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말로우(Philip Marlowe)

 

 1959년 미스터리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가 사망하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챈들러는 사립탐정을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다’라는 특집 기사를 실었다. 그 사립탐정이란 바로 로스앤젤레스의 독신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라는 인물이다. 챈들러의 표현에 의하면 말로우는 “외롭고, 가난하며, 위험하며, 인정 있는 사나이”이며, 팬들은 그를 “현대의 기사(騎士)”로 추앙하고 있다.


  처음 등장했던 <빅 슬립>에서 그의 나이는 33세였으며, 6피트(약 183cm), 190파운드(약 85kg)의 작지 않은 체격이지만 우람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약간 마른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짙은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지닌, 외모만으로는 그다지 튀는 면이 없는 중년 사나이지만 여자들은 종종 그에게서 야수(野獸)같은 분위기를 발견하기도 한다. 중절모에 트렌치 코트, 그리고 줄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습은 사실상 하드보일드 장르의 탐정을 대표하는 상징처럼 되었다. 수입이 아주 시원찮은 것은 아니지만 방 두 개 짜리 사무실에는 책상과 의자, 캐비넷, 모자걸이와 달력뿐이며 여비서나 전화 자동응답기조차 두지 않고 있다. 담배 이외에도 술을 즐기는 편으로 사무실 책상의 ‘깊숙한 서랍’안에는 자신과 때로는 의뢰인에게 대접할 술병과 잔이 항상 들어 있다. 그러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시지는 않는다.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TV 시리즈의 주연을 맡은 파워스 부스)

 

  캘리포니아 출생으로, 대학을 중퇴한 뒤 보험회사 조사원을 거쳐 로스앤젤레스 지방검사국의 태거트 와일드 검사 휘하의 경찰로 근무했지만 부당한 명령을 참지 못해 사표를 던진 후 할리우드  대로의 빌딩에 사립탐정 사무소를 열었다. 그의 특징이라고 하면 신랄할 정도의 날카로운 독설(毒舌)과 유머 감각이다. 코앞에 권총을 들이대더라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그것도 상대의 심경이 뒤틀릴 정도로 말을 쏘아댈 정도의 배짱을 가지고 있다. “인생은 비정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하지만 비정함만으로는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는 필립 말로우가 남긴 말 중 가장 유명한 대사. 

 

영화 '기나긴 이별'에서의 필립 말로우(엘리엇 굴드가 주연을 맡음)

 

  흔히 상상하는 거친 탐정의 모습과는 달리 말로우는 대단히 금욕적이다. 한가한 시간에는 위스키 잔을 한 손에 들고 체스의 묘수풀이를 즐기며, 브라우닝, T.S.엘리엇, 셰익스피어, 플로베르의 문구를 종종 인용할 정도로 고전을 즐겨 읽는다(말로우라는 이름이 16세기 영국 극작가의 이름에서 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독특한 매력을 지닌 독신 남성 말로우는 종종 여성들로부터 유혹을 받지만, ‘직업에 대한 긍지’를 지키기 위해 의뢰인과는 절대로 자신이 정해 놓은 선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태도에는 훗날 변화가 생긴다. <플레이백>(챈들러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에서는 바로 전 작품 <기나긴 이별>에 등장했던 부호(富豪)의 딸 린다 롤링과 결혼 이야기가 나올 만큼 친밀한 관계로 이어지며, 미완성 유작인 <푸들 스프링>에서는 두 사람의 신혼생활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된다.

'빅 슬립' 표지

  필립 말로우가 등장하는 장편은 ‘공식적’으로 일곱 편이다. 그러나 후배 하드보일드 작가인 로버트 B. 파커가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푸들 스프링>을 완성시킨 후 내친 김에 <빅 슬립>의 속편 격인 <Perchance to Dream>을 썼는데, 팬과 평단으로부터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말로우가 등장하는 작품은 더 이상 나올 것 같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원작자인 챈들러나 말로우의 팬들이 원하는 바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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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부커상 수상작가인 소설가 존 밴빌(John Banville)이 새로운 필립 말로 시리즈 작품을 2013년에 출간할 예정이라고 헨리 홀트 출판사가 밝혔습니다. 새삼스래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필립 말로라 하면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하드보일드 탐정의 대명사적인 주인공이지요. 

