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창살 뒤에서 무엇을 했을까

자본가들은 돈을 모으고 교도소로 가지요.
작가들은 교도소로 간 다음 돈을 법니다.
-고든 크로스
     - <화형법정> (1937) 존 딕슨 카
 

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사설 보안경비업체가 사원을 모집하면서 박사급의 고급인력뿐만 아니라 강절도범 등 전과자를 모집한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첨단 컴퓨터 범죄를 막기 위해 해커(hacker)를 키우자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나오곤 하죠. 이건 바로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이론에 따른다는 것인데,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흥미로운 일이긴 합니다.

소설가 사이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써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범죄를 다루는 추리소설의 경우 범죄자가 훨씬 실감나는 작품을 쓸 수 있을까요? ‘아니오’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에 등장한 추리소설가 중 교도소 신세를 겪은 작가는 극소수에 불과하겠고 또한 그들이 모두 성공한 작가가 되었을 리는 없겠지만, 사실 근대 추리소설의 뿌리는 어느 탈옥수의 회고록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 범죄자였으며 나중에는 프랑스 수사국의 책임자가 되는 프랑수아 외젠 비도크(François Eugène Vidocq)는 웬만한 소설의 주인공보다 훨씬 극적인 인생을 살아간 인물이었습니다. 빵집 아들로 태어난 비도크는 프랑스 대혁명 시절에 입대, 5년 동안 군인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정식 제대특명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도망병이 되어 체포당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 감방에 있던 위조지폐범 두 명이 그들의 죄를 비도크에게 뒤집어 씌우기까지 했지요. 억울하게 중형을 선고받은 비도크는 그로부터 10년 동안 옥살이와 탈옥을 거듭하며 반평생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도크의 '회고록'

그는 이 기간 동안 프랑스의 거의 모든 교도소에 수감되는 경험을 했고 한편으로는 범죄자의 생리와 수법을 파악하게 되었으며 또한 변장의 명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평생을 숨어서 사느니 차라리 경찰의 정보원이 되기로 결심한 그는 1년 9개월의 옥살이를 자청해 교도소 안에서 스파이 노릇을 했으며, 형기를 마친 다음에는 정식으로 경찰 전속 탐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의 범죄가 극심하게 증가하자 비도크는 개심한 전과자들을 모아 특별 팀인 범죄수사국을 창설하는데, 이들은 대단한 활약을 벌여 창설 8년 만에 파리의 범죄율을 40%나 떨어뜨렸습니다. 이러한 눈부신 공적으로 비도크는 루이 18세에 의해 위조지폐 사범이라는 무고한 죄에 대해 완전한 사면을 받았습니다.

비도크는 50대에 접어들어 갑자기 책의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4권으로 이루어진 그의 저서 <회고록>은 자신의 경험을 위주로 썼다고는 해도 과장된 부분이 많아 허풍이라고 혹평받기도 하며 심지어는 창작물이라는 말까지 듣지만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우, 영국의 윌키 콜린즈, 프랑스의 에밀 가보리오 등 근대 추리소설의 기초를 세운 작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현대 추리소설의 시조로 인정받는 포우는 공교롭게도 음주 난동으로 필라델피아의 교도소에 잠시 구금되어 있을 때 이 책을 읽었다고 그의 편지에서 밝히고 있네요.

1896년 2월 미국에서는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idney Porter)라는 은행 출납계원이 854달러를 횡령한 혐의로 체포당합니다. 그는 병든 아내를 이유로 보석절차를 받아 잠시 집으로 돌아왔으나 재판이 있기 전 온두라스로 도망쳤다가 아내가 위독해지자 돌아와서 5년형을 선고받습니다. 은행원이 되기 전 잠깐 기자 생활도 했던 그는 남아도는 시간을 이용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때가 미국 최고의 단편작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1899년 아직 복역 중이던 포터는 오 헨리(O. Henry)라는 필명으로 잡지에 단편을 발표했으며, 모범수가 되어 3년 만에 형기를 마친 그는 <마지막 잎새>, <크리스마스 선물>등 수많은 주옥같은 단편을 남겼습니다.

단편소설의 거장 O.헨리

오 헨리를 추리소설가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지만, 셜록 홈즈의 패러디인 ‘샘록 존스’ 시리즈를 쓰는가 하면 꽤 많은 수의 작품이 범죄와 연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되살아난 개심(改心)>(1909)에 등장하는 금고털이 지미 밸런타인은 교도소에서 만난 인물이 모델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오 헨리의 범죄 혐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은행 감사 때 장부의 숫자가 맞지 않자 말단 출납계 직원이었던 오 헨리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웠다는 설도 있으며, 그가 경영하고 있던 잡지 <롤링 스톤(Rolling Stone)>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횡령한 것이 사실이라는 설도 있는데 정작 본인은 죽을 때까지 그 일에 대해서 함구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미국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기반을 확립한 대쉴 해미트는 1950년대 좌익 소탕 열풍에 휘말리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고수했던 그는 반(反) 파시스트가 되어 1930년대에 미국 공산당에 입당한 경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훗날 냉전시대에 접어들어 매카시 의원의 반미(反美) 조사위원회에서 자신의 활동이나 동료를 밝히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법정 모독죄로 6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몰타의 매>(1929)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은 좌익이라는 낙인이 찍혀 도서관에서 금서로 규정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를 빨갱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심지 굳은 인물, 대쉴 해미트


한편 해미트의 작품은 한 전과자가 추리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28년 열아홉 살의 흑인 청년 체스터 하임즈는 무장 강도 혐의로 7년형을 언도받습니다. 그는 이듬해인 1929년 펄프 잡지 <블랙 마스크>에 연재된 해미트의 <붉은 수확>을 읽은 후 영감을 얻어 교도소에서 소설 습작을 시작했습니다. 1945년 첫 장편 <If He Hollers Let Him Go>를 발표한 그는 1953년 절친한 흑인작가인 제임스 볼드윈, 리처드 라이트 등이 살고 있던 프랑스로 떠나 84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유럽에 머무르면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체스터 하임즈

그가 창조해 낸 할렘의 형사 ‘코핀(Coffin: 관) 에드 존슨’과 ‘그레이브 디거(Gravedigger) 존스’ 콤비 - 어렸을 때 어느 책에서 '관 짜는 에드와 무덤 파는 존스'라고 소개한 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 는 강렬한 이미지로 미국보다 유럽의 추리소설 애독자들에게 크게 어필했는데, 그들의 인물 묘사는 작가의 생생한 경험 덕분이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블랙 달리아>와 <L.A.컨피덴셜>이 소개된 제임스 엘로이 역시 젊은 시절의 일부를 교도소에서 보냈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열 살 때 어머니가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은 그는 청소년기에 사유지 침입, 알코올 중독, 폭행 등으로 전과자가 되고 말았지요. 20대 후반에 문학에 눈을 뜬 그는 술을 끊고 골프 캐디 일자리를 얻은 다음 글을 쓰기 시작해 <Brown's Requiem>(1981)으로 데뷔합니다. 그는 2차 대전 이후의 미국의 어두운 면을 묘사한 소설들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엘로이


이렇게 한때의 어려움을 겪고 입신한 이들과는 반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다가 철창신세를 진 작가도 없지 않습니다. 영국 보수당 부의장․런던시장 후보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제프리 아처 경(卿)의 사례는 가장 유명합니다. 단거리 육상선수로 올림픽에도 출전한 바 있으며 1969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하원의원에 당선된 화려한 경력의 아처는 그로부터 5년 후 투자에 실패, 파산 위기에 몰리면서 의원직을 사퇴했으나 당시의 경험을 살린 소설 <한 푼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를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했고, 제3작 <케인과 아벨>은 미국에서 TV 미니시리즈로 제작, 방영되면서 거물급 베스트셀러 작가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한편 정치활동을 재개해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총애를 받으면서 한때 보수당 당수 물망에까지 올랐습니다.

파란만장한 경력의 제프리 아처. 롤러코스터 인생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1987년 그가 매춘부와 같이 잤다는 기사가 타블로이드 일간지에 실리면서 정치적인 몰락의 구멍에 빠지게 되지요. 그는 이 기사를 보도한 데일리 스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 친구 테드 프란시스의 알리바이 입증에 힘입어 승소해 배상금 50만 파운드를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2년 후 친구인 프란시스가 아처의 부탁으로 거짓증언을 했다고 폭로, 결국 99년 11월 런던 시장 선거전에서 중도 하차하고 출당 처분을 받는 한편 위증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습니다. 법원은 그에게 적용된 5건의 기소내용 가운데 위증 등 4건의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 최장 4년의 징역형과 함께 소송비용 17만5천 파운드를 12개월 내에 납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특히 형기 가운데 2년 이상은 반드시 실형을 살아야 한다는 판결을 내려 결국 철창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복역 중에도<교도소 일기(A Prison Diary)>를 출간했으며 2003년 7월 영국 남부 교도소에서 2년 만에 가석방되어 런던의 자택으로 귀가, 불사조 같다는 세간의 평가를 증명하려는 듯 계속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석방 이후의 작품으로 <배반의 자화상>(2005)이 번역되어 있군요.

옥살이를 한 작가들 중 성공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교도소 생활이 즐거웠다고 회상하는 작가는 아무도 없었습니다(지난해 교도소를 견학할 기회가 있었는데, 어지간하면 신세지고 싶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성공한 추리작가가 되는 길은 직접 범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남의 책을 많이 읽고 머릿속에서만 구상하는 편이 현명한 일이겠지요. 세상에는 하도 별난 범죄가 많고 또 추리소설도 엄청나게 많으니 활자를 통한 간접경험만 해도 모자랄 게 없을 것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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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야기꾼 2011.02.18 11: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 추리소설가 중에도 교도소에 다녀 온 양반이 있지요. 황세연 작가.
    불특정 다수에 대한 살인, 명의 도용, 좌중을 썰렁하게 하는 농담 남발 혐의로....는 아니고요,
    군복무를 교도소에서 했다고 합니다. ㅎㅎ

  2. 카메라이언 2011.02.19 03: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야야... 엄청나네요. 어렸을 때엔 여러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을 보며 '교도소(수녀원, 절)는 밥도 주고 하니까 어쩌면 글 쓰기에 이상적인 곳일지도 몰라.'라는 로망(?)을 꿈꾸기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떻게 저딴 생각을 했었는지. (;;;) 왠지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나면서, 대작가님들의 어마어마한 이야기에 입을 쩌억 벌리고 갑니다. 그리고, 오 헨리 님의 샘록 존스 시리즈 너무 궁금한데요. <--설록수 준비하고 있다 보니 호기심이 마구마구!

    • 평시민 2011.02.19 21: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 찾아보기는 힘들어졌지만 도서관에서라도 <꼭두각시 인형>을 검색해 보십시오, 오 헨리의 추리소설 단편집이고 샘록 존스 시리즈도 세 편 실려 있습니다. 패러디물이라 그런지 억지 개그물이긴 하지만요.

    • 카메라이언 2011.02.21 01: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혹시나 아는 덕후가 갖고 있을까 싶어 물었더니, 이 덕후도 없더군요. (;;;) 도서관에 가야겠어요. 국립도서관인가, 어디에 한 권 있다는데... 과연 볼 수 있으려나. ㄱㅡ;;;;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원작 그림이 가진 열정과 자연스러움- 즉 elan(열의) -은 흉내 낼 방법이 없지.
모사품은 아무리 원작과 닮았더라도 둘 사이에는 큰 심리적 차이가 있어.
모사품에는 진지함이 결여되고 너무 완벽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 흔적이 남아 있다네.
   
