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 울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2.02 테마로 읽는 미스터리 <19> 술 마시는 사람 (10)
  2. 2010.12.09 테마로 읽는 미스터리 <11> 왓슨 역 (6)

애주가, 주정뱅이, 알코올 중독자

세상에는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남자가 처음으로 술을 마셨을 때,
다른 하나는 여자가 마지막 한 잔을 마셨을 때이다.
     - <The Octopus Marooned> (1908) O.헨리
 
술.
술자리는 친구, 동료, 혹은 명절날 가족들과 함께 하는 즐거운 자리일 수도 있겠지만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게는 그런 자리가 괴롭기만 하죠. 또 음주가 지나치면 좋지 못한 일(따로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이 생길 때도 많습니다. 이렇게 술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괴로움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문학적 측면에서 보면 술은 매우 쓸모 있는 소도구로, 웬만한 작가라면 음주 취향만으로 등장인물의 사회적 지위와 배경을 쉽게(혹은 상투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와인을 즐기는 도시적인 인물, 생맥주를 들이키는 직장인, 칵테일을 홀짝거리는 묘령의 여인,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배 나온 중년 남자, 소주나 막걸리를 안주도 없이 들이키는 거친 사나이… 이런 전형적인 인물 설정은 예나 지금이나 커다란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추리작가와 술의 관계도 밀접합니다. 현대 추리소설의 창시자 에드거 앨런 포는 음주벽으로 유명했고, 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네가 범인이다>, <아몬틸라도 술통>등의 작품도 있지만 그가 불과 40세라는 짧은 나이에 요절한 것은 폭음으로 인해 일찌감치 건강을 해쳤던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


그러나 포 이후 한동안 탐정은 술을 멀리한 것 같습니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는 연신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심지어 아편이나 코카인 등의 마약까지 상용했는데 취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귀족적인’ 영국 탐정은 식탁에서 예의 바르게 가벼운 술 한 잔을 즐기는데 그쳤지요. 애거서 크리스티의 주인공 엘큐울 푸아로는 박하주, 석류주 등 독하지 않을 듯한 술을 즐겼으며 배러니스 오르치가 만들어 낸 괴상한 주인공 ‘구석의 노인’은 쉴 새 없이 손을 만지작거리고 매듭을 만들며 마치 알코올중독자 같은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그가 마시는 것은 놀랍게도 우유일 뿐이었습니다.

이언 플레밍이 만들어 낸 영국의 전설적인 스파이 007 제임스 본드도 고급 술을 즐기는 까다로운 입맛을 가졌습니다. 술에 대해 박식한 플레밍은 제임스 본드의 미각 묘사를 통해 자신의 지식을 보여주고 있지요. 영화 <007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에서는 원작 소설에는 없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련 스파이가 생선 요리와 함께 레드와인(붉은 포도주)을 주문한 것. 공산주의자인 소련 스파이는 -빨갱이라서- 포도주도 붉은 것을 마신다는 유머와 함께, 본드가 상대의 정체를 알아내는 계기가 됩니다. 원래 생선요리에는 화이트 와인(흰 포도주)을 함께 마시기 때문에 수상쩍게 여기게 되는 것이죠.

용의주도하게 와인 맛을 보는 제임스 본드(숀 코네리가 연기).


술을 많이 마시는 탐정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귀족 같은 생활을 하던 유럽의 천재 탐정 대신 뒷골목에서 악당들과 맞붙는 현실적이며 훨씬 더 인간적인 탐정이 하드보일드 작품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드보일드의 선구자 대쉴 해밋이 만들어낸 탐정 샘 스페이드는 술을 즐기는 편인데, 사건을 의뢰 받았을 때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마십니다. 대신 강인한 외모나 성격처럼 알코올에도 강해 인사불성이 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의뢰인에게 실망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해미트의 뒤를 이은 레이먼드 챈들러가 탄생시킨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도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인데, 사무실의 책상 서랍(작품에서는 ‘깊숙한 서랍’이라고 나옵니다)에는 언제나 위스키 병과 술잔이 들어 있어 자신이 마시거나 손님에게 대접하곤 합니다.