 

존 밴빌


 

저작권자와의 합의는 이미 마쳤으며, 작품 배경은 1940년대의 베이 시티 - 캘리포니아 주 산타 모니카를 모델로 한 가상 도시 - 이고, 밴빌은 이 작품에 말로의 친구인 버니 올즈도 등장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1945년 아일랜드 웩스포드에서 태어난 밴빌은 벤자민 블랙(Benjamin Black)이라는 필명으로 쿼크(Quirke)라는 이름의 병리학자를 주인공으로 한 범죄소설 시리즈를 발표해 왔으며 최근 다섯 번째 작품인 <Vengeance>가 출간되었습니다.

그는 10대 시절 챈들러의 작품을 처음 읽은 이후 여러 차례 다시 읽었다면서, 챈들러의 주인공을 다시 살려내는 작업을 맡게 된 것에 대해 무척 기쁘게 여긴다고 합니다.

 

챈들러가 발표한 필립 말로 시리즈는 다음과 같습니다:  <빅 슬립> (1939), <안녕, 내 사랑> (1940), <하이 윈도> (1942), <호수의 여인> (1943), <리틀 시스터> (1949), <기나긴 이별> (1953), <Playback> (1958).

이 시리즈는 거의 다 볼 수 있지만 마지막 작품인 <Playback>은 아쉽게도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로버트 B.파커는 챈들러가 1959년 세상을 떠나면서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유작 <Poodle Springs>(1989)을 완성했고, 몇 년 후에는 <빅 슬립>의 속편 격인 <Perchance to Dream>(1991)도 쓴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밴빌은 필립 말로 시리즈를 정식으로 쓰는 세 번째 작가가 되는 셈입니다(참, 필명인 벤자민 블랙 명의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어떤 작품이 나올지 기대되는군요.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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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2.08.18 00: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소한 작가군요, 하지만 레이몬드 챈들러 시리즈에 도전하다니 기대됩니다.


같아 보이면서도 다른 것

누구나 할리우드에서 6주일 이상 살게 되면,
갑자기 치료가 불가능한 정신병에 걸린다고 한다.
 <트럼프 살인사건(The Four of Hearts)>(1938) - 엘러리 퀸


어느덧 활자(책)보다 영상(영화)이 강세를 보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마음먹고 일정을 잡아야 하는 행사였지요. 그나마 개봉영화는 많지도 않아 선택의 여지도 별로 없었지만, 컬러 TV의 등장, 비디오․케이블 TV의 보급, 인터넷의 보편화, 그리고 이제는 DMB 등 기술 발전을 통해 말 그대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영화감상을 할 수 있습니다. 초기 영화 중 하나가 열차 강도를 소재로 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영화는 범죄를 소재로 한 것이 많았는데, 범죄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대중소설인 추리소설은 역시 대중성을 추구하는 영화로 옮기기에 매우 적합한 듯합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영화관계자들이 추리소설을 열심히 읽는 독자라고도 합니다(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작가가 영화와 관계를 맺는 데는 작품 자체에 작가가 관여할 때, 즉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거나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 가장 많습니다.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 경우는 일일이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라서 원작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볼 때가 흔하지요. 좀 오래된 기록입니다만, 1993년판 영화관련 기네스북을 보면, 가장 많이 영화에 등장한 인물은 다름 아닌 명탐정 셜록 홈즈였습니다. 영국 작가 코난 도일이 창조한 전설적 인물 셜록 홈즈는 1900년부터 1993년까지 무려 211편의 영화에 등장해 2위인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159편)과 3위 프랑켄슈타인의 괴물(115편)을 여유 있게 앞서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숫자에서 눈치 챌 수 있듯 홈즈가 등장하는 영화라고 해서 모두 코난 도일의 원작 소설을 토대로 한 것은 아닙니다. 인기가 있으면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유명한 주인공의 이름을 걸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지요. 이런 일은 드물지 않은데, 예를 들어 얼 데어 비거스의 찰리 챈 시리즈는 장편 여섯 개에 불과하지만 영화로는 1931년부터 1949년까지 20년 남짓 사이에 무려 43편이 제작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영화로 제작된 찰리 챈 시리즈

