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문학관 개관 20주년을 축하합니다!

 

별로 뛰어나지 않은 기억력을 더듬어 보건대, 1992년 이후 부산에 간 것이 대략 여섯, 일곱 번쯤 되는 것 같습니다(일 때문에 당일치기로 다녀 온 것은 제외하고요). 그런데 갈 때마다 반드시 한 번씩은 들리는 장소가 있는데, 바로 해운대 달맞이고개에 자리잡은 추리문학관이지요.

1992년 김성종 선생님이 설립한 이 추리문학관이 올해로 개관 20년을 맞이했습니다.  

추리문학관 개관 기사(한국추리작가협회보 제12호. 1992년)

 

후배 한 명과 의기투합(?) 해서 부산 보수동의 헌책방에 가기로 하고 그 김에 추리문학관도 들려봐야겠다고 했던 것이 1992년 말이던가 1993년 초로 기억합니다. 으,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부산 지리도 제대로 모르는 터라 길을 잘못 들고 무진장 헤매다가 물어물어 가까스로 도착한 것이 다시 생각나네요. 입 벌리고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기념으로 머그 몇 개를 사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습니다(밑의 사진 왼쪽. 네 개쯤 샀던 것 같은데 나눠주고 해서 이젠 하나만 있음).

 

1996년의 추리문학관 전경. 그때나 지금이나 겉모습은 변함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몇 년 지난 1996년, 약간 기분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늦은 여름에 혼자 심야고속버스를 타고 새벽에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아침밥으로 돼지국밥 한 그릇을 먹고 배를 채웠지만 아는 데도 없고 뭐 갈 곳이 있나요. 해운대까지 가서 한산한 아침 바다를 구경하다가 언덕길을 올라가 다시 찾아갔습니다. 마침 김성종 선생님이 계셔서 인사를 드리고, 머그를 하나 얻을 수 없을까 하고 좀 뻔뻔스럽게 부탁을 드렸더니 웃으시면서 "앞으로 남은 것은 대통령이 와도 안 준다"며 선뜻 하나를 주셨습니다. 처음 갔을 때와 달리 바다가 보이던 앞쪽 전망이 아파트들로 꽉 막혀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은 구하기 힘든(?) 추리문학관 머그(오른쪽이 먼저 제작된 것입니다^^)

 

 

2002년 개관 10주년 행사는 못 갔지만 <추리문학의 밤>, 2007년의 여름추리소설학교 행사 등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한두 차례 들렀구요.

 

5층의 김성종 선생님 집필실 전경(2001년 12월. 추리소설가 황세연 제공). 10년도 더 지났으니 많이 달라졌을수도...

 

그리고 지난 3월 31일~4월 1일에는 개관 20주년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행사에 직접 참여하게 된 터라 별로 사진 찍을 틈도 없었고 제대로 구경할 틈도 없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축하를 해 주셨고, 강연, 연극 등의 프로그램이 이틀동안 성황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추리문학관 (개관 20주년 축하 화환이 밑에 살짝 보입니다).

 

 

추리문학관은 추리소설 애호가들이라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많은 책이 있는 추리문학 전문 도서관이며, 추리문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행사가 자주 열립니다. 가깝지 않아서 자주 찾아갈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지요. 혹시 부산 가실 일 있으시면 꼭 한 번쯤 들러 보시길 바랍니다. 사실 예전에는 빈말로라도 교통편이 좋다는 말을 하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마을버스를 타면 바로 앞에 세워주니 무척 편해졌습니다.

 

 

추리문학관 행사 팜플렛

 

 

이번 행사에서 김성종 선생님은 워낙 바삐 움직이셔서 별로 이야기할 틈은 없었습니다만, 그날 저녁식사 후 "이번 행사 준비하시느라 무척 힘드셨겠습니다."라는 말씀을 드렸을 때 씩 웃으시면서 하신 짧은 대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아냐, 재미있잖아?"

 

다시 한 번 추리문학관 개관 20년을 축하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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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2.04.25 15: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참, 추리문학관에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보고는 추리문학에 김성종 선생님이 공헌한 바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 그 분 말씀대로 달맞이고개가 헤이온와이 못지않은 곳이 된다면 좋겠는데 말이죠.

