가 오래 전에 사망한 작가들마저도 요즘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수십 년, 길게는 1백 년 전의 숨겨져 있던 이야기마저 연구가들이 파헤쳐 전기(傳記)로 발간하기 때문인데요, 한마디로 유명세를 치르는 셈이지요. 하지만 아직까지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아서 관심 있는 사람들을 궁금하게 만드는 사례가 몇 가지 남아 있습니다.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등 엘러리 퀸이 등장하는 걸작 시리즈를 남긴 엘러리 퀸이 사촌 형제간인 맨프레드 B.리와 프레드릭 더네이의 합작 필명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또 다른 필명인 바너비 로스라는 필명으로 <Y의 비극>등 드루리 레인 시리즈 4부작도 발표했지요. 퀸이라는 이름이 유명해지면서 컬럼비아 대학이 강연 요청을 하자, 둘 중 누가 갈 것인지 동전을 던져 결정하기로 해서 결국은 리가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퀸의 정체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던 터라 리는 고심 끝에 검정 마스크를 쓰고 강연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퀸이 대중 앞에 나타나야 할 때면 항상 리가 검정 마스크를 쓴 채로 나섰으며, 바너비 로스 역으로는 더네이가 검정 마스크를 썼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강연회에 나타나 논쟁을 벌이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정체를 숨긴 터라 1936년 <퍼블리셔스 위클리>를 통해 이들의 신분이 드러나기 전까지 퀸과 로스가 같은 작가였다는 것을  독자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비밀은 거의 밝혀졌지요, 그러나 그들의 작업 분담에 대해서는 아직도 추측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유족이나 친지들을 통해 테마와 플롯, 등장인물 등 기본적인 틀은 더네이가, 그 기본에 살을 붙이고 세밀한 점을 보완하는 일은 리가 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할 뿐입니다.

복면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미스터리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는 자신의 수많은 추리소설보다 훨씬 기묘한 사건에 휘말립니다.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자신의 실종 사건이었습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1926)을 발표한 지 얼마 후인 1926년 12월, 당시 35세의 크리스티는 저녁식사 후 드라이브를 나간다고 말한 후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그녀의 소지품이 남아있던 차가 호수 근처의 풀밭에서 발견되었고, 그것은 자살했거나 혹은 사고를 당했을 것 같은 정황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열흘 동안 전문가와 경찰, 보도진은 다양한 가설을 세웠으며, 수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근처를 철저한 수색했지만 그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크리스티는 멀리 떨어진 호텔에서 가명으로 숙박하고 있었던 것이 발견되었는데, 실종 다음날인 토요일부터 묵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크리스티는 어머니의 사망, 남편의 외도 등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가 그것이 어느 순간 폭발하면서 기억상실증을 일으킨 것으로 설명되었지만, 그 ‘실종’은 마치 계획이라도 짠 듯이 물 흐르듯 차질 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대중들을 납득시킬 수는 없었고 ‘인기를 얻기 위해서’, ‘외도한 남편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진짜 기억상실증’ 등 가지가지 가설이 나왔지만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사건의 당사자인 크리스티는 자서전에서 첫 번째 결혼의 실패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했지만 실종 사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을 정도로 그 사건의 기억을 잊고 싶어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실종된 애거서 크리스티 수색에 나선 사람들

에드거 앨런 포는 그의 기발한 작품 세계와 맞먹을 만큼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는데, 그의 죽음 역시 의문 투성이였습니다. 음주와 아편 흡입, 또 조울증 등으로 혼란한 정신상태였던 포우는 40세였던 1849년 9월 리치먼드에서 열차에 탄 뒤 닷새 후인 볼티모어의 한 술집 앞에서 인사불성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병원으로 실려 갔으나 사흘 만에 사망했으며 사망 원인은 알코올 중독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병원 임상기록을 검토한 결과 포우는 알코올 중독이 아니라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에 의해 광견병에 감염되어 사망했다는 설이 제기되었습니다. 임상기록에 따르면 포우는 입원 당일 정신착란증세를 보이다가 다음날 호전되었고 다시 악화되어 사망했는데 이 증세는 광견병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물론 확정된 진실이 아닌 가설에 불과합니다. 그의 사망 원인은 아직 불분명한 만큼 더욱 자세한 분석 방법이 나오게 되면 혹시 다른 이유가 발견될지도 모릅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에 포가 죽음을 맞이하던 시기를 다룬 작품이 무척 많은데, 번역된 작품으로는 매튜 펄의 <포의 그림자>, 조엘 로즈의 <가장 검은 새> 등이 있습니다.