‘만약…’이라는 말은 언제나 여운이 남지요. 로스 맥도널드의 루 아처 시리즈도 어쩌면 007과 같은 인기 시리즈가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사립탐정 루 아처(Lew Archer)의 이름이 루 하퍼(Lew Harper)로 바뀌고 제목도 <움직이는 표적>에서 <하퍼>가 된 이유는 주연배우 폴 뉴먼의 성공작들이 모두 H로 시작되었기 때문(<허드 Hud>, <허슬러 The Hustler> 등)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각본을 맡았던 -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 - 윌리엄 골드먼이 밝힌 바에 따르면 사실무근이라고 합니다. 아처 시리즈를 영화 시리즈로 제작할 계획을 세운 영화사는 아처의 이름을 계속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으며, 맥도널드가 그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에 당시 각색을 맡았던 골드맨이 아처와 발음이 비슷한 하퍼로 바꾸었다는 것이지요.


주인공은 매력적이지만 오락영화로 만들기에는 줄거리가 무거운 편이었던 아처 시리즈는 이런 이유로 <하퍼>와 <The Drowning Pool>등 두 편만 제작되는데 그쳤습니다. 골드먼은 아처 시리즈의 최고 걸작으로 인정받는 <소름>에 애착을 가지고 각본도 썼지만, 뉴먼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 제작되지 않고 창고 어딘가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수백, 혹은 1천 페이지가 넘는 장편 소설을 각색하는 동안 많은 부분에서 원작과 달라지기 때문에 원작을 읽은 독자뿐만 아니라 작가도 불만이 없을 수가 없겠지요. <재키 브라운> <표적>등 호평 받은 영화의 원작자 엘모어 레너드는 영화계가 잡으려고 경쟁을 벌이는 현역 최고 작가 중 하나지만, 그의 첫 각본이자 자신의 작품을 직접 각색한 <The Moonshine War>가 제작되던 1970년에는 큰소리칠 입장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디트로이트의 디킨스' 엘모어 레너드

촬영 현장에 처음 나간 그는 프로듀서나 감독이 걸핏하면 각본을 즉석에서 바꾸는 모습을 보고 당황했고, 주연 배우 패트릭 맥구헌이 ‘자신의 대사가 엉망이 되니 기분이 어때요?’하는 질문에 대답도 못했다고 회상했습니다. 영화화 과정에서는 대개 이런 일이 벌어지는 만큼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다. 판권을 팔았으면 그걸로 끝이다. 영화는 내 작품이 아니다’라는 제임스 엘로이의 태도가 훨씬 편할 것 같네요.

  유명한 추리작가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쓰거나 다른 사람의 작품을 각색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탐정 필립 말로우를 탄생시킨 하드보일드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는 역시 위대한 하드보일드 작가 중 한 사람인 제임스 케인의 <이중 배상(Double Indemnity)>(1943)을 훌륭하게 시나리오로 만들어 호평을 받았으며,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의혹의 전망차> 역시 여성 추리작가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의 데뷔작인 <낯선 승객>(1950)을 그가 각색한 작품입니다. 히치콕 감독의 또 다른 걸작 <새>는 로맨틱 서스펜스 작가 대프네 뒤 모리에의 단편 소설을 경찰소설의 대가 에드 멕베인이 각색한 것이지요.

  작가의 활동은 원작이나 시나리오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위대한 작가는 그 시대를 다룬 영화나 혹은 전기 영화, 다큐멘터리에 실명으로 등장합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저명인사였던 코난 도일의 전기 영화는 제작된 적이 없지만, 그와 미국의 유명한 마술사인 해리 후디니의 친분은 워낙 잘 알려져 있어 <위대한 후디니(Great Houdini)>(1976), <젊은 해리 후디니(Young Harry Houdini)>(1987), <후디니(Houdini)>(1998) 등 후디니의 전기 영화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유명 작가가 실명으로 나오는 영화로는 1926년 발생한 애거서 크리스티의 실종 사건을 다룬 <애거서(Agatha)>(1979), 하드보일드 작가 대쉴 해밋과 그의 동반자적 존재였던 여성 극작가 릴리언 헬만의 이야기를 다룬 <줄리아(Julia)>(1977), <대쉬와 릴리(Dash and Lilly)>(1999)등이 있으며, 좀 독특한 소재의 영화로 빔 벤더스 감독의 <해미트(Hammett)>(1982)가 있습니다. 이 작품은 탐정 출신 추리작가 조 고어즈가 해미트의 사립탐정 시절을 그린(물론 허구이죠)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해밋을 연기한 프레드릭 포러스트는 10년 후 제작된 <시티즌 콘(Citizen Cohn)>에서도 해미트로 등장합니다.