  2. 레이 2013.05.20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제 한 번 꼭 가보겠습니다. 레어템이 된 머그컵 사진 잘 보고 갑니다. ^^


자칫하면 헛갈리는 수가 있습니다

"범죄자 하나보다 더 불필요한 것은 가짜 증인이다."
- 맥윌리엄 씨
<That Yew Tree's Shade>(1954) - 시릴 헤어

'이름은 같지만 다른 사람'이라는 의미의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는 사자성어는 자주 보셨을 겁니다. 이렇게 단어가 존재하는 만큼 드문 경우는 아니고 직접 현실에서 가끔 마주치기도 하죠. 옛날에는 전화번호부에서 이름이 같은 사람을 찾아본 적도 있었는데, 요즘 인터넷에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보면 세상에, 같은 이름이 이렇게 많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좋은이름은 필요하지만 새로운이름을 짓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회사나 상표 같은 것은 이름을 등록하기도 하지만, 사람의 이름에는 특허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설 제목도 마찬가지라서 독점권이 없으니 먼저 나오는 쪽이 임자라기보다는 유명한 쪽이 임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소설을 비롯한 영화나 노래에서는 동제이작(사전에 이런 단어는 없습니다만)이 나오기도 하죠.
하긴 추리소설의 역사도 오래되었고 작품 수가 수십만 권을 넘어가는 상황이니 같은 제목의 작품이 나오는 것이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닐 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들어볼까요. 지난 가을쯤 서점에 갔다가 신간 코너에 <최후의 증인>이 있어서 , 김성종 선생님의 작품이 또 재출간되었구나하고 슬쩍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 그것은 일본의 신진 작가 유즈키 유코의 작품이었습니다. 설마 하고 살펴보니 원제도 똑같은(물론 일본어지만) <最後証人>이었지요. 줄거리만 살펴보건대 내용은 전혀 비슷한 곳이 없어 보입니다. 
김성종 선생님의 작품은 일본에도 번역되었는데, 유즈키 유코의 작품 출간보다 1년 빠른 2009년이었습니다.


워낙 제목이 간결하고 강렬하니 저라도 써 보고 싶은 제목이기도 합니다. 일본 아마존을 검색해보니 같은 제목의 작품은 아직 없더군요. 그러니 써도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최후의 증인' 발간기념 사인회 광고


문득 궁금해서 미국 인터넷 서점 아마존을 검색해보니 <Last Witness>(혹은 <The Last Witness>)라는 제목은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미스터리쪽으로만 좁혀보아도 조엘 골드먼, 질리앤 호프먼, K. T. 로버츠, 존 매튜스, 리처드 몽고메리, K. J. 에릭슨, 조셉 배론, 레이프 실베르스키 & 올로프 스베델리드등의 여러 작가가 같은 제목의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1994년에 나온 추리소설 서지목록인 앨런 J. 휴빈의 <Crime Fiction II>에도 같은 제목의 작품이 두 편이 있으니, 세계로 범위를 넓히면 엄청나게 늘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증인이 너무 많다

지난 2006년부터 올해까지 번역된 작품의 목록을 뒤져보니 동제이작이 몇 편 나오는군요. <고백>(존 그리샴/The Confession, 미나토 카나에/告白), <소문>(고이케 마리코/うわさ, 오기와라 히로시/), <실종자>(오리하라 이치/失踪者, 도바 순이치/蝕罪), <약탈자>(퍼트리샤 콘웰/Predator, 막심 샤탕/Predateurs), <헤드헌터>(미셸 크리스피/Chasseur de Te'tes, 요 네스뵈/Hodejegerne)등인데, 원래 제목도 거의 같습니다. 사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의 일반명사이니 남의 제목이 멋있어서 베꼈다고 하기는 어렵지요.

비슷한 제목도 있습니다. <잘린 머리 사이클>(니시오 이신),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노리츠키 린타로), <잘린 머리처럼 불길한 것>(미쓰다 신조) 잘린 머리트리오가 있고,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피에르 바야르), <누가 제노비스를 죽였는가?>(디디에 드쿠엥), <누가 조지를 죽였는가>(레오니 슈반), <누가 하비 버델 선생을 죽였나>(엘렌 호란),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이스마일 카다레)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형제들이 있습니다.

이런 단순한 제목은 그렇다 치지만, 가끔 복잡한 제목이 겹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콜린 덱스터의 <옥스포드 운하 살인사건>의 원제는 <The Wench is Dead(‘여자(혹은 계집아이, 하녀)는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휴빈의 저서를 살펴보면 같은 제목이 덱스터의 작품 이외에도 두 편 더 있습니다(프레드릭 브라운과 루스 페니송이라는 작가가 썼네요). 이런 독특한 제목이 우연일까요? 역시 검색을 해 보면 16세기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The Jew of Malta>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좀 생소하지만 영어권에서는 유명한 작가인 만큼, 그의 작품을 인용했을 가능성이 무척 커 보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콜린 덱스터의 책이 번역되어 있지만, 원제로 기억하는 분은 별로 없을 것 같긴 합니다만.

