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슨, 당신이 없으면 섭섭하지

“그(네로 울프)는 날 해고할 수 없을 것이다.  혼자선 아무 것도 못하다가 결국 굶어 죽을 테니까.”
                                                                             - 아치 굿윈
<Instead of the Evidence>(1949)  -  렉스 스타우트

 소설이든 영화든 모든 드라마에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기둥임이 분명하지만, 그를 뒤에서 받쳐주는 조연이 없다면 그 작품은 마치 양념이 안 된 요리처럼 싱겁고 밋밋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낯선 섬에 홀로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도 후반부에서 식인종 프라이디가 등장하는 변화가 없었더라면 그저 섬에서 고생스레 혼자 살아간 사나이의 이야기라는 따분한 내용 정도로만 그치지 않았을까요.

추리소설에도 당연히 주인공이 있고 조연도 빠지지 않는데, 친구 역, 애인 역, 지나가는 사람 역 등등 그런 것 이외에 추리소설에만 있는 특별한 역할이 있습니다.

내가 빠지면 섭섭하지요 - 영화 '셜록 홈즈'에서 왓슨 역을 맡은 주드 로


고전적 추리소설(일반적인 수수께끼 풀이 추리소설)에서는 ‘피해자-범인-탐정’이라는 필수적 등장인물 이외에 보통 ‘왓슨 역(Watson Character)’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명칭은 전설적인 명탐정 셜록 홈즈의 하숙집 룸메이트이며 그의 사건을 기록해 온 의사 존 왓슨(John Watson)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데서 유래한 것이지만, 사실 이런 역할을 처음 등장시킨 것은 코난 도일이 아니라 현대 추리소설의 창시자 에드거 앨런 포우였습니다. 포우는 아마추어 탐정 뒤팽이 등장하는 3편의 단편 소설, 즉 <모르그 거리의 살인>,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 <도둑맞은 편지>에서 단지 ‘나’라고만 알려진 이름 없는 인물을 등장시켰는데, 이 ‘나’라는 인물은 사건을 설명하면서 친구인 뒤팽의 추리를 묘사합니다. 이것이 ‘왓슨 역’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할은 대개 정적인 작품에서나 가능하며, 1인칭의 하드보일드 형식이나 쉴 새 없이 액션이 전개되는 작품에서는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왓슨 역의 인물은 다양한 역할을 합니다. 보통 작품의 화자(話者)가 되어(1인칭 시점) 사건의 흐름을 기록하면서 사건의 주변 상황을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대목에서 어느 정도의 지성을 지닌 독자가 물어볼 만한 질문을 탐정에게 던지는 것이죠. 이것은 작가가 독자와의 머리싸움을 하기 위한 아주 편리한 방법으로, 탐정이 생각하고 있는 사항 가운데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일러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진범인이 누구인지 탐정이 알아낸 순간을 감추어 놓고 이야기 줄거리의 막판에서 그것을 밝히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왓슨 역할의 인물은 보통 독자보다 다소 머리가 나쁜 것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탐정의 능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구실을 합니다.

왓슨 역할의 인물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뭐니 뭐니 해도 코난 도일의 작품에 등장하는 진짜 왓슨입니다. 런던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왓슨은 군의관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의병 제대한 후 런던으로 돌아옵니다. 친척도 친구도 없던 그는 하숙방을 찾다가 셜록 홈즈를 만나게 되어 베이커 거리 221B 번지 하숙방의 룸메이트가 되고 <주홍색의 연구>사건 수사에 참여합니다. 왓슨은 훗날 결혼해서 하숙방을 떠나기도 하고, 아내가 죽은 후 다시 홈즈와 함께 살기도 하며 생활에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홈즈 시리즈의 거의 모든 작품의 기록자가 되었습니다(<사자의 갈기>, <표백된 병사>등 일부 단편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비록 조연이고 화려함은 없지만 그는 주인공인 홈즈 못지않게 유명해졌으며, 작가인 도일은 홈즈보다 오히려 그의 사생활에 대해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도일 역시 의사였던 만큼 왓슨을 묘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겠지요.

홈즈 시리즈가 인기를 얻은 이후 - 이른바 단편소설의 황금기 - 에 나타난 많은 작가들은 개성있는 주인공과 함께 왓슨 역할을 하는 인물을 등장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R.A. 프리먼의 손다이크 박사와 저비스, 자크 푸트렐의 ‘생각하는 기계' 반 두젠 교수와 허친슨 해치 기자, G.K.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와 전직 도둑 플랑보우, 어네스트 브라마의 시각장애인 탐정 맥스 캐러도스와 하인 루이스 칼라일 등… 이들 가지각색의 직업과 성격을 가진 탐정과 조수들은 근본적으로 홈즈-왓슨 관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형식이었습니다.

다만 왓슨만큼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사람은 드물긴 했고, 가끔 어정쩡한 형태의 조연도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오르치 남작부인의 <구석의 노인> 시리즈에 등장하는 여성 기자 폴리 버튼은 쉴 새 없이 매듭을 만지작거리는 정체불명의 노인을 찻집에서 만나 난해한 사건에 대한 설명을 일방적으로 들은 후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사건의 결말을 듣고 놀라기만 합니다. 명색이 사건기자라고 하는 폴리는 평상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건에 대해 모를 때가 태반으로, 사건의 시작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과 추리까지 탐정 역할을 하는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작품 속에서 그녀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의하기 애매해질 지경입니다.

폴리 기자, 당신이 왓슨 역할인 것 틀림없어요? - 구석의 노인


‘미스터리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는 명탐정 푸아로와 함께 퇴역 군인인 존 헤이스팅즈라는 인물을 등장시켰습니다. 머리는 뛰어나지는 않지만 선량하고 성실한 사나이 헤이스팅즈는 푸아로와 함께 여러 사건에 등장하지만 크리스티는 코난 도일과는 달리 그를 영구적인 고정 배역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크리스티가 창조한 또 다른 뛰어난 탐정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시리즈에는 고정적으로 왓슨 역할을 맡은 인물이 없었습니다. 뭐 직업 탐정이 아닌 이상 그런 사람이 있기는 어렵겠지요.

헤이스팅스(오른쪽, 휴 프레이저 분)과 푸아로(데이빗 수셰)


렉스 스타우트는 사립탐정 네로 울프와 조수 아치 굿윈 사이에 독특한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천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네로 울프는 대단히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것에는 틀림없으나 움직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거나 증거 조사 등의 일은 조수인 아치 굿윈이 도맡아 합니다. 두 사람 모두 불평도 많고 비꼬기도 잘하며 심술궂기로는 우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이지만 누구보다도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이기도 하죠.

에도가와 란포가 창조한 아케치 코고로에게는 초기에 그와 친구인 듯한 인물이 화자로 등장합니다만 어느 순간에 말없이 사라져버리지만,  그가 쓴 어린이 대상 소설에서는 아케치 탐정의 제자인 고바야시 소년이 소년 탐정단을 이끌며 조수 역할(?)을 해서 과거 일본 어린이들의 우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차츰 드물어지던 왓슨 역은 1980대 중반 이후의 신본격 작가들의 작품에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시마다 소지의 미타라이 기요시를 돕는 이시오카 카즈미가 대표적이지요.

그중 독특한 인물을 꼽자면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들 수 있겠네요. 그의 작품에는 작가와 이름이 같은 아리스가와 아리스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학생 시리즈'에서는 선배인 에가미 지로를, '작가 시리즈'에서는 임상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를 보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세 사람… 음, 조금 헷갈립니다만 이 두 개의 시리즈는 분리된 세계로 '작가 아리스'는 학생 시리즈를 쓰고, '학생 아리스'는 작가 시리즈를 쓴다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진짜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 독자와의 머리싸움은 여전히 매력이 있는 만큼 가장 중요한 요소인 왓슨 역할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탐정 옆에 고정출연(?)하는 왓슨 역은 없더라도 경찰이건 관계자이건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거의 빠지지는 않습니다.

내가 빠지면 되겠습니까? - '셜록'에서 왓슨 역을 맡은 마틴 프리먼


최근 제작된 드라마 <셜록>에서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왓슨은 빠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의 매력은 영원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P)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추리닝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허니문 차일드 2010.12.09 1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탐정물에 있어 주연과 조연이 서로 끈을 당기고 밀어주는 역할은 독자에게 또 하나의 재미를 주는 것 같습니다. 갈수록 애정도 깊어지고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필명도 엘러리 퀸처럼 주인공과 작가를 동일시하는 데서 착안했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저도 조만간 제 소설에 허니문 or 차일드가 나올 것 같습니다. ㅎㅎㅎ 잘 읽었습니다.

  2. 카메라이언 2010.12.13 1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왓슨왓슨왓슨 ㅠㅠㅠㅠㅠㅠㅠ오늘 새벽에 셜록 kbs더빙방송 끝나서 안타까워했는데 너무너무 반가워요. 중간에 포와로와 헤이스팅스도 케이블서 해줄때 줄기차게 봤던 기억이 나서 아아아아. 왓슨은 정말 약방의 감초!!

  3. 레이 2010.12.13 17: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왓슨 없는 셜록은 찐빵 없는 앙꼬죠.
    맨 밑에 왓슨 사진과 설명이 어울려 웃음이~ㅋㅋ


작가들이 사랑하는 것

“일찍이 알라누스 데 인술리스는 이렇게 노래하셨느니라. 
이 세상 만물은 책이며 그림이며 또 거울이거니” - 윌리엄 수도사
<장미의 이름>(1980)  -  움베르토 에코

 

추리소설 애호가들이 주로 읽는 책은 당연히 추리소설이겠지요. 사실 추리소설은 재미라는 면을 중시하다 보니 술술 읽히는 - ‘시속 수백 페이지’였던가, 뭐 그런 비슷한 광고를 본 것 같기도 합니다 -  바람에 한 번 잡으면 하루 이틀 만에 끝장을 보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수십, 수백 권 정도로는 많이 읽었다고 내세우기도 어렵습니다(천 단위는 되어야 할 것 같군요).

단기간의 독서량을 이야기할 때면 항상 화제에 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 작가 S.S.밴 다인입니다. 현학적이고 대단히 유식한 탐정 파일로 밴스를 창조했으며, 추리소설을 쓰기 전에는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라는 본명으로 문학․미술평론가로 활동했던 인물이지요. 추리소설계에게 널리 알려진 그의 ‘전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래 엄청난 독서량을 과시하고 있던 그는 1차 세계대전 직후 과로와 긴장으로 인한 신경쇠약으로 병석에 눕게 된다. 담당 의사는 그에게 신경 쓸 만한 책을 읽는 것을 금했지만, ‘추리소설 같은 대수롭지 않은 책들’을 읽는 것은 허락했다. 결국 반 다인은 병석에 누워 있던 1923년부터 1925년의 2년간 무려 2천여 권의 책을 읽었으며, 그때 두 가지 사실을 파악한다. 하나는 추리소설이 탄생한 나라는 미국인데도 당시의 영국 작가가 훨씬 뛰어났다는 것이며, 자신이라면 이들 작품보다 더 나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2년간 2천권을 읽었다'는 S.S.밴 다인


하지만 그의 전기 <일명 S.S.밴 다인(Alias S.S. Van Dine)>(1992)을 집필한 존 러퍼리에 따르면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는 허구와 사실을 밴 다인 자신이 교묘하게 조합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병을 앓은 것이나 다른 작품을 읽고 자신감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2년 동안 병석에서 읽은 2천여 권’은 과장이었으며, 의사의 집필 허락 등의 에피소드는 자기 홍보를 위해 만들어낸 신화였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계산을 해 봅시다. 2년, 즉 7백 30일 동안 2천권을 읽으려면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 두 권 반씩은 읽어야 한다는 것이니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허풍 같은 이야기가 의심 없이 아직도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면 그의 작품이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엘러리 퀸- 맨프레드 리와 프레드릭 더네이의 공동 필명- 은 ‘미스터리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명예로운 별명은 위대한 추리작가를 뜻하지만, 추리문학 전반의 독보적 공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퀸은 추리소설 전문잡지(‘미스터리 리그’와 ‘엘러리 퀸즈 미스터리 매거진’)의 발간과 방대한 추리문학 관련 문헌의 수집․정리로 추리문학의 역사를 정립하는 업적을 남긴 것이지요. 그들의 장서량은 추리문학 관련 자료로는 당대 세계 최고를 자랑했으며, 그 장서의 대부분은 텍사스 대학에 기증, 보존되어 있습니다.

작업중인 엘러리 퀸


미국의 로렌스 블록이나 영국의 H.R.F.키팅은 직업상 의무적으로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직업’은 추리작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평론가로서의 측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블록은 14년 동안 <라이터스 다이제스트(Writer's Digest)>에 서평을 썼고, 키팅도 <타임즈(The Times)>에 장기간 서평을 썼습니다. 이들은 남의 작품을 많이 읽는 것이 창작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방해가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두 사람 모두 여러 모로 도움이 되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대체로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을 써 오던 로렌스 블록은 고서점 주인을 작품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자신의 유머러스한 면을 보여주었습니다. 도둑(Burglar) 시리즈의 주인공 버니 로덴바는 평상시 고서점을 운영하고 있지만 본업(?)은 물건을 훔치는 일입니다. 하지만 버니의 책에 대한 애정은 거짓말이 아니지요.