- 파일로 밴스
<카나리아 살인사건> (1927) S.S. 밴 다인
 
인터넷 이용은 일상생활이 되어버린지 이미 오래로군요. 그러면서 개인이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이 많아지자 예전에는 드물었던 일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표절 문제입니다. 여러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들을 '복사 및 짜깁기'해서 학교 숙제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하네요. 이렇게 타인의 노력을 어려움 없이 가로채는 비양심적인 표절 행위는 학술 논문이나 음악, 방송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문학 부문에서도 꽤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심지어 일간지 신춘문예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을 정도니까요. 대신 인터넷의 엄청난 전파력 덕분에 빨리 들통나기도 합니다만

특히 추리소설은 작품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비슷한 트릭을 사용하기만 해도 오해를 살 여지가 있습니다. 작가 입장에서는 기발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다른 작품에 나온 비슷한 아이디어가 사용된 것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비슷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라고 해서 모조리 표절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추리소설이 표절로 의심받는 경우는 트릭이 비슷할 때, 혹은 상황이나 구성이 비슷할 때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1926)은 범인의 의외성만으로 평가하자면 역대 최고 작품 중 하나인데, 놀랍게도 그보다 9년 전 거의 비슷한 트릭을 사용한 작품이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스웨덴 해군 장교이자 소설가인 새뮤얼 아우구스트 두제가 1917년 발표한 <스미르노 박사의 일기>가 바로 그것인데, 일기 형식으로 서술된 이 작품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크리스티의 ‘세계적 명성’ 밑에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스미르노 박사의 일기


한편 엘러리 퀸은 크리스티의 작품 제목 때문에 집필하던 작품을 중단한 적도 있습니다. 제목의 표절을 피했다고나 할까요. 퀸은 서구의 전래동요 ‘마더 구즈(Mother Goose)’중에서 ‘10명의 인디언’을 제재로 삼아 <The Indian Club Mystery>라는 제목으로 집필 중이었는데, 크리스티가 먼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발표하는 바람에 도중에서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각각 죽이고 싶은 상대가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상대를 바꿔 범행을 저지른다’는 아이디어는 누구든 한번쯤 상상해 볼 수 있었는지 여러 작가가 사용했습니다. <태양은 가득히>로 유명한 여성 작가 패트리셔 하이스미스가 데뷔작 <낯선 승객>(1950)에서 사용한 이 아이디어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던 니콜라스 블레이크의 <A Penknife in My Heart>(1958)에서 다시 나왔습니다. 비슷한 소재라는 것을 알게 된 블레이크는 하이스미스에게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등장인물의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훗날 프레드릭 브라운의 <교환 살인>(1962), 로렌스 블록의 단편 <핸드볼 코트에서 만난 이방인>(이 작품은 <낯선 승객>과 제목마저 흡사하군요)등이 나왔지만 이미 보편화된 소재라 별다른 시비가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TV 드라마 <CSI>에서도 이런 에피소드를 다루기도 했지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낯선 승객'


일본 추리소설계의 선구자인 에도가와 란포도 몇 차례 표절 시비에 휩쓸린 일이 있습니다. 그의 데뷔작이 된 단편 <2전 동화>(1923)의 원고를 읽은 잡지사 편집진은 ‘초보 작가치고는 너무 뛰어난 작품’이라 외국 작품의 아이디어를 베낀 것이 아닌지 잠시 의심했다고 합니다. 물론 소재가 일본어 암호였기 때문에 순수 창작물임을 인정받고 오히려 잡지사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행운을 얻게 되었지요. 그러나 란포의 이름이 유명해진 뒤, 그의 단편 <화승총(火繩銃)>이 멜빌 데이비슨 포스트의 밀실을 다룬 단편 <둠도프 사건>(1911)과 유사한 트릭을 사용한 것이 알려지며 약간 표절 시비가 일었습니다. 그러나 란포의 해명에 의하면 <화승총>은 대학 재학 중이던 1915년 잡지에 투고했으나 채택되지 않은 사실상 그의 처녀작으로, 아이디어 자체는 그의 창작이 아니라 미국의 사건 실화집에서 얻은 것임을 밝히며 표절 시비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런 모양의 화승총이었을까요?


트릭의 유사성은 판정이 매우 미묘해서 심사 기준에 의해 희비가 엇갈리기도 합니다. 경마를 소재로 한 <짙은 갈색 파스텔(焦茶色のパステル)>로 28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받은 오카지마 후타리는 1년 전 다른 작품으로 응모해 최종심사까지 올라갔다가 아쉽게 탈락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트릭의 유사성 때문이었지요. 1년 전의 심사위원들은 ‘마권(馬券)을 이용해 훔친 말의 몸값을 받으려 한다’는 트릭이 여류 작가 나츠키 시즈코의 단편 <5천만 엔짜리 남자>에서 쓰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독창성이 결여되었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7년 후 유사한 트릭을 사용한 아베 사토루의 <사라진 항적(消された航跡)>은 요코미조 세이시 상 당선작으로 결정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확실히 줄을 잘 서야 세상살이도 편해지겠군요.

트릭의 유사성만큼은 아니지만 상황이나 플롯이 비슷한 경우도 드물지는 않은 편입니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나이가 자신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동료나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증인들을 찾아 나서지만 증인들은 사라지거나 살해되며 차츰 집행 날짜가 다가온다…

음, 언젠가 읽은 것 같다고 기억하실 분도 계실 것 같군요. 이것은 서스펜스의 거장 윌리엄 아이리쉬의 대표작 <환상의 여인>과 조너던 라티머의 <처형 6일 전> 등 두 작품의 골격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줄거리만 소개해 놓으면 뭔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시겠죠. 아무래도 훨씬 유명한 아이리쉬의 작품을 라티머가 베껴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라티머의 작품이 무려 7년이나 앞서 발표한 것입니다. 물론 이 두 작품은 소재만 비슷할 뿐 내용에서는 큰 차이가 있고 해결 방식도 각각 독창적이라서 읽어보신다면 표절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으실 겁니다.

영화 '환상의 여인' 포스터


표절로 보기 애매한 상황이 또 있군요. 자기 작품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이죠. 코난 도일은 1924년 단편 <세 사람의 가리데브>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30여 년 전에 발표했던 <붉은 머리 클럽>(1891)과 <증권 중개인>(1893)을 섞어 놓은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렇지만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작품을 변형해서 쓴 작품이기 때문에 홈즈 연구자들의 불만을 제외하고는 별 논란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 힘이 떨어진 도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최근(이라 해도 이미 꽤 되었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표절 이야기로는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의 트릭 만화 <김전일>에서 사용된 것이 기억나는군요. 사실 이건 표절이라기보다 트릭을 그냥 갖다 썼기 때문에 주제에서 핀트가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시마다 소지는 이 사건에 대해 특별히 소송을 걸거나 하는 일의 행동을 하진 않았지만, “유례가 없는 트릭이라고 자부하고 있어, 트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영상화등의 2차사용은 지금까지 거절해 왔다. 때문에 트릭을 유용하는 텔레비전 기획은 절대로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김전일>시리즈의 이 에피소드는 원작만화로는 볼 수 있지만(트릭에 관해서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TV 드라마로 제작된 것은 비디오 등에서 빠지게 되어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점성술 살인사건>은 워낙 잘 알려진 작품이었기 때문에 만화나 드라마 등에서 시마다 소지의 허락을 당연히 받은 것으로 알고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믿기 어려운 소문도 전해지긴 합니다.

'점성술 살인사건' 도용을 다룬 기사


표절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는 모든 작품에 대해 다 알면 좋겠지만, 전 세계의 추리소설을 모두 읽기는커녕 구할 수도 없을 겁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요즘 나온 새로운 트릭이라고 해 봐야 사실은 과거의 트릭을 약간 뒤틀어 변형한 정도에 불과한 만큼 ‘기발한 아이디어를 이야기의 핵심으로 삼지 않는 것이 좋다’는 영국 작가 H.R.F.키팅의 충고는 아이디어를 짜 내느라 고심하는 작가가 머릿속에 새겨두어야 할 만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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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2.10 0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표절 시비 하니 절대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제가 2008년 KBS <이야기 발전소>에 한 화가가 죽은 뒤 유령이 되어 다른 화가의 몸에 빙의하여 그림을 계속 그려 나간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지어서 나갔고 좋은 점수를 낸 적이 있는데 그 날 시청자 게시판에 그 이야기가 MBC의 모 드라마와 내용이 거의 같다는 표절 의혹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드라마에 대하여 전혀 몰랐거든요. 다행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아찔한 경험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그 드라마를 보고 표절하여 이야기를 냈다면 그건 제 양심이 아니라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2. 카메라이언 2011.02.14 05: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헉 매회 요즘 제가 읽으려고 하거나, 읽었거나, 읽다 중단한 책들 이야기가 나와서 뜨끔뜨끔 한다니깐요. 'ㅂ'... ...;;;;; 이번엔 환상의 여인에서 흠칫. 아는 언니께 읽겠다고 4 개월 전에 얻어놓고 여전히 책장에 꽂아놓은 채 방치. (;;;) 이번에야 말로 홈스 패스티쉬 모음집 베이커가의 살인 끝까지 읽고 나면 읽어야겠어요. 'ㅂ';;; 카나리아 살인사건도 옆에 쌓아놓고 모른 척했는데 어서 읽어야겠 ;;;

    그나저나 베이커 가의 살인 책 보고 한 분께서 저도 써보라고 해서 함 써보려고요. ㅋㅋㅋ 잼날 것 같아요. ]서울에 사는 셜록홈스가 아니라 설록수(설록차??) 이야기라도? 탐정 설록수가 설록차 창립자를 살인자로 몰릴 위기에서 구해줘서 새로 나오는 생수 이름을 설록수로 지었다는 결론? ㅋㅋㅋ<--기발한 아이디어를 이야기의 핵심으로 삼지 말라는 이야기 방금 전에 보고서 이런다 ;;;;; 표절시비나 조심해야 ;;;;; 쿨럭 ;;;

  3. 허니문 차일드 2011.02.15 1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얼마 전 문학동네에서 펴낸 <편집된 죽음>이란 책을 봤습니다. 오래된 친구가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콩쿠르상 수상이 결정되던 날 복수의 수레바퀴가 돌아간다는... (이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그 복수의 방법이 바로 표절시비입니다. 그 책의 원제가 바로 <별쇄본>이죠. 작가 하나 묻어버리는 게 일도 아니더군요. 내용 중에 바로 표절에 관한 의식이 있었느냐, 아니면 정신병에 의한 무의식 표절이냐는 내용이 나옵니다. 음악도 기본 몇 가닥 멜로다가 동일하면 표절판정이 나오는데 무의식 중에 나오는 표절도 무시 못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초이님도 대단하시네요. 이 글 한 편 쓰기 위해 얼마나 공부를 하셨을까요. ^^ 많이 보고 배우고 갑니다.


애주가, 주정뱅이, 알코올 중독자

세상에는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남자가 처음으로 술을 마셨을 때,
다른 하나는 여자가 마지막 한 잔을 마셨을 때이다.
     - <The Octopus Marooned> (1908) O.헨리
 
술.
술자리는 친구, 동료, 혹은 명절날 가족들과 함께 하는 즐거운 자리일 수도 있겠지만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게는 그런 자리가 괴롭기만 하죠. 또 음주가 지나치면 좋지 못한 일(따로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이 생길 때도 많습니다. 이렇게 술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괴로움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문학적 측면에서 보면 술은 매우 쓸모 있는 소도구로, 웬만한 작가라면 음주 취향만으로 등장인물의 사회적 지위와 배경을 쉽게(혹은 상투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와인을 즐기는 도시적인 인물, 생맥주를 들이키는 직장인, 칵테일을 홀짝거리는 묘령의 여인,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배 나온 중년 남자, 소주나 막걸리를 안주도 없이 들이키는 거친 사나이… 이런 전형적인 인물 설정은 예나 지금이나 커다란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추리작가와 술의 관계도 밀접합니다. 현대 추리소설의 창시자 에드거 앨런 포는 음주벽으로 유명했고, 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네가 범인이다>, <아몬틸라도 술통>등의 작품도 있지만 그가 불과 40세라는 짧은 나이에 요절한 것은 폭음으로 인해 일찌감치 건강을 해쳤던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


그러나 포 이후 한동안 탐정은 술을 멀리한 것 같습니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는 연신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심지어 아편이나 코카인 등의 마약까지 상용했는데 취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귀족적인’ 영국 탐정은 식탁에서 예의 바르게 가벼운 술 한 잔을 즐기는데 그쳤지요. 애거서 크리스티의 주인공 엘큐울 푸아로는 박하주, 석류주 등 독하지 않을 듯한 술을 즐겼으며 배러니스 오르치가 만들어 낸 괴상한 주인공 ‘구석의 노인’은 쉴 새 없이 손을 만지작거리고 매듭을 만들며 마치 알코올중독자 같은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그가 마시는 것은 놀랍게도 우유일 뿐이었습니다.

이언 플레밍이 만들어 낸 영국의 전설적인 스파이 007 제임스 본드도 고급 술을 즐기는 까다로운 입맛을 가졌습니다. 술에 대해 박식한 플레밍은 제임스 본드의 미각 묘사를 통해 자신의 지식을 보여주고 있지요. 영화 <007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에서는 원작 소설에는 없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련 스파이가 생선 요리와 함께 레드와인(붉은 포도주)을 주문한 것. 공산주의자인 소련 스파이는 -빨갱이라서- 포도주도 붉은 것을 마신다는 유머와 함께, 본드가 상대의 정체를 알아내는 계기가 됩니다. 원래 생선요리에는 화이트 와인(흰 포도주)을 함께 마시기 때문에 수상쩍게 여기게 되는 것이죠.

용의주도하게 와인 맛을 보는 제임스 본드(숀 코네리가 연기).


술을 많이 마시는 탐정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귀족 같은 생활을 하던 유럽의 천재 탐정 대신 뒷골목에서 악당들과 맞붙는 현실적이며 훨씬 더 인간적인 탐정이 하드보일드 작품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드보일드의 선구자 대쉴 해밋이 만들어낸 탐정 샘 스페이드는 술을 즐기는 편인데, 사건을 의뢰 받았을 때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마십니다. 대신 강인한 외모나 성격처럼 알코올에도 강해 인사불성이 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의뢰인에게 실망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해미트의 뒤를 이은 레이먼드 챈들러가 탄생시킨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도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인데, 사무실의 책상 서랍(작품에서는 ‘깊숙한 서랍’이라고 나옵니다)에는 언제나 위스키 병과 술잔이 들어 있어 자신이 마시거나 손님에게 대접하곤 합니다.