콜린 덱스터


두툼한 <Crime Fiction II>를 뒤적이면서 비슷한 제목을 대강 살펴보니, ‘The Man with로 시작되는 제목은 1백 편을 넘깁니다. 조금 더 뒤져보니 ‘Murder at으로 시작되는 제목은 3백 편이 넘고, ‘Murder in으로 시작되는 제목은 5백편, ‘The Case of로 시작되는 제목은 무려 8백 편이 넘습니다(사실은 세어보다가 지쳐서 대충 계산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러고 보니 ‘Murder’로 시작되는 제목은 셀 수도 없겠군요. 우리나라에 나온 작품도 정확한 집계는 어렵습니다만, '… 살인사건'은 엄청나게 많을 것 같습니다. 때때로 제목이 어째 비슷하다 생각하셨더라도 비슷한 제목이 이렇게 많을 줄 아신 분은 별로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추리소설가가 창의적으로 누굴 죽이고 또는 속이고(물론 작품 속에서) 하는데 애를 씁니다만 제목은 오히려 단순할 경우가 많지요. 외국 작품의 제목까지 챙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고… 외국의 사실 복잡한 제목은 독자도 기억하기 힘드니 상업적인 측면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외국(특히 영어권) 작품 중 똑같은 제목을 보면 상상력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똑같은 제목이라도 상관없다는 배짱인지그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연예인들은 유명한 선배 때문에 자기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많은데, 작가는 자신의 자식같은 작품 이름을 쉽사리 바꿀 수는 없나봅니다. 하여튼 좋은 제목은 이제 웬만큼 다 나왔으니, 혹시 비슷한 제목이 나오더라도 너그럽게 넘어가주어야 할 듯합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포스팅을 못했는데, 2011년 마지막날 턱걸이 하는군요.
새해 소원성취하시길 바랍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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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2.01.02 23: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동제이작 하니 생각나는데 얼마 전 나온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신작 제목이 <주홍색 연구>더군요. 고전에 대한 오마주로 일부러 같은 제목을 붙였겠지요.


 

                                         초보 작가 지망생의 몇 가지 실수


마니아들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추리소설을 쓸 때 흔히 범하는 실수들.
주워들은 얘기, 책에서 읽은 얘기, 개인적 습작 경험을 중심으로 다시 정리해봤습니다. 초판 팔기도 버거워하는 작가의 자격지심에 이런 얘기 불편하지만 왕초보 지망생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낚시성 이미지입니다. 어울리는 사진을 못 찾아서요. 지송^^;



1. 트릭에 목숨 걸지 마라

“밀실이 나오는 본격물을 써보고 싶어요. 트릭은 많이 개발해놨는데 문장이 약해서….”
한 젊은 작가 지망생은 그렇게 말하면서 본받고 싶다는 몇몇 일본 작가를 거론합니다. 당황스럽게도 그가 언급한 이름은 쉬이 넘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작가들이고 개인적으로 그들의 문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단지 본격물의 설정상 ‘탁월한 문장력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를 ‘본격물은 문장력이 떨어져도 쓸 수 있다’라는, 엄청난 오해를 한 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배경에는 추리소설은 트릭 하나면 만사해결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듯하고요. 마치 확대한 추리퀴즈 같은 김전일이나 코난의 영향일지도 모르겠습니다(사실 만화는 시각적인 면이 크기 때문에 대화체 문장 같은 것에 신경 쓰는 분이 거의 없을 겁니다). 암튼 추리소설도 소설인데 그 근간인 문장을 외면한 채 출간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아마 편집자들이 제일 먼저 퇴짜를 놓겠죠.
그 작가 지망생은 그러면서 덧붙입니다.
“반전이 진짜 끝내줘요!”
저는 속으로 대답합니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안정된 문장력이 장점입니다.



2. 피 같은 원고? 아낌없이 날려라!
네, 압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느무 많다는 걸. 특정 분야 전문가를 만나 깊이 취재한 내용 다 때려 넣고 싶은 욕심 누가 모르겠습니까. 또 자신이 쓴 원고는 피와 같죠. 하지만 넘치는 건 모자람만 못합니다. 전문지식 자랑은 흐름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절해야 하고, 반복되는 설명은 속도감을 잡아먹는 주범입니다. 이메일 보내는 장면 쓰는데 컴퓨터 전원 켜고 로그인하고 이것저것 잡스러운 내용까지 묘사할 필요는 없겠지요. 원래 살짝 생략된 듯한 글이 독자들 상상력을 더 자극하는 법입니다.
‘팍팍 줄여야 원고가 살아난다’. 추리작가협회 황모 선배가 10년 전에 해준 조언인데 아직도 와 닿습니다. (그래도 일단 원고량이 많아야 고료도 많이 들어오는데…퍽!)