오래된 책을 수집하는 주인공은 버니뿐만이 아닙니다. 미국 작가 빌 프론지니가 만들어낸 이름 없는 탐정(유명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의 유일한 취미는 오래된 펄프 잡지(1920년대 무렵 발간되었던 염가판 잡지)의 수집으로, 5천 권 이상의 잡지가 자신의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을 보면서 뿌듯해 하는 별난 인물입니다.

책 읽는데 장소를 가릴 필요는 없지만 독서실 겸 서재가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서재는 항상 조용하고,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아도 남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곳이지요. 그래서 악당들은 그곳을 범행 장소로 노리기도 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걸작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서 로저 애크로이드가 살해된 곳이 그의 서재였으며, 니콜라스 블레이크의 <종장(終章)>에서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한 여성 소설가가 죽은 곳은 출판사였습니다. 고서점이 등장하는 인상적인 작품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이 있습니다. 필립 말로우는 협박범으로 여겨지는 고서점의 주인을 찾아가기 전 도서관에서 <벤 허>의 희귀본에 대해 조사하고 이웃 서점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으며 분주하게 돌아다니지요.

서점에서 탐문중인 필립 말로우 - 영화 '빅 슬립'에서


<죽음의 예약(Booked to Die)>, <깨어난 서적외판원(Bookman's Wake)>등 제목에서 책 냄새가 물씬 풍기는 존 더닝의 작품에는 콜로라도의 고서점 주인이자 전직 경찰인 클리포드 제인웨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전도유망한 추리작가였던 더닝은 출판사와 충돌, 절필을 선언하고 30대의 나이에 고서점을 개업해 10년 이상 동안 운영해오다가 50대에 접어들어 <죽음의 예약>으로 복귀했는데, 고서에 대한 깊은 지식을 피력하는 제인웨이는 작가의 또 다른 모습인 셈입니다.

존 더닝보다 훨씬 먼저 고서점을 운영했던 작가가 있군요. 이 작가는 대학을 졸업한 후 무역회사에 취직했지만 매일 같은 업무를 반복하는 것이 지겨워 1년 만에 튀어나와 타자기 판매, 조선소 전기담당부, 잡지 편집, 포마드 제조업 지배인 등등 평균 반 년 정도마다 직업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25세가 되던 해 2월, 자본이 별로 없이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동생 두 명과 함께 고서점을 개업합니다. 하지만 수입은 시원치 않았고, 결국 경영난으로 2년을 못 채우고 폐업하고 맙니다. 얼마 후 신문사 편집부에 들어간 그는 그로부터 3년 뒤 <2전짜리 동전>을 발표한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작가활동으로 일본 추리문학계의 최고봉이 됩니다. 이쯤 되면 그가 누구인지 아시겠지요. 바로 에도가와 란포입니다.

서재의 에도가와 란포

한때 정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추리작가가 추리소설을 많이 읽을수록 참신한 추리소설을 쓰기 어려울까’라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물어보아도 그렇고 해외 작가들의 인터뷰 등을 보면 딱 부러진 답이 나오진 않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키팅과 블록은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고 하지만 일부러 추리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는 작가도 있으니까요. 답을 내긴 어렵겠지만, 뜬금없는 결론을 내리자만 작가들도 독자들만큼 책을 사랑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P)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추리닝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카메라이언 2010.12.02 02: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이렇게 재미난 포스팅이 올랑오다니. ㅎㅎ 너무 좋아요. 그 때 해주셨던 이야기가 정리되어서. ㅎㅎㅎㅎ 그나저나 저는 책은, 많이 읽을 수록 좋다, 가능하다면 많이 베끼고, 생각하고, 주변에 추천해야 한다는 주의예요. 좋은 책은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읽는 순간 뭔가가 번쩍거린달까요. ㅎㅎ

  2. 평시민 2010.12.03 1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 작가는 영향받을까봐 일부러 책을 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저는 표절을 막기 위해서 많이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작가가 우연히 같은 플롯이나 트릭을 쓰게 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기 때문이죠.

    • 추리닝4 2010.12.06 0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 많이 읽는게 창작에 도움된다고 생각하지만,너무 과하면 자기검열때문에 힘들어질 수도 있단 얘길 해^^...남편이 부인 죽이고, 부인이 남편 죽이는 설정 수백편을 있을듯~


추리소설가들과 범죄자들의 꿈

대부분의 살인자들은 범죄를 너무 완벽하게 저지르려는 실수를 범한다.
<The Willow Pattern>(1965)  -  로베르트 반 훌릭

 

추리소설가와 실제 범죄자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양 쪽 모두 범죄로 수익을 올린다는 점(물론 한쪽은 머릿속으로 구상해 글로 옮기는데 그치고, 다른 한쪽은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과 완전범죄(작가는 독자에 대해서)를 실현하고 싶어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완전범죄란 과연 무엇일까요.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치밀한 계획과 실행에 의하여, 범인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거나 범죄를 입증할 수 없는 범죄

한 발 더 나아가볼까요.

일본의 추리소설가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살인산행>(1974)에서 완전범죄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종류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1. 심신 상실(心身喪失)을 이용한 범죄처럼 사회 상식적인 범죄로 보이는 행위가 있는데 범인도 증거도 갖추고 있으면서 법률적으로는 범죄에 대한 책임 추궁도 면하는 것.
2. 범행의 흔적이 명백하고 범인도 분명한데 유죄를 인정할 만큼 증거가 없는 것.
3. 미궁에 빠진 사건처럼 범행의 흔적이 있으면서 범인을 알 수 없는 것.
4. 범죄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흔적,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에 범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는 것.

하지만 작가는 범죄자와 다릅니다. 작가 마음대로 써서 범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잡지도 못한 채 끝난다… 하기는 쉽겠지만, 그렇게 무능한 수사관이 나오는 작품이라면 틀림없이 독자에게 외면당할 겁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대체로 정의를 추구하는 탐정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지능적인 범죄자가 저지른 사건이라도 반드시 해결되고 맙니다. 결국 완전범죄가 이루어지는 작품은 드문 편이고 누구나 납득할 만큼 강한 설득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오히려 강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죠.

작품 속에서 범인이 체포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합니다. 우선 탐정이 사건을 다 해결하고도 피해자가 더 악당이었다거나 가해자에게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혹은 범인을 밝히게 되면 애꿎은 사람에게 피해가 간다거나 할 때 눈감아 주는 경우입니다. 물론 공직자인 경찰이라면 사건을 그렇게 쉽사리 처리할 수는 없지만, 사립탐정이나 아마추어 탐정들은 가끔 그런 선심을 베풀 때가 있습니다(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이런 사건은 공식적으로 미해결 사건으로는 남겠지만 수수께끼는 풀렸으니 완전범죄라고 하기엔 뭔가 미흡한 점이 있지요.

다른 한 갈래는 악당이 주인공일 경우입니다. 악당 주인공이라면, 추리소설 애호가들은 모리스 르블랑이 창조한 프랑스의 괴도 아르센 뤼팽을 쉽게 연상하시겠지요? 뤼팽은 범죄를 예고하고 경찰을 농락하면서 그 자리를 유유자적하게 빠져나갑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는 단지 범인을 못 잡았을 뿐이지 누구의 짓인지는 뻔히 알기 때문에 이 역시 완전범죄의 범주에 넣기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가지는 작가가 조건에 맞는 완전범죄를 완성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잘 알려진 작품들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여성 작가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의 <재능 있는 리플리 씨>는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톰 리플리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알랭 들롱 주연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원작으로, 가난한 미국 청년 리플리는 친구 디키의 부유한 생활을 부러워한 끝에 그를 살해한 후 대신 디키 행세를 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용모를 똑같이 할 수는 없지만, 머리 색깔을 바꾸는 것을 시작으로 글씨체, 행동, 그리고 사고방식까지 죽은 친구와 닮기 위해 노력하고, 또 눈치 챌만한 사람들은 죽이기까지 하는 강경한 행동까지 벌인 끝에 합법적으로 친구의 재산을 가로채는데 성공합니다.

나는 리플리인가 누구인가 - 영화 '태양은 가득히'


미국 작가 스콧 스미스가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발표한 데뷔작 <심플 플랜>(1993)은 전혀 사전 계획이 없었던 상태에서 범죄가 벌어졌다는 점에서 약간 성격을 달리 합니다.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던 젊은 회계직원 행크는 형, 그리고 형의 친구와 함께 사냥에 나섰다가 추락한 비행기를 발견하는데, 그 안에는 4백만 달러가 넘는 거액이 실려 있던 것입니다. 엄청난 돈 앞에서는 누구나 장님이 되곤 하죠. 하물며 경제적 여유가 그다지 없던 사람들이었다면 더욱 이성을 잃을 것입니다. 아무리 똑같이 나누기로 했어도 엄청난 액수의 돈은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고, 급기야는 커다란 비극을 몰고 옵니다.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국 완전범죄가 되어버리긴 합니다만, 그들이 얻은 것은….

진정 돈 앞에 장사 없나 - 영화 '심플 플랜'


스위스의 역사학자 출신 작가인 장 자크 피슈테르의 첫 번째 소설 <편집된 죽음>은 앞서 소개한 작품들과는 달리 끔찍한 폭력도 없고 거액의 돈이 오락가락하는 것도 아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가장 뛰어난 완전범죄 작품으로서 꼽을 만합니다. 주인공 에드워드 램은 친구인 니콜라 파브리가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받으면서 행운의 절정에 오르는 순간 오래 전부터 계획해 오던 보복을 실행으로 옮깁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에드워드를 여러 차례 절망 속에 빠뜨렸던 니콜라가 자신의 애인마저 죽음으로 몰았다는 것을 알게 된 때부터 계획된 것이었지요. 이 작품을 최고의 완전범죄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복수극을 벌인 장본인 에드워드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심지어는 피해자 니콜라마저 그것이 복수였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편집된 죽음'


<슌킨쇼(春琴抄)>, <세설(細雪)>등의 작품을 남긴 일본의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는 추리소설에도 관심이 많아 작품을 직접 쓰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1920년 발표한 단편 <도상(途上)>은 에도가와 란포가 감탄할 정도의 완전범죄를 다루었습니다. 한 샐러리맨이 아내를 죽이기 위해 택한 방법은 직접적인 폭력 등을 행사하는 대신 은근히 위험한 상황을 거듭 만든다는 것으로, 목적을 달성한 후 만약 의심을 받더라도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완전범죄가 이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란포는 이런 방법을 ‘프로버빌리티(probability)의 범죄’, 즉 확률의 범죄라고 이름 붙였으며, 얼마 후에는 그 자신도 이런 트릭을 이용한 단편 <붉은 방>(1925)을 발표했습니다.

최근 접한 작품 중에서 이쪽 방면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는 우타노 쇼고의 단편집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2005)를 들고 싶습니다. 특히 작가의 본격 추리소설에 대한 (반어법적인) 애정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에 수록된 세 편의 단편은 모두 밀실을 다루고 있는데, 그중 두 작품은 훌륭한 완전범죄 작품으로도 볼 만합니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그의 대표작 <나비부인 살인사건>(1946)에서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재미있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사회가 진보함에 따라 인명을 존중하게 되며, 그럴수록 살인에 대한 제재가 엄격해진다. 그러한 제재를 피하기 위해 범인들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게 되기 때문에, 완전범죄를 노린 교묘한 계획적 범죄가 발생할수록 사회는 진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회 발전을 위해서’ 지능적 범죄자가 늘어나길 바라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아리송하긴 합니다.  (:P)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추리닝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갈매 2010.11.26 16: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편집된 죽음> 그런 내용이었군요. ㅠ.ㅠ 책이 어딘가 굴러다녔었는데, 알아보질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진듯.. 영화도 있었네요~ 담에 꼭 봐야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썼다는 소설도 살펴 봐야겠네요.
    우타노 쇼고는 반어/반전 트릭을 정말 잘 구사하나봐요~ <벚꽃지는~~ >만 봤는데, 결말에 가서 화들짝 놀랐었다니까요..

    읽어둘 추리소설 리스트에 올릴 작품을 새롭게 알았네요!

  2. 카메라이언 2010.11.27 18: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맞다. 편집된 죽음 나왔을 때부터 읽는다 읽는다 해놓고 아직도... -_- 영화도 소설도 봐야겠습니다. 2 그나저나 우타노 쇼고가 요즘 인기몰이가 대단하네요. 그리고 명탐정이~는 알라딘 올해의 책 후보에도 올랐던데.