술집에서의 필립 말로우(로버트 미첨이 연기). 영화 '빅 슬립'에서


지나간 일이니 결과론이 되겠지만 레이먼드 챈들러는 만약 술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위대한 추리소설가 대신 유능한 사업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젊은 시절 변호사를 지망했던 챈들러는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문학세계로 발을 디뎠으나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못했고, 군복무 후 은행을 거쳐 석유회사의 중역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미국을 휩쓸었을 때 이미 알코올중독 기미를 보여서 직장을 잃은 챈들러는 44세라는 나이에 본격적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으며, <빅 슬립>(1939), <안녕, 내 사랑>(1940),<기나긴 이별>(1954)등의 걸작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 역시 포우에 못지않게 서글펐는데, 1954년 연상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진정되어가던 모습을 보이던 알코올중독이 다시 도진 것입니다. 결국 건강을 해친 그는 집필 중이던 장편 <푸들 스프링>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1959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미국 탐정이 위스키 같은 독한 술만 마시는 것은 아닙니다. 렉스 스타우트의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는 ‘맥주와 난(蘭)’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울프는 입맛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맥주도 가려서 먹는데, 문제는 마음에 드는 맥주라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마신다는 것이죠. 저녁식사 때는 언제나 맥주를 마시는데 어쩌다가 마음만 내키면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계속 마시기 때문에, 조수인 아치 굿윈을 걱정스럽게 만듭니다.

맥주 맛을 보는 네로 울프(에드워드 아놀드가 연기).


와인을 마시는 사람으로는… 역시 프랑스가 자랑하는 메그레 경감을 들 수 있겠군요. <Maigret a Vichy>(1968)에서는 휴가차 비시로 간 메그레 경감이 젊은 의사와 술 이야기를 나누는데, 하루에 와인을 1리터 정도를 마신다고 하니 거의 음료수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개 집에서는 와인, 나가면 맥주를 마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애주가가 어느 선을 넘어서면 술꾼이 되고, 그걸 더 넘어서면 알코올중독자가 되죠. 그런데 그런 탐정도 있습니다.


1930년대 중반 조나단 라티머가 창조한 사립탐정 빌 크레인은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데, 문제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아무데서나 쓰러져 잠이 들기까지 한다는 것이죠. 재치있고 머리도 좋아 어떤 궁지에서든 잘 빠져나오긴 하지만, 술만 아니면 궁지에 빠질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탐정 빌 크레인은 이렇게 생겼습니다-영화 '시체실의 여인' 포스터


<스위트홈 살인사건>으로 알려진 여류 작가 크레이그 라이스도 술꾼 주인공을 만들어 냈습니다. 뒤죽박죽 희극식 작품에 등장하는 주정뱅이 변호사 존 J.말론은 과거 하드보일드 탐정들을 풍자한 듯이 보이는데, 그는 캐비넷 서랍 안에 ‘기밀(Confidential)’과 ‘비상 (Emergency)’이라고 붙여 놓은 술병을 숨겨 놓고 있으며, 아름다운 여자와 노닥거리는 것을 즐깁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보다 술이 덜 깼을 때 머리가 더 잘 돌아간다니 아무래도 별난 인물입니다.

J.J. 말론은 이렇게 생겼을까요 (물론 뒤에 있는 남자)


한편 웨이드 밀러가 <Guilty Bystander>(1947) 등에 등장시킨 맥스 서즈데이는 아내와 헤어지고 나서 주정뱅이가 된 탐정입니다. 에드 맥베인이 커트 캐넌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일련의 단편에 등장하는 주정뱅이 탐정 커트 캐넌(작가와 이름이 같습니다)도 이와 비슷한 쓰라린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뉴욕의 잘 나가는 사립탐정이었던 그는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자 친구를 반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팬 끝에 탐정 허가증을 빼앗기고 아내도 잃고 말지요. 결국 알코올중독자가 된 그는 뉴욕 뒷골목에 살게 되었지만 무허가 탐정으로 서민층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커트 캐넌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미국 추리작가협회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커더 역시 비슷한 경력을 가졌습니다. 뉴욕 시경 소속의 유능한 형사였던 스커더는 수사 중 쏜 총탄이 무고한 소녀의 생명을 빼앗자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경찰을 사직합니다. 그 후 아내와도 이혼하고 알코올중독자가 되어버린 그는 싸구려 호텔에 살면서 무허가 사립탐정 일을 하며 살아가다가 알코올중독자 치료모임에 들어가 금주(禁酒)를 시작하며 음지에서 양지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8백만 가지 죽는 방법'에서 매트 스커더(왼쪽, 제프 브리지스가 연기했습니다)


그나저나 술 하면 문득 떠오르는 작가는 나카지마 라모입니다. <가다라의 돼지>에서 어린 딸을 잃고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민족학자 오우베 교수가 등장하는가 하면 <오늘 밤 모든 바에서>에서는 알코올성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한 알코올 중독자가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작품 속에서 알코올 중독자의 묘사가 너무나 생생한 것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끊임없이 술을 마신 탓에 그 역시 삼십 대 중반에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었지요.

공연중인 나카지마 라모


주정꾼 탐정은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빈틈 하나 없는 사람보다 약한 면을 보이는 등장인물에게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좀 다르겠습니다만. (:P)

P.S. 명절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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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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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야기꾼 2011.02.03 0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에드 맥베인의 커트 케넌에 한 표!
    어린 시절 그 작품을 읽고 경도되었던 경험이....

    허나....술 먹고 댓글쓰는 건 참 ㅊ하들거미...ㅋㅎ샤댜ㅣㄹ ㅑ디

  2. 평시민 2011.02.03 02: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선요리에 붉은 포도주 썼다고 빨갱이라니..., 조금 억지가 심한 건지 이안 플레밍이 의외로 매카시스트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본드 하니 생각납니다.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 보면 두 명의 킬러가 웨이터로 위장하고 본드에게 다가오는데 본드가 "이 요리에는 보르도산 포도주가 잘 어울리는데 오늘은 무통이군." 두 웨이터는 다 떨어졌다고 대답합니다. 사실 무통이 보르도산인데 말이죠. 본드는 이들이 웨이터 치고 향수 냄새가 짙다는 점(그것도 익숙한)을 보고 의심하고 있었지만요.

  3. 카메라이언 2011.02.14 04: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카지마 라모 아저씨가 저렇게 생기셨었구나... 'ㅂ'... 수많은 직업들 중 뮤지션이기도 하셨다는 말에 궁금했었는데 (;;;) 아우 정말, 오늘 밤 모든 바에서 보면서 정말 술은 사회 악이구나 싶더라고요.

    크레이그 라이스의 책은 최근에 동서미스터리서 나온 스위트홈 살인사건을 봤는데, 안 그래도 작품 말미에 붙은 해설에서 나온 다른 소설들 읽고 너무 보고 싶더라고요. 번역이 상당히 어색한데도, 그 코믹코드가 넘넘넘 좋더라고요.

    명절은 한참 지났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__) (--) <--세뱃돈을 받고 싶은 수작. ㅋㅋㅋ

  4. 2011.03.06 0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무슨 이름이 그래요?

주인공의 이름이 나의 취미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주제일지라도
그것을 충분히 살리지 못하는 고경(苦境)에 빠진다.
     - 수필 <창백한 뇌수>(1939), 김내성

작가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까지 많은 고심을 하게 됩니다. 소재나 플롯은 물론 기본이고,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성격에서부터 사건 무대가 되는 배경에 이르기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들 중 쉬운 것은 하나도 없지요.

헌데 언뜻 보면 등장인물의 이름 짓기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뭐… 순간적으로 멋진 이름이 머릿속에 번쩍 떠오르는 것처럼 운이 좋을 때도 어쩌다가 있겠지만, 항상 그렇게 편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인공의 이름은 작품의 여러 요소들 중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여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 활자매체에서 등장인물의 첫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름을 통해 독자들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아기 이름을 지어 보신 분이라면 고개를 끄떡이실지도…)

하나하나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작명하는 것은 동서양 작가들을 막론하고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추리문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미키 스필레인의 사립탐정 마이크 해머는 이름에서부터 강렬한 인상을 풍깁니다. ‘마이크’라는 평범한 이름 뒤에 붙은 ‘해머(Hammer, 쇠망치)’라는 성은 그가 거칠고 강인한 남자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죠(그러고보니 ‘슬렛지 해머(Sledge Hammer, 대형 쇠망치)’라는 이름의 형사가 등장하는 뒤죽박죽 TV 시리즈도 있었습니다만…).

터프가이의 대명사 마이크 해머(TV 시리즈에서 대린 맥거번이 연기했습니다).


우리나라 작품의 등장인물 중 매우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 비록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 김홍신 씨 원작 <인간시장>의 주인공 ‘장총찬’이었습니다. 원래는 ‘권총찬’이었다가 최종 단계에서 바뀌었다고 하는군요.

그렇다면 작가들은 어떤 식으로 이름을 지을까요? 아마 어감이나 의미를 고려해 지어낸 이름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멋지거나 독특한 이름이 실존한다면 작가는 그것을 빌려 쓰기를 꺼리지 않습니다. 널리 알려진 주인공들만 살펴봐도 다른 곳에서 본 듯한 이름들이 많습니다. 탐정의 대명사인 셜록 홈즈의 이름은 코난 도일이 미국의 법률학자인 올리버 웬델 홈즈(Oliver Wendell Holmes, 1809-1894)에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이름을 가져와 쓴 것으로 전해집니다.

법률학자 올리버 웬델 홈즈


셜록 홈즈와 마찬가지로 영국 사람이며 국제적인 명성 또한 그에 못지않은 첩보원 제임스 본드는 원작자 이언 플레밍의 눈에 우연히 띈 책 <서인도제도의 새들(Birds in the West Indies)>을 쓴 조류학자 제임스 본드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조류학자 '제임스 본드'의 책


얼 스탠리 가드너가 창조한 명 변호사 페리 메이슨은 선배 작가 멜빌 데이비슨 포스트의 작품에 나오는 변호사 랜돌프 메이슨의 이름에서 따 왔는데, 재미있는 것은 페리 메이슨이 정의감 넘치는 인물이지만 랜돌프 메이슨은 악덕 변호사라는 점입니다.

'악덕 변호사' 랜돌프 메이슨


로스 맥도널드가 창조한 사립탐정 루 아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나는 선배 작가 해미트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의 작품 <몰타의 매>에 등장했던 마일즈 아처의 이름을 빌렸다는 것이고, 자신의 탄생 별자리가 궁수(弓手-Archer)자리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맥도널드가 직접 밝힌 바가 없어서 정확한 사연은 알 수 없습니다만….

존경의 뜻을 담은 주인공의 이름을 또 들자면,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館)’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인공 시마다 기요시(島田潔)가 있습니다. 이 이름은 등단시절부터 그를 후원해주었던 작가 시마다 소지(島田莊司)의 성과 그가 창조한 주인공 미타라이 기요시(御手洗潔)의 이름을 합성해 만들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미타라이 기요시라는 이름에는 좀 어이없는(?) 사연이 있더군요. ‘미타라이’는 절 등에서 참배자가 손을 씻는 장소를 의미하지만 화장실, 즉 변소의 완곡한 표현이기도 하죠. 그런데 시마다 소지의 어린 시절 별명은 ‘벤죠 소지(便所掃除)’, 즉 ‘변소 청소’였다고 하는데 이 별명이 훗날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명탐정 이름의 기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미타라이'라는 이름에 이런 심오한 의미가….


미국 작가 로버트 파커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립탐정 스펜서는 일반적 이름인 ‘Spencer’가 아니라 ‘Spenser’로 표기하는데, 이는 16세기의 시인인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 1552-1599)의 이름을 빌린 것입니다. 그런데 ‘스펜서’가 이름인지 성(姓)인지 작품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아는 것 같지만 정작 독자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또 있는데요, 앤드류 복스가 창조한 전과자 출신 탐정 버크 역시 성인지 이름인지 불분명하군요.

호크와 스펜서(오른쪽) - TV 시리즈 '스펜서'에서


이들은 사립탐정이니까 그럭저럭 넘길 수 있다고 하지만, 콜린 덱스터의 주인공 모스 경감은 한동안 성 외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아서 많은 독자들이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결국 열네 번째 장편에서야 모스의 이름이 ‘엔데버(Endeaver)’라고 밝혀지면서 작은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콜린 덱스터는 영국에서도 손꼽히는 십자말풀이(crossword)의 전문가였기 때문에 독자가 엔데버의 이름을 ‘end’와 ‘over’의 합성으로 넘겨짚어 해석해 그가 시리즈를 끝내거나 심지어 절필하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죠.