빔 벤더스 감독의 '해밋'

  여건이 되면 작가가 영화에 출연도 합니다. 코난 도일은 역시 이쪽에서도 선구자로 <5백만 달러 위조 계획(The $5,000,000 Counterfeiting Plot)>(1914), 또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한 <잃어버린 세계(The Lost World)>(1925) 등 두 편의 무성영화에서 실명으로 등장합니다. 변호사 출신 작가 얼 스탠리 가드너는 TV 시리즈 <페리 메이슨>에서 판사 역으로 출연했는데, 재판 과정에 익숙한 그로서는 근엄한 얼굴로 앉아있는 검사 연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 같다. 조연으로 등장한 이들과는 달리, 화끈한 사립탐정 마이크 해머 시리즈를 쓴 미키 스필레인은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들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시리즈 다섯 번째 영화 <걸 헌터>(1963)에 직접 해머로 등장했습니다. 스필레인은 TV 시리즈인 <형사 콜롬보>에도 등장했는데 여기서는 살해당하는 소설가를 연기했지요.
  다큐멘터리 픽션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범죄소설 <인 콜드 블러드>를 남긴 트루먼 캐포티는 귀여운(?) 아저씨 같은 외모와는 달리 <5인의 탐정(Murder by Death)>라는 코믹 미스터리 영화에 출연해 명탐정들을 골탕 먹이는 인물을 연기했습니다. 유명 희곡작가 닐 사이먼이 각본을 쓴, 싸구려 추리소설들을 야유하는 듯한 이 영화에서 캐포티가 연기한 괴상한 인물 라이오넬 트웨인은 탐정들이 너무 영리한 나머지 겸손함을 잃고 독자들을 기만한다고 질타하며, 결국에는 수백만의 독자들이 복수할 것이라고 외칩니다.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은 영화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에서 종종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커다란 체격에 강렬한 인상을 지닌 그는 ‘스티븐 킹의 영화에 가장 많이 출연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자신’이라는 퀴즈가 있을 정도로 자주 출연했기 때문에 영화를 볼 때 그를 찾아내는 것도 또 다른 재미 중 하나이죠. 킹은 출연뿐만 아니라 <맥시멈 오버드라이브>의 감독을 맡은 적도 있는데,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해 이젠 감독 역할에 관심을 끊은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그러니까 2009년 말 재미있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영화 <이중 배상>에 각본을 썼던 레이먼드 챈들러가 깜짝 등장하는 장면이 있었다는 것이죠(지금은 DVD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챈들러입니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세계의 수천만 명이 보았을 터인데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던 것도 놀랍지만, 프랑스와 미국의 연구자가 거의 같은 시기에 발견했다는 건…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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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8.25 2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993년까지 만들어진 홈즈 영화가 211편이면 지금은 그보다도 더 많겠군요, 다 보고 싶습니다. 제가 영화로 보고 싶은 추리소설 걸작은 존 딕슨 카의 <벨벳의 악마>, 야마구치 마사야의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 김내성의 <마인>입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존재
 
"우리 집 고양이는 폭군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 레이먼드 챈들러, 1948년 제임스 샌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양이는 어쩐지 가까이하기 어려운 짐승 같습니다. 고양이가 사람과 함께 산 것은 고대 이집트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적어도 5천년 이상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으면서도 사람보다는 고양이 쪽에서 먼저 거리를 두곤 하죠(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하는 개하고는 많이 다르더군요).

또 서양에서 검은 고양이는 마녀의 사자이며 악(惡)이나 죽음을 의미할 정도로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제임스 본드의 숙적인 스펙터의 우두머리 블로펠드가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장면은 그런 시각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금기는 무척 뿌리 깊어 요즘도 서양 사람들은 검은 고양이가 앞을 가로질러 가면 매우 불쾌하게 여기곤 합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같지요?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도둑을 잡는데 고양이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었답니다. 다만 개처럼 냄새를 쫓아가는 과학적 방식이 아니라 주술적 매개체로 썼지요. 한국문화상징사전(동아출판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경기도 지방에서는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고양이를 잡아다가 시루 속에 넣고 상여줄로 시루를 감고 불을 때면서 도둑의 눈이 멀거나 손이 오그라들게 해 달라는 주문을 외운다. 이렇게 해서 고양이를 쪄 죽이면 도둑도 주문대로 눈이 멀거나 손이 오그라든다는 것이다. 전북 지방에서는 고양이를 항아리에 넣고 불을 때면서 주문을 외우다가 항아리 뚜껑을 열면 고양이가 도둑의 집으로 가서 죽고, 그때 도둑도 따라서 죽는다고 한다. 또 평안북도 지방에서는 고양이를 장례에 썼던 삼줄로 묶어 3일간 지붕 위에서 햇볕을 쬐게 한 후 삼거리에서 고양이를 쪄 죽이면 역시 도둑도 함께 죽는다는 것이다. 