    • 추리닝4 2010.11.28 14: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 본격물들이 잘 팔리는 것 같아요. <편집된 죽음>은 예전에 <표절>이란 제목으로 나왔었는데 확실히 새책이 제목도 편집도 깔끔하더라는. 두껍지 않아서 좋죠^^;;

  3. 허니문 차일드 2010.12.09 19: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편집된 죽음 메모했습니다. 심플 플랜은 책으로 무지 잼나게 봤었는데, 정말 돈 앞에서는 장사가 없더군요. 갈수록 눈덩이처럼 사건은 커지고... 마츠모토 세이초는 글 쓰기 전에 관련 취재를 정말 열심히 하는 작가 중 한 명이더군요. 오죽하면 편집자에게까지도 부탁할까요. 그런 작품은 읽고 나면 뭔가 강한 울림이 남는 것 같습니다.

  4. 이프리드 2011.05.14 09: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멋진 포스트를 읽고
    '우와~ 최고다~ 근데 왜 아를레 작품이 빠졌지?'
    하는 마음에 글을 써봅니다~
    아직 본격 개장^?^은 안 했지만 준비 중인
    제 블로그(http://blog.naver.com/hifreed)와
    하우미에도 올려봅니다~

    -----------------------------------------

    어린 시절 읽었던 가장 충격적이었던 완전범죄 소설은
    여성 작가 카트린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였습니다...
    완전범죄엔 성공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에 의해
    범인이 잡히게 되는 <눈에는 눈을>도 이 작가의 작품이죠

    란포가 말한 '프로버빌리티 범죄'가 구현되는 작품으로 책 후기에서도 언급되는
    제 생각에는 가장 비애가 깊게 배인 심리 서스펜스 미스터리의 명작
    <여자 살인 이야기>(아일즈 또는 버클리로 불리는 대작가의 작품이죠)에서도
    습관적으로 완전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주인공이 그 희생물이 되어가는 과정이
    섬뜩하고도 슬프게 그려지니 이 또한 완전범죄 소설이라 불러야겠죠

    (완전범죄를 그럴 듯하게 계획한 주인공이 우연에 의해 오히려 자신의 파멸을 부르고
    그 결과가 완전범죄로 되어 다른 사람이 이득을 보는 독특한 추리단편['너기 바'(사이먼 브레트)]이나
    희생자를 절묘하게 유인하는 심리트릭과 함께, 공범의 협력에 의해 완전범죄가 확고히 수립되는
    절묘한 추리단편['좋은 죽음이 되시기를!'(안토니아 프레이저)] 등도 있고
    완전범죄를 시도하지만 어설픈 데가 많아서 오히려 피해자에게 역습당하는 <백모살인사건>이나
    완전범죄로 보이는 범죄의 헛점을 차근차근 깨나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놀라움을
    지극히 현실적인 수사과정으로 보여주는 크로프츠의 소설들도 생각납니다)

    단편의 귀재 로이 비커즈의 <미궁과 사건부>는 완전범죄를 성공시킨 자들이
    어이없는 우연이나 미궁과 형사들의 마구잡이식 추리에 의해 그 파탄을 뒤늦게 드러내는 과정이
    독특하고 재미있게 그려지는데, 이 역시 완전범죄 소설인 동시에 완전범죄의 불가능성을
    권선징악적으로(^^;;) 역설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직접 살인하지 않고,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 나오는 이아고처럼
    다른 사람의 심리를 조종해 간접살인을 창출하는 게 가장 섬뜩한 완전범죄일지도 모릅니다
    증거가 없으니, 그 위대한 탐정 포와로조차도 결국 <커튼>에서
    이아고같이 완전범죄를 계속 저지르는 범죄자를 스스로 죽이고
    자신도 죽어야 하는 비극이자 한계를 맞이하죠(드루리 레인의 죽음도 생각나지만 좀 국면이 다르죠)

    최근 끝난 드라마 <싸인>에서 범죄자인 권력층 여성은 사실 허점도 좀 있는 범죄를 저지르지만
    권력의 힘으로 결국 자신의 범죄를 입증할 수 없는 완전범죄로 만들어버리더군요;;
    그래서 한국의 스카페타 또는 CSI나 본즈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윤지훈도
    결국 포와로 비슷하게 자신의 죽음으로 함정을 파서야 범인을 잡을 수 있으니,
    완전범죄를 다루는 방법도 참 다양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작품들을 보면 '미스터리' 작가로도 볼 수 있지만
    켄지-제나로 시리즈만 놓고 보면 주인공 탐정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이
    절묘한 추리보다는 액션 돌파와 사회문제 고발의 알레고리적 접근으로 주로 이뤄지니
    엄밀한 의미에선 '스릴러'
    (캐릭터의 비정함, 액션, 단문 등에선 미스터리의 한 계열인 하드보일드물과 어느 정도 겹치고
    희생자의 심리를 잘 그리는 점에선 역시 미스터리의 한 계열인 서스펜스물과 겹치며
    분위기나 세계관에선 누아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추리보다는 외적 긴장감[스릴] 조정-유지와 치열한 추격플롯 및
    독자에게 쾌감을 지속 공급하기 위한 다양한 액션/전투장면 제공 그리고
    희생자의 처지로 몰리는 주인공들이 오히려
    약자의 힘겨운 위기극복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정통 서스펜스물보다는
    훨씬 강력한 수단과 행동 및 조력자를 활용해 위기를 부순다는 점에선
    스릴러 장르로 봐야겠죠)
    작가로 보는 게 더 정확할 데니스 루헤인의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도 범인은 결국 어느 정도 완전범죄에 가까운 범죄를 성공시키고 살아남는데
    (물론 주인공의 엄포에 나름 내면적 공포를 겪게 되긴 하지만)
    강력한 악과 맞설수록 스릴이 더 커지는 장르인 스릴러에서는
    완전범죄 전문가나 모든 범죄를 완전범죄화시킬 수 있는 권력이 있는 조직이
    퍼즐미스터리나 하드보일드미스터리보다는 더 쉽게 등장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스터리 장르보다 스릴러 장르에 더 가깝다고 보는
    스파이물에서도, 존 르 카레나 로버트 리텔 등의 작품에서는
    조직이 저지르는 그 수많은 범죄들에 의해 사람이 죽거나 폐인이 되어도
    그 범죄들의 책임자가 벌을 받는 경우는 드무니,
    이런 '결과적 완전범죄' 내지 '사회적 완전범죄'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탐정들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스릴러의 불가능없다형 액션전사나 그래픽 노블의 슈퍼히어로들이 아니고서야...
    (아마도 결과적 완전범죄의 실현 가능성과 그 결과의 무시무시함을
    미스터리 소설이나 스릴러 소설이 아닌 다른 장르에서 가장 확실히 보여준 작품은
    앨런 무어의 그래픽 노블 <왓치멘>이 아닐까요...)

    끝으로, 최근 한국 장르소설 중에서 최근 속간되고 있는 작품 중 하나인 <마검왕>
    -나민채 작가의 장르퓨전 소설(무협, 판타지, 현대액션물 등이 섞여 있더군요)-에선
    군 참모 출신으로 풍부한 인맥과 정보력을 가지고 권력층이나 갱단 등과의 협상을 전문으로 하는
    21세기 미국 현실에서 보면 충분히 있을 법한 현실적 탐정이 나오던데
    결국 주인공은 탐정에게도 도움받지 못하고 갱단의 공격에 홀로 맞서야 하게 됩니다
    아마 어떤 범죄든 완전범죄(라기보다는 죄의 결과에 책임지지 않을 수 있는 권력으로 범죄 덮기)
    화할 수 있는 이들이 존재하는 현실에선, 아마 이런 현실적 탐정들도 꽤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계 각지를 돌며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국내외 분쟁 해결을 교섭하는
    '분쟁교섭인'[추리만화 <Q.E.D>의 신비한 여성 조연 어니 클레이너의 새 직업]이나
    영화 <네고시에이터>의 전문 협상인도 생각나고, 만화 <마스터 키튼>의 주인공은 탐정 역이긴 하지만
    보험사의 민간조사원도 하고 간혹 분쟁교섭인 역할도 하니까요)


끊임없이 원고지를 채우는 사람들



"하고 싶은 일은 많이 있다. 시간과의 경쟁이다."  -   마쓰모토 세이초


한국은 초겨울에 접어들었지만 중국 광저우에서는 아시안 게임의 열기가 한창입니다. 스포츠는 스포츠고 추리소설은 추리소설… 아, 딴 길로 잠깐 들어서는 바람에 갑자기 주제가 헷갈렸습니다.

지난번에는 서양의 다작 작가들을 소개했는데 이번에는 일본의 다작 작가를 소개할 차례네요.

스포츠야 어쨌든 간에 추리소설에서만큼은 새삼스러운 설명이 필요 없이 일본이 아시아 최강국임에 틀림없습니다. 수백 명의 작가, 또 그들이 끊임없이 발표하는 수많은 작품들, 그리고 그 작품들을 꾸준히 사서 읽는 독자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무척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 몇 년 사이 일본 추리소설 시장이 불황이라 문고판 추리소설 초판을 1만부만 찍는 상황’이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듭니다(왕년에는 3만부 정도 찍었다는데 반토막보다 더 줄어들었으니 사실 불황 소리 들을 만도 합니다만).

그런데 일본의 강점 중에서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은 바로 ‘끊임없이’라는 것입니다.

자, 일단 한국에서 인기 있는 일본 추리작가들을 한번 살펴볼까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1999년 <비밀>이 번역된 이래 40여 편이 출간되었고, 미야베 미유키는 2000년 <화차> 이후 30여 편이 나왔습니다. 온다 리쿠 역시 2005년 <밤의 피크닉> 이후 30여 편이 소개된 바 있습니다.
오사와 아리마사는 90년대 중반만 해도 여러 편이 나왔지만 요즘 '한국에서 인기 높은' 작가는 아니어서 현재 유통되는 작품은 <신주쿠 상어> 하나뿐이로군요. 어쨌든 당장 이 네 사람의 작품만 구한다고 해도 1백편이 넘으니 꽤 많은 양입니다.


다작 작가는 아닌 히가시노 게이고

 

그럼 일본에서의 출간 상황을 조금 살펴볼까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1985년 <방과후>로 등단한 이래 25년 동안 70편의 단행본을 출간했습니다(에세이 포함해서). 해마다 세 권 좀 못미치는 셈이네요. 1987년 데뷔해 1989년 <퍼펙트 블루>를 처음 출간한 미야베 미유키는 21년간 47권의 단행본을 출간해 연간 2.2권을 기록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온다 리쿠는 1992년 <여섯 번째 사요코>이래 18년간 45권을 냈습니다(연간 약 2.5권). 가장 연장자인 오사와 아리마사는 1978년 데뷔해 32년간 76권을 썼습니다(연간 약 2.3권). 우리나라 같았으면 꾸준히 많이 쓰는 작가로 인정할만 하지만 적어도 일본에서는 이들을 다작 작가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써야 '좀 많이 쓴다'고 할까요?

진짜 다작을 하는 사람들을 살펴보기 전에, 적게 쓰는 작가는 누가 있나 잠깐 살펴볼까요?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가 번역된 바 있는 노리츠키 린타로는 자신의 글 쓰는 페이스가 너무 느려서 답답하다고 하는데, 그래도 그는 22년동안 장․단편집 16권에 평론집 3권을 썼습니다.

신본격 추리작가들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시마다 소지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장편을 1년에 열 편씩은 써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시마다 소지는 열심히, 끊임없이 글을 쓰라는 의미에서 한 이야기였겠지만, 전업 작가로 나서려면 그 정도의 각오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일 겁니다(시마다 소지 역시 80권 이상의 저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럼 일본 추리작가 중에서 최고 다작 작가 넘버 원은 누구일까요?

올해 들어 여러 편의 작품이 한꺼번에 번역 소개된 아카가와 지로입니다.
그는 1976년 등단한 이래 2008년에는 <드라큐라성의 무도회>를 출간하면서 오리지널 저작물이 500권에 도달했고(1년 평균 약 15권), 지금은 대략 530권쯤 되는군요. 누적발행부수는 3억 부를 넘어섰습니다.
<삼색 고양이> 시리즈는 장 단편집이 무려 40권을 넘겼으며 그 외에도 <세 자매 탐정단>, <하야카와 가족>, <4문자 숙어> 등 20여 가지나 되는 다양한 시리즈물을 쓰고 있습니다.

‘결말을 정하지 않고 글을 쓴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마구 쓰는 것 같지만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까지 수수께끼 풀이 형식의 추리소설을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한창 때는 한꺼번에 여러 곳에 연재를 했기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서재에 각 작품의 등장인물 일람표를 붙여놓았다고도 하는군요.