3. 캐릭터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마라
원고지 100매 짜리 단편 투고 작품을 읽어본 적 있습니다. 신체적 결함을 가졌으나 유머감각 넘치는 탐정 캐릭터는 꽤 매력적입니다. 그런데, 앞부분을 시시콜콜 이 탐정의 전지적 능력과 고난의 가족사에 할애합니다. 그것도 죄다 지문으로 설명해버리죠. 사건은 30매가 지나서 시작됩니다. 독자는 이미 지겨워졌습니다. 추리작가는 독자가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 주리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유명 작가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죠. 비슷한 사례로 작품 배경이 되는 도시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 작품도 많습니다.
단편에선 가능하면 사건을 빠르게 진행시키고 인물과 배경에 관한 정보는 서서히 풀어줘도 늦지 않습니다. 당연히 설명이 아닌 대화나 행동 등을 통해서요.
투고한 작가는 분명히 우기겠죠.
“처음엔 지루해도 결말이 죽여줘요!”
또 속으로 외칩니다. 지루한건 못 참아!

미국추리소설작가협회에서 펴낸 작법서입니다. 재밌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4. 사건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지 마라
영화 <미션 임파서블3> 앞 부분에 에단 헌트(톰 크루즈)의 약혼녀가 납치돼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은 나중에 클라이맥스에 다시 나오죠. 이처럼 긴장감 넘치는 한 부분을 뚝 떼어와 맨 앞에 배치하기는 스릴러 작가들이 즐겨 씁니다. 딘 쿤츠나 할런 코벤 등의 작품에서도 보셨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왕초보 작가들의 흔한 실수 중 하나가 사건을 꼭 시간 순으로 배열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네 건의 연쇄 살인사건을 소재를 설정했을 때, 그것들을 차례대로 전개해나간다면 좀 밋밋하지 않을까요. 소설 첫 장면을 세 번째 살인사건부터 시작해 주목을 끈 다음,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인물과 배경 지식을 풀어내기 위한 정보 제공용으로, 네 번째는 사건 해결을 위한 결말용으로 뒤바꾸어 보는 건 어떨까요. 같은 이야기라도 플롯에 따라 긴장감은 몇 배나 달라집니다.

연쇄살인사건에 관한 플롯의 정석을 보여주는 제2회 네오픽션상 수상 작품. 현장 취재도 아주 사실적입니다.

5. 죽이던지, 벗기던지 
소제목이 유치 섹시해 좀 거시기합니다만 이 바닥 작가들이 자주하는 우스갯소리입니다. 
장편을 쓰다 줄거리가 막혔을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방법이 또 다른 살인이나 섹스신이라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추리소설의 생명인 긴장감 유지가 그 만큼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도 제일 역량 부족을 절감하는 부분입니다.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복선과 장치들이 필요합니다. 밑밥을 차곡차곡 뿌려 독자들을 끊임없이 유혹해야죠. 하지만 초보 작가들은 풀어야 할 정보를 꾹 쥐고 있다가 최후에 한방 쾅 터트릴 생각만 합니다.
하지만 보여줘야 할 부분을 아끼면 전개가 건조해지기 싶습니다. 또 긴장감은 한순간에 생기는 게 아닙니다. 사실 반전이 뛰어나다는 건 미리 설정해 놓은 복선과 장치들이 훌륭하다는 것일 겁니다. 달궈 놓은 프라이팬이 화력 더 좋은 법이니까요. 그러니 추리작가는 다 보여 주지는 말되, 안보여 주지도 말아야합니다.

어릴 때 김성종 선생님의 신문 연재소설에 빠져 대문 앞에서 신문을 기다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교황 암살사건을 다룬 작품 <라인X>로 기억하는데요, 작가는 매일 짧게 짧게 연재를 이어가면서도 독자 심장을 잡았다 놓았다 하더군요. 그런 설정과 필력이 그저 부러울 수밖에요.
(“그럼, 빨가벗겨서 죽이면 긴장감 최곤가요?” 혹시 이런 질문을 하신다면 그건… 그건… ㅠㅠ)


6. 취재는 정확하게, 구라는 확실하게

일간지 기자가 등장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열혈 슈퍼 울트라 캡숑 짱 기자는 청와대와 국회, 경찰청을 지 마음껏 넘나들며 범인을 집요하게 추적합니다.하지만 조금만 관심 있는 독자라면 불가능한 설정이란 걸 알 겁니다. 일간지 기자들은 출입처가 정해져 있어 소위 자신의 ‘나와바리’(영역)를 넘을 때에는 취재 협조를 구해야 합니다.
형사, 의사, 기자 등 추리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직업에는 그 세계의 전문성이 있겠지요. 그러니 위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선 정확한 취재가 생명입니다. 그래서 작가의 첫 작품은 대개 자신이 잘 아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간단한 법의학 상식도 기본이겠고요. (저처럼 인터넷에서 긁어 쓰면 바로 들통ㅠ)

반대로 다소 무리한 설정이 꼭 필요한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 설정을 독자가 신뢰하도록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 또한 작가의 능력이겠죠. 여러 장치와 온갖 구라를 총동원해서라도 말입죠. 뭐시라? 한강에 괴물이 나타났다고? 봉 감독이 만들면 믿는 법입니다.