술집에서의 필립 말로우(로버트 미첨이 연기). 영화 '빅 슬립'에서


지나간 일이니 결과론이 되겠지만 레이먼드 챈들러는 만약 술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위대한 추리소설가 대신 유능한 사업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젊은 시절 변호사를 지망했던 챈들러는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문학세계로 발을 디뎠으나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못했고, 군복무 후 은행을 거쳐 석유회사의 중역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미국을 휩쓸었을 때 이미 알코올중독 기미를 보여서 직장을 잃은 챈들러는 44세라는 나이에 본격적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으며, <빅 슬립>(1939), <안녕, 내 사랑>(1940),<기나긴 이별>(1954)등의 걸작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 역시 포우에 못지않게 서글펐는데, 1954년 연상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진정되어가던 모습을 보이던 알코올중독이 다시 도진 것입니다. 결국 건강을 해친 그는 집필 중이던 장편 <푸들 스프링>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1959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미국 탐정이 위스키 같은 독한 술만 마시는 것은 아닙니다. 렉스 스타우트의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는 ‘맥주와 난(蘭)’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울프는 입맛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맥주도 가려서 먹는데, 문제는 마음에 드는 맥주라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마신다는 것이죠. 저녁식사 때는 언제나 맥주를 마시는데 어쩌다가 마음만 내키면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계속 마시기 때문에, 조수인 아치 굿윈을 걱정스럽게 만듭니다.

맥주 맛을 보는 네로 울프(에드워드 아놀드가 연기).


와인을 마시는 사람으로는… 역시 프랑스가 자랑하는 메그레 경감을 들 수 있겠군요. <Maigret a Vichy>(1968)에서는 휴가차 비시로 간 메그레 경감이 젊은 의사와 술 이야기를 나누는데, 하루에 와인을 1리터 정도를 마신다고 하니 거의 음료수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개 집에서는 와인, 나가면 맥주를 마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애주가가 어느 선을 넘어서면 술꾼이 되고, 그걸 더 넘어서면 알코올중독자가 되죠. 그런데 그런 탐정도 있습니다.


1930년대 중반 조나단 라티머가 창조한 사립탐정 빌 크레인은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데, 문제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아무데서나 쓰러져 잠이 들기까지 한다는 것이죠. 재치있고 머리도 좋아 어떤 궁지에서든 잘 빠져나오긴 하지만, 술만 아니면 궁지에 빠질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탐정 빌 크레인은 이렇게 생겼습니다-영화 '시체실의 여인' 포스터


<스위트홈 살인사건>으로 알려진 여류 작가 크레이그 라이스도 술꾼 주인공을 만들어 냈습니다. 뒤죽박죽 희극식 작품에 등장하는 주정뱅이 변호사 존 J.말론은 과거 하드보일드 탐정들을 풍자한 듯이 보이는데, 그는 캐비넷 서랍 안에 ‘기밀(Confidential)’과 ‘비상 (Emergency)’이라고 붙여 놓은 술병을 숨겨 놓고 있으며, 아름다운 여자와 노닥거리는 것을 즐깁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보다 술이 덜 깼을 때 머리가 더 잘 돌아간다니 아무래도 별난 인물입니다.

J.J. 말론은 이렇게 생겼을까요 (물론 뒤에 있는 남자)


한편 웨이드 밀러가 <Guilty Bystander>(1947) 등에 등장시킨 맥스 서즈데이는 아내와 헤어지고 나서 주정뱅이가 된 탐정입니다. 에드 맥베인이 커트 캐넌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일련의 단편에 등장하는 주정뱅이 탐정 커트 캐넌(작가와 이름이 같습니다)도 이와 비슷한 쓰라린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뉴욕의 잘 나가는 사립탐정이었던 그는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자 친구를 반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팬 끝에 탐정 허가증을 빼앗기고 아내도 잃고 말지요. 결국 알코올중독자가 된 그는 뉴욕 뒷골목에 살게 되었지만 무허가 탐정으로 서민층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커트 캐넌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미국 추리작가협회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커더 역시 비슷한 경력을 가졌습니다. 뉴욕 시경 소속의 유능한 형사였던 스커더는 수사 중 쏜 총탄이 무고한 소녀의 생명을 빼앗자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경찰을 사직합니다. 그 후 아내와도 이혼하고 알코올중독자가 되어버린 그는 싸구려 호텔에 살면서 무허가 사립탐정 일을 하며 살아가다가 알코올중독자 치료모임에 들어가 금주(禁酒)를 시작하며 음지에서 양지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8백만 가지 죽는 방법'에서 매트 스커더(왼쪽, 제프 브리지스가 연기했습니다)