현역 최다 발표 작가, 아카가와 지로


아카가와 지로와 쌍벽을 이룰 만한 작가는 니시무라 교타로인데, 1963년 데뷔한 그의 저작물은 2010년 중반 현재 470권에 다다랐으며, 누적 발행부수는 2억 부 이상입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도츠가와 경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열차나 관광지를 무대로 한 것이 많아 ‘트래블 미스터리’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독특하게도 이들 두 사람과 오사와 아리마사는 컴퓨터나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지 않고 여전히 원고지에 펜으로 쓰는 것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기계보다는 ‘손으로 쓰는 것이 빠르다’는 것이 아카가와 지로의 주장입니다. 이분들이 손으로 쓴  것을 입력하는 것도 꽤 힘든 일이겠군요.


원고를 '손으로 쓰는' 니시무라 교타로



엄청난 집필 능력이 전설처럼 전해지는 과거의 작가들도 있습니다.

르포라이터이자 사회파, 하드보일드, 포르노 작가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던 카지야마 도시유키(1930~1975)는 한창 전성기이던 1971년에는 주간지 연재 6개, 신문연재 2개, 월간지 연재 2개, 그리고 소설 전문지에 많은 작품을 기고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매달 원고지 1천-1천2백매를 썼으며, 이틀 사이에 252매를 썼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원고지 규격이 일본에서는 4백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원고 분량을 한국 원고지 분량으로 계산하려면 두 배를 해야 됩니다). 

물론 워드프로세서나 컴퓨터 같은 기기가 없던,  손으로 쓰던 시절이지요. 그의 조수였던 사람의 말에 따르면 그렇게 빨리 쓰면서도 글씨는 깨끗했으며 틀린 글자도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완성되진 않았지만, 그가 구상하던 마지막 작품 <적란운(積亂雲)>은 8천매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예정하고 있었다고 하는군요.



사사자와 사호(1930~2002)는 야쿠자와의 싸움, 교통사고, 자살미수 등으로 여러 번 목숨을 잃을 뻔 했습니다만 그 와중에서도 매월 1천 2백에서 1천 5백매씩 원고를 쓰면서 평생 4백권 출간을 목표로 했습니다.
결국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목표에는 못미쳤지만 380권(마지막 작품은 미완성이었는데 그와 친분이 있던 후배 추리소설가
모리무라 세이이치가 완성했습니다)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바로 마쓰모토 세이초(1909~1992)입니다.
그가 첫 작품을 쓴 것은 보통 작가들보다 훨씬 늦은 40살이 되어서였습니다. 늦게 데뷔했기 때문에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할 일은 많다. 시간과의 경쟁이다’라고 하면서 한 달에 1천매씩 쓰는 한편 끊임없이 자료조사와 취재에 나섰습니다.
그러기를 40년, 80세가 될 때까지도 정력적인 집필을 한 그는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고대사, 현대사까지 파헤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작품 수는 솔직히 세어 볼 엄두가 나질 않는데, 일본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 검색을 해보니 2,224건이 검색되는군요. 저서 목록만으로도 책 한 권은 거뜬히 나올 것 같습니다.


기차 역에서 알리바이 트릭을 구상중인 마쓰모토 세이초

원고지 한 장 쉽사리 못 채우는 입장에서 위에 언급한 작가들은 도무지 인간처럼 보이질 않는군요. 마쓰모토 세이초가 ‘노력만 가지고서는 안 되고, 대부분은 운이다’라는 언급을 했다고는 하지만, 이 말이 평범한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인지 아니면 팔자에 맡기라는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P)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추리닝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카메라이언 2010.11.18 03: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럴 줄 알았어 ;;;;; 역시나 대망의 1위는 아카가와 지로 님이로군요. ㄱㅡ;;;;;;;;;;; 아우 정말, 일 년에 장편 열 편에서 시마다 소지님 미워지고 으흑흑... 이 시간에 혼자 막 울분을 토하다 갑니다. 아우 어서 읽고 써야겠어요.

  2. 이야기꾼 2010.11.18 09: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훗...
    부러우면 지는 거다...

  3. 블레이드 2010.11.19 00: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 저도 일년에 세권쯤은 쓸 수 있습니다. ㅡ.ㅜ;;; 문제는 5백권을 쓴다고 해도 3억권을 돌파할 자신과 능력이 없다는거죠. 저도 마쓰모토 세이초 선생님과 같은 의견입닏. 능력과 여건이 되면 쓸 수 있을만큼 써야죠. 다..다만 팔리느냐가..ㅜ.ㅜ;;;

  4. 평시민 2010.11.19 15: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소설 쓰기를 중단했다가 다시 쓰면서 '적어도 1년에 한 권!'이라는 목표를 잡은 적이 있는데 그 작품들을 공모에 냈다가 모두 미역국 끓이는 데 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단편을 쓰면서 질을 높이는 훈련을 했고 이제 다시 장편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양과 질 모두에서 인정받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글 쓰는 기계를 능가하는 사람들


"3년 전에 칠순 고개를 넘었는데, 그때 나는 결심했습니다. 이제는 메그레 경감이나 그밖에 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입장에서 사는 것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다짐했지요. ‘나는 내 이름으로 220편의 장편소설을 썼고, 필명으로 150편을 썼다. 이제부터는 나 자신의 입장에서만 살기로 하자.'”
                                                           조르주 시므농 - 허버트 미트갱과의 인터뷰(1976)

영국 작가 다알(Roald Dahl)의 단편 <위대한 자동 문장(文章) 제조기 The Great Automatic Grammartizator>에 나오는 ‘자동 문장 제조기’라는 것은 소설의 성격, 주제, 형식, 등장인물, 길이 등을 지정해 놓으면 자동으로 집필을 시작해 인쇄까지 마쳐 주는 환상적인 성능을 가진 기계입니다. 이런 기계를 만들어 낸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은 창작, 즉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상 속의 기계처럼 완벽한 수준에는 못 미치더라도 한때 플롯 휠(Plot Wheel), 플롯 카드(Plot Card) 등 작가의 창작을 도와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도구가 나온 적도 있었고 컴퓨터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등장인물, 배경, 주제를 적어 넣으면 소설을 만들어 주는 프로그램이 나오기도 했지만, 베스트셀러 작가가 ‘저는 이런 창작 보조 도구를 사용해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은 없습니다(혹시 도움을 받았더라도 내놓고 말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발표하는 작품 숫자만 보면 혹시나 그런 글 쓰는 기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궁금한 생각이 들 만큼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 추리작가가 있긴 합니다.

'스릴러의 제왕' 에드거 월러스


추리소설은 규칙이라는 양날의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규칙대로만 한다면 쉽게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지켜야만 하는 규칙 때문에 참신한 작품을 쓰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골치 아픈 추리소설을 쉴 새 없이 발표하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닌 작가들은 대중소설이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하던 20세기 초반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영국 대중소설계의 선두주자였던 에드거 월러스(Edgar Wallace)는 30세에 첫 작품을 낸 후 57세라는 과히 많지 않은 나이로 작고하기까지 27년간 170권이 넘는 장편 소설과 수많은 단편, 30여 편의 각본을 남겼는데, 장편 소설만을 따져 봐도 연간 여섯 편을 쓴 셈이지요. 한때 영국의 서점에서 팔리는 책 네 권중 하나가 그의 책이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아 ‘스릴러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전성기에는 4일 만에 각본 하나를 쓴 다음 그 주말에 장편 소설 하나를 탈고할 정도로 쉴 새 없이 펜을 휘둘렀다고 전해집니다(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플롯 휠'이라는 도구를 고안한 사람도 바로 월러스입니다). 더글러스 톰슨(Douglas Thompson)의 <추리소설의 거장들(Masters of Mystery)>(1931)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남아 있습니다.

한창 집필중인 월러스를 찾는 장거리 전화가 오자 비서가 받았다. “월러스 씨는 지금 막 소설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상대방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좋아요! 다 쓸 때까지 전화 끊지 않고 기다리겠소.”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활동한 작가 프레드릭 데이(Fredric Van Rensselaer Dey)는 1891년부터 닉 카터(Nick Carter)라는 탐정이 등장하는 작품 1천여 편을 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훗날 조사에 따르면 소문보다는 적은 6백여 편으로 밝혀졌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숫자이지요. 닉 카터 시리즈는 추리소설다운 치밀함이 다소 부족한 활극입니다만, 1886년 처음 등장한 이래 1백년이 넘도록 시리즈가 이어져 왔습니다. 다만 수많은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쓰는 바람에 대부분의 작품에는 작가의 이름 대신 ‘닉 카터의 저자(The Author of 'Nick Carter')’ 혹은 ‘유명 작가(A Celebrated Author)’라고 쓰여 있습니다.

월러스나 데이가 주로 잡지 연재를 통해 작품을 끊임없이 발표할 수 있었던 20세기 초반이 지나자 잡지보다는 단행본의 판매가 우세해졌습니다.

‘추리소설의 여왕’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이 붙어 있는 영국의 여류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는 바로 이 시기인 1920년에 등장했습니다. 그녀에게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물론 걸작 추리소설을 썼다는 점에도 있지만 ‘크리스마스를 크리스티와 함께’라는 선전문구가 수십 년 간 이어지도록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다른 여성 작가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작품을 남겼다는 것도 큰 이유입니다.

이정도는 되어야 많이 썼다고 하겠죠 - 애거서 크리스티


원래 변호사였던 미국 작가 얼 스탠리 가드너(Earl Stanley Gardner)는 여가시간을 이용해 12년간 1백여 편의 단편 소설을 싸구려 잡지에 발표해 왔습니다. 당시 그는 오후 11시쯤 귀가해 하루 4천 단어 정도 - 대략 단편 하나 정도 분량입니다 - 의 원고를 쓰고 새벽 3시쯤 잠자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던 그는 작업 방식을 크게 바꿉니다. 1933년 변호사 페리 메이슨(Perry Mason)을 처음 등장시킨 장편 <벨벳 손톱 사건(The Case of the Velvet Claw)>은 직접 글을 쓰지 않고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비서에게 불러줘서 간단히 타자를 마친 후 그것을 토대로 완성했는데, 이틀 남짓 걸렸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절약한 그는 이듬해부터 전업 작가가 되어 1933년부터 1970년 작고하기까지 37년간 페리 메이슨 시리즈 82편을 비롯해 130여 편의 장편과 다수의 단편을 남겼는데, 장편만을 따져 보아도 연평균 세 편 이상을 쓴 셈이지요. 이로 인해 한때 그는 대신 써 주는 작가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오해까지 받곤 했습니다.

이정도는 되어야 많이 쓴 거죠 - 얼 스탠리 가드너(왼쪽)


프랑스에도 가드너와 맞먹을 만큼 빠른 속도로 글을 쓰는 작가가 있었습니다. 벨기에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한 조르주 시므농(Georges Simenon)은 메그레(Jules Maigret) 경감이 등장하는 작품만 장편 77편, 중․단편 35편 등 1백여 편 이상을 남겼습니다. 20세에서 30세 사이에 신문에 1천여 편의 단편을 발표하며 빠른 글 솜씨로 정평이 나 있던 그는 메그레 경감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1931-32년의 2년 동안 스물두 편을 썼습니다(우리나라 기준으로 볼 때 일반적 장편 길이에는 못 미치는 분량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한 달에 한 편 이상 발표한다는 것은 대단합니다). 그는 ‘현대 프랑스 문단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진실로 소설가다운 소설가’라고 앙드레 지드로부터 격찬을 받았을 정도로 추리소설적인 측면보다 인간 내면을 깊이 있게 파고든 문학적인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57개 국어로 번역되어 40여 개 국가에 출판되었고 세계적으로 7억 권 이상이 팔렸다는 것이 그 증명일 것입니다.

이정도는 되어야 많이 썼다고 할 수 있죠 - 조르주 시므농


장편소설에 비해 단편소설은 단순히 짧다는 이유만으로 쓰기 쉬운 것이라고 짐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단편을 많이 써 본 작가들은 물리적인 수고 면을 제외하고는 기발함, 구성 등 여러 면에서 절대 장편소설보다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나마 추리소설 전문 잡지가 줄어들면서 단편만 전문으로 쓰는 작가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에드워드 D.호크(Edward Dentinger Hoch)는 평생 꾸준하게 단편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1973년부터 미국의 추리소설 전문지인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 Ellery Queen Mystery Magazine>에 매월 하나 이상의 단편을 계속 발표했는데(2007년 5월호에서 단 한 번 빠졌습니다), 2008년 초 세상을 떠나기까지 34년간 수록된 그의 작품 수는 450편이 넘습니다(잡지의 숫자보다 작품의 수가 많은 이유는 그가 필명으로 한 달에 두 편을 실은 적도 여러 번 있기 때문입니다). 우등상보다 개근상이 더 가치가 높다는 말도 있는데, 호크에게는 특별 개근상이라도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서구의 전업 작가들은 아무리 빨라도 보통 1년에 한 작품 이상은 발표하지 않는데, 이것은 작가의 능력 부족이나 퇴보라기보다는 출판 시장을 고려한 작가나 출판사의 신중한 정책 덕분이지요. 한 편만 성공해도 부와 명예가 쏟아져 들어오니, 굳이 급하게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아직 일본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음번에는 서구 작가 못지않게 많은 작품을 쓰는 일본의 작가들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P)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추리닝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얼룩끈 2010.11.11 15: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작이란 작가로서는 꿈 중의 하나입니다. 걸작 하나만 제대로 남기기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양과 질 모두 인정받기는 더욱 힘들죠. 한국 문학사상 최고 다작가는 누구인가 궁금합니다.