중앙일간지 국장님이 몇 해 전에 쓴 추리소설입니다. 실감나는 기자 세계가 궁금하시다면…


7. 시작은 거창하나 결말은 대략난감
시작은 그럴듯 합니다. 캐릭터 좋고 스케일 크고 작품 배경 색다르고…. 의문의 살인사건에 용의자의 완벽한 알리바이까지. 재밌는 추리물의 조건은 다 갖췄습니다. 소년탐정 김전일이 아니라 그의 외할아버지 긴다이치 고스케가 와도 사건을 못 풀 것 같습니다. 독자는 자신의 돌머리를 탓하며 신나게 책장을 넘깁니다. 궁금증은 점점 커져갑니다. 과연 이 미스터리는 어떻게 풀릴까. 이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작가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결말부에 도달할수록 뭔가 수상합니다. 작가는 벌여놓은 이야기 수습할 생각은 않고 앞뒤 안 맞는 엉뚱한 논리를 강요합니다. 억지로 사건 끼워 맞추기도 등장하고요.
이런 ‘용두사미 추리작가’에게서 독자들은 배신감을 느낍니다. 특히 결말에서 “이 모든 일이 꿈이었노라”를 외치거나, 주인공 화자가 “내가 범인이라네. 다 내가 벌인 짓이야”라는 독백 따위가 나온다면 더더욱.
소재가 아무리 좋아도 결말의 윤곽 정도는 정해 놓고 작업에 들어가야 합니다. 추리소설은 ‘논리의 게임’이잖습니까.

현직 판사님이 쓴 본격 추리물입니다. 마지막 반전이 압권입니다.



웃기는 건, 이런 실수를 책을 여러 권 낸 작가들도 한다는 점입니다. 자기 글에 갇혀서 안 보이는 법이죠. 그래서 혹자는 주위에 돌려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래저래 창작이 어렵네요.

참고로, 작가이자 평론가인 백휴님이 쓴 <김성종 읽기>를 보면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김성종 문체의 특징은 시각적 내지는 영상적인 언어구사에 있다. (…) 이것은 그의 문체가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이 늘 오감(五感)에 호소하기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추리작가 김성종 작품을 분석한 책입니다. 작가의 팬이라면 한번 읽어볼만 합니다.


보통 눈에 의존한 묘사가 많지만 김성종의 소설에는 후각, 청각 등을 이용한 묘사가 많아 시각적 이미지를 더 풍부하게 한다는 조언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듯 이미지가 선명하게 잡힌다는 거죠. 영상화 기법의 글쓰기에 반감을 가지신 분들도 많습니다. 어차피 취사선택은 글쓴이의 몫이겠죠. 가끔씩 새겨보는 대목입니다.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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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블레이드 2011.01.11 10: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3번 절대 공감합니다. 장르소설 독자들한테 지루함과 구구절절함은 연쇄살인마보다 더 끔찍한 법이죠. 2번은 무식하게 공부한티를 팍팍 내려고 고구려를 배경으로 했던 첫번째 장편에서 무려 고구려 '고어'를 등장시키려고 했다가 출판사 에디터한테 한 소리 듣고 깨갱한 적이 있습니다. 3번 같은 경우는 이렇게 보충하면 되겠네요. 사건을 해결하는 것 자체가 주인공의 캐릭터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요. 적당한 궁금증과 호기심은 다음 책을 나올 수 있게 하는 씨앗이 됩니다.

  2. 평시민 2011.01.11 11: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제대로 된 추리물을 쓰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저도 본격 취향이라 트릭 쪽에 비중을 많이 둔 편이었지만 중요한 건 역시 스토리겠죠,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기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추리닝4 2011.01.11 1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우리나라도 트릭 중심의 본격물이 좀 활성화됐으면 좋겠어. 다른 쪽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이 분야가 취약하다는...한국판 김전일 캐릭터 하나 만들면 먹고 살텐데ㅋㅋ (박물관을 배경으로 하나 쓰면 멋질 것 같아^^)

  3. 카메라이언 2011.01.11 23: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앗 중간에 추리소설 쓰는 법 책! 그 시리즈로 동화 쓰는 법이 집에 있어요! 학교 다닐 때에 동화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사라고 해서 출판사서 구해서 단체주문했었는데, 아직도 글이 막힐 때마다 읽는답니다. 아아, 추리소설 쓰는 법도 있었구나.