그런데 아예 이름이 없으면 편할까요? 대쉴 해미트는 하드보일드의 선구적인 작품 <붉은 수확>의 주인공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컨티넨틀 탐정사의 탐정이라는 의미인 ‘컨티넨틀 오프(Continental Op)’로만 불리는 이 중년의 독신 인물은 두 개의 장편을 비롯해 무려 28편의 중․단편에 등장하면서 끝내 이름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탐정 '컨티넨틀 옵'


현대 작품에도 해미트의 착상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작가가 있습니다. 빌 프론지니는 아예 ‘무명(無名) 탐정(Nameless Detective)’을 만들어 냈습니다. 프론지니는 이 40대 사나이의 여자관계에서부터 폐암이 겁나도 연신 담배를 피워 무는 강박관념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쓰지 않고도 솜씨 있게 묘사하고 있지요. 이 무명 탐정은 콜린 윌콕스와의 합작 <Two spot>(1978)에도 등장하는데, 윌콕스의 주인공 프랭크 헤이스팅즈 경사가 “빌(Bill)”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있습니다(그런데 이 “빌”은 눈치 채셨겠지만 바로 작가인 프론지니의 이름입니다).

작품에 잠깐 나오는, 즉 조연에도 못 미치는 인물들의 이름은 그냥 눈에 띄는 이름을 응용하는 것이 보통이라고도 합니다. 신문이나 뉴스에 나오는 이름을 쓰거나 어떤 작가는 사람 이름으로만 이루어진 책, 즉 전화번호부를 이용하기도 한다네요. 하지만 다작으로 유명한 아카가와 지로는 똑같은 이름이 계속 이어지는 전화번호부는 이용하기 불편해 잡지의 당첨자 발표 명단을 종종 이용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5백 편이 넘는 작품을 쓴 사람이니, 등장인물 숫자만도 엄청날 겁니다. 혹시 같은 이름이 있을지도…?

이름을 결정하는 방법은 작가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겠지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너무 흔한 이름을 쓰지 말라는 것이죠. 이를테면 ‘홍길동’이나 ‘임꺽정’, 혹은 운동선수나 연예인 등 당대의 유명인 이름을 그대로 갖다 쓰는 유치한 방법을 쓴다면 망하는 지름길이 될 겁니다. 설마, 그럴 분은 없으시겠지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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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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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1.26 19: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탐정의 이름 하니 저도 생각납니다. 어렸을 적에 제가 어린이용 탐정소설을 쓰는 걸 본 제 사촌동생이 자기도 소설 쓰겠다며 자기 친구 이름을 딴 탐정이 주인공인 소설을 하나 썼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마음에 들어서 나중에 제가 만든 탐정에 그 이름을 붙였지요, 캐릭터 성격이나 외모 등은 다르지만요. 빨리 그 탐정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2. 레이 2011.01.26 22: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마다 소지 님. ㅋㅋ
    제임스 본드, 어렸을 때 본드(접착제)라고 킥킥거렸는데 조류학자의 이름이었군요~

  3. 카메라이언 2011.01.27 03: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타라이 기요시가 왜 이리 좋은가 했더니 변소여서였군요...아...어쩐지...넘...좋더라............(네이버 닉네임이 특급변소. 본래 이 변소는 변태완소의 줄임말로 카페 김종일의 경계문학의 초코소라빵님이 지어주신 이름인데, 마음이 들어 계속 쓰고 있 ;;;)

    저는 주인공 이름 윤해환은 고등학교 때 문학교과서에서 본 윤동주 아명이 마음에 들어 기억해 뒀다 피씨통신에서 고 3 때부터 필명으로 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쓰고 있어요. 카메라이언 윤해환이라는 캐릭터 이름을 지은 건... 한 5 년 된 것 같은데요, 상당히 고민해서 지었던 듯해요, 정말.

    의도는 아니었지만, 사진 동호회 다니며 본 것들이라든가, 마음에 드는 이야기들 메모하고, 취재하고, 직접 dslr 사용법 배우고, 어울리면서 스캔들도 뿌리면서(;;;) 카메라이언이란 단어를 떠올리고, 출사다니면서 이런 출사지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서해안에 붉은 깃발의 섬 만들고, 사미사-사진에 미친 사람들 동호회 이름, 그 다음엔 동호회 시삽인 혁클베리-이건 실제로 한 동호회 시삽이시고 꽤나 유명하신 블로거이신 분의 예전 별명으로, 허락받고 빌렸어요- 정하고...(그 후로 글 쓴다고 동호회 안 나가버렸 ;; 열심히 활동하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배은망덕한 ㅡㅡ;;;;) 또 중간에 등장하는 반항야옹이는 제 옛날 다른 동호회 닉네임에다... 이야 정말 뭔가 상당히 설정이 많았네요. ;;;; 와, 엄청 덧글 길어졌다. ;;;;;

    주인공 이름들은 이런 식으로 여러가지로 뭔가 복합적으로 (;;;) 만들고, 때문에 바꾸고 또 바꾸는데 그냥 인물들, 별 생각없이 짓는 인물들은 보통 눈앞에 보이는 책 저자 이름을 써요. (;;;;;)

  4. 이야기꾼 2011.01.27 1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름 편하게 짓기로는 추리소설가 황세연을 빼놓을 수 없지요.
    온갖 한국추리소설가를 범인, 피해자, 목격자로 골고루 활용,
    작금에 이르러서는 인터넷 검색하면 '살인자 ***'으로 뜰 정도!

    대표적 인물로는 김성종, 이상우, 백휴, 서미애, 최혁곤, 한이...등등등...

    그러고 보니 드라마 작가 중에도 있네요...지화자, 배신남, 이런 이름으로 짓는 분이...


징벌 대신 구원을

마음속에 있는 악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어
- 캐드펠 수도사
<수도사의 두건>(1980)  -  엘리스 피터스

 범죄자가 밝혀지고 체포되는 것 - 이것은 대부분의 추리소설의 마무리단계에 나오는 장면입니다(물론 악당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유유히 달아나는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파격적인 결말을 가진 작품은 추리소설 전체의 비율에서 살펴볼 때 무시해도 괜찮을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악당들은 어떻게 죄의 대가를 치를까요? 1841년 포우가 발표한 <모르그 거리의 살인>에서 두 여인을 끔찍하게 살해한 범인은 정식 재판을 받지 않았고, 또 그 이후 드물게 저항하다가 처절한 최후를 맞이하는 범죄자도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니 아마 법정에 나가 재판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범죄자들을 쫓는 사람 중에는 경찰이나 직업적 탐정이 아닌, 성직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분들은 직업적인 특성상 범죄자들에게 징벌을 내리기보다는 영혼의 구제를 원합니다.

성직자 탐정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영국 작가 G.K.체스터튼이 창조해 낸 브라운 신부일 것입니다. 작은 체격에 노포크의 푸딩같이 둥글고 멍청해 보이는 얼굴을 가진, 점잖고 조용한 브라운 신부는 외모나 행동거지만을 보아서는 그의 놀라운 추리력을 도무지 상상하기 어렵지만 추리작가이자 연구가인 엘러리 퀸이 오귀스트 뒤팽, 셜록 홈즈와 더불어 세 명의 위대한 탐정 중 하나로 꼽았을 정도로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는 영국을 비롯한 각지를 순례하며 수많은 이상야릇한 사건과 접하게 되는데, 돋보기나 현미경을 이용하는 대신 범죄 자체의 본질을 관찰해 실마리를 찾아내어 수수께끼를 풀어냅니다.

경찰들과 대화를 나누는 브라운 신부(오른쪽 두 번째. 알렉 기네스가 연기했습니다).


브라운 신부는 정의를 존중하지만, 언제나 자비로움을 발휘하곤 하죠. 그의 사명은 범인을 체포하는 것보다 회개시키고 영혼을 구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가 거둔 최대의 성공으로는 프랑스 출신의 거물 도둑 프랑보우를 전향시킨 일일 것입니다. 거물급 도둑이었던 프랑보우는 여러 차례 붙잡힌 이후 회개해서 사립탐정으로 전향해 신부에게 많은 도움을 얻으며, 때로는 신부의 목숨을 구하기도 합다. 브라운 신부는 단편에만 등장하는데, 한 세기를 넘긴 지금까지도 전혀 고리타분한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가치 있는 작품입니다.

1980년대 중반, 움베르토 에코는 윌리엄 수도사라는 매력적인 인물을 창조합니다. 그는 <장미의 이름> 단 한 편에만 등장했지만 이 작품을 통해 국내에 ‘에코 붐’이 일어났고 그 덕택에 어지간한 탐정들보다 훨씬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14세기 초반의 초겨울, 산 속의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연속살인사건과 마주친 윌리엄 수도사는 셜록 홈즈와도 같은 추리력과 제임스 본드 같은(에코는 소설 집필 당시부터 영화에서 본드 역을 맡았던 숀 코네리를 염두에 두었다고 하네요) 행동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이야기의 화자(話者)인 아드소를 감탄하게 만듭니다.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 수도사(왼쪽. 숀 코네리).


영국의 여성 작가 이디스 메리 파지터는 20대의 나이이던 1930년대부터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엘리스 피터스라는 필명으로는 추리소설을 썼습니다. 1961년에는 <죽음과 즐거운 여자>로 에드거상 장편상을 받을 정도로 절정에 오른 그녀는 1977년, <성녀의 유골>이라는 작품에서 새로운 주인공인 인물인 캐드펠 수도사를 탄생시켰습니다. 원래 12세기 중반 잉글랜드의 귀족이었던 그는 과거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선장으로 10년 동안 이슬람의 해적과 싸우기도 한 경력을 지닌 캐드펠은 이제 성 베네딕트회 슈로즈베리 수도원 내에서 15년 넘게 머무르면서 약초 재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살고 있지만 속세에서의 지식과 성직자로서의 지혜, 그리고 어깨를 흔들며 걷는 선원 특유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남아 있지요. 그는 보통 사람이라면 눈치 채지 못할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는 통찰력을 지녔으며, 그에 못지않은 의협심과 따뜻한 인정의 소유자입니다.

캐드펠 수도사(데릭 재코비가 연기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다소 생소하지만 유대교의 율법학자 또는 유대교 지도자를 뜻하는 랍비(Rabbi)라는 직책이 있는데, 미국 작가 해리 케멜먼은 랍비인 데이빗 스몰이 등장하는 시리즈를 썼습니다. 랍비 스몰은 브라운 신부와 더불어 추리문학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젊은 성직자 탐정입니다. 매서추세츠의 시골 마을에 살면서 탈무드(Talmud: 유대교 율법과 해설)를 자주 언급하는 젊은 성직자인 스몰은 친구인 마을의 경찰서장과 차 한 잔씩을 놓고 마주 앉아 종교를 비롯한 여러 관점에 대해 토론하며, 사건의 해결에 커다란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스몰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금요일 랍비는 늦잠을 잤다>, <토요일 랍비는 배가 고팠다>, <일요일 랍비는 집에 있었다>등의 독특한 제목으로 눈길을 끌었지요.

'금요일 랍비는 늦잠을 잤다' 표지


서구의 신부나 목사 등과는 달리 동양의 스님은 속세를 떠나 수양을 해야만 하기 때문에 사건과의 접촉이 다소 적은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물론 서양 작품에 나올 가능성은 적겠지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에 등장하는 지장 스님은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수행을 쌓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런 도중에 마주친 이상한 사건들을 칵테일 한 잔 마시면서 스낵바의 손님들에게 늘어놓는다고 하는군요. 절제가 필요한 한국의 스님과는 조금 다른 것 같긴 합니다만…

행각승이란 이런 차림인가봅니다


그런데, 남자 성직자 탐정만 있냐구요? 그건 아닙니다. 영국 작가 피터 트레메인은 1993년 단편 <Murder in Repose>에서 주인공으로 피델마 수녀를 탄생시켰습니다. 피델마 수녀는 왕의 여동생이자 변호사/재판관 자격을 가진 미모의 여인으로, 7세기의 아일랜드를 무대로 활약합니다. 이듬해 처음 장편이 나온 이 시리즈는 지난해까지 21편이나 나왔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피델마 수녀 홈페이지


한편, 성직자는 아니지만 그런 오해를 받을 지도 모를 사람이 있네요. 영국 작가 레슬리 채터리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이먼 템플러는 세인트(The Saint), 즉 성자(聖者)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90년대에 영화로도 제작되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계실 분도 많겠지만, ‘현대의 로빈 훗’으로 불리는 그는 범죄 현장에 후광을 그린 사람을 그려놓는 습관이 있어서 성자라는 별명이 붙었을 뿐이지 성직자와는 거리가 멀지요. 잘생긴 외모에 모험을 즐기며 격투에도 일가견이 있는 세인트는 자비심이라고는 별로 없으며 망설임 없이 총칼을 사용해 악당들을 때려눕히는 활극의 주인공입니다.

작가 중에도 성직자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영국 작가 로널드 녹스로, 1888년 주교의 아들로 태어나 1차대전 후인 1919년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은퇴 후에는 라틴어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녹스는 주교로 임명된 후에도 유머와 날카로운 풍자가 담긴 에세이를 여러 잡지에 발표하는가 하면 교양 있고 뛰어난 트릭을 사용한 추리소설을 썼는데, 아마도 미스터리 팬들에게는 한동안 추리소설의 규칙으로 남아 있던 ‘녹스의 추리소설 10계(戒)’로 잘 알려져 있을 것입니다.