포의 묘비

포가 죽은 지 약 150여년이 지난 1996년 12월, 미국의 하드보일드 추리작가 유진 이지가 시카고 시내의 빌딩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방탄조끼를 입은 채 목에는 올가미가 씌워져 있었는데, 그 밧줄은 빌딩 14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 금고에 연결되어 있었고, 금고 옆에는 권총 한 자루, 그의 주머니에는 브래스 너클(brass knuckle:격투할 때 손에 끼우는 쇳조각)과 현금 약 5백 달러가 들어 있었습니다. 또 사무실 문은 잠겨 있어서 밀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찰은 그의 죽음이 타살이라고 단정할 만한 증거도 없어 일단 자살로 판단했습니다. 한동안 슬럼프였던 그가 새 작품의 출간을 앞두고 정신적인 압박을 받은 끝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설명에서부터 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선전행위라는 추론까지 나왔지만, 하지만 이지의 가족과 친지들은 그가 10대의 두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으며 이미 생활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큼 자리를 잡은 작가였던 만큼 책을 더 팔기 위해 자살할 리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신작 집필을 위해 취재해 왔던 민간무장그룹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어 가족들을 안전한 호텔로 옮기고 방탄복과 권총을 지닌 채 홀로 사무실에서 지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타살로 보기에도 미심쩍은 점이 너무 많습니다.

유진 이지 Eugene Izzi(1953-1996)

육군 특수부대 출신의 이지는 운동으로 단련된 180cm, 100kg의 거구인데, 대낮에 사무실에서 격투한 흔적도 없이 그에게 올가미를 씌워 창 밖으로 내던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시카고 경찰은 밀실살인을 자주 다룬 작가 에드워드 호크에게 자문을 구하기까지 했지만 뾰족한 결론이 나오질 않았다고 하네요.

어쩌면 추리소설가들의 비밀은 추리소설의 수수께끼보다 훨씬 풀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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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6.23 2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지의 죽음을 모델로 한 작품을 써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2. 시무언 2011.06.27 00: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게 코난 도일이 크리스티의 실종때 수사를 도왔다는군요. 그외의 사건도 해결한적이 있고


몸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
 
나는 오늘 밤 내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만큼 사람을 죽였다.
난 그놈들을 쏠 때마다 즐거웠고, 마음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 마이크 해머
<One Lonely Night>(1951) 미키 스필레인

 

‘범죄자와 대결을 벌이려면 그들 이상의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에게 없으면 안 되는 조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뛰어난 머리일 수도 있고, 혹은 육체적인 힘, 아니면 무기를 사용하는 솜씨일 수도 있지요.