그나저나 술 하면 문득 떠오르는 작가는 나카지마 라모입니다. <가다라의 돼지>에서 어린 딸을 잃고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민족학자 오우베 교수가 등장하는가 하면 <오늘 밤 모든 바에서>에서는 알코올성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한 알코올 중독자가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작품 속에서 알코올 중독자의 묘사가 너무나 생생한 것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끊임없이 술을 마신 탓에 그 역시 삼십 대 중반에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었지요.

공연중인 나카지마 라모


주정꾼 탐정은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빈틈 하나 없는 사람보다 약한 면을 보이는 등장인물에게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좀 다르겠습니다만. (:P)

P.S. 명절 잘 보내세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추리닝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야기꾼 2011.02.03 0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에드 맥베인의 커트 케넌에 한 표!
    어린 시절 그 작품을 읽고 경도되었던 경험이....

    허나....술 먹고 댓글쓰는 건 참 ㅊ하들거미...ㅋㅎ샤댜ㅣㄹ ㅑ디

  2. 평시민 2011.02.03 02: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선요리에 붉은 포도주 썼다고 빨갱이라니..., 조금 억지가 심한 건지 이안 플레밍이 의외로 매카시스트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본드 하니 생각납니다.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 보면 두 명의 킬러가 웨이터로 위장하고 본드에게 다가오는데 본드가 "이 요리에는 보르도산 포도주가 잘 어울리는데 오늘은 무통이군." 두 웨이터는 다 떨어졌다고 대답합니다. 사실 무통이 보르도산인데 말이죠. 본드는 이들이 웨이터 치고 향수 냄새가 짙다는 점(그것도 익숙한)을 보고 의심하고 있었지만요.

  3. 카메라이언 2011.02.14 04: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카지마 라모 아저씨가 저렇게 생기셨었구나... 'ㅂ'... 수많은 직업들 중 뮤지션이기도 하셨다는 말에 궁금했었는데 (;;;) 아우 정말, 오늘 밤 모든 바에서 보면서 정말 술은 사회 악이구나 싶더라고요.

    크레이그 라이스의 책은 최근에 동서미스터리서 나온 스위트홈 살인사건을 봤는데, 안 그래도 작품 말미에 붙은 해설에서 나온 다른 소설들 읽고 너무 보고 싶더라고요. 번역이 상당히 어색한데도, 그 코믹코드가 넘넘넘 좋더라고요.

    명절은 한참 지났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__) (--) <--세뱃돈을 받고 싶은 수작. ㅋㅋㅋ

  4. 2011.03.06 0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왓슨, 당신이 없으면 섭섭하지

“그(네로 울프)는 날 해고할 수 없을 것이다.  혼자선 아무 것도 못하다가 결국 굶어 죽을 테니까.”
                                                                             - 아치 굿윈
<Instead of the Evidence>(1949)  -  렉스 스타우트

 소설이든 영화든 모든 드라마에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기둥임이 분명하지만, 그를 뒤에서 받쳐주는 조연이 없다면 그 작품은 마치 양념이 안 된 요리처럼 싱겁고 밋밋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낯선 섬에 홀로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도 후반부에서 식인종 프라이디가 등장하는 변화가 없었더라면 그저 섬에서 고생스레 혼자 살아간 사나이의 이야기라는 따분한 내용 정도로만 그치지 않았을까요.

추리소설에도 당연히 주인공이 있고 조연도 빠지지 않는데, 친구 역, 애인 역, 지나가는 사람 역 등등 그런 것 이외에 추리소설에만 있는 특별한 역할이 있습니다.