    처음 이야기의 트릭-문장력-일본작가 하는데 듣는 순간 바로 h모 대작가가 떠오르는데요. 으흐흐. 저도 사실 최근까지 h모 작가는 트릭은 좋은데 문장이 뭔가 허전해, 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근데 요즘 들어 연달아 본 책들 보며 "아아, 내가 덜 읽어서였어!" 라고 완전 판단이 바뀌어버렸습니다. 히죽히죽. 정말 좋은 글들이 많았는데, 안 읽어서 몰랐었더라고요.

    그런 것 같아요. 결국 내가 잘 몰라서인 듯. 아아 열심히 쓰고 읽어야지. ㅠ-ㅠ

  4. 모리스 2011.02.04 1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소설쓰다가 시작은 멋지게 세웠다가 뒷감당이 안 되서 고생 많이 했었는데, 논리 맞추는 일이 제일 힘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최코치님 블로그에는 처음 글을 남기는 것 같네요, 반갑습니다.

  5. 허니문 차일드 2011.02.10 13: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문장에 있어 군더더기는 먹지도 못할 밑반찬만 쫙~ 깔아놓은 것 같죠. 저도 최대한 군더더기를 빼고 쓴다고 쓰는데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역시 작품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시간순서대로 나열하지 말고, 취재는 정확하게... 동감합니다. ^^

  6. 청하야 2011.04.07 03: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우 도움이 되는 글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7. Miss Baby 2011.05.21 14: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하하. 멋진 글이네요^^ 추리소설을 굉장히 좋아하는 '독자'의 입장으로서 공감이 많이 되는 글입니다.

  8. 행복티움 2011.09.29 1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서출판 행복티움에서 필진을 모집하네요. 글 쓰는 것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한번 가보셔요. 필진 등록하고 바로 연재할 수 있네요. 연재된 글은 모아서 전자책으로 만든답니다.

  9. 이름은묻지마 2012.05.25 00: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흑.....눈물이 앞을 가리네요.ㅠㅠ
    저도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데 너무 걱정되요ㅠㅠ
    저 할 수 있는거 맞죠?ㅠㅠ
    안 될 놈이면 안된다고 아직 가능성 있다면 있다고 대답 좀 해 봐요!! 제발ㅠㅠ


                                                          
                                             방정환도 추리소설을 썼다는데…

                                                                                 - 한국추리소설 102년 약사




바야흐로 동학이 곳곳을 평정한 때, 나주 군수의 아들 김 주사는 길을 가다가 ‘비밀개탁’이라고 쓰인 편지를 바람 때문에 잃어버린다. 대수롭잖게 여기고 일본 상고선을 타고 인천에 도착, 서울로 이동하던 중 돈가방이 사라졌음을 깨닫는데…. 그리하여 기찰 잘하기로 유명한 정순검에게 사건을 의뢰하니….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 '쌍옥적'


1908년 이해조가 제국신문에 연재한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 <쌍옥적(雙玉笛)>은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최초’ 논쟁이 몇 차례 있었으나 우연이 아닌 증거와 추리를 이용해 사건을 풀어나가고, 별순검이라는 탐정 역이 등장해 범죄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추리소설 구조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물론 고대부터 시작된 송사소설이나 공안소설도 범죄 해결을 다루고 있지만 확실히 논리성 부분에선 취약하지요. (주위에 홍길동전이 한국 최초 액션스릴러라고 주장하는 분도 계십니다만 ㅋㅋ) 이렇게 따지고 보니 한국 추리소설도 성취면에서 빈약하지만 짧은 역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탐소설’에 관심이 남달랐던 이해조가 뒤이어 <구의산(九疑山)>등을 발표했지만 추리소설 자체가 아무래도 서양에서 탄생했다보니 초창기는 번역, 번안소설이 주를 이룹니다. 주로 일본을 통해 들어온 쥘 베른, 코난 도일,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이 소개됩니다. 해방 전까지 100편 정도가 소개됐습니다.
1920년대 중반에 비로소 국내 창작물이 등장합니다. 박병호가 경성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혈가사(血袈裟)>라는 작품을 연재해 단행본으로도 출간하고, 최독견은 <사형수>를, 채만식은 <염마>를 연재합니다. 재밌는 사실은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도 추리소설을 썼는데요,  <괴남녀 이인조>라는 코믹한 단편과 외국 작품을 번역한 <누구의 죄?>등을 대중 잡지 별건곤에 실었으며(당시 ‘북극성’이란 필명을 사용했습니다), 아동물로 <칠칠단의 비밀>, <동생을 찾으러>등을 발표했습니다.