추리소설의 초창기이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까지 탐정과 범인과의 대결 양상은 머리싸움이었습니다. 당시 작품 속의 범인은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고심 끝에 사건을 저지르기 때문에 그보다 뛰어난 두뇌를 지닌 주인공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사건이 미궁에 빠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어쨌든 주인공은 범인의 계략을 모두 알아채고 궁지로 몰아놓아 체포하지만 이 과정에서 육체적인 격투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범인은 사람을 죽인 흉악범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당할 수 없는 상대에게는 순응할 줄 아는 지능적인 인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 묻혀 살던 샌님 같은 오귀스트 뒤팽은  진짜 흉악한 범죄자와 홀로 마주쳤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궁금증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모르그 거리의 살인>에서 선원 한 사람을 만날 때 권총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 조심성은 뛰어나도 맨손으로 범죄자를 상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긴 하네요. 반면 런던의 명탐정 셜록 홈즈는 추리력은 물론이거니와 권투를 포함한 격투기에 능하고 사격에도 일가견이 있어 행동하는 사립탐정의 이미지를 독자들의 머릿속에 심어 놓았습니다. 홈즈가 인기를 얻자 20세기 초반 ‘홈즈의 라이벌들’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주인공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대체로 뛰어난 두뇌를 과시하느라 육체적 능력을 써먹을 틈은 별로 없었습니다. 브라운 신부처럼 플랑보라는 경호원 겸 조수를 함께 등장시켜 이런 약점을 보완하는 정도에 그쳤을 뿐 홈즈와 같이 주먹다짐을 피하지 않는 행동파 탐정은 한참 후에나 나타납니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펄프 잡지를 통해 등장한 활극에 가까운 추리소설의 주인공들은  범죄라는 것이 일개 가정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현상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머리만으로 살아남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대쉴 해미트가 창조한 두 명의 주인공, 컨티넨틀 오프와 샘 스페이드를 가장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겠군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수수께끼 풀이형 소설의 탐정들 - 크리스티의 엘큐울 푸아로와 미스 마플, 반 다인의 파일로 밴스, 엘러리 퀸의 엘러리 퀸 - 은 여전히 안락의자에 앉아 놀라운 추리력으로 기묘한 사건들을 풀어나가고 있는 동안 하드보일드 소설 속 탐정은 거리의 건달이나 폭력조직의 두목과 직접 마주쳐야만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완력 좋고 사격 솜씨도 뛰어난 탐정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무턱대고 총을 휘두를 수는 없습니다. 탐정이건 경찰이건 상대가 위협을 가할 경우에만 사격할 수 있을 뿐, 먼저 총부터 쏘고 들이닥친다면 그건 범죄자나 마찬가지 이죠. 탐정은 경찰과는 달리 체포권이 없기 때문에 말로 해결할 수 있으면 가장 좋고,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 약간의 완력을 쓰고, 총은 어쩔 수 없을 경우에만 쓰기 위해 가지고 다닌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해미트의 <붉은 수확>에 등장하는 컨티넨틀 오프는 포이즌빌의 악한들을 혼자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힘 대신 책략을 이용했습니다.

해미트의 '붉은 수확'

그러나 2차대전 이후 등장한 마이크 해머의 행동은 이전까지의 하드보일드 탐정들이 온화하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미키 스필레인의 <심판은 내가 한다>(1947)에서 처음 등장한 그는 독자에게 엄청난 충격, 그리고 한편으로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했습니다. 그를 ‘터프 가이’라 표현하면 오히려 부드럽게 여겨질 정도인 과격한 인물이지요. 45구경 군용 콜트 권총을 애용하는 그는 악당에 대해서는 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손으로 처리해 버린다는 자신만의 규칙이 있습니다.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는 시대착오적인 폭력성향 탓에 그가 사건을 해결하려 나서면 오히려 시체가 쌓이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맙니다.

TV 시리즈 '마이크 해머'에서 주연을 맡았던 스테이시 키치. 원작과는 달리 매우 점잖았습니다.

탐정의 무기는 권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앤드류 복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전과 27범의 무허가 탐정 버크는 총 뿐만 아니라 격투기에도 능하며 다양한 무기들도 사용합니다. 경찰의 수사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며 필요하다면 범인을 죽이는 것도 불사하는 버크는 표창이나 손톱에 독을 바른 칼날을 붙여놓고 싸움에 임할 정도입니다.


로렌스 블록의 매트 스커더 시리즈에 등장하는 미키 발루는 평범하지만 살벌한 무기를 사용하는 인물입니다. 사립탐정인 스커더의 친구이며 도살장 주인인 미키의 무기는 다름 아닌 커다란 식칼로, 총알이 난무하는 뉴욕의 뒷골목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단히 치명적인 무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패트릭 켄지 & 안젤라 제나로’ 시리즈에서도 이에 뒤지지 않는 인물이 등장하죠. 두 사람의 친구이자 “인간 흉기”라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닌 부바 로고프스키는 불법 무기상이라 총을 달라고 하면 미사일은 필요없냐고 물어보는 사람입니다. 또 판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거침없이 사용하지요. 절대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영화 'Gone, Baby Gone'에서 부바 역을 맡은 배우 Slaine.