…음, 끔찍한 방법이지만 실제로 효력이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추리소설보다는 공포소설로 보아야 할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일 겁니다. 아내를 살해한 죄목으로 다음날 사형 당할 예정인 한 사나이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에서 ‘플루토’라는 이름의 검은 고양이는 단지 좀 똘똘해 보일 뿐 아무런 나쁜 짓을 벌이지는 않습니다. 기껏해야 보통 고양이가 하는 흔한 행동, 즉 할퀴는 정도에 그치지요. 그러나 이 검은 고양이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아내를 죽이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주인공마저 파멸의 늪으로 몰아넣고 맙니다. 19세기에 발표한 이런 구닥다리(?) 작품이 여전히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여기 등장하는 고양이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괴기영화에 나오는 고양이 가죽을 뒤집어 쓴 괴물은 더더욱 아닌,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검은 고양이'(알퐁스 르그로의 그림)

현대 추리소설에서 고양이들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존재로서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사립 탐정들이 푼돈을 벌기 위해 종종 고양이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사건 의뢰가 없어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탐정들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지요. 엘러리 퀸은 단편 <일곱 마리 검은 고양이의 모험>에서 독자에게 희한한 수수께끼를 하나 제시합니다. 중풍으로 기동을 못하는, 그리고 고양이를 몹시 싫어하는 할머니가 왜 매주 검은 고양이를 한 마리씩 사는 것일까요? 이 수수께끼의 뒤에는 놀라운 진상이 숨어 있는데, 아직 작품을 읽지 않은 분을 위해서 여기서 결말을 밝힐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양이의 복수극 같은 괴기스러운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주로 집에서 집필활동을 하는 작가들에게 고양이는 무서운 존재라기보다 애완동물로서 무척 사랑 받는 것 같습니다. 하드보일드의 대가 레이먼드 챈들러는 타키(Taki)라는 이름의 검정색 페르시아 고양이를 20년 가까이 애지중지 키웠으며 문인들과의 편지에서도 소식을 써 보내기도 했습니다.

챈들러와 그의 고양이 타키

이렇게 고양이들이 작가들과 함께 지내다 보니, 급기야는 고양이가 당당히 주인공으로 등장해 사건을 해결하는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여성작가 릴리언 잭슨 브라운은 ‘코코(Coco)’라는 이름의 입맛 까다로운 수컷 샴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 연작을 쓰고 있습니다. 제목이 <The Cat Who…>로 이어지는 시리즈에 등장하는 코코는 글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고양이치고는 터무니없이 머리가 좋습니다. 하지만 고양이가 혼자서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기 때문에 코코의 주인인 신문기자 짐 클라인이 보조적인 역할을 합니다.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코코가 스트레스를 받는 기미를 보이자 클라인은 ‘얌얌’이라는 이름의 암놈 샴 고양이를 구해 함께 키우게 됩니다. 작가 브라운은 과거에 생일 선물로 받은 고양이에 코코라는 이름을 붙여 애지중지하면서 키웠는데, 어느 날 10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슬픔에 잠긴 브라운 여사는 고양이가 등장하는 단편을 쓰기 시작했고, 좋은 반응을 얻자 1966년 첫 장편인 <The Cat Who Could Read Backwards>를 발표한 후 코코가 등장하는 시리즈를 2007년까지 발표했습니다(릴리언 잭슨 브라운은 1913년생입니다). 시리즈 30번째 장편이 될 뻔했던 <The Cat Who Smelled Smoke>는 출간이 취소되었다는데 이유는 모르겠군요.