내가 빠지면 섭섭하지요 - 영화 '셜록 홈즈'에서 왓슨 역을 맡은 주드 로


고전적 추리소설(일반적인 수수께끼 풀이 추리소설)에서는 ‘피해자-범인-탐정’이라는 필수적 등장인물 이외에 보통 ‘왓슨 역(Watson Character)’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명칭은 전설적인 명탐정 셜록 홈즈의 하숙집 룸메이트이며 그의 사건을 기록해 온 의사 존 왓슨(John Watson)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데서 유래한 것이지만, 사실 이런 역할을 처음 등장시킨 것은 코난 도일이 아니라 현대 추리소설의 창시자 에드거 앨런 포우였습니다. 포우는 아마추어 탐정 뒤팽이 등장하는 3편의 단편 소설, 즉 <모르그 거리의 살인>,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 <도둑맞은 편지>에서 단지 ‘나’라고만 알려진 이름 없는 인물을 등장시켰는데, 이 ‘나’라는 인물은 사건을 설명하면서 친구인 뒤팽의 추리를 묘사합니다. 이것이 ‘왓슨 역’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할은 대개 정적인 작품에서나 가능하며, 1인칭의 하드보일드 형식이나 쉴 새 없이 액션이 전개되는 작품에서는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왓슨 역의 인물은 다양한 역할을 합니다. 보통 작품의 화자(話者)가 되어(1인칭 시점) 사건의 흐름을 기록하면서 사건의 주변 상황을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대목에서 어느 정도의 지성을 지닌 독자가 물어볼 만한 질문을 탐정에게 던지는 것이죠. 이것은 작가가 독자와의 머리싸움을 하기 위한 아주 편리한 방법으로, 탐정이 생각하고 있는 사항 가운데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일러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진범인이 누구인지 탐정이 알아낸 순간을 감추어 놓고 이야기 줄거리의 막판에서 그것을 밝히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왓슨 역할의 인물은 보통 독자보다 다소 머리가 나쁜 것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탐정의 능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구실을 합니다.

왓슨 역할의 인물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뭐니 뭐니 해도 코난 도일의 작품에 등장하는 진짜 왓슨입니다. 런던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왓슨은 군의관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의병 제대한 후 런던으로 돌아옵니다. 친척도 친구도 없던 그는 하숙방을 찾다가 셜록 홈즈를 만나게 되어 베이커 거리 221B 번지 하숙방의 룸메이트가 되고 <주홍색의 연구>사건 수사에 참여합니다. 왓슨은 훗날 결혼해서 하숙방을 떠나기도 하고, 아내가 죽은 후 다시 홈즈와 함께 살기도 하며 생활에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홈즈 시리즈의 거의 모든 작품의 기록자가 되었습니다(<사자의 갈기>, <표백된 병사>등 일부 단편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비록 조연이고 화려함은 없지만 그는 주인공인 홈즈 못지않게 유명해졌으며, 작가인 도일은 홈즈보다 오히려 그의 사생활에 대해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도일 역시 의사였던 만큼 왓슨을 묘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겠지요.

홈즈 시리즈가 인기를 얻은 이후 - 이른바 단편소설의 황금기 - 에 나타난 많은 작가들은 개성있는 주인공과 함께 왓슨 역할을 하는 인물을 등장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R.A. 프리먼의 손다이크 박사와 저비스, 자크 푸트렐의 ‘생각하는 기계' 반 두젠 교수와 허친슨 해치 기자, G.K.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와 전직 도둑 플랑보우, 어네스트 브라마의 시각장애인 탐정 맥스 캐러도스와 하인 루이스 칼라일 등… 이들 가지각색의 직업과 성격을 가진 탐정과 조수들은 근본적으로 홈즈-왓슨 관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형식이었습니다.

다만 왓슨만큼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사람은 드물긴 했고, 가끔 어정쩡한 형태의 조연도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오르치 남작부인의 <구석의 노인> 시리즈에 등장하는 여성 기자 폴리 버튼은 쉴 새 없이 매듭을 만지작거리는 정체불명의 노인을 찻집에서 만나 난해한 사건에 대한 설명을 일방적으로 들은 후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사건의 결말을 듣고 놀라기만 합니다. 명색이 사건기자라고 하는 폴리는 평상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건에 대해 모를 때가 태반으로, 사건의 시작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과 추리까지 탐정 역할을 하는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작품 속에서 그녀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의하기 애매해질 지경입니다.