남성만 무기를 갖고 다니는 것은 아니죠. 강력범죄가 넘치는 미국에서는 여성 탐정들도 총을 다루고 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사라 패러츠키의 여성 사립탐정 V.I.워쇼스키는 시카고 대학 로스쿨을 거친 변호사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경찰이었던 아버지에게 배운 사격과 격투기를 배워 웬만한 남자들은 쉽사리 제압합니다. 역시 여류작가인 수 그래프튼의 작품에 등장하는 킨지 밀혼은 전직 경찰이었기 때문에 사격이나 호신술 등 경찰이 하는 것은 다 할 줄 아는 여성 사립탐정이지요. 물론 자넷 이바노비치의 주인공 스테파니 플럼 같은 예외도 있습니다. 회사에서 해고된 후 돈이 필요해 용의자 소환 업무를 맡게 된 플럼은 총이라곤 생전 건드려 본 적도 없지만 진지하게 사격 연습을 시작합니다.

시대가 변했고 작가들도 변했고 독자들도 변했어도, 추리력이건 총이건 주먹이건 어떤 수단으로든 범인을 잡아낸다는 추리소설의 스타일은 근본적으로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난 이국의 작품을 읽더라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요란한 수단을 쓰지 않는 평범한 인물들이 기억에 남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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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5.26 2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탐정에게 제일가는 무기는 역시 뇌라고 해야겠지만 각종 무기를 사용하여 악당들을 해치우는 탐정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많은 장비를 이용하여 악당을 잡는 탐정은 배트맨이라고 하면 좋을까요? 배트맨도 일종의 탐정이니까요.


평생 감사해야만 할 분 
 
사실 어머니에게 있어서 형사의 일은 놀이처럼 쉬운 일이다.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알아내는 따위의 일은 어머니에게 있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 형사 데이빗
<어머니는 잘 아신다 (Mom Knows Best)>(1952) 제임스 야페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5월은 다른 한편으로 가정의 달이라고도 합니다. 아마도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등 가정과 관계된 기념일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성탄절이나 석가탄신일 등의 기념일이 1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데 비해 부모를 기리는 날의 유래는 의외로 짧습니다. 어머니날의 발상지는 미국으로, 필라델피아의 한 소녀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지에 카네이션 꽃다발을 갖다놓은 것에서 시작된 것이 점점 풍습이 될 정도로 널리 퍼진 후 1914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 때 정식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 어머니날이 제정되었으며, 아버지날이 따로 없었던 터라 1973년부터는 어버이날로 바뀌었습니다.

좀 늦었지만, 세상의 모든 어머님께

그럼 추리소설에서 어머니의 위치는 어느 정도일까요? 자주 등장하진 않더라도 어머니는 어머니죠. 매우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사건을 해결하는 작품으로는 제임스 야페가 발표한 <브롱스의 엄마(Mom in Bronx)>시리즈를 우선 꼽을 수 있겠습니다. 뉴욕 시경 살인과의 형사인 데이빗은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아내와 함께 어머니를 찾아가 함께 식사를 하면서 골치 아픈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그럼 사건의 전모를 들은 어머니는 몇 가지 뜻 모를 질문을 던진 후 아들의 무능력에 대해 한탄하면서 순식간에 진상을 파악해내고 맙니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인텔리’ 며느리 셜리는 이런저런 의문을 제기하지만 어머니는 점잖게 면박을 주면서 그에 대한 답을 내어 놓곤 하죠.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인 ‘엄마’는 세상 사람들의 심리는 모두 똑같다는 견해 아래 이웃과 친척, 주변 가게 점원 등을 예로 들면서 범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엄마' 시리즈 단편집