로널드 녹스


이 열 가지 규칙은 차츰 세월이 흐르면서 시대에 뒤떨어져간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만, 페어플레이를 강조한 녹스의 정신은 그의 뒤를 잇는 추리작가들이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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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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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야기꾼 2011.01.19 14: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건섭의 <호수에 죽다>(맞나요? 제목이...)에서 환속한 신부가 주인공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개인적으로 저 분 추리소설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작품입니다만....

  2. 평시민 2011.01.19 2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추리만화 <스님탐정 잇큐>가 생각나는군요, 전 7권이고 도서추리물입니다. 소년탐정이자 승려인 잇큐가 헤라클레스처럼 여러 가지 임무를 수행한 다음에 자신의 뿌리를 찾아간다는 내용이지요. 그리고 2권까지 나온 <사쿠라 신부의 사건노트>도 꽤 재미있는 추리만화입니다.

  3. 카메라이언 2011.01.21 04: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허헉 랍비 늦잠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계속 모른 척했는데 내일 읽어야겠다 덜덜덜. ;;;;;;;; 아웅 이번 포스트 너무 교육적이어욤. 추천 주소 올려놔야지 다른 데 가서 희희.

  4. lbeb 2011.02.28 21: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오~ 새로운 작품을 알게되는 건 언제나 즐겁습니다. 피델마 수녀 시리즈에 도전해봐야겠네요~


 

결혼해도 아쉽고, 안해도 아쉽고

모든 여성들은 결혼하면 남성이 바뀔 것이라 기대하고,
모든 남성들은 결혼하면 아내가 변함없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결혼의 비극이다.
- 버니 샘슨
<London Match>(1985)  -  렌 데이튼

 

자, 우선 직설적인 질문부터 하나. 탐정은 이상적인 배우자감일까요?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탐정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 잘생기고 똑똑한 사람이라 결혼상대자로서는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걸작 미스터리 속에 등장했던 탐정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지요.

등장인물의 가족상황을 살펴보면  1) 미혼, 2) 기혼, 3) 독신에서 결혼, 4) 기혼에서 독신 등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꽤 많은 수의 탐정이 미혼으로 지냈습니다.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에드거 앨런 포우가 만들어낸 탐정 뒤팽은 몰락한 귀족 가문 청년으로 두뇌회전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친구와 함께 하숙집에서 삽니다. 코난 도일이 만들어낸 명탐정 셜록 홈즈 역시 절친한 친구인 의사 왓슨과 베이커 거리의 하숙집에서 생활합니다. 친구 왓슨은 홈즈를 만난 이후 결혼을 세 번이나 했던 반면 홈즈는 도무지 여성에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이 탓에 나중 ‘홈즈는 동성연애자였다’거나 ‘왓슨이 여자였다’라는 구구한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지요(음, 이 이야기는 언젠가 한번 다루겠습니다).

셜록 홈즈의 번잡한 하숙방


렉스 스타우트가 창조한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 역시 조수 아치 굿윈을 비롯해 여러 사람과 함께 살지만 배우자는 없습니다. 하드보일드 탐정인 샘 스페이드나 루 아처도 독신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작가가 남자라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유명한 탐정 엘큐울 푸아로나 미스 마플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을 보면요. 이들이 홀로 산 것에는 갖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혼 운이 도무지 없다는 점에서는 괴도 뤼팽을 따라가기 어려울 것 같군요. 임꺽정처럼 험한 산 속에 집이라도 있는 산적이라면 아내도 맞이하고 가족을 이룰 수 있겠지만(자녀교육에는 문제가 있겠습니다만), 뤼팽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주거부정의 거물급 범죄자’라 안정된 가정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나름대로 여자관계는 또 복잡한 터라 연애감정을 가졌던 여성이 적진 않았지만, 이리 저리 꼬여서 결국 혼자가 되곤 했습니다.

한편 독신인 것이 당연한 인물도 있는데, G.K.체스터튼의 작품에 등장하는 브라운 신부나 엘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수도사 같은 성직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이야 속세를 떠난 분들이니 뭐…

사립탐정 대부분이 독신인 반면 안정된 직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경찰 주인공들은 결혼했고, 대부분 가정도 안정된 편입니다. 또한 가족들은 주인공에게 가정생활 뿐에서만 아니라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기도 하죠. F.W.크로프츠의 작품에 등장하는 조셉 프렌치 경감은 추리소설 최초의 현실적인 경찰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과거의 명탐정들처럼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지독하다고 할 정도의 끈기가 있어 애독자들에게서 ‘알리바이 깨기의 명수’라는 멋진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에게는 사건이 풀리지 않으면 종종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있는데, 그건 다름 아닌 그의 아내입니다. 프렌치 경감의 아내는 남편보다 머리가 좋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대화를 통해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곤 합니다.

메그레 경감. 심술궂어 보이지만 따뜻한 분입니다.


조르주 심농이 만들어낸 인물로 프랑스의 명배우 장 가방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파리 경찰국의 쥴 메그레 경감 역시 아내와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종종 아내와 다투기도 하지만 금방 풀어지며, 사건을 위해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것에 미안함을 느끼는 메그레 경감의 모습에서 마치 이웃 아저씨를 보는 것 같다면 과장된 표현일지요. 로렌스 샌더즈의 작품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X.딜레이니 경감은 첫 아내와 사별하지만, 사건을 수사하다가 만난 여성과 다시 결혼하는 것을 보면 혹시 지휘관급 경찰은 반드시 독신이 아니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작가와 이름이 같은 명탐정 엘러리 퀸은 사건 속에서 항상 독신 청년으로 나왔기 때문에 평생 혼자 산 것으로 오해를 많이 받고는 하는데, 사실 그는 처음 등장하는 작품인 <로마 모자의 비밀>서문에서 유부남임이 밝혀져 있습니다. 즉 엘러리 퀸은 고향인 뉴욕을 떠나 이탈리아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아버지, 아내, 어린 아들, 그리고 하인 주나와 함께 조용히 은퇴생활을 하고 있으며, 엘러리 퀸이 활약하는 모든 작품들은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이라는 설명과 함께.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결혼하는 경우는 아주 이상적입니다. 영국의 여성작가 도로시 세이어즈의 주인공 피터 윔지 경은 <맹독(Strong Poison)>(1930)에서 살인용의자였던 여성 추리작가 헤리엣 베인(세이어즈가 모델처럼 보이기도 하네요)의 누명을 벗겨준 뒤 여러 차례 구혼 끝에 결혼해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헤리엣 베인과는 대조적으로 세이어즈의 결혼생활은 무척 굴곡이 심했습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 상처를 입고, 미혼모가 되는가 하면 이혼남인 아서 플레밍과 결혼했지만 그는 아내가 자신보다 수입도 많고 명성도 높아지자 불만을 품고 결국은 외도까지 합니다. 결국 세이어즈에게 행복한 가정생활은 단지 꿈이었을 따름일까요.

훗날 부부가 되는 헤리엣 베인과 피터 윔지 경(오른쪽)


하드보일드 탐정이 언급될 때 필립 말로가 왜 빠졌나… 하셨을 텐데, 그도 역시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억만장자 할란 포터의 딸인 린다 로링. 필립 말로는 <기나긴 이별>과 <플레이백>에서 그녀와의 결혼을 거절하지만, 챈들러의 마지막 작품(그리고 미완성이어서 로버트 파커가 완성한) <푸들 스프링스 Poodle Springs>의 시작은 말로우와 린다와 결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챈들러의 미완성 유작을 파커가 완성한 '푸들 스프링스'


미국 만화의 주인공이며 우리나라에는 영화로 알려진 형사 딕 트레이시는 애인인 테스 트루하트와 만난지 어언 18년 만에 결혼을 합니다. 현실에서라면 거의 중년 나이가 된 셈이지만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은 만화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외모에는 별로 변화가 없었습니다.

가정적인(?) 딕 트레이시와 테스 트루하트


영국의 여성 거장 P.D.제임스는 애덤 댈글리쉬 경감과 여성 사립탐정 코델리아 그레이라는 두 명의 매력적인 주인공을 창조했는데, 이들은 완전한 별개의 인물이 아니라 서로 알고 지내며 호감을 가진 사이입니다(코델리아 그레이가 처음 등장하는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에서부터 두 사람이 만나죠). 댈글리쉬 경감은 아기를 낳을 때 아내가 세상을 떠나  독신남입니다. 그래서 몇몇 여성을 만나기도 하죠. 열성 독자들은 코델리아와 댈글리쉬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의견을 밝히며 편지를 보냈다는데, P.D.제임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진척시키진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이가 좋으면서도 이성관계로 발전하지 않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지만, 최근에 소개된 타나 프렌치의 <살인의 숲>에서는 주인공인 롭 라이언 형사는 동료인 캐시 매독스 형사와 순수한 파트너 관계로서 지내오다가 사이가 진척되면서 갑작스러운 갈등에 빠지고 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족을 보살피면서 위험한 범죄자와 상대하는 가정주부를 상상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여성 사립탐정의 많은 수가 독신입니다. 현대의 대표적인 여성 탐정들, 즉 수 그래프튼 작품의 주인공 킨지 밀혼은 두 차례, 새러 패러츠키 작품의 주인공 V.I.워쇼스키는 한 차례 이혼한 독신녀입니다. 밀혼은 경찰, 워쇼스키는 변호사 출신인데, 자신의 직업이 이상과 어긋나고 남편에게도 무시당하자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사립탐정의 길로 들어섰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요.

영화에서 캐슬린 터너가 연기한 사립탐정 V.I.워쇼스키


2차대전 이후부터는 사립탐정 뿐만 아니라 경찰 주인공들도 독신이 늘어났습니다. 업무에 바빠서 결혼을 할 틈이 없었다면 거짓말 같고, 아무래도 멋진 주인공이라면 그에 어울리는 멋진 이성 등장인물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주기 위한 작가들의 의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사건 자체뿐만 아니라 주변의 잡다한 일까지 묘사해야 작품의 맛이 살아나는 만큼 놀라운 일은 아니죠. 어쨌든 서두에 내 놓은 질문의 답은 어떠실지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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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야기꾼 2011.01.13 16: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갑자기 생긴 질문 하나!
    그럼 저런 멋진 탐정을 창조한 추리소설가들은 멋진 배우자감 일까요? ㅎㅎ

    • 카메라이언 2011.01.14 00: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로 사람 죽이고 풀면서 스트레스 푸니까, 실제 생활에선 잘 하지 않을까요. +-_-+

  2. 카메라이언 2011.01.14 00: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흑흑 이 글을 보니, 안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미미여사님의 '이름없는 독' '누군가' 시리즈 주인공 행복한 탐정 스기무라 상이 시리즈 세 번째 편에서 아내와 이혼한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정말 말이죠, 탐정들은 결혼 못 한다니까요. 아우. 성격들 어떻게 할 테얏!!!! ㅠㅠㅠㅠㅠㅠㅠㅠ

  3. 레이 2011.01.15 20: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읽고나니 탐정 몽크가 생각나네요. 함께 살기 힘든 유형임에도 운 좋게 이상적인 아내를 만났지만, 끔찍한 사건으로 너무 일찍 잃게 된 몽크 탐정...

    탐정은... 혼자 사는 게 속 편할 듯합니다.

  4. 괴도40면상 2011.01.21 04: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혼이라.. 참 멋진 일이죠.
    적어도 100명중 두명에게는. 나머진 그저 어떻게든 해보려는거고요.
    (..라고 말하던 필립 말로도 결혼을...-_-;;)


평범한 것은 싫다

탐정 일이란 천한 짓이지. 오직 신사나 악당만이 할 수 있어.
-키스 이네스
<The Rising of the Moon>(1945)  -  글래디스 미첼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때그때 달라지긴 합니다. 예를 들어 멜로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잘생기고 인간성은 훌륭하고 머리 역시 좋아서 흠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인물들이 태반입니다. 다만 너무 착한 것이 약점일 뿐. 이 주인공들은 어떤 위험과 마주쳐도 죽지 않으니(좀 고생은 합니다만) 초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영화나 TV처럼 눈으로 보는 것에 의존하는 영상 매체에서는 잘생긴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반면 추리소설은 두뇌의 오락이라는 측면이 강한 탓에 등장인물들, 특히 탐정들의 외모나 성격은 그들의 뛰어난 머리를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다소 독특한 묘사와 설정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현대 추리소설의 원조 격인 에드거 앨런 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포는 자신의 반항적인 기질 탓인지 유별난 성격의 주인공을 만들어 내었는데,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퇴락한 귀족 가문 출신의 아마추어 탐정 뒤팽은 밝은 쪽 보다는 어두운 이미지가 훨씬 강합니다. 밤의 어두움을 좋아해서 대낮부터 창문을 가린 채 향기 나는 촛불을 켜 놓고 명상에 잠기는가 하면 밤이 되면 거리로 나가 산책을 즐긴다는 습관은 도무지 평범하다고 할 수 없겠지요. 주인공에게 이런 괴상한 버릇을 부여한 것은 훗날의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산책중인 뒤팽(오른쪽)과 친구(포처럼 보입니다).