김내성의 본격 장편소설 '마인'과 방정환이 쓴 어린이 추리소설 '칠칠단의 비밀'


1930년대에 드디어 한국 첫 전문 추리작가가 탄생합니다. 바로 아인 김내성 선생입니다. 1935년 일본 유학 중 탐정소설 전문잡지 <프로필>에 단편 <타원형 거울>과 <탐정소설가의 살인>이 당선됩니다. 유불란 (뤼팽을 만든 프랑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일본 추리문학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가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에서 유래한 것과 비슷하죠)이란 필명으로 <기담연문왕래(국내에서 <연문기담>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발표)>를 발표하기도 하고, 귀국해서 내놓은 <백가면>, <마인>이 큰 인기를 끕니다. 비록 집필 인생 후반기에는 순수소설에 치중했고 49세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작년 그의 탄생 100주기를 맞아 ‘한국 추리소설 개척자’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진 점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추리소설의 개척자' 김내성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사실상 추리소설의 명맥이 끊겨 버립니다. 일제 강점시대 말기에는 대중잡지조차 거의 전쟁 독려 선전으로 내용을 채울 지경이었으며, 일본 현지에서도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까지 검열에 걸릴 정도로 추리소설에 대한 눈길이 곱지 않던 터라 식민지 한국에서의 상황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해방 후인 1940년대 후반에야 방인근이 장비호 탐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이 시리즈는 60년대 중반까지 이어집니다), 1960년대에는 허문영(필명 허문순, 성걸 등)이 <검은 독수리>등의 시리즈를 내 놓았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이분들의 작품은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무렵 추리소설은 잡지를 통해 부활 조짐을 보이는데, 1950년대 중반부터 인기를 모은 대중 잡지에서는 추리 창작물뿐만 아니라 외국 작품도 꽤 많이 번역되어 실렸습니다. 특히 60년대에는 영화의 흥행과 함께 제임스 본드, 즉 007 시리즈의 인기가 폭발적이었습니다.


1970년대 들어 또 한 명의 스타작가가 탄생하니 바로 김성종입니다. ‘해방 전 김내성, 해방 후 김성종’일 정도로 그는 우리 추리소설사에 독보적 존재였습니다.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경찰관>으로 등단해, 1974년에 한국일보 주최 공모전에 대표작 <최후의 증인>을 내놓습니다. 분단 현실의 비극을 미스터리 서사로 녹여낸 이 소설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고 <흑수선>등의 이름으로 수차례 영화화되었습니다. 그 후 <제5열>, <백색인간>, <라인X>, <피아노 살인>등 내놓은 작품마다 히트를 치면서 사실상 독주시대가 열립니다. 오병호라는 의협심 강한 형사 캐릭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당시 군부대 내무반에 김성종 소설 한 권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작가는 1992년 부산 해운대에 추리문학관을 열고 최근 <안개의 사나이>를 내놓는 등 꾸준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추리작가 김성종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한국 추리소설은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를 거치며 꾸준히 성장합니다. 해방과 전쟁, 분단과 군부독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긴장된 삶을 살던 국민들이 약간의 여가를 갈망하게 된 사회 분위기도 한 몫 합니다.
대학교수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미스터리클럽>을 모태로 1983년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창립, 체계적 활동의 틀을 놓습니다. 공동 단편집을 매년 발행하고 추리문학상을 제정해 신인작가 발굴에 나섭니다. 언론인 출신의 이상우, 중앙정보국 출신의 노원, 방송작가 출신의 김남 작품이 인기를 끌었고 <계간 추리문학>, <미스터리 매거진>같은 전문 잡지와 명지사, 추리문학사, 남도출판사 등 전문 출판사들이 등장합니다. 공모전도 여럿 생겼는데 유우제, 강형원, 권경희 등이 수상자로 등단합니다. 스포츠신문에 추리소설 신춘문예가 생긴 것도 80년대 중반입니다. 

한국추리작가협회 현판식


1990년대 들어 한국추리작가협회는 일본추리작가협회와 교류를 시작할 정도로 외연을 넓혔고, 1993년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과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대박을 치면서 추리 서사의 토대는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스포츠신문 자본은 끊임없이 연재물을 만들어내고, 통신 동호회를 통한 온라인 작가의 등장은 장르문학의 다양성에 기여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성기는 짧았습니다. 비디오, 케이블TV 등 다양한 영상매체의 발달과 휴대전화 보급 등이 추리소설 독자층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여기에 IMF 외환위기에 따른 출판시장 위축까지 겹치면서 침체기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장 신춘문예가 다 사라지면서 작가 수급에 애를 먹었고, 작품이 나오지 않는 악순환이 거듭됩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국 추리소설의 침체 요인으로 작품의 선정성, 폭력성을 흔히 드는 것입니다. 선정성, 폭력성에 대한 옹호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그것이 실제로 추리소설의 침체와 직결된다는 적절한 근거 제시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 시비를 걸 정도로 선정적이라면 성인 독자들에게 오히려 더 잘 팔려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2천년대 들어 미스터리 붐이 다시 일지만 그때는 이미 외국 작품에 독자를 다 빼앗긴 상황이었습니다. <다빈치 코드>로 대변되는 팩션의 열풍,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 등 일본 인기 작가들의 작품이 쏟아지면서 국내 작가가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습니다. 추리소설 시장에 국내 창작물은 10%도 안 될 정도로 기형적 구조를 가지게 됐습니다. 그러나 여성 고정 독자가 늘고 시장 규모를 키운 긍정적 효과도 있습니다. 국내 작가의 창작욕을 자극한 점도 하나의 수확입니다.