미국의 여성작가 크레이그 라이스의 <스위트홈 살인사건(Home Sweet Homicide)>(1944)도 어머니라는 인물을 생각할 때 쉽게 떠오르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데이나, 에이프릴, 아치라고 하는 열네 살, 열두 살, 열 살짜리 삼남매입니다. 이들의 어머니 매리언은 신문기자였던 남편이 일찍 죽은 후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해 어렵게 아이들을 키워 왔습니다. 어느날 이웃집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이들 삼남매는 어린 마음에 추리작가인 어머니가 이 사건을 해결한다면 유명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일에 뛰어드는데, 마침 인간성 좋은 미남인 빌 스미스 형사가 사건을 맡자 삼남매는 한술 더 떠 스미스 형사를 어머니 매리언과 맺어줄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경찰의 수사와 아이들의 참견이 뒤얽히면서 사건은 점입가경이 되어 가는데, 과연 삼남매의 희망대로 일이 이루어질까요?

1946년 1월 타임지 표지에 등장한 크레이그 라이스

하지만 작가 크레이그 라이스의 생애는 따뜻하고 유쾌한 이 작품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일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라이스의 부모는 육아에 관심이 없어서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친척에게 맡겨졌습니다. 게다가 이 친척 역시 방랑벽이 있었기 때문에 라이스는 정규교육을 받지도 못하며 성장했습니다. 성인이 된 그녀는 1920년대부터 문필 활동을 시작해 작가로서는 성공했습니다만  세 차례나 결혼에 실패했으며 자살까지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1957년 로스앤젤레스의 아파트에서 4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시신으로 발견되는데 사인(死因)은 불명이며 자살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스위트홈 살인사건>에서 볼 수 있는 사랑 넘치는 가족의 모습은 그녀가 끝내 이룰 수 없었던 꿈이었을까요.

최근에 읽은 작품 중에서 기억나는 ‘어머니’로는 스웨덴 작가 리사 마르클룬드의 <폭파범>에 등장하는 여성 기자 안니카 뱅트슨이 있군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취재에 열심인 그녀는 신문사에서 자신을 무시하려는 동료(선배도 있고 부하도 있습니다)들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두 아이의 엄마로 돌아오지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피곤해 죽을 지경이지만 안타깝게도 남편은 가사에 별로 도움을 주지 않아서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곤 합니다.

리자 마르클룬드

친어머니는 아니라도 그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하에 무서울 것 없고 거침없는 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도 감히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오직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부모를 일찍 잃은 그를 키워준 유모 빅트와르입니다. 뤼팽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빅트와르는 가끔 그의 부탁으로 사건 속에 뛰어들어 정보를 수집해 줄 때도 있으며, 뤼팽의 딸인 주느비에브까지 키우고 보살펴 주면서 뤼팽에게 바른 길로 돌아서라고 항상 종용하지만 그것만큼은 뤼팽에게 먹혀들지 않아서 안타깝게 여기지요.

20세기에 등장한 탐정 중 살벌한 이력을 가진 사람 중 하나는 버크(Burke)로만 불리는 뉴욕의 무허가 탐정일 것입니다. 미국 작가 앤드류 복스(Andrew Vachss)가 창조한 그는 부모를 모르는 고아로 ‘버크’가 이름인지 성인지도 불분명하며, 전과 27범이라는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범죄자가 우글거리는 뉴욕 뒷골목을 무대로 살아가는 버크의 동료나 친구도 다양한데, 그 중 중국요리점을 경영하는 ‘마마 웡’이라는 여인은 버크의 어머니 같은 노릇을 합니다. 버크가 음식을 먹으러 가면 기어코 좋은 음식을 차려 먹이는 어머니와 같은 모습을 보이며, 한편으로는 버크의 은행 역할을 해 주기도 합니다.