코난 도일이 창조한 셜록 홈즈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탐정이지만 그에게도 괴상한 습관이 있었습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지동설(地動說) 조차 모를 정도로 범죄 이외의 일에는 관심이 없으며, 가끔 괴상한 바이올린 곡을 연주해 룸메이트인 왓슨을 괴롭게 만들 때도 있고, 더욱 놀라운 것은 아편, 모르핀, 코카인 등 마약을 상습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당시에 단속이 없었기에 다행이었지 요즘 같았으면 홈즈는 정의를 추구하는 명탐정이 되기는커녕 마약 중독자로 교도소와 재활센터를 들락거리느라 사건을 다룰 틈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나마 뒤팽, 홈즈는 점잖은 편입니다. 수수께끼 풀이 형식 추리소설의 시대에 등장했던 탐정들의 괴벽은 작품의 분위기를 전환하는 데나 주로 쓰였을 뿐이었지 그 요소들을 크게 강조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른바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이라고 불렸던 수많은 단편의 주인공들은 홈즈라는 인물의 개성을 능가하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괴상한 습관을 보여주었습니다.

멍청한 얼굴에 우산을 거듭 잃어버리는 브라운 신부라던가, 쉴 새 없이 매듭을 만지작거리며 수다를 떠는 구석의 노인, 왕위 계승 신분을 버리고 러시아에서 쫓겨나 런던 교외의 낡고 큰 저택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잘레스키 왕자, 철저한 채식주의자에 적에게 잡혀도 시간이 되면 반드시 식사를 해야 하는 탐정 소프 헤이즐, 셜록 홈즈의 열성 팬으로 통신교육 탐정기술강좌를 수강한 아마추어 (엉터리) 탐정 파일로 겁, 심지어는 뤼팽 같은 도둑들까지 탐정으로 나설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반면에 약점이 보이지 않는 탐정들도 수두룩하게 등장했습니다. 오만한 성격만 제외하면 매력적인 반 다인의 파일로 밴스, 너무나 사무적인 오스틴 프리먼의 손다이크 박사 등은 그리스 조각 같은 외모에 다재다능한 능력을 지닌 대표적 탐정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물들은 그저 추리력을 보여주는 기계로 보일 만큼 독자에게는 인간적인 매력을 주기 어려웠지요. 


황금기의 주요 작가이며 밀실의 제왕이라 불리는 미국 작가 존 딕슨 카는 늑대인간, 마녀, 강령술(降靈術), 흡혈귀 전설 등 괴기스러운 소재를 다루었지만 기디언 펠 박사나 헨리 메리베일 경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면을 가진 등장인물을 만들어 내 딱딱함을 탈피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유머란 범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어둡고 차가운 분위기를 전환해 주는 데에는 가벼운 웃음만큼 적절한 것이 없습니다. 또한 주인공들의 철저한 완벽함 보다는 어딘가 보이는 약점은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게 해 준다는 점도 있지요.

'세 개의 관' 표지에 보이는 펠 박사

유머가 가미된 작품들이 성공하게 되자 앞에 열거한 명탐정들의 괴상한 점들도 단숨에 평범하게 보일 만큼 경이적인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영국의 여성 작가 조이스 포터의 소설에 등장하는 윌프레드 도버 경감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신장 188cm, 체중 100kg을 넘는 몸집을 가졌지만 근육질이 없고 대부분이 지방질이라 마치 하마처럼 보이는데다가 커다란 얼굴에 히틀러 같은 콧수염을 길러 첫 인상에서부터 부담감을 주는 인물이지요. 명색이 소설 주인공인데 외모가 이렇게 험악하다면 그것을 상쇄할 만한 뛰어난 두뇌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그 예상은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그는 영국 경찰국의 가장 무능한 경관으로 꼽히며, 범죄를 극도로 혐오하지만 그것은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단지 수사를 나서야 한다는 것이 귀찮아서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게으름은 지저분한 와이셔츠와 원래 색깔이 어땠는지  알 수 없는 넥타이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경감을 보좌하는 찰스 맥그리거는 도버와는 달리 잘생기고 지성적인 인물이지만, 젊은이에게 고생이 필요하다는 상관의 생각으로 도버 경감과 일하게 되는 불운을 맞이하게 됩니다.

도버 경감이 어떤 사람인지 딱 감이 오시겠지요?

도버 경감을 잇는 영국의 괴짜 경찰은 80년대 피터 러브지의 작품에 등장한 피터 다이아몬드 경감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는 <마지막 형사>라는 작품에 처음 등장하는데, 심술궂고 고집불통이며 현대의 첨단 수사기술을 불신하는 ‘마지막 고참 형사’입니다. 뚱뚱하고 몸집이 크다는 점에서는 도버 경감과 비슷하지만, 무능하면서도 자리 걱정을 하지 않았던 도버와는 달리 다이아몬드 경감은 자신의 실수에 대한 문책을 받고 결국 경찰을 떠나야 하는 아픔을 맛봅니다. 하지만 그는 경찰을 떠나서도 자신이 수사하던 사건을 추적해 나가는 끈질긴 면을 보여줍니다.


영국의 주인공들이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괴짜들이라면 70년대 이후 미국에 등장한 탐정들은 현실 사회를 반영하는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로저 사이먼의 <인간의 덫(The Big Fix)>에 등장한 유태계 사립탐정 모우지스 와인은 대마초를 비롯한 마약을 거리낌 없이 상용하고 있으며, 조셉 핸슨의 작품에 등장하는 보험조사원 데이브 브랜드스태터는 동성연애자입니다. 앤드류 복스의 주인공 버크는 무허가 탐정인데 전과 27범이기까지 하니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겨야 그를 찾을 일이 생길까 궁금할 지경이죠.

사립탐정 모우지스 와인(리처드 드레이푸스).

이 정도만 소개해도 푸아로나 미스 마플 같은 사람이 얼마나 평범하고 무난한 인물인지 감이 잡히실 겁니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이들은 아무리 이상한 성격을 가졌더라도 사람임에 틀림없는데, 가끔 상식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가들은 초자연적인 존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도 합니다. 시바타 렌자부로의 <유령신사>, 야마구치 마사야의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에 등장하는 탐정은 유령과 이미 죽어서 심장이 뛰지 않는 시체입니다.

무엇을 구상하십니까... 야마구치 마사야

여기에 한술 더 떠 공룡 탐정도 있습니다. 에릭 가르시아의 <Anonymous Rex>, <Casual Rex>, <Hot and Sweaty Rex> 등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빈센트 루비오는 사람 크기로 진화한 밸로시랩터 -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에서 떼지어 사람들을 습격하던 작은 공룡이 기억나시죠 - 로, 사람처럼 변장하고 태연하게 대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탐정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구 인구의 10% 정도가 변장한 공룡이라니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건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었으니 이미 보신 분도 계실 듯 싶네요.

맨 왼쪽이 주인공 빈센트 루비오(샘 트래멀). 겉보기엔 공룡처럼 보이진 않네요.

약점을 보완하는 쪽과 강점을 더욱 살리는 쪽 중 어느 쪽이 더 좋을지는 정답이 없겠지요. 적어도 추리소설에서만큼은 이제 초인적인 천재 탐정이 오히려 너무 평범한(아니면 흔한) 만큼 독자들의 호응을 얻으려면 비록 괴상하게 보이더라도 개성이 살아 있는 주인공들 쪽이 더 유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해도 며칠 지났네요. 여기 오신 분들 모두 올해의 주인공이 되시길 바랍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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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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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이 2011.01.06 09: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공룡!;;

  2. 이야기꾼 2011.01.06 11: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룡 탐정에 비하면
    제가 구상한 탐정은 아무것도 아니군요.
    너무 기괴하다는 생각에 망설이고 있었는데요...ㅎㅎ

  3. 허니문 베이베 2011.01.06 15: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분전환으로 허니문 차일드에서 베이베로 바꿨습니다. ㅎㅎ 추리닝님 글 읽다보면 회사에 금방 도착한다는. 덕분에 아이폰 배터리 빨리 소모돼도 마냥 즐겁다는. 탐정의 성격은 괴팍할수록, 특이할수록, 독특할수록 시선을 잡아 끄는 것 같습니다.^^

  4. 시무언 2011.01.07 02: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상하게 몇몇 팬들은 홈즈가 피도 눈물도 없는 추리 기계라고 얘기하더군요. 사회성이 부족할뿐이지 홈즈도 충분히 인간적인데(실수도 하고 말이죠)

    • 추리닝4 2011.01.11 11: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솔직히 최근엔 홈즈가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더라고요^^; 어릴때부터 봐온 너무 익숙한 캐릭터라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여전히 탐정하면 홈즈!!

  5. 평시민 2011.01.08 0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셜록 홈즈 사건집>에 나오는 단편 <세 명의 개리뎁>을 보면 왓슨이 범인의 총에 맞았을 때 홈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대목이 있죠, 홈즈가 왓슨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여러 캐릭터를 구상하고 있지요, 새해에 작가 분들 모두 좋은 글 많이 쓰시고 멋진 캐릭터를 많이 구상하시기 바랍니다.

  6. 카메라이언 2011.01.09 00: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크핫핫 공룡탐정 ;;;;;;; 아우 생각만 해도 웃겨요. 크핫핫 ;;;; 음음 저도 제 캐릭터들 생각하는데... 아우 너무들 평범해요. 카메라이언만 해도 뭐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보이는 정도 수준이니까요. 호호호... 라고 웃을 일이 아니잖아! OTL

    • 추리닝4 2011.01.11 1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카메라이언님은 이미 확고한 본인 캐릭텨 있으셔요^^

    • 카메라이언 2011.01.11 2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무슨 초 감동의 세계로 빠지는 말씀을... ;ㅂ;
      한미모에 올릴 단편 열심히 쓰고 있사와요. 트릭을 중심으로 한 명탐정 카메라이언이 등장하는 롯데리아 살인사건-제목은 바뀌겠지만요-여요. 호호호. 기대하셔도 좋사와요-라고 자신있게 말은 못하겠습니다. OTL


흰 눈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은

이제 또 다른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스패터 시의 사람들이
그해 겨울에 일어났던 일들을 잊어버리려면 꽤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호그 연속살인>(1979)  -  윌리엄 디앤드리어

 

추리소설의 계절은 흔히 여름이라고 합니다…만 그것은 작품 외적인 입장, 즉 ‘여름의 무더위를 쫓기 위해 추리소설을 읽는다’는 시장 구조적인 시점에서 나온 말입니다. 어쩌면 작가에게는 오히려 겨울 쪽이 매력을 갖춘 계절처럼 보이긴 합니다. 고전적인 수수께끼 풀이 추리소설에서는 겨울이라는 계절만이 가진 요소, 특히 눈은 훌륭한 배경 및 소재가 되곤 하지요.

올해는 눈이 별로 오지 않았다고 방정을 떨었더니 웬걸, 한바탕 쏟아지고 또 내릴 분위기네요


눈에는 다양한 특성이 있습니다. 함박눈, 싸락눈, 진눈깨비 등 많은 이름이 있을 정도로 하늘에서 내려올 때부터 가지각색이고 땅에 떨어진 후에도 녹거나 얼어붙거나 아니면 얼지도 녹지도 않고 어중간할 때도 있기 때문에 변화무쌍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뛰어난 작가들은 눈을 트릭으로서의 도구가 아니라 사건의 중요한 배경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배경’이라는 말은 너무 단순한 표현인데, 눈이 내린다는 것은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햇볕이 화창하다’, ‘이슬비가 내린다’ 등의 날씨와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웬만큼 내린 눈은 흔적을 남겨주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교통수단의 움직임을 차단할 수 있는 위력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사람 키 정도로 눈이 쌓이게 되면 발자국 트릭 같은 것은 아예 엄두도 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태풍이나 홍수처럼 주변 사물을 어디론가 날려 보내지는 않는다는 것도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엄청난 폭설이 등장하는 작품 중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열네 번째 장편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먼저 떠오릅니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프랑스의 칼레까지 유럽 대륙을 횡단하는 특급열차 오리엔트 특급(Orient Express)열차가 폭설 때문에 한밤중 유고슬라비아 국경 근처의 철길에서 꼼짝 못하게 되고, 그 무렵 만원이던 1등석 침대차 안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기차가 멈춘 곳은 외진 곳이라 누구도 열차로 몰래 들어오거나 밖으로 달아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침대차 안에 타고 있던 열 세 명의 승객 중 누군가가 범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승객 모두에게는 각각의 알리바이가 있어서 사건이 미궁에 빠질 것 같지만 하필이면 그 열 세 명 중에 푸아로라는 명탐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고로 사건은 뭐, 고비가 있지만 순조롭게 해결되지요. 이 작품에서는 폭설이 기차를 고립시키기 위한 배경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만, 독특한 범인의 설정은 이 작품을 영원한 걸작의 위치에 올려놓았습니다.