    • 추리닝4 2010.11.15 1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다 유명한 작가들이라 더 부럽다는^^; 한국 최고 다작가는 누구인지 나도 궁금. 순문학 작가들이야 장편을 자주 안내니 혹시 무협쪽? 한작품을 기본 5권씩들 써시니^^

  2. 카메라이언 2010.11.12 0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아, 감탄했습니다. 특히 책탑보는 순간 부러움이 울컥. 아아, 다음 편에는 마쓰모토세이초옹 이야기가 나오겠네요. 두근두근두근두근. 무지하게 기대되요, 꺅!

  3. 이야기꾼 2010.11.12 13: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쩝...부러울 따름입니다.

    저정도는 써 줘야 아, 좀 썼구나...할텐데 말이죠...

  4. myungworry 2010.11.14 16: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쓰고 쓰고 또 쓰면 못 쓸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쓰고 산만 높다 하더라..(뭔 소리인가요?) 기계의 도움이었든 조수의 도움이었든, 아무튼 개근상 받은 것만해도 대단한 작가들이네요.

  5. 허니문 차일드 2010.12.08 15: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우~ 애거서 크리스티 대단하군요. 늘 꾸준히 활동하시는 작가분들을 보면 정말 그 어떤 것보다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준비가 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암튼 대단하네요.^^

  6. 지나가다 2016.03.01 0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연히 다작 작가를 검색해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범죄와 죽음의 빛깔

'백(白)’자에서 나는 고결(高潔) 내지 고상(高尙)을 연상하는 동시에, 아니 그보다 먼저 그 어떤 병적 환영을 뇌리에 그릴 수 있으며 그리고 거기에 한층 더 강렬한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 수필 <백가성(白哥姓)>, 김내성           

 

우리나라에서 색깔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요즘이야 한국 축구팀이나 응원단에 ‘붉은 악마’라는 별명이 붙어 있지만, 최소한 70년대까지만 해도 국가대표 유니폼은 대개 푸른 색 계통이었지 붉은 색은 잘 쓰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굳이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만 붉은 색은 빨갱이, 즉 공산당의 색깔이었기 때문이지요.


사실 ‘색깔론’이라는 단어 자체는 미술 관련 주제를 벗어나게 되면 논쟁을 의미하게 되어버립니다. 이념 싸움이 되기도 하고, 자칫하면 ‘흑백논쟁’이 되어버려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사람은 ‘회색분자’로 취급받는 일도 생깁니다.


그나저나 이런 이야기는 이제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이런 사상이나 이념을 다룰 것이 아니라 추리소설의 색깔을 한번 살펴보려 하니까요.


고전적인 추리소설은 무지개처럼 알록달록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단색의 요소가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뒤팽이나 홈즈, 뤼팽 등이 등장하는 고전 작품들은 낡은 흑백 사진을 보는 듯한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지요. 일찌기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의 데뷔작 제목을 <주홍색 연구>라고 지었습니다만, 제게는 주홍색보다는 세피아색의 화면이 연상되곤 합니다.


셜록 홈즈는 흑백이 제격? (셜록 홈즈 역은 존 배리모어)


21세기에 들어와 우리나라에 다시 몰아친 홈즈와 뤼팽 붐은 새로운 독자들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읽은 적이 있었던 책을 다시 보려는 분들의 추억이 결합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절모를 쓰고 구겨진 트렌치코트 속에 손을 집어넣은 채 어둠 속에 서 있는 하드보일드 사립탐정 역시 단색이어야만 제격일 것 같습니다.


이런 작품들이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느껴진다면 20세기 후반부터 나타난 작품의 색깔은 다채롭습니다.


최근 2007년부터 요즘까지 우리나라에 출간된 작품들 중에서(창작/번역 모두 포함) 색깔이 들어가 있는 작품을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과연 어떤 색이 선두를 차지했을까요?

1위는 단연 검정색입니다. ‘블랙’, ‘검정’, ‘암흑’ 등의 단어가 들어간 작품은 모두 18편이고, ‘어둠’, ‘다크(dark)'까지 포함하면 7편이 더 추가되어 모두 25편이나 됩니다.


패션업계에서는 매우 세련된 색깔로 여겨지는 검정색이지만, 범죄와 관련이 된다면 그다지 좋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흑백이 가려졌다’, ‘흑막(黑幕)이 걷혔다’, ‘검은 세력’ 등 흔히 쓰는 말에서 볼 수 있듯 흰색이 결백함을 의미하는 반면 검정색은 뭔가 음흉하고 비밀스러운 느낌을 주곤 하지요. 이런 검정색의 느낌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작가는 미국의 코넬 울리치(필명 윌리엄 아이리쉬)와 일본의 마쓰모토 세이초 두 사람을 꼽을 수 있습니다.

코넬 울리치 원작의 영화 [검은 옷의 신부](1968)


울리치는 그의 문체, 그리고 작품 분위기에서 어두움이 느껴집니다. <검은 옷의 신부(The Bride wore Black)>(1940)을 시작으로 <검은 커튼(The Black Curtain)>(1941), <검은 알리바이(Black Alibi)>(1942), <검은 천사(The Black Angel)>(1943), <공포의 검은 길(The Black Path of Fear)>(1944), <상복의 랑데뷰(The Black Rendezvous)>(1948)등의 작품은 블랙 시리즈로 일컬어지면서 ‘블랙 울리치(Black Woolich)’라는 별명을 그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한편 마쓰모토 세이초의 검정색은 어떤 분위기라기보다는 강력한 힘을 가진 ‘어두운 세력’처럼 느껴집니다. <검은 땅의 그림(黑地の繪)>(1958), <검은 화집(黑い畵集)>(1959), <검은 나무숲(黑い樹海)>(1960), <일본의 검은 안개(日本の黑い霧)>(1960), <검은 복음(黑い福音)>(1961), <검은 수첩(黑い手帖)>(1961), <검은 양식(黑の樣式)>(1967), <검은 회랑(黑の回廊)>(1976) , <검은 하늘(黑い空)>(1988) 등 ‘흑(黑)’이라는 한자를 집어넣은 작품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

일본은 한자 생활권인 만큼 색깔이 들어가는 작품을 많이 볼 수 있는데, ‘흑백’이라는 대조적인 느낌을 살린 작품들이 제법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다카키 아키미츠(高木彬光)의 <검은 무지개(黑い虹)>, 아유카와 데츠야(鮎川哲也)의 <검은 백조(黑い白鳥)>, 요코미조 세이시(橫構正史)의 <백과 흑(白と黑)>, 유라 사부로(由良三郞)의 <흑백의 환영(黑白の幻影)>등을 들 수 있지요. 참고로 일본에서 ‘흑이냐 백이냐’는 ‘죄가 있냐 결백하냐’를 의미합니다.

그러다 보니 검정색 때문에 곤욕을 치른 작가도 있습니다. 일본 추리작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던 작가 아토다 타카시는 언젠가 독자에게 항의를 받은 일이 있는데, 다름 아니라 왜 등장인물 중 ‘흑(黑)’이라는 한자가 들어간 이름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악당이냐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흑’씨 성도 없고 ‘흑’자가 들어가는 이름도 별로 없으니, 추리소설 속에서 마음 놓고 써도 될 듯 싶습니다(그런데 '흑'씨 성의 인물이 나오면 비현실적이니 쓸 수도 없겠군요).


요즘 우리나라에서 점점 팬이 늘어나고 있는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는 첫 두 작품에 '블랙'이 붙어 있습니다. 예전에 처음 읽었을 때 혹시 모조리 '블랙'이 붙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이 두 작품으로 색깔은 끝이 났습니다.


두 번째로 많이 등장하는 색은  붉은 색입니다(모두 13편으로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검정색과는 꽤 큰 차이가...). 신호등에서 멈춤을 의미하는 색이며 또한 사람 피의 색깔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눈에 많이 띄고, 약간 경계심을 품게 되기도 합니다.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붉은 손가락>과 지난 여름 출간된 조엘 타운슬리 로저스의 <붉은 오른손>이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파란 색이 9편, 흰 색이 7편 등으로 뒤를 잇고 있습니다.


더보기


흰 색은 한국 추리소설의 선구자 김내성 선생이 끊임없이 추구하던 색깔입니다. 수필 <창백한 뇌수>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지요.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구작(舊作)을 더듬어서 거의 내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작중인물(作中人物)의 이름들을 추려 보았다. 그러한 결과 그들이 태반(殆半)은 ‘백(白)’가성을 가지고 있다는 기이한 사실을 나는 발견하였다. [백가면(白假面)]을 위시하여 [황금굴(黃金窟)]의 백희(白姬), [연문기담(戀文綺譚)]의 백장주(白章珠), [무마(霧魔)]의 백웅(白雄), [시유리(屍琉璃)]의 백추(白秋), [살인예술가(殺人藝術家)]의 백상몽(白想夢), [백사도(白蛇圖)]의 백화(白華), [심야(深夜)의 공포(恐怖)]의 백린(白麟), [마인(魔人)]의 백영호(白英豪)씨 일가, 검열관계로 중단된 [백(白)과 홍(紅)]의 백룡(白龍), 그리고 아직 미발표의 장편 [혈석류(血石榴)]의 주인공은 백수(白秀)로 되어 있다."

 

약간의 강박적인 모습도 보입니다만, 그 순수함이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의 추리소설을 개척한 힘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울리치나 세이초, 그리고 김내성은 한 가지 색에 집착했습니다만, 미국의 작가 존 D.맥도널드나 월터 모즐리는 다양한 색깔의 제목을 사용했습니다. 맥도널드의 대표적 주인공인 배를 탄 사립탐정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는 모두 21편이 있는데, 첫 작품인 <The Deep Blue Good-by> (1964)에서부터 마지막인 <The Lonely Silver Rain>(1984)까지 모두 제목에 색깔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스물 한 개의 색깔 중에 검정색은 빠져 있군요.

이 아름다운 여인이 푸른 드레스를 입은 악마? 영화[블루 데빌]에서


90년대 등장해 클린턴 전 대통령도 애독자라고 밝힌 바 있는 월터 모즐리의 흑인 사립탐정 이지 롤린스 시리즈도 역시 단 한 편을 제외하고는 제목에 색깔이 들어갑니다(단편집 제외). 번역된 작품이 하나도 없어서 아쉽습니다만, <Devil in a Blue Dress>(1990)는 다행히도 <블루 데빌>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우리나라에도 비디오나 DVD 등으로 나와 있습니다(덴젤 워싱턴이 주인공 롤린스 역을 맡았습니다).



그나저나 추리소설을 생각하면 여러분들은 과연 무슨 색깔이 떠오르십니까?              (:P)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추리닝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카메라이언 2010.11.05 0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질문이 너무 어려워서 덧글이 안 달렸나 봅니다. ㅋㅋㅋ 퇴근하고 다시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추리소설하면 생각나는 색...은 역시 검은 색인 듯합니다. 책의 제목에 대한 이야기는 미리 하셨듯이 그러하고, 그보다는 정말 말이에요, 책장이요, 온통 까아아아아매애애애애애요오오오오오오 -,.-;;; 표지들에 검은 색이 많다는 이야기. 흐흐흐흐 하지만 김내성작가님의 책은 마인이 흰 색이라, 아아 혹시 '백'이 많이 들어가서 그럴까나 하고 문득 생각했답니다.

    • 추리닝4 2010.11.05 1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ㅎㅎ 책장 이야기를 하자면 전 밀리언셀러클럽 책이 많다 보니 하얀 느낌. 예전 노블하우스란 출판사에서 나온 제프리 디버와 퍼트리샤 콘웰 시리즈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 책들도 옆면은 다 하~얗다는..

    • 카메라이언 2010.11.05 1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맞다. 밀리언셀러는 그러고보니 하얗네요! 저어기 위에 꽂힌 것을 보다 목이 뒤로 삐끗할 뻔 (;;;)

  2. 얼룩끈 2010.11.11 15: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색깔과 추리를 연결시키다니...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 추리소설의 성격에 따라 색은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정통 추리물이라면 붉은색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붉은색은 피의 색이기 때문이지요.