릴리언 잭슨 브라운의 'The Cat Who Could Read Backwards'

그 뒤를 이었다고 하긴 뭣하지만, 역시 미국의 여성 작가 리타 메이 브라운은 고양이 머피 부인(고양이의 이름입니다!)가 사건을 해결하는 시리즈를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작품 내용보다 더 독특한 것은 이 시리즈를 쓰는 것이 작가 브라운이 키우는 고양이 스니키 파이 브라운이라는 것이지요. 작가 브라운은 자신이 공동 저자라고 주장합니다만 판단은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리타 메이 브라운과 스니키 파이 브라운

한편 일본 작가 아카가와 지로는 ‘홈즈’라는 이름의 암컷 얼룩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고양이 홈즈의 주인인 가타야마 요시타로는 강력 사건을 다루는 형사임에도 불구하고 피(血)만 보면 정신을 잃을 정도의 현기증을 일으켜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고양이 홈즈의 도움으로 사건을 해결하며 위기를 넘깁니다. 유머 미스터리를 표방한 홈즈 시리즈는 첫 작품 1978년 <얼룩고양이 홈즈의 추리>가 발표된 이래 장편 33권, 단편집 14권이라는 대하(大河) 시리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독일 작가 아키프 피린치의 <펠리데(Felidae)>는 인간의 사건이 아닌 고양이의 사건을 고양이가 해결한다는 독특한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여기 등장하는 고양이들은 백과사전을 찾아보고 심지어 컴퓨터까지 다루지만, 사람들의 눈에 뜨이게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작가가 탐정 노릇을 하는 고양이에 대해서 호의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경찰소설의 선구자였던 에드 맥베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탐정소설을 가지고 온갖 괴상한 짓들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듣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맞아요. 고양이가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하겠습니다. 금붕어는 어떨까요? 금붕어 앞에 범죄 무기로 의심되는 것을 들자 금붕어가 물거품을 뻐끔뻐끔 내 뿜는다… 맙소사.”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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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5.05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고양이가 개보다 자유분방하니 고양이가 탐정 노릇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동물 탐정 이야기도 재미있는데 고양이 외에 과연 어떤 동물이 탐정 노릇을 하면 어울릴까요.

  2. 2011.05.09 10: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애주가, 주정뱅이, 알코올 중독자

세상에는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남자가 처음으로 술을 마셨을 때,
다른 하나는 여자가 마지막 한 잔을 마셨을 때이다.
     - <The Octopus Marooned> (1908) O.헨리
 
술.
술자리는 친구, 동료, 혹은 명절날 가족들과 함께 하는 즐거운 자리일 수도 있겠지만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게는 그런 자리가 괴롭기만 하죠. 또 음주가 지나치면 좋지 못한 일(따로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이 생길 때도 많습니다. 이렇게 술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괴로움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문학적 측면에서 보면 술은 매우 쓸모 있는 소도구로, 웬만한 작가라면 음주 취향만으로 등장인물의 사회적 지위와 배경을 쉽게(혹은 상투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와인을 즐기는 도시적인 인물, 생맥주를 들이키는 직장인, 칵테일을 홀짝거리는 묘령의 여인,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배 나온 중년 남자, 소주나 막걸리를 안주도 없이 들이키는 거친 사나이… 이런 전형적인 인물 설정은 예나 지금이나 커다란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추리작가와 술의 관계도 밀접합니다. 현대 추리소설의 창시자 에드거 앨런 포는 음주벽으로 유명했고, 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네가 범인이다>, <아몬틸라도 술통>등의 작품도 있지만 그가 불과 40세라는 짧은 나이에 요절한 것은 폭음으로 인해 일찌감치 건강을 해쳤던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


그러나 포 이후 한동안 탐정은 술을 멀리한 것 같습니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는 연신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심지어 아편이나 코카인 등의 마약까지 상용했는데 취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귀족적인’ 영국 탐정은 식탁에서 예의 바르게 가벼운 술 한 잔을 즐기는데 그쳤지요. 애거서 크리스티의 주인공 엘큐울 푸아로는 박하주, 석류주 등 독하지 않을 듯한 술을 즐겼으며 배러니스 오르치가 만들어 낸 괴상한 주인공 ‘구석의 노인’은 쉴 새 없이 손을 만지작거리고 매듭을 만들며 마치 알코올중독자 같은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그가 마시는 것은 놀랍게도 우유일 뿐이었습니다.