지금도 추리소설 창작 열기는 뜨겁습니다. 인터넷 창작카페가 활성화 되고 기성 작가의 작품도 꾸준히 나오는 편입니다. 한국추리작가협회에서 발간하는 <계간 미스터리>의 신인상 투고작도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콘텐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출판사들도 우호적이고 상금 1억원의 장르소설 공모전도 생겼습니다. 분명 반길만한 현상이지만 한국 추리소설의 지속적 성장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덧붙임>한국 추리소설 미래는 장밋빛인가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다빈치 코드>같은 추리소설이 탄생할 것이다.’

한국 추리소설 현황을 다루면서 말미에 이런 식의 낙관적 전망을 내는 기사가 많습니다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막연한 기대일 뿐입니다.


미스터리 소설(넓게는 장르소설) 강국이 되기 위해선 축적된 역사와 자국 작품을 소화할 넓은 시장, 영어권역, 두터운 작가층, 사회적 인식 등 여러 조건들이 골고루 갖춰져야 하는데 지금 현실은 어느 것 하나 충족시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미국과 일본 미스터리가 쏟아지면서 독자와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한국 작품은 저질이라는 편견은 여전합니다. 순문학과의 벽도 엄연히 존재하고요. 다수의 작가가 기존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팩션, 혹은 액션 영화 스타일에 가까운 스릴러에 집중하다보니 정통 미스터리 작품은 기근 상황입니다. 게다가 한국 추리문단의 최고 약점은 인기 작가 몇 명에 의존해 지탱해 왔다는 점입니다. 일본이 ‘사회파’니 ‘본격파’니 그들만의 스타일로 오랫동안 시장을 개척해 장르강국이 된 점과 확연히 비교됩니다.  


그러니 한 사람의 인기작가가 갑작스럽게 등장하여 수십만 권의 판매고를 기록한다고 해서  순식간에 추리소설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김연아와 박태환이 세계 정상의 위치에 올랐다고 피겨나 수영 강국이 아니듯 말이죠. 기본적으로 국내 작가의 작품이 연간 1백 편 정도 출간되고(좀 많나요^^;;) 누구나 휴가를 떠날 때 한국 창작 추리소설 한 권쯤 들고 가서 읽는 생활이 일반화될 때, 바로 그때가 추리소설 선진국이 되는 순간일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되는 데는 제법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체계적 작가 양성, 내재된 역량의 축적, 한국형 스타일의 작풍 확립 없이는 침체된 분위기를 한동안 반전시키기 힘들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만, 부디 이런 예측이 빗나가길 고대합니다^^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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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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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메라이언 2010.11.09 22: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그 날 스치듯 들었던 추리소설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로군요. 와아 흥미로워요. 방정환 선생도 추리소설을 쓰셨었군요! ㅎㅎ

    꼬리.
    블로그 디자인이 바뀌었네요. 훨씬 시원하고 좋아요. ^-^

    • 추리닝4 2010.11.10 14: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날 스치듯 이야기를 했군요ㅋ 최근 이야기는 시시콜콜 적기가 좀 부담스럽네요^^; 글구 편집장님이 자료를 많이 주셨어요. 80년대 추리작가협회 현판식 사진을 어디서 구하겠어요. 블로그 디자인은 어느 순간 바뀌어있더라는 ㅎ

    • 카메라이언 2011.01.18 0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 ... ... 추리소설을 보고 추리소설을 쓰는 제가 보기에 이 주소는 백퍼센트 광고! 이 주소에 추리소설 있을 리 없다!! (주소가 gamehanpan 인데 누를 리 없잖아욧!!!! ;;;) 혹시나 싶어 네이버에 검색하니 역시나 게임사이트였 ;; (;;;)

  2. 무혼자 2011.08.21 23: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고스럽게도 한국 추리소설 역사를 쓰셨군요. 한번은 읽고 기억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추리소설등에 관한 발전적 문제는 금방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생각듭니다.

  3. Dokuta 2011.09.17 0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내성의 <기담 연문 왕래>(일본말)를 공개했습니다. 일본말을 할 수 있는 분은 와 보십시오.
    http://www36.atwiki.jp/asianmystery/pages/16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