앤드류 복스

지독한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었던 뤼팽이나 버크가 그래도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갖고 인간적인 모습을 잃지 않았던 것도 어머니와 비슷한 따뜻한 역할을 해 준 인물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독신인 여성 탐정 역시 모성본능만큼은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라 패러츠키의 여성 탐정 V.I.워쇼스키는 원래 변호사였으나, 역시 변호사였던 남편과 이혼하고 사립탐정이 되었지요. 그녀는 “두 명의 자녀들을 데리고 평온한 중산층 생활을 누리는 것”이라는 소박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 시리즈가 계속 나오고 있는 중인만큼 언젠가는 하드보일드 '어머니' 사립탐정이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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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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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5.14 20: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5월에 아주 좋은 주제입니다. 저는 역시 제임스 야페의 '어머니' 시리즈가 가장 마음에 들더군요. 칭기즈칸의 어머니처럼 엄한 편이 좋은지, 아니면 미드 <캐슬>에 나오는 캐슬의 어머니처럼 우스울 정도로 철부지인 어머니가 좋은지 모르겠지만 어디에서나 어머니 캐릭터는 강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지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존재
 
"우리 집 고양이는 폭군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 레이먼드 챈들러, 1948년 제임스 샌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양이는 어쩐지 가까이하기 어려운 짐승 같습니다. 고양이가 사람과 함께 산 것은 고대 이집트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적어도 5천년 이상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으면서도 사람보다는 고양이 쪽에서 먼저 거리를 두곤 하죠(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하는 개하고는 많이 다르더군요).

또 서양에서 검은 고양이는 마녀의 사자이며 악(惡)이나 죽음을 의미할 정도로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제임스 본드의 숙적인 스펙터의 우두머리 블로펠드가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장면은 그런 시각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금기는 무척 뿌리 깊어 요즘도 서양 사람들은 검은 고양이가 앞을 가로질러 가면 매우 불쾌하게 여기곤 합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같지요?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도둑을 잡는데 고양이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답니다. 다만 개처럼 냄새를 쫓아가는 과학적 방식이 아니라 주술적 매개체로 썼지요. 한국문화상징사전(동아출판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경기도 지방에서는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고양이를 잡아다가 시루 속에 넣고 상여줄로 시루를 감고 불을 때면서 도둑의 눈이 멀거나 손이 오그라들게 해 달라는 주문을 외운다. 이렇게 해서 고양이를 쪄 죽이면 도둑도 주문대로 눈이 멀거나 손이 오그라든다는 것이다. 전북 지방에서는 고양이를 항아리에 넣고 불을 때면서 주문을 외우다가 항아리 뚜껑을 열면 고양이가 도둑의 집으로 가서 죽고, 그때 도둑도 따라서 죽는다고 한다. 또 평안북도 지방에서는 고양이를 장례에 썼던 삼줄로 묶어 3일간 지붕 위에서 햇볕을 쬐게 한 후 삼거리에서 고양이를 쪄 죽이면 역시 도둑도 함께 죽는다는 것이다. 

…음, 끔찍한 방법이지만 실제로 효력이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추리소설보다는 공포소설로 보아야 할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일 겁니다. 아내를 살해한 죄목으로 다음날 사형 당할 예정인 한 사나이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에서 ‘플루토’라는 이름의 검은 고양이는 단지 좀 똘똘해 보일 뿐 아무런 나쁜 짓을 벌이지는 않습니다. 기껏해야 보통 고양이가 하는 흔한 행동, 즉 할퀴는 정도에 그치지요. 그러나 이 검은 고양이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아내를 죽이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주인공마저 파멸의 늪으로 몰아넣고 맙니다. 19세기에 발표한 이런 구닥다리(?) 작품이 여전히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여기 등장하는 고양이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괴기영화에 나오는 고양이 가죽을 뒤집어 쓴 괴물은 더더욱 아닌,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검은 고양이'(알퐁스 르그로의 그림)

현대 추리소설에서 고양이들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존재로서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사립 탐정들이 푼돈을 벌기 위해 종종 고양이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사건 의뢰가 없어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탐정들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지요. 엘러리 퀸은 단편 <일곱 마리 검은 고양이의 모험>에서 독자에게 희한한 수수께끼를 하나 제시합니다. 중풍으로 기동을 못하는, 그리고 고양이를 몹시 싫어하는 할머니가 왜 매주 검은 고양이를 한 마리씩 사는 것일까요? 이 수수께끼의 뒤에는 놀라운 진상이 숨어 있는데, 아직 작품을 읽지 않은 분을 위해서 여기서 결말을 밝힐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양이의 복수극 같은 괴기스러운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주로 집에서 집필활동을 하는 작가들에게 고양이는 무서운 존재라기보다 애완동물로서 무척 사랑 받는 것 같습니다. 하드보일드의 대가 레이먼드 챈들러는 타키(Taki)라는 이름의 검정색 페르시아 고양이를 20년 가까이 애지중지 키웠으며 문인들과의 편지에서도 소식을 써 보내기도 했습니다.