  3. 얼룩끈 2010.11.19 15: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 감사합니다. 새 작품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름 뒤에 숨어있는 비밀


"난 필명이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 웨스트레이크가 한 말을 결코 잊을 수가 없어요. 그는, 맑은 날에는 그가 글을 썼고, 날씨가 궂은 날에는 스타크가 일을 떠맡았다고 했습니다." 
                                     -<다크 하프 The Dark Half>(1989), 스티븐 킹

자기의 본래 모습조차 잊어버렸다고 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괴도 아르센 뤼팽은 각각의 변장에 어울리는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마 열 개는 충분히 넘은 것 같지만 스무 개까지는 안 되는 것 같네요. 뭐,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인물이니까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마는 너무 많으면 작가인 모리스 르블랑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테지요.

그런데 영국의 추리소설가 존 크리시(John Creasey)는 비록 얼굴 생김새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는 없었을망정 이름의 숫자는 뤼팽을 압도합니다. 추리소설을 쓸 때는 존 크리시를 비롯해 고든 애쉬, 패트릭 길, J.J.매릭, 제레미 요크 등을 사용했으며 웨스턴 소설(서부극 소설입니다)을 쓸 때는 텍스 라일리, 지미 와일드, 켄 레인저 등, 그리고 로맨스 소설을 쓸 때는 마가렛 쿡, 엘리제 퍼캠프스 등 여성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작품 표지에 올라간 이름은 무려 28개,그리고 6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존 크리시 - 스물여덟개의 이름을 가진 사나이


실제 이름 대신 쓰는 가짜 이름은 범죄자들이 사용하면 가명(假名), 연예인들이 사용하면 예명(藝名), 작가들이 사용하면 필명(筆名) 등 다양하게 일컬어지는데(그러고 보니 이름 자체에도 다양한 이름이 많군요), 작가들이 필명을 쓰는 이유는 본명이 추리소설에 별로 어울리지 않게 평범하다거나, 유명인의 이름과 같거나 비슷하다던가, 발음이 어렵다던가, 혹은 이름을 숨기고 싶다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무명작가인 케네스 밀러(Kenneth Millar)는 추리소설을 쓰는 아내 마가렛 밀러(Margaret Millar)보다 늦게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네 권의 작품을 발표한 후 이미 유명했던 아내의 작품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존 로스 맥도널드(John Ross Macdonald)라는 필명을 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미 자리를 잡은 유명 추리작가 존 D.맥도널드(John D.MacDonald)와 혼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결국 그가 선택한 이름은 로스 맥도널드(Ross Macdonald)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그는 하드보일드의 거장이 되었고, 지금은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요. 역시 사람의 앞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영국의 계관 시인이며 옥스포드 대학 교수였던 세실 데이 루이스(Cecil Day-Lewis)는 낡은 지붕의 수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즐겨 읽던 추리소설을 직접 쓰기로 했는데, 본명으로 글을 쓰기가 부담스러워 니콜라스 블레이크(Nicholas Blake)라는 필명을 사용했습니다. 처녀작인 <증거의 문제(A Question of Proof)>(1935)가 성공하면서 작가가 누구인지 금방 밝혀졌으나, 평생 본명으로는 추리소설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스티븐 킹은 웨스트레이크의 작품 이미지에서 착상해 <다크 하프(The Dark Half)>(1989)를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소설가 새드 보먼트(Thad Beaumont)는 조지 스타크(George Stark)라는 이름으로 폭력적인 범죄소설을 쓰고 있는데, 이 이름은 바로 도널드 웨스트레이크(Donald Westlake)의 필명 리처드 스타크(Richard Stark)에서 따온 것입니다. 웨스트레이크는 본명으로 <뉴욕을 털어라 (The Hot Rock)>(1970)와 같은 밝고 유쾌한 분위기의 작품을 쓰지만 스타크란 필명으로는 <인간 사냥 (The Hunter, 리 마빈이 주연한 <포인트 블랭크 Point Blank>, 멜 깁슨 주연의 <페이백 Payback> 등 두 차례나 영화로 제작된 바 있습니다)>(1962)과 같은 어둡고 폭력적인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웨스트레이크의 필명은 스타크 이외에도 앨런 마셜, 터커 코우 등 15개가 더 있습니다.

오늘은 맑은 날인가요 궂은 날인가요 -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두 명이 함께 작품을 쓸 때면 대개 ‘누구와 누구’라는 식으로 쓰지만, 필명 하나를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미국의 추리작가 엘러리 퀸이 떠오르네요. 작품 속 탐정의 이름이자 작가의 이름이기도 한 엘러리 퀸은 사촌 형제 사이인 프레드릭 더네이(Frederic Dannay)와 맨프레드 리(Manfred B. Lee)의 합작 필명이란 것은 추리소설 팬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요. 하지만 ‘더네이’나 ‘리’도 본명이 아닌데, 그들의 원래 이름은 대니얼 네이던(Daniel Nathan)과 맨포드 레포프스키(Manford Lepofsky)입니다. <로마 모자의 수수께끼>로 데뷔한 그들은 바나비 로스(Barnaby Ross)라는 필명으로도 <Y의 비극>등의 걸작을 발표한 뒤, 이름이 밝혀지기 전까지 퀸과 로스로 각각 행세하며 장난기 넘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컴퓨터의 덫(コンピュ-タの熱い罠)>(1986)을 쓴 오카지마 후타리(岡嶋二人)는 이름에서부터 ‘두 사람(二人)’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의미 그대로 도쿠야마 준이치(德山諄一)와 이노우에 이즈미(井上泉) 두 사람의 합작 필명입니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은 성(性)을 숨기기 위해 필명을 쓴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처럼 여겨지지만 20세기에만 해도 여성 작가들은 남성 작가들의 전유물인 미스터리를 발표하기 위해서는 남자 이름을 써야만 했습니다. 영국 여성작가 루시 비어트리스 맬리슨(Lucy Beatrice Malleson)은 앤소니 길버트(Anthony Gilbert), J.키머니 키스(J.Kimeny Keith)라는 필명으로, 미국 시카고 출신의 여성작가 조지애너 앤 랜돌프(Georgiana Ann Randolph)는 크레이그 라이스(Craig Rice), 마이클 배닝(Michael Venning)이라는 남성적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했지요.

필명은 아니지만 영국 작가 필리스 도로시 제임스(Phyllis Dorothy James)는 여성이라는 선입견을 벗어나기 위해 약자를 써서 P.D.제임스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우리나라에 번역된 어느 작품에서는 P.D.를 Ph.D로 오해했는지 ‘제임스 박사’라고 소개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의 문학평론가이자 야구광인 오오이 히로스케(大井廣介)는 타지마 리마코(田島莉茉子)라는 이름으로 <야구 살인사건(野球殺人事件)>이라는 작품을 내 놓았습니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일본에서는 여성 작가가 드물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1930년대 활약한 미국 작가 풀턴 아워즐러(Fulton Oursler, 1893-1952)는 추리소설을 쓸 때는 이름을 앤소니 애봇(Anthony Abbot)이라는 필명으로 바꾸고, 작품은 모두 ‘about’으로 시작하는 제목을 지었습니다. 작가의 이름이나 작품 제목이 모두 ‘A’로 시작되기 때문에 도서관의 10진 분류법에 의해 정리하면 항상 목록 앞부분에 오도록 한 것이지요. 이와는 좀 다르지만, 본명이 재니스 영 브룩스(Janice Young Brooks)인 미국의 여성작가 질 처칠(Jill Churchill)은 알파벳 순으로 진열된 서점 책꽂이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근처에 자리 잡기 위한 필명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필명은 어떤 방법으로 지을까요?

존 크리시가 기디언 경감 시리즈를 발표할 때 썼던 ‘J.J.매릭(J.J.Maric)’이란 필명은 자신의 이름 존(‘J’ohn), 부인 진(‘J’ean), 두 아들 마틴(‘Mar’tin)과 리처드(‘Ric’hard)등 가족 이름을 합쳐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신데렐라의 함정(Piège pour Cendrillon)>(1962), <긴 일요일의 약혼식(Un long dimanche de fiançailles)>(1991)등의 작품이 소개된 프랑스 작가 세바스띠앙 자프리조(Sebastien Japrisot)의 본명은 장 밥티스트 로시(Jean-Baptiste Rossi)인데, 그는 자신의 이름 철자 순서를 바꿔(애너그램 anagram이라고도 합니다) 새 이름을 만들어 냈습니다.  

국내 추리작가 중 가장 독특한 필명을 가진 분을 꼽아보자면 바로 원로 추리작가인 노원 선생님입니다. 원래 언노운(Unknown: '알려지지 않은','알 수 없는')을 한글로 차용한 안노운(安老雲)을 필명으로 사용하려 했다가 더 짧고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노원(No One: 한자명은 盧媛→盧遠→魯元으로 세 차례 바뀝니다)’으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단편 <미스터리 클럽의 살인>에는 안노운 경감이 등장해 한 가닥 흔적을 남기고 있지요.

'안노운'이 되실 뻔한 노 원 선생님


일본 추리문학계의 거두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의 본명은 히라이 타로(平井太郞)인데, 에드거 앨런 포우의 이름과 흡사하게 들리는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추리소설의 원조인 포우의 이름을 빌린 작가답게 그는 일본 추리문학계의 선구자로서 추리작가협회의 조직 및 위상 확립에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요즘 눈에 띄는 독특한 필명의 작가는 <불야성(不夜城)>(1996)으로 알려진 하세 세이슈(馳星周)입니다. 그의 필명은 국내 독자들에게 일본식 발음으로는 별 의미가 없겠지만, 한자를 거꾸로 읽어보면 옳커니 할 독자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세 세이슈는 홍콩 영화의 팬인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주성치(周星馳)의 이름을 거꾸로 해서 자기의 필명으로 삼은 것이지요. 코믹한 배우의 이름을 빌리긴 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웃음기라고는 거의 없이 어둡고 진지합니다.

성공하려면 이분에게 이름을 얻어가야... 시마다 소지


시마다 소지(島田荘司)는 <점성술 살인사건(占星術殺人事件)>(1981)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신본격(新本格)작가들의 대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신인 작가들을 추천하고 독려했습니다. <십각관의 살인사건>을 쓴 아야츠지 유키토(綾辻行人), <벚꽃 피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의 작가 우타노 쇼고(歌野晶午), <살육에 이르는 병>의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我孫子武丸),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의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法月綸太郞)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시마다 소지는 점성술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성명학(姓名學)에도 일가견이 있어 이들의 필명을 다 지어주었다고 하는군요.

그나저나 작가로서 성공하려면 작품도 중요하지만 이름을 잘 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P)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추리닝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뎅뎅 2010.10.28 16: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저도 주성치 왕팬인데. 필명은 하나도 없는 저는 한때 별명이 한 스무개남짓 됐던 적도 있습니다. 실없는 오라버니가 저를 닥치는대로 부르다가 그만... 그때 다 적어나 둘 걸, 지금은 대여섯개 밖에 생각이 안나요.

    • 추리닝4 2010.10.29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명성 자자한 그 오라버니 어릴때부터 언어유희를 꽤 즐기셨군. 합류걸님^^; .. 다른 얘기지만 나는 네이버에서 '최코치'란 닉네임을 쓰는데 많은 사람들이 헬스장 관련 일 하는 사람인 줄 알더라는 ㅠㅠ

  2. 갈매 2010.10.28 17: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마다 소지!
    재밌네요. 우타노 쇼고며 아야츠지 유키토의 필명을 지어줬다니. 이들의 이름이 다 필명이었던 거군요.
    저도 좋은 필명 하나 얻으면 글이, 팍팍 써지려나??

  3. 카메라이언 2010.10.30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할아버지의 소설 '뉴욕을 털어라'와 '페이백'은 와앗, 정말 거리가 있는데요! '뉴욕을 털어라'는 정말 가볍던데! 새삼 놀랍니다. 아아, 그나저나 시마다 소지 넘넘 좋아하는데 저렇게 생기셨구나. 사진은 처음 봤어요. 와 멋져멋져 꺅꺅!

  4. 이야기꾼 2010.10.30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필명하면 <류삼> 씨라는..ㅎㅎ
    그나저나 요새 류삼씨는 뭐하시나...

  5. 붕붕 2010.11.05 1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류삼', '삼류'...
    아 그렇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6. 필론 2010.12.08 17: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Bill Bass와 John Jefferson이 한팀으로 Jefferson Bass란 이름으로 Body Farm 시리즈를 내는것이나, 요즘 화제가 되는 드라마 캐슬의 캐릭터가 실제 작가처럼 책을 낸 Richard Castle의 경우도 특이한 경우인것 같습니다.

    • 추리닝4 2010.12.09 14: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리처드 캐슬 이름으로 출간하는 아이디어는 괜찮은 것 같아요..극중에서 함께 포커 치던 제임스 패터슨 옹이 생각납니당 ㅋㅋ 필론님 블로그와 링크 완료^^

    • 필론 2010.12.09 14: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임스 패터슨이 (시즌 2에서는 마이클 코넬리가) 카메오로 등장한다는 것도 드라마 캐슬의 매력인것 같더군요.^^



속고 속이는 죽음의 다이아몬드

                                  

탐정 짓은 그만하고 야구나 해. 그렇지 않으면 다음은 네 차례야.
                                                -<스트라이크 살인>(1984), 리처드 로젠

 

한동안 서늘한 가을 날씨를 뜨겁게 달구었던 한국 프로야구도 이제 마무리되었습니다. 미국과 일본 프로야구도 포스트시즌 경기가 벌어지는 중이고, 겨울이 되기 전에 모두 끝이 나겠지요.