승객들을 모아놓고 질문을 던지는 명탐정 푸아로(중앙).


‘눈 속의 고립’이라는 상황은 범인이 당장 누구인지는 알 수 없더라도 어딘가로 도망치지는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탐정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만약 악당 쪽이 주도권을 잡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실 이렇게 되면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공포소설이 되는 셈이지요. 스티븐 킹은 <샤이닝>(1977)과 <미저리>(1987)에서 그러한 무서움을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샤이닝>은 한겨울동안 로키산맥 외진 곳에 자리 잡은 오래된 호텔을 관리하게 된 주인공 잭 토렌스가 이른바 오두막집 열병(Cabin Fever, 고립된 곳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신경증) 증세로 차츰 미쳐가면서 아내와 아들의 목숨마저 위협하게 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미치게 된 이유는 단순히 외딴 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만(호텔에 존재하던 유령 탓이었지요), 어쨌든 사방이 눈으로 뒤덮여 며칠도 아닌 몇 달 동안 꼼짝 못하게 된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편할 것 같진 않습니다. 한편 <미저리>에는 유령보다 더 무서운 집착을 가진 여인이 등장합니다. 눈길에서 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를 당한 소설가 폴 쉘던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미저리 체스테인’의 팬인 애니라는 여인에게 운 좋게(?) 구조되지만 그의 행운은 당분간 거기서 멈추고 맙니다. 아니, 그것은 행운이 아니었지요. 그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소설을 써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다리가 부러진 데다 바깥은 눈이 와서 도망갈 수조차 없고 난감할 따름입니다.

눈 속의 산장이 보이는 '미저리' 오디오북 커버


눈이 많이 내리는 때를 살펴보니 그것은 12월과 1월로 이어지는, 즉 ‘연말연시’라고 불리는 시점입니다. 1년 365일 중 불과 며칠에 지나지 않고 물리적으로도 그다지 특별한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점(해가 바뀐다는 것)을 맞이한다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의미를 두곤 합니다. 아마도 크리스마스라는 세계적으로 가장 대중화된 명절이 있고, 새해맞이 행사 역시 어느 나라에나 다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들뜬 사람들 사이에서 사고나 범죄는 발생하고, 때가 때인 만큼 당사자나 주변 사람은 평상시보다 훨씬 강한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인지 크리스마스나 신년 축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적지 않을뿐더러 인상적인 작품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애거서 크리스티의 <푸아로의 크리스마스>는 뭔가 즐거울 것 같은 느낌의 제목과는 달리 밀실 상태의 방에서 피투성이 시체가 발견되는 살벌한 분위기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제임스 엘로이의 <L.A.컨피덴셜>은 크리스마스이브에 경찰서 유치장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지면서 시작됩니다. ‘피투성이 크리스마스’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과거의 정신적 상처와 야심을 숨긴 젊은 형사 세 사람의 운명을 크게 바꾸는 방아쇠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피투성이 크리스마스' 사건 - 영화 'L.A.컨피덴셜'에서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 42번째 작품 <자장가(Lullaby)>에서는 10대 베이비시터 소녀가 새해 전날 살해됩니다. 살인을 주로 담당하는 형사들에게 사람의 죽음이란 그다지 드물거나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하필 이런 즐거운 때에 불행한 소식을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전해 주는 일은 평상시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죽은 소녀의 부모에게는 이 날이 더 이상 새해의 전날이 아니라 딸의 기일(忌日)이라는 가슴 아픈 날로 돌변하는 것이니까요. 새해로 접어드는 새벽 3시 무렵 주인공인 카렐라 형사가 소녀의 집 현관을 노크한 후, 부모가 문을 열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하는 것으로 작가는 그 장면을 마무리 짓습니다. 독자들의 상상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제프리 디버의 <악마의 눈물>에서도 ‘모두가 새해를 맞이하는 축제 준비로 여념이 없는 한 해의 마지막 날’ 무차별 총격사건이 벌어집니다. 한 번이 아니라 그날 중 세 차례 더 학살극을 벌이겠다는 범인의 예고에 필적 전문가 파커 킨케이드를 비롯한 수사진이 막으러 나섭니다(시리즈 작품이 아니지만, 낯익은 인물이 깜짝 등장해서 즐거움을 주네요. 그 ‘낯익은 인물’은 연말인데도 아무 약속도 없고 아무 데도 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옛날 일을 한번 살펴볼까요? 코난 도일은 1887년 12월 <비튼>지 크리스마스 특집호에 셜록 홈즈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주홍색 연구>를 발표했는데, 작품의 고료로 불과 25파운드밖에 못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도 독자들에게 외면당해 실의가 컸습니다. 

셜록 홈즈가 이 잡지를 통해 처음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주홍색 연구>에 주목한 미국 잡지 <리핑코트>지가 도일에게 새 작품 원고를 청탁했고, 이때 쓴 두 번째 장편 <네 사람의 서명>은 1890년 1월호에 실리게 됩니다. 푸대접받던 도일의 작품들은 드디어 미국과 영국 양쪽에서 호평을 받기 시작했고 그의 운명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하지요. 도일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연말의 분위기를 가장 잘 탄 작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다만 <주홍색 연구>나 <네 사람의 서명>은 잡지의 연말 특집에 실렸어도 내용은 전혀 크리스마스나 새해 분위기와 상관이 없었습니다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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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이 2010.12.30 15: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상한 눈사람 사건>이랑 <고리키 공원> 읽어보고 싶네요.
    눈사람 속에 시신을 숨겼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은 있는데 생각해보니 작품으로 읽어본 적은 없군요. 엄청 재밌을 것 같아요.
    (김전일 만화에서 눈사람(아니면 그냥 눈?)속에 시신 숨긴 이야기가 있었는 거 같아요.)

    지난 글 덕분에 이번 겨울에 <심플 플랜>을 재밌게 읽었습니다.(우와우와~ 스콧 스미스!)

  2. 카메라이언 2011.01.03 0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_</~

    그리고... ... 눈+살인... ... 눈의 살인... ...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제목인데요? 호호 'ㅂ'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경감님 눈에는 내가 아흔 살쯤 되어 보이겠지만 나 자신은 백 살도 더 먹은 기분입니다.”
  - 드루리 레인
<레인 최후의 비극>(1933)  -  엘러리 퀸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 추리소설도 마찬가지지만 - 무슨 자격증이나 허가증 같은 것은 필요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성공할수 있는지는 개인적인 능력에 따라 각각 달라지지요. 예를 들어 <사이코>의 작가 로버트 블록은 17세 때 잡지에 작품을 투고해 돈을 벌었으며, 아이러 레빈은 <죽음의 키스>(1953)로 데뷔했을 때의 나이가 24세에 불과해 천재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일찌감치 등단한 작가가 있는가 하면 물론 그 대척점에 있는 작가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죄(大罪)>시리즈로 유명한 로렌스 샌더즈는 과학기술 잡지사에 근무하다가 49세가 되던 1969년 <앤더슨의 테이프>를 발표해 미국 추리작가협회상(에드거상)의 신인상을 받았고, 1971년 <모비를 찾아라>를 발표해 이듬해 에드거상 신인상을 수상한 A.H.Z.카의 나이는 70세였는데, 이는 수상자 중 역대 최고령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뭐, 물론 이것이 성공할 수 있는 나이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24세에 데뷔하여 충격을 주었던 아이러 레빈


작가의 나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따로 한 번 살펴보기로 하구요…

그렇다면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탐정들의 나이는 어떨까요? 추리소설이라는 특성상 주인공들이 터무니없이 어린 경우는 극히 드문 편입니다. 물론 청소년이나 아동을 대상으로 쓴 작품에는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이에서부터 10대 청소년까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별개로 보아야 하겠지요. 현실에서 스무 살도 안 된 경찰이 있을 리도 없을뿐더러 세상물정은커녕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 애송이 탐정에게 자신의 심각한 사정을 허물없이 털어놓을 의뢰인이 과연 있기나 할까요?

물론 예외 없는 예외는 없는 법이라 어린 주인공이 있긴 합니다. 프랑스 작가 가스통 르루의 걸작 밀실 추리소설 <노란 방의 비밀>에 등장해 사건을 풀어나가는 신문기자 조셉 룰르타비유는 우리나라 기준으로 따지면 고등학교 3학년인 18세에 불과해 청년이라 부르기도 어색한데, 기자가 된 것은 그보다 2년 전이라고 하니 정말 19세기 프랑스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룰르타비유는 후속작에도 등장해 젊은 피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젊다못해 어린 친구가 담배까지? - 조셉 룰르타비유


하지만 룰르타비유가 막내 삼촌쯤으로 보일 만큼 훨씬 어린 주인공이 있습니다. 일본 작가 다나카 마사미(田中雅美)의 작품에 등장하는 호시카와 아츠코(星川厚子), 통칭 ‘앗쨩’으로 불리는 이 소녀는 불과 다섯 살의 유치원생입니다. <앗쨩의 추리 포켓>(1985)에 처음 등장하는, 소녀라고 하기도 어색한 이 꼬마는 유치원 친구가 버스에 치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어린이 특유의 호기심과 직감(?)으로 원기 넘치는 엄마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밝혀냅니다. 아츠코는 시리즈 진행과 함께 나이를 먹어 초등학교에 진학하는데, 아마 이보다 어린 탐정은 등장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혹시 모르지요, 어찌될지.

반면 나이 먹은 탐정은 제법 있습니다. 로렌스 샌더즈의 <대죄>시리즈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딜레이니나 피터 러브지의 피터 다이아몬드는 경찰에서 퇴직한 50대 후반의 사람들이며, 엘러리 퀸이 버나비 로스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작품에 등장하는 은퇴한 연극배우이자 아마추어 탐정 드루리 레인도 환갑을 넘은 노인입니다.

하지만 그들마저 젊은이로 보이게 하는 탐정도 있습니다. L.A.모스의 <늙은 탐정(The Old Dick)>(1981)에 등장하는 제이크 스패너는 78세의 괴짜 골초 영감님으로 자신의 마지막 사건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공원에서 일광욕하거나 시시한 소설을 읽으며 소일하던 왕년의 사립탐정 스패너에게 40년 전 그가 형무소로 보냈던 폭력단 두목 살 피콜로가 찾아와 유괴된 손자의 몸값 75만 달러를 주는데 동행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사건은 예상 밖의 방향으로 전개되고 맙니다.

제임스 시겔
의 <묘비명(Epitaph)>(2001)의 주인공도 70세를 넘긴 전직 탐정 윌리엄 러스킨입니다. 그는 과거 동료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그 동료가 죽기 전까지 사건을 맡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사건을 이어받기로 합니다. 약간의 질투심으로 시작된 조사에서 윌리엄은 50년 전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미해결 대량살인사건을 알게 되고, 또 최근 발생하고 있는 실종사건이 과거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에게도 위험이 다가옵니다.

어떤 탐정은 작가와 함께 나이를 먹어갑니다. 로스 맥도널드의 주인공 루 아처는 <움직이는 표적>(1949)에 처음 등장했을 때 작가의 나이와 비슷한 30대 중반이었지만 4반세기가 지난 후의 마지막 작품 <블루 해머(The Blue Hammer)>(1976)에서는 20대의 여성이 딸처럼 보일 만큼 원숙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올해 초 세상을 떠난 로버트 파커의 주인공, 보스턴의 사립탐정 스펜서 역시 처음에는 독신 생활을 즐기는 3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어느덧 40대에 접어들어 삶의 연륜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알리바이의 A(A is for Alibi)>, <강도의 B(B is for Burglar)> 등 알파벳 순서대로 시작되는 작품을 쓰는 여성작가 수 그래프튼은 데뷔작에서 27세였던 여탐정 킨지 밀혼이 대략 두 작품 반마다 한 살씩 나이를 먹게 해 시리즈 마지막 작품이 될 <0의 Z(Z is for Zero)>(제목을 미리 정해 놓았다고 하는군요)에서는 40세가 되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21편이 나왔으니 앞으로 다섯 편 남았군요. 성공의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후속 작품의 계획까지 세우는 것은 무척 세심하거나 야망이 대단한 작가가 아니라면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추리소설을 처음 쓸 때부터 알파벳으로 스물여섯 편의 시리즈를 쓰겠다고 결정한 그래프튼은 그런 점에서도 대단한 작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26번째 작품을 기대합니다 - 수 그래프튼


한편 아무런 생각 없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의 나이를 언급했다가 혹시라도 인기를 얻어 작품이 이어진다면 호기심 많은 독자들은 등장인물의 사생활까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가장 화제가 된 것은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가 아닐까 싶군요. 크리스티는 작품마다 빈틈없이 치밀한 구성으로 독자를 감탄시켰지만 주인공의 나이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탓에 훗날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크리스티는 데뷔작이자 푸아로가 등장하는 첫 작품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을 1920년에 발표한 후 197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 이상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고, 푸아로가 세상을 떠나는 내용을 담은 <커튼>을 유작으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습니다. 푸아로의 죽음은 뉴욕 타임즈에까지 부고가 실렸는데, 거기에 실린 그의 추정 연령은 무려 120세였던 것입니다!