챈들러와 그의 고양이 타키

이렇게 고양이들이 작가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급기야는 고양이가 당당히 주인공으로 등장해 사건을 해결하는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여성작가 릴리언 잭슨 브라운은 ‘코코(Coco)’라는 이름의 입맛 까다로운 수컷 샴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 연작을 쓰고 있습니다. 제목이 <The Cat Who…>로 이어지는 시리즈에 등장하는 코코는 글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고양이치고는 터무니없이 머리가 좋습니다. 하지만 고양이가 혼자서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기 때문에 코코의 주인인 신문기자 짐 클라인이 보조적인 역할을 합니다.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코코가 스트레스를 받는 기미를 보이자 클라인은 ‘얌얌’이라는 이름의 암놈 샴 고양이를 구해 함께 키우게 됩니다. 작가 브라운은 과거에 생일 선물로 받은 고양이에 코코라는 이름을 붙여 애지중지하면서 키웠는데, 어느 날 10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슬픔에 잠긴 브라운 여사는 고양이가 등장하는 단편을 쓰기 시작했고, 좋은 반응을 얻자 1966년 첫 장편인 <The Cat Who Could Read Backwards>를 발표한 후 코코가 등장하는 시리즈를 2007년까지 발표했습니다(릴리언 잭슨 브라운은 1913년생입니다). 시리즈 30번째 장편이 될 뻔했던 <The Cat Who Smelled Smoke>는 출간이 취소되었다는데 이유는 모르겠군요.

릴리언 잭슨 브라운의 'The Cat Who Could Read Backwards'

그 뒤를 이었다고 하긴 뭣하지만, 역시 미국의 여성 작가 리타 메이 브라운은 고양이 머피 부인(고양이의 이름입니다!)가 사건을 해결하는 시리즈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작품 내용보다 더 독특한 것은 이 시리즈를 쓰는 것이 작가 브라운이 키우는 고양이 스니키 파이 브라운이라는 것이지요. 작가 브라운은 자신이 공동 저자라고 주장합니다만 판단은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리타 메이 브라운과 스니키 파이 브라운

한편 일본 작가 아카가와 지로는 ‘홈즈’라는 이름의 암컷 얼룩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고양이 홈즈의 주인인 가타야마 요시타로는 강력 사건을 다루는 형사임에도 불구하고 피(血)만 보면 정신을 잃을 정도의 현기증을 일으켜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고양이 홈즈의 도움으로 사건을 해결하며 위기를 넘깁니다. 유머 미스터리를 표방한 홈즈 시리즈는 첫 작품 1978년 <얼룩고양이 홈즈의 추리>가 발표된 이래 장편 33권, 단편집 14권이라는 대하(大河) 시리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독일 작가 아키프 피린치의 <펠리데(Felidae)>는 인간의 사건이 아닌 고양이의 사건을 고양이가 해결한다는 독특한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여기 등장하는 고양이들은 백과사전을 찾아보고 심지어 컴퓨터까지 다루지만, 사람들의 눈에 뜨이게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작가가 탐정 노릇을 하는 고양이에 대해서 호의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경찰소설의 선구자였던 에드 맥베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탐정소설을 가지고 온갖 괴상한 짓들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듣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맞아요. 고양이가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하겠습니다. 금붕어는 어떨까요? 금붕어 앞에 범죄 무기로 의심되는 것을 들자 금붕어가 물거품을 뻐끔뻐끔 내 뿜는다… 맙소사.”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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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5.05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고양이가 개보다 자유분방하니 고양이가 탐정 노릇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동물 탐정 이야기도 재미있는데 고양이 외에 과연 어떤 동물이 탐정 노릇을 하면 어울릴까요.

  2. 2011.05.09 1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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