여기서 잠깐. 일반적으로 운동장은 '그라운드Ground'라고 하지만 야구장은 '다이아몬드 Diamond'라고 합니다. 이유는 단순한데, 하늘에서 보면 각 루를 이어지는 내야 지역이 다이아몬드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1980년대 후반 뉴욕 메츠에서 활약했던 무키 윌슨은 야구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 이유를 묻자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아내가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원했거든요."

미국 메이저리그 프로야구계의 밀실 미스터리(?)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1994년 7월의 일이니 꽤 되었습니다만,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진 라몬트 감독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잘 아시겠지만 추신수 선수가 현재 소속된 팀입니다)와의 경기 도중 상대팀 간판선수이자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던 강타자 알버트 벨이 부정 배트를 쓴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심판은 벨의 배트를 압수해서 사무국에 보내기 전까지 심판 라커룸에 보관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심판 라커룸에 들어간 심판들은 눈을 의심했습니다. 전날 압수했던 벨의 배트 대신 그의 동료 폴 소렌토의 배트가 놓여 있었던 겁니다. 라커룸 문은 잠겨 있고 열쇠를 가진 것은 분명히 심판들 밖에 없으며 그렇다고 심판들 중 누군가가 바꿔친 것도 절대 아니었습니다. 추리소설에 나올 만한 불가사의한 밀실 사건이 벌어진 것일까요?

배트가 수상하면 이렇게 검사를 받습니다


하지만 과학수사 팀이나 명탐정이 나설 필요도 없이, 심판들은 곧 알아챘습니다. 동료 선수가 천정을 통해 라커룸에 들어가 다른 배트와 바꿔치기 한 것이었습니다. 상황은 금방 확인됐고, 인디언스 팀은 벨의 배트를 내 놓아야만 했습니다. 결국 그 배트는 X선 검사결과 이물질, 즉 코르크가 들어 있는 것으로 판명돼 벨은 7경기 출전정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약 반 년쯤 지나 이듬해 춘계 훈련 때 인디언스의 투수 제이슨 그림슬리는 자신이 배트를 바꿔치기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덧붙이길, 처음에는 벨의 다른 배트로 바꾸려 했지만 모두 코르크가 들어 있어서 할 수 없이 소렌토의 것을 가져가야만 했다는 것이었지요.(미국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실험한 것을 보면 코르크를 넣었을 때 효과는 거의 없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부정방망이를 사용한 것은 어쩌면 헛수고였을지도?) 야구계의 밀실 미스터리는 이렇게 싱겁게 끝났습니다.

그나저나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추리소설과 야구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억지를 써 본다면 몇 가지 들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공통점은 규칙이지요. 야구를 비롯한 운동경기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어서 선수들은 그것을 지켜야만 하며, 추리소설 역시 유달리 규칙이 많기 때문에 작가 역시 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써야만 합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규칙을 약간 위반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 정도가 심하면 ‘반칙왕’이나 ‘엉터리 작가’라는 명예롭지 못한 꼬리표가 따라다니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경쟁입니다. 선수들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심지어 직접 경기를 하지 않는 관중까지도 응원으로 경쟁을 합니다. 추리소설 속에서는 탐정과 범인사이에 대결이 벌어지지만, 그 바깥 - 즉 현실에서는 작가와 독자의 머리싸움이 벌어지지요. 작가는 뻔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며, 독자는 작가의 속임수를 간파하기 위해 꼼꼼하게 읽거나 심지어 메모까지 해 가면서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씁니다.

이런 승부욕 탓인지 추리작가 중에는 야구팬이 적지 않습니다. 거장 엘러리 퀸(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사촌 형제간인 맨프레드 리와 프레드릭 더네이의 합작 필명입니다)은 단편집 <엘러리 퀸의 새로운 모험(The New Adventures of Ellery Queen)>의 절반 가까운 분량을 스포츠 소재 작품에 할애했는데, 그중 <사람이 개를 물었다 Man Bites Dog>(1940)는 월드 시리즈가 한창 벌어지는 야구장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황금의 투타 콤비? - 어린 시절의 엘러리 퀸(왼쪽이 리, 오른쪽이 더네이) (1912년 촬영)


또한 걸작 단편 <특별요리(Speciality of the house)>를 쓴 스탠리 엘린은 브루클린 다저스(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사랑하고 뉴욕 자이언츠(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증오하는 프로야구 팬(다저스와 자이언츠의 관계는 미국 프로 스포츠 계에서 최고의 앙숙으로 꼽힙니다)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홈 구장 펜웨이 파크


또한 올해 작고한 로버트 파커는 자신이 살고 있는 보스턴의 프로야구팀을 작품 속에 등장시켰습니다. 사립탐정 스펜서는 <최후의 도박(Mortal Stakes)>(1975)에서 보스턴 레드삭스 구단의 의뢰로 에이스 투수 마티 랩이 승부조작을 하는지 조사에 나섭니다. 여기서 스펜서는 야구장이라면 보스턴의 홈구장 펜웨이 파크만한 곳이 없다고 극찬하는 대목이 있는데, 저도 가 본 적은 없지만 TV 중계 화면만으로만 보아도 멋진 곳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포의 시구'를 하는 스티븐 킹.

보스턴의 팬이라면 스티븐 킹이 더 유명하겠군요. 그의 작품 치고는 '덜 무서운'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The Girl Who Loved Tom Gordon)>(1999)가 눈에 띄고(톰 고든은 레드삭스의 구원투수로 활약했는데 나중에는 뉴욕 양키즈로 팀을 옮깁니다), 베이브 루스의 저주가 깨지던 2004년 시즌을 다룬 <Faithful>이라는 논픽션을 쓰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유명작가인 폴 오스터가 먹고살기 힘들던 무명시절 ‘탐정소설은 돈이 된다’는 생각으로 쓴 작품이 <스퀴즈 플레이(Squeeze Play)>(1976)입니다. 살해 협박을 당하는 스타 야구선수가 나오고 사립탐정이 등장하는, 하드보일드 냄새가 푹푹 풍기는 매력적인 작품이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작품이 폴 오스터에게 큰 돈을 벌어다 주지는 못했습니다. 한때 야구 카드게임도 고안해서 팔아보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야구 관련 추리소설이 많은 나라는 일본입니다. 일본은 프로축구 창설과 2002년 한일 월드컵 등을 계기로 축구의 인기가 높아졌지만 역시 최고 인기 종목은 ‘미국이 발명하지 않았으면 일본이 발명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야구입니다. 그러다 보니 야구를 소재로 한 작품 역시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번역된 야구 관련 작품으로는 고교야구선수의 의문의 죽음을 다룬 미야베 미유키의 <퍼펙트 블루>(1989)가 있겠군요. 생각보다는 적은 것 같습니다.

일본 작가 중에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면 구장에서 스타 선수가 살해되는 사건을 다룬 <4만 명의 목격자(四万人の目擊者)>(1959)를 쓴 아리마 요리치카(有馬賴義)를 들 수 있겠는데, 그는 야구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프로야구 입단 테스트를 받은 경험이 있으며 자비로 아마추어 팀을 창단해 감독 겸 투수를 맡았는가 하면 1960년대에는 대학야구팀의 감독을 맡아 두 차례 우승을 한 경력도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의 야구 관련 추리소설은 정현웅의 <스타의 마지막 여름(<황제 살인>으로도 출간>(1986), 박청하의 <마운드의 틈입자>(1990), 이승영의 <코리안 시리즈 살인사건>(1992), 그리고 단편으로 문윤성의 <프로야구와 프로도박사> 등으로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닙니다. 1982년 프로야구 창설 이후 바람을 타고 잠깐 나오는 듯하더니 요즘은 보기 어렵네요. 좀 아쉽습니다.

한국 추리작가들이 쓴 야구 소재 작품들.


야구 시즌이 끝나면 팬들께서는 섭섭하겠지만,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야구는 다시 시작합니다. 그동안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많이 읽으시길 ^^ (:P)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추리닝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야기꾼 2010.10.21 0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핫...야구와 추리소설이 이렇게 얽혀 있을 줄은 몰랐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 카메라이언 2010.10.21 11: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 역시 앨러리퀸의 야구 소설(?)이 제일 먼저 나오는군요. 야, 정말 그런데 야구나 축구나 여러가지 미스터리를 끌어낼 수 있는 요소가 많은 듯해요. 베이비루스 우주인설에 맞춘 추리물도 나올 수 있을 듯하고. 흐흐. 또, 전 명탐정 코난도 정말 좋아하는데(광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만 합니다만 주변에서 인정을 안 합죠) 이 이야기를 보면 코난과 가장 친한 친구(?)인 핫토리 헤이지가 각각 축구와 야구로 캐릭터를 표현합죠. 때문에 요 두 소년이 서로의 스포츠가 최고다, 하고 싸울 때란 참 즐겁더라고요.


 

타인의 시선에서 나를 숨기는 방법

                                  

"당신이 어떤 인물로  변장했을 때 당신 자신이 완전하게 그 인물이 되지 않는다면 결국
 들통 날 걸세.” 

                                                                  
-<39계단>(1915), 존 버캔
   

                                                                      
어린 시절 뭔가 잘못했을 때, 아니면 누구를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을 때 손오공처럼 둔갑술을 가졌으면 했던 기억이 있는 분은 많을 것입니다. 추리소설 속의 탐정이나 악당들이 주문만 외워서 순식간에 변신할 수 있다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현실성을 중시하는 추리소설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보통 사람에게는 초능력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변하려면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쫓아가거나 쫓기는 경우, 다른 사람을 대신하고 싶은 경우 등 이유야 어쨌든 간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을 때 사용하는 수단이 변장입니다. 

사실 영화에서 나오는 변장 장면은 비현실적입니다. TV 시리즈나 영화로 제작되었던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에서는 등장인물이 인조 피부를 뒤집어쓰고 다른 사람으로 변장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만, 영화와 현실이 똑같진 않을 것입니다. 주인공이 다양한 인물은 물론 심지어는 무생물로까지 둔갑하는 코미디 영화 <마스터 오브 디스가이즈(Master of Disguise)>도 있었습니다만, 이건 말 그대로 코미디니까 그냥 봐 줄 수 있는 것이었지요. 

이것으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영화 '페이스오프'에서


변장은 크게 영구적인 변장과 일시적인 변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구적인 변장은 바뀐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일시적인 변장은 필요할 때만 자신의 모습을 감출 뿐 평상시에는 원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지요.


영구적인 변장 중 대표적인 것은 물리적으로 성형수술을 하는 방법입니다. 현실에서도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해 거의 완전할 정도로 다른 얼굴이 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작품 속에서는 수배중인 악당이 주로 이용하며, 증인이나 정치적 망명자 등도 신변보호를 위해 이용하곤 하지요. 가끔 성형수술로 특정한 사람과 똑같은 얼굴로 바꾼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이렇게 되려면 원래부터 체격이나 용모가 가까운 편이어야 가능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에 있었던 카게무샤(影武者)라던가, 이라크의 전 대통령 후세인은 집권 당시 자신과 비슷한 인물을 여럿 ‘만들어’ 암살 위협에 대비했다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이지요. 경찰과 범죄자가 서로의 얼굴 피부를 그대로 뒤집어쓰고 상대방 행세를 하는 <페이스 오프(Face Off)>(1997)라는 영화도 있었지만 사람의 외모는 피부보다 골격에 의해 나타나기 때문에 영화처럼 다른 사람 얼굴의 피부를 갖다 붙인다고 해서 그 사람의 얼굴과 절대 똑같은 얼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면 신분을 위장하는 것만으로도 영구적 변장이 가능합니다. 땅이 넓고 신분등록제도가 약간 느슨한 편인 미국 등 서구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지만, 주민등록 제도가 철저한 편인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는 사회생활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것이, 신용불량 때문에 재기불능이 되어 타인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여인의 인생을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火車)>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일시적 변장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다른 사람의 옷을 입는 것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변장술로, 전쟁 때는 적군의 옷을 입고 기습공격을 하는 일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물론 이것은 전술적 위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서로 얼굴을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거짓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신분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포우의 <도둑맞은 편지>에 등장하는 뒤팽은 편지를 훔친 장관을 찾아갔을 때 본명 대신 다른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이름을 사칭하고 남의 집을 뒤지는 뒤팽 - 포우의 '도둑 맞은 편지'에서


수완이 뛰어난 사람은 이런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모습을 바꾸기도 하지요. 프랑스의 실존인물 비도크는 다양한 사람으로 변장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범죄자를 잡아들이면서 수사관으로서의 경력을 쌓았으며, 그의 후배뻘인 명탐정 홈즈와 괴도 뤼팽 역시 놀라운 변장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홈즈는 노인에서부터 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로 변장했고, 뤼팽은 귀족이나 건달은 물론 한술 더 떠 경찰 간부로 변장해 형사들을 지휘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에 등장했던 일본의 전설적 범죄자 ‘괴인 20면상(怪人 20面相)’은 얼굴이 스무 개라는 별명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세상을 뒤흔들어놓곤 했습니다.