뉴욕 타임즈에 실린 푸아로의 부고 기사


심지어 크리스티의 평전(評傳)을 쓴 H.R.F.키팅은 푸아로가 1904년 벨기에 경찰에서 은퇴했다는 기록에 따라 당시 60세였다면 1970년 중반까지 살아있었으니 130세 이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줄리언 시먼즈는 <위대한 탐정들(The Great Detective)>에서 푸아로가 퇴직했을 때 40대였다며 100세를 넘겼다는 설에 반론을 제기했지요. 결국 푸아로의 나이는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일찌감치 모습이 굳어진 주인공은 나이를 먹지 않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독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을 꼽자면 제임스 본드, 이름보다 007이라는 번호로 더 잘 알려진 첩보원이지요. 작가 이언 플레밍이 세상을 떠난지 한참 되었습니다만, 영화에 등장하는 본드의 나이는 점점 젊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50년 이상 87번 관서(분서라고도 많이 번역되었네요) 시리즈를 발표했던 에드 맥베인은 등장인물의 나이에 대해 별로 고민이 없었습니다. 어떤 인터뷰(1992년입니다)에서는 이렇게도 말했지요.

질문: 인물들의 나이-예를 들어 쌍둥이(사실상의 주인공인 스티브 카렐라의 아들입니다)- 를 조금씩 먹게 하는 것은 어떻게 결정하십니까?

맥베인 : 쌍둥이는 “사춘기”를 향해 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 자신도 그들이 도대체 몇 살인지 모르겠군요. 다음 책을 쓸 때 살펴봐야겠습니다. 카렐라와 다른 사나이들은 모두 30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전부예요.

이렇게 마음을 편하게 먹은 덕에 그가 수많은 좋은 작품을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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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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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0.12.23 1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재미있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제가 만든 탐정의 나이를 먹게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소년탐정 김전일이나 코난은 전혀 나이를 먹지 않죠), 사극이라면 <로마 서브 로사>시리즈의 고르디아누스처럼 나이를 먹게 해야겠지만 현대물에서는 계속 그 나이를 유지시키기로 했습니다.

  2. 레이 2010.12.23 19: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나이하면 김전일과 명탐정 코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군요~

    작가와 함께 나이를 먹는 탐정, 이거 좋네요. 진짜 살아있는 것 같아요. 점차 성숙해가는 모습도 흥미로울 것 같고요.
    알파벳 시리즈 내용이 어떤지 궁금하네요. 국내에도 소개될 날이 오길... 계속 쓰시고 계실 작가분께 감탄하고 갑니다.

  3. 카메라이언 2010.12.23 23: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키키키킥 너무 재미있게 보고 가요. 포와로는 혹시 알고 보면 장삼봉이랑 같은 수준의 선인? 키키키킥. 역시 명탐정 코난이 젤 웃겨요. ㅋㅋㅋㅋ

  4. 평시민 2010.12.25 0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장편 주인공이라..., 그러고 보니 저와 나이가 비슷했습니다.


지혜로운, 혹은 사악한 이방인

“사슴이 호랑이와 놀아서는 안 됩니다.”  - 찰리 챈
<Charlie Chan Carries On>(1930)  -  얼 데어 비거스

20세기 초반의 영․미 추리소설에는 '사악한 동양인(Oriental Sinister)' 또는 '황화(黃禍 Yellow Peril)'로 일컬어지는 동양계 악당이 적지 않게 등장했습니다. 자신들의 소설이 좀 더 이국적으로 보이고 또한 배경의 분위기를 더욱 신비스럽게 과장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들이 생각하던 무서운 중국인



당시까지 아시아의 대표적인 국가였던 중국인은 신비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영국 작가 로널드 녹스는 <추리소설작법 10계>라는 규칙을 공표하면서 그중 다섯번째 항목으로 “중국인을 중요한 인물로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항목을 포함시킬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서양인과 다른 외모의 중국인 심리를 쉽게 파악하지 못하는 데다 그들에게 알 수 없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고 있는 중국인은 머리가 좋지만 뭔가 음험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신비함을 넘어 공포감까지 주었던 것입니다. 

이런 공포감은 소설 속의 무시무시한 중국인을 통해 더욱 과장되었습니다.

무시무시한 푸 만추 박사(공포영화 전문배우 보리스 칼로프가 연기)


영국의 작가 색스 로머에 의해 탄생한 괴상한 인물 푸 만추 박사는 익히 알려진 서양의 범죄자 뤼팽 같은 사람을 어린애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악당 중에서도 초 거물급 악당입니다. ‘셰익스피어 같은 이마에 악마 같은 얼굴, 빨아들일 듯한 녹색 눈을 가진’ 그의 목표는 값진 것을 훔치면서 부귀나 명성을 얻는 사소한 욕심 따위가 아니라 고대 중국의 막강한 권한을 일으켜 세워 세계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언제나 죽은 것처럼 믿어지지만, 후속 작품에서는 마치 지옥에서라도 되돌아온 듯이 더욱 강해져서 나타나곤 했습니다. 작품에 나온 그의 악행만으로 따져 보면 유럽의 작은 국가, 즉 벨기에나 스위스 정도의 인구 정도를 없애버렸을 정도라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로머의 경제적인 필요 때문에 창조된 이 무시무시한 중국인은 작가 사후에도 다른 작품 속에 종종 인용되면서 동양의 대표적 악당이라는 지위가 굳어졌습니다. ‘푸 만추 수염(Fu Manchu moustache)’이라는 스타일이 여전히 남아있어서 인터넷을 뒤져보면 별별 재미있는 사진을 구경할 수 있고, 유명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980년대 후반 결성해서 아직도 활동하는 ‘푸 만추’라는 4인조 락밴드도 있네요.

…이렇게 수염이 돋보이는 푸 만추 꽃병도 있습니다


이런 중국인의 이미지가 차츰 변화된 것은 미국 작가 얼 데어 비거스가 만들어낸 중국계 탐정 찰리 챈의 덕택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챈'은 '장'씨라고 하는군요). 하와이 호놀룰루 경찰국 소속의 찰리 챈은 열 한 명의 자녀들과 함께 살고 있는 가정적이고 밝은 성격의 사나이로서, 이전까지의 사악한 중국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주인공입니다. 언제나 졸린 듯한 눈에다 뚱뚱해서 둔해 보여도 사실은 지혜롭고 끈기 있는 유능한 수사관인 그는 ‘낮게 날아가는 새는 떨어져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 등 동양적인 경구를 즐겨 인용하곤 하죠. 1925년 <열쇠 없는 방>으로 시작된 찰리 챈 시리즈는 대단한 인기를 얻어서 영화로도 많은 수가 제작되었으며, 워너 올랜드가 찰리 챈 역을 맡아 제작된 1930년대 흑백 영화들은 요즘도 심심찮게 비디오 광고가 보일 정도로 여전히 인기가 있습니다.

찰리 챈(가운데, 워너 올랜드 분)과 그의 두 아들


한때 동양인의 대명사였던 중국인에 비해 한국인이나 일본인의 등장은 적은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인상적인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 중 하나인 <골드핑거>(1959)에는 악당 오릭 골드핑거의 부하로 중절모자를 살인무기로 사용하는 오드잡(Oddjob)이라는 덩치 큰 한국인이 등장합니다. 한국 사람의 이름치곤 정말 이상하고(한국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별난 이름이긴 합니다만), 우두머리의 명령을 묵묵히 수행하는 우직한 인물인 오드잡이 ‘고향에서 먹던 고양이 고기를 좋아한다’는 대목이 있을 정도로 당시의 한국이 얼마나 미지의 국가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화로 제작된 <골드 핑거>에서는 아쉽게도 오드잡 역을 한국 사람이 맡지 않고 프로레슬러 출신인 해롤드 사카다라는 일본인이 연기했습니다.

말 없는 사나이 오드잡


황당한 면에서는 007 시리즈를 능가하는 워렌 머피의 <디스트로이어> 시리즈에서도 비록 조연이지만 한국인이 고정적으로 등장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미 백여 권 이상이 출간된 이 활극의 주인공인 리모 윌리엄스에게 ‘신안주(Sinanju)’라는 무술을 가르치며 특수요원으로 양성시키는 역할을 맡은 사람은 ‘치운’이라는 한국인 노인입니다. 평양에서 약 160km 떨어진 해변의 작은 마을과 같은 이름의 신안주라는 무술은 치명적인 공격 기술과 총알도 피하는 방어술, 그리고 심지어 물 위도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공입니다. 이 디스트로이어 시리즈는 <레모>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져서 기억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이 영화는 80년대에 만들어졌는데도 동양인 치운 역할을 미국 배우가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한국 사람이 했을지도 모르지요).

치운(오른쪽)과 리모 윌리엄스. 그러고보니 이분도 푸 만추 수염을…



주인공이 일본인이었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별로 인기를 얻지 못한 작품이 있었습니다. 존 P.마퀀드의 주인공 모토 켄타로, 일명 모토 씨(Mr. Moto)라는 인물은 일본 천황의 명령을 받고 극동과 하와이 등지를 무대로 활약하는 일본인 첩보원입니다. 이 일본 스파이가 활약하는 이 시리즈들이 발표된 것은 묘하게도 1930~40년대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던 때로 반일감정이 높던 시기였는데, 비슷한 시기에 헝가리 출신의 유명 배우 피터 로레가 모토 씨 역을 맡은 영화로도 여러 편 만들어졌던 것을 보면 참 모를 일입니다.

"여보세요, 제가 미스터 모토올시다"


20세기 후반부터는 일본 사람들이 잠재적인 위협으로 추리소설에 가장 많이 등장했습니다. 야쿠자라는 폭력조직은 서양의 갱단이나 마피아보다 훨씬 잔인하고 어떤 면에서는 신비한 면이 있어서 종종 묘사되며, 또한 일본인 개인보다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아주 위협적인 존재로 묘사되곤 하지요. 미국인들의 반일감정은 1930년대보다는 80년대 이후에 훨씬 강해졌는데, 일본 경제의 미국 진출은 많은 작가들의 작품 소재가 되었습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떠오르는 태양(Rising Sun)>은 일본 국기인 일장기를 의미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의 경제적 미국 진출을 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심지어 톰 클랜시의 <적과 동지(Debt of Honor)>에서는 미국과 일본과의 전면전이 벌어지기까지 합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2001년 9월 11일의 뉴욕 테러를 방불케 하
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일본인을 주인공으로 삼는 미국 작가들도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마스 아라이'는 일본계 정원사 할아버지가 활약하는 시리즈를 쓰는 일본계 미국 여성 작가 나오미 히라하라가 있고(<스네이크 스킨 샤미센>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었지요),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리즈를 쓴 I.J.파커가 있습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10/26 사건을 소재로 삼은 스티브 새건의 <서클>이란 작품도 있었고, 1988년 올림픽 이후 이미지가 강해진 덕택인지 톰 클랜시의 <적과 동지>라던가 마이클 크라이튼의 <에어프레임>, <넥스트>등에서 길지 않게 소개되는 정도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북한도 가끔 등장하는데, 번역된 작품으로는 제임스 처치의 <평양의 이방인>을 들 수 있겠습니다(후속작도 두 편 더 나왔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어지지 않는군요).

국가 이미지의 상승은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지만, 소설이라는 허구 속의 묘사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소설은 소설이니까요. 요즘 미국 드라마에서 한국계 배우들을 종종 볼 수 있는 것을 보면 이제 세계는 하나가 되었다…까지는 아니더라도 좁아진 것은 틀림없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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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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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16 0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 없다는데 한표 던집니다..

  2. 평시민 2010.12.16 15: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푸만추 시리즈가 한국에 번역되어 나오면 좋겠습니다.

  3. 이야기꾼 2010.12.17 09: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에 방송되는 미드에는 한국계가 많이 나옵니다.
    예전 인기미드를 리메이크한 <Hawii five-O>에는 한국계가 두 명이나...
    <멘탈리스트>에도 언제나 조용하고 독서를 좋아하는 '조'가 있지요...

  4. 레이 2010.12.17 1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뤼팽이 어린애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라니. 저도 푸만추 읽고 싶어요. ㅠ

  5. 카메라이언 2010.12.20 01: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드잡에서 뿜었습니다. 갑자기 듣보잡이 떠올랐어요. ㅋㅋㅋㅋㅋㅋ

  6. 원한의 거리 2011.06.27 1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 유명한 배우 크리스토퍼 리 경도 60년대에 제작되었던 푸 만추 영화 시리즈에서 푸 만추 역으로 나온 적이 있었죠.

    연기는 그럭저럭 잘했는데 정작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가 보리스 칼리프가 주연했던 30년대 시리즈보다도 떨어질 정도로 형편없어서 크리스토퍼 리 본인에게는 별로 좋은 기억은 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