폴리 기자, 당신이 왓슨 역할인 것 틀림없어요? - 구석의 노인


‘미스터리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는 명탐정 푸아로와 함께 퇴역 군인인 존 헤이스팅즈라는 인물을 등장시켰습니다. 머리는 뛰어나지는 않지만 선량하고 성실한 사나이 헤이스팅즈는 푸아로와 함께 여러 사건에 등장하지만 크리스티는 코난 도일과는 달리 그를 영구적인 고정 배역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크리스티가 창조한 또 다른 뛰어난 탐정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시리즈에는 고정적으로 왓슨 역할을 맡은 인물이 없었습니다. 뭐 직업 탐정이 아닌 이상 그런 사람이 있기는 어렵겠지요.

헤이스팅스(오른쪽, 휴 프레이저 분)과 푸아로(데이빗 수셰)


렉스 스타우트는 사립탐정 네로 울프와 조수 아치 굿윈 사이에 독특한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천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네로 울프는 대단히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것에는 틀림없으나 움직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거나 증거 조사 등의 일은 조수인 아치 굿윈이 도맡아 합니다. 두 사람 모두 불평도 많고 비꼬기도 잘하며 심술궂기로는 우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이지만 누구보다도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이기도 하죠.

에도가와 란포가 창조한 아케치 코고로에게는 초기에 그와 친구인 듯한 인물이 화자로 등장합니다만 어느 순간에 말없이 사라져버리지만,  그가 쓴 어린이 대상 소설에서는 아케치 탐정의 제자인 고바야시 소년이 소년 탐정단을 이끌며 조수 역할(?)을 해서 과거 일본 어린이들의 우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차츰 드물어지던 왓슨 역은 1980대 중반 이후의 신본격 작가들의 작품에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시마다 소지의 미타라이 기요시를 돕는 이시오카 카즈미가 대표적이지요.

그중 독특한 인물을 꼽자면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들 수 있겠네요. 그의 작품에는 작가와 이름이 같은 아리스가와 아리스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학생 시리즈'에서는 선배인 에가미 지로를, '작가 시리즈'에서는 임상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를 보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세 사람… 음, 조금 헷갈립니다만 이 두 개의 시리즈는 분리된 세계로 '작가 아리스'는 학생 시리즈를 쓰고, '학생 아리스'는 작가 시리즈를 쓴다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진짜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 독자와의 머리싸움은 여전히 매력이 있는 만큼 가장 중요한 요소인 왓슨 역할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탐정 옆에 고정출연(?)하는 왓슨 역은 없더라도 경찰이건 관계자이건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거의 빠지지는 않습니다.

내가 빠지면 되겠습니까? - '셜록'에서 왓슨 역을 맡은 마틴 프리먼


최근 제작된 드라마 <셜록>에서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왓슨은 빠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의 매력은 영원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P)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추리닝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허니문 차일드 2010.12.09 1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탐정물에 있어 주연과 조연이 서로 끈을 당기고 밀어주는 역할은 독자에게 또 하나의 재미를 주는 것 같습니다. 갈수록 애정도 깊어지고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필명도 엘러리 퀸처럼 주인공과 작가를 동일시하는 데서 착안했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저도 조만간 제 소설에 허니문 or 차일드가 나올 것 같습니다. ㅎㅎㅎ 잘 읽었습니다.

  2. 카메라이언 2010.12.13 1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왓슨왓슨왓슨 ㅠㅠㅠㅠㅠㅠㅠ오늘 새벽에 셜록 kbs더빙방송 끝나서 안타까워했는데 너무너무 반가워요. 중간에 포와로와 헤이스팅스도 케이블서 해줄때 줄기차게 봤던 기억이 나서 아아아아. 왓슨은 정말 약방의 감초!!

  3. 레이 2010.12.13 17: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왓슨 없는 셜록은 찐빵 없는 앙꼬죠.
    맨 밑에 왓슨 사진과 설명이 어울려 웃음이~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