실제 변장의 교과서라고 할 만한 작품이 있습니다.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재칼의 날(The Day of the Jackal)>에서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 암살을 의뢰받은 암살전문가 ‘재칼’은 자신과 비슷한 외모와 체격을 가진 덴마크 목사, 미국 대학생의 여권을 훔치고 죽은 사람의 이름으로 또 다른 여권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임무 수행 준비에 들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재칼은 대단히 세심하게 다양한 신분으로 위장합니다. 암살용 무기와 가짜 신분증을 마련한 그는 벨기에의 브뤼셀을 거쳐 이탈리아의 밀라노, 제노바 등을 거쳐 프랑스로 침투해 들어가는데, 프랑스 경찰은 암살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지만 정작 암살자에 대해서는 전혀 정보가 없는 난감한 처지에서 대책을 세워야만 합니다.

제이슨 본은 그의 본명이 아닙니다 -영화 '본 아이덴티티'에서

변장은 공권력을 이용하면 훨씬 수월해집니다. 경찰을 비롯한 정부 조직은 범죄나 테러조직 침투나 함정 수사를 위해 위장을 하는데, 때로는 신분을 아예 바꿔버리는 방법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로버트 러들럼의 <본 아이덴티티(The Bourne Identity)>(1980)에서는 거물 테러리스트를 잡기 위해 월남전 특수부대 출신 - 한때 ‘카멜레온’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뛰어난 변장술을 갖춘 - 요원을 제이슨 본(Jason Bourne)이라는 인물로 변신시킵니다. 그런데 그가 임무수행 와중에 사고로 기억을 상실하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지고 말지요(이 이야기는 영화로 제작되면서 배경과 내용이 많이 바뀌긴 합니다).

엘러리 퀸 '중국 오렌지의 수수께끼' 표지

피해자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흔히 있네요. 자신의 자발적 의사가 아니라서 변장이라는 말이 어색합니다만, 살인자가 피해자의 신분을 숨겨 자신의 범행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것이지요. 죽은 사람이 실제로는 다른 사람이었다…라는 이야기는 무척 많지만 어떤 작품인지 밝히는 순간 작품의 맛이 달아나 버리니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엘러리 퀸의 <중국 오렌지의 수수께끼(The Chinese Orange Mystery)> (1934)에서는 뉴욕 중심가의 한 호텔 대기실에서 정체불명의 남자가 변사체로 발견되는데 기묘하게도 피살자의 복장이 모두 뒤집혀 있습니다. 즉 상의는 등 쪽에서 단추가 채워져 있고 구두를 제외한 셔츠, 바지, 조끼, 그리고 속옷까지 그런 식으로 입혀져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가구나 시계, 카펫 등 방안의 가구라는 가구도 마찬가지로 반대편을 향하고 있습니다. 과연 피해자는 누구이며 왜 모든 것이 뒤집혀 있는 것일까요. 독자들을 궁금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도입부입니다  (:P)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추리닝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mignon 2010.10.07 23: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엘러리 퀸의 소설, 제목부터 확 끄는데요?? 찾아봐야겠어요!!

    이 시리즈, 정말 재밌어요! ^^

  2. 2010.10.11 15: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만든 자와 푸는 자, '은밀한 메시지'

 



1993년, 재일교포 작가 레이라(麗羅: 한국명 정준문)는 장편 <청구사보(靑丘四寶)의 비밀>에서 수수께끼 하나를 독자에게 던졌습니다.

‘청구사보의 청룡향로에는 ‘양월탈상득(良月脫相得)’, 백호도침에는 ‘향녀사이지(向女四而智)’, 주작매병에는 ‘견옥해화알(犬玉解和閼)’, 현무주자에는 ‘망영신당궤(亡迎神當匱)’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스무 자를 미즈사와 유미는 ‘양견향망월(良犬向亡月) 옥녀영탈해(玉女迎脫解) 사신상화이(四神相和而) 당득알지궤(當得閼智匱)’, ‘즉 좋은 개는 지는 달을 향하고, 옥녀는 탈해를 맞으며, 네 신이 서러 어우러져 이제 알지의 궤를 얻다’로 풀이했습니다. 이를 힌트로 해서 고려 대학자 김부식이 숨겨놓은 신라 천년 왕조의 재보가 있는 곳을 맞춰 보십시오.’

작가는 독자에의 도전을 위해 작품 끝에 있어야 할 ‘수수께끼 풀이’를 하지 않고 현상 공모를 했습니다. 그런데 응모자는 무려 1천2백 명이나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정답은커녕 비슷하게 맞춘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렇듯 누군가에게 전달해야 할 사항이 있는데, 그것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남들의 눈에 띄어도 쉽게 알아볼 수 없을 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암호입니다.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위의 문장만 가지고 이 암호를 푸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 한번 도전해 보시길. 답은 이 글의 끝에 있습니다.

암호의 역사는 기원전 450년 경 그리스 인들이 사용했던 스키테일(Scytale)이라는 도구에서 알 수 있듯 대단히

스키테일

오래되었습니다. 당시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는 굵기와 길이가 같은 두 개의 둥근 나무봉(스키테일이라고 합니다)을 만들어 하나는 본부, 다른 하나는 파견 지역의 장군에게 주었습니다. 뭔가 전달할 내용이 있으면 이 나무봉에 가느다란 종이 두루마리를 겹치지 않도록 감은 다음 그 위에 글씨를 쓴 후 종이를 상대에게 보내면 됩니다. 만약 종이를 풀어서 보거나 같은 굵기가 아닌 나무봉에 감으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잦은 전쟁으로 혼란기였던 16-17세기의 유럽 각국에서는 암호에 대한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지배자가 수시로 바뀌면서 적과 동지의 관계도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시대, 어디에 첩자가 있을지 모르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반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 평범한 편지가 언제 어디서 반역의 증거물이 될 수도 있던 시절에 암호는 필수적이었겠지요.

현대 추리소설의 선구자 포우는 암호 소설의 원조이기도 합니다. 단편 <황금 풍뎅이>에서 명탐정 뒤팽 대신 등장한 미국 청년 윌리엄 레그랜드는 황금빛 풍뎅이를 잡기 위해 주운 양피지에 보물을 숨긴 장소를 알려주는 괴상한 암호가 적혀 있는 것을 알아내고 친구와 하인의 미치광이 취급을 무릅쓰고 열정을 불태웁니다. 문자 그대로 작가와 독자와의 두뇌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암호 추리소설은 후배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줘 추리소설의 초기인 20세기 초반에는 뛰어난 후속 작품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황금 풍뎅이>의 암호풀이를 거의 모방한 듯한 코난 도일의 단편 <춤추는 인형>을 비롯해 르블랑의 <기암성>, 멜빌 데이비슨 포스트의 <대암호>, 오스틴 프리먼의 <금고>, 에도가와 람포의 <2전짜리 동전(二錢銅貨)>등이 암호 풀이의 독특한 맛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암호 제작기 '에니그마'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암호 제작방법은 기계를 이용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대단히 복잡해졌습니다. 군용으로 쓰이는 암호는 일개 천재의 머리로는 해독(解讀)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특히 독일이 제작한 암호 제작기 에니그마(Enigma)가 만든 암호문은 연합군이 입수하더라도 해독을 할 수가 없어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 난공불락의 암호 제작기를 둘러싼 이야기는 무척 많지만 그 중 추천하자면 로버트 해리스의 <에니그마(Enigma)>(1995)를 들 수 있겠습니다.

상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면 사실상 암호나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2차대전 때 미군은 나바호 인디언을 동원해 그들의 언어로 만든 통신용어로 교신했습니다. 일본군은 통신을 감청했으나 내용을 해석하는 데는 실패했지요. 포우의 <모르그 거리의 살인>에서 명탐정 뒤팽은 이와 비슷한 상황과 마주칩니다. 살인 현장에서 들린 목소리에 대해 증인들은 모두 외국인이라고 - 프랑스 사람은 스페인 사람의 음성으로, 네덜란드 사람은 프랑스 사람의 목소리로, 영국 사람은 독일 사람의 음성으로, 스페인 사람은 영국 사람의 목소리로, 이탈리아 사람은 러시아 사람의 목소리라고 -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증언에 따라 그 어느 나라의 말도 아니었다는 것을 파악한 뒤팽은 살인범이 예상 밖의 존재라는 것을 간파합니다.

암호 기법은 크게 치환법(transposition)과 대용법(substitution)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며, 에도가와 란포는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1) 할부법(割符法) : 고대 그리스의 스키테일 방식

2) 표형법(表形法) : 간단한 도형만으로 표시하는 방법.

3) 우의법(寓意法) : 시(詩), 노래, 주문 등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방법

4) 치환법(置換法) : 글자, 단어의 순서를 바꾸거나 끼워넣어 뜻을 알 수 없게 하는 방법.

5) 대용법(代用法) : 글자, 단어 등을 숫자나 도형으로 바꿔 뜻을 알 수 없게 하는 방법.

6) 매개법(媒介法) : 특정 책, 악보 등을 매개로 쓰는 방법

컴퓨터가 대중화되면서 암호 기술은 철벽에 가깝게 발전했습니다. 컴퓨터로 암호화된 문서 파일을 탐정의 지식만으로 해독하는 것은 요행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입니다(영화에서 순식간에 암호를 푸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요컨대 종이 등 어떤 표면에 남아 있는 기호의 해석이 아니라 컴퓨터 공학자들의 정밀 기술이 된 셈이지요. 이런 탓인지 요즘은 차츰 암호 추리소설이 쇠퇴하는 추세이긴 합니다만, 다빈치의 작품 속에 숨겨진 의미를 풀어내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The Da Vinci Code)>(2003)가 대히트하면서 암호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했습니다.

강의중인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영화 '다빈치 코드'에서


다만 아직 남아있는 것은 이른바 ‘다잉 메시지(Dying Message)’, 즉 치명상을 입은 피해자가 숨이 끊어지기 전에 남겨 놓은 마지막 단서입니다. 만약 피해자가 범인의 이름을 남겨 놓으면 범인이 가장 먼저 눈치 챌 터이니 들키지 않기 위해 알듯 말듯 아리송하게 남겨 놓아야 하죠. 그러다 보니 이것을 알아채는 일은 암호를 푸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잉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작가는 엘러리 퀸입니다. 그는 <X의 비극(The Tragedy Of X)>(1932)에서 이것을 처음 사용했는데, 사건에서뿐만 아니라 탐정 드루리 레인의 입을 빌려 다잉 메시지의 심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처럼 죽기 직전의 비할 바 없는 성스러운 순간, 인간 두뇌는 한없이 비약합니다.”

퀸은 장편 <샴쌍둥이의 비밀(The Siamese Twin Mystery)>(1933)등을 비롯해 여러 편의 작품에서 이런 트릭을 사용했습니다.

외국의 암호 추리소설은 암호 구성이 우리말이 아닌 탓에 외국어에 아주 유창한 사람이 아니라면 풀기 어렵고(라틴어나 고대 문자 같은 것을 술술 해석할 수 있는 독자는 드물겠지요), 다잉 메시지를 사용하는 경우 흔한 일은 아니지만 단어 자체에 2중적 의미를 가졌을 경우 번역을 했을 때 숨은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가 있어 독자로서는 암호 풀이에 도전하기 어려운 약간의 아쉬움이 있긴 합니다.

(:P)


퀴즈의 답:

더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추리닝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손선영 2010.10.06 22: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와~ 흥미롭게 읽고 갑니다. 암호는 항상 흥미로워요^^

  2. 무슨메세지? 2010.11.01 1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궁굼한게있어서조언부탁드려도될까요? 숨긴 메세지 푸는 문제인데 도무지 알수가 없어서요. 간단히 요약하면.. 한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녀의 직장은 의문에 범죄조직에 조직원으로 죽음?을 예감하고 태어날 딸을 위해서 4개의 테이프를 남김.(1~5/6~10/11~15/16~20,숫자는 딸의 나이에 해당하는 메세지)
    11~15,16~20 2개 테이프는 메세지와 함께 공백이 많음, 1~5.6~10 2개 테이프는 녹음이 되지 않은 공테이프../ 딸의 10살까지 해당하는 2개의 공테이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참고로 어머니는 죽지 않았다고 의심이 갑니다.메세지 내용은 자식을 사랑하는 모성애가 담긴 말 (11살 생일 축하한다.. 좋아하는 남자 친구는 있니?.. 이런식) 딸의 나이는 18살임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