이언 플레밍이 만들어 낸 영국의 전설적인 스파이 007 제임스 본드도 고급 술을 즐기는 까다로운 입맛을 가졌습니다. 술에 대해 박식한 플레밍은 제임스 본드의 미각 묘사를 통해 자신의 지식을 보여주고 있지요. 영화 <007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에서는 원작 소설에는 없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련 스파이가 생선 요리와 함께 레드와인(붉은 포도주)을 주문한 것. 공산주의자인 소련 스파이는 -빨갱이라서- 포도주도 붉은 것을 마신다는 유머와 함께, 본드가 상대의 정체를 알아내는 계기가 됩니다. 원래 생선요리에는 화이트 와인(흰 포도주)을 함께 마시기 때문에 수상쩍게 여기게 되는 것이죠.

용의주도하게 와인 맛을 보는 제임스 본드(숀 코네리가 연기).


술을 많이 마시는 탐정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귀족 같은 생활을 하던 유럽의 천재 탐정 대신 뒷골목에서 악당들과 맞붙는 현실적이며 훨씬 더 인간적인 탐정이 하드보일드 작품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드보일드의 선구자 대쉴 해밋이 만들어낸 탐정 샘 스페이드는 술을 즐기는 편인데, 사건을 의뢰 받았을 때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마십니다. 대신 강인한 외모나 성격처럼 알코올에도 강해 인사불성이 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의뢰인에게 실망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해미트의 뒤를 이은 레이먼드 챈들러가 탄생시킨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도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인데, 사무실의 책상 서랍(작품에서는 ‘깊숙한 서랍’이라고 나옵니다)에는 언제나 위스키 병과 술잔이 들어 있어 자신이 마시거나 손님에게 대접하곤 합니다.

술집에서의 필립 말로우(로버트 미첨이 연기). 영화 '빅 슬립'에서


지나간 일이니 결과론이 되겠지만 레이먼드 챈들러는 만약 술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위대한 추리소설가 대신 유능한 사업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젊은 시절 변호사를 지망했던 챈들러는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문학세계로 발을 디뎠으나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못했고, 군복무 후 은행을 거쳐 석유회사의 중역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미국을 휩쓸었을 때 이미 알코올중독 기미를 보여서 직장을 잃은 챈들러는 44세라는 나이에 본격적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으며, <빅 슬립>(1939), <안녕, 내 사랑>(1940),<기나긴 이별>(1954)등의 걸작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 역시 포우에 못지않게 서글펐는데, 1954년 연상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진정되어가던 모습을 보이던 알코올중독이 다시 도진 것입니다. 결국 건강을 해친 그는 집필 중이던 장편 <푸들 스프링>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1959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미국 탐정이 위스키 같은 독한 술만 마시는 것은 아닙니다. 렉스 스타우트의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는 ‘맥주와 난(蘭)’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울프는 입맛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맥주도 가려서 먹는데, 문제는 마음에 드는 맥주라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마신다는 것이죠. 저녁식사 때는 언제나 맥주를 마시는데 어쩌다가 마음만 내키면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계속 마시기 때문에, 조수인 아치 굿윈을 걱정스럽게 만듭니다.

맥주 맛을 보는 네로 울프(에드워드 아놀드가 연기).


와인을 마시는 사람으로는… 역시 프랑스가 자랑하는 메그레 경감을 들 수 있겠군요. <Maigret a Vichy>(1968)에서는 휴가차 비시로 간 메그레 경감이 젊은 의사와 술 이야기를 나누는데, 하루에 와인을 1리터 정도를 마신다고 하니 거의 음료수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개 집에서는 와인, 나가면 맥주를 마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애주가가 어느 선을 넘어서면 술꾼이 되고, 그걸 더 넘어서면 알코올중독자가 되죠. 그런데 그런 탐정도 있습니다.


1930년대 중반 조나단 라티머가 창조한 사립탐정 빌 크레인은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데, 문제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아무데서나 쓰러져 잠이 들기까지 한다는 것이죠. 재치있고 머리도 좋아 어떤 궁지에서든 잘 빠져나오긴 하지만, 술만 아니면 궁지에 빠질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탐정 빌 크레인은 이렇게 생겼습니다-영화 '시체실의 여인' 포스터


<스위트홈 살인사건>으로 알려진 여류 작가 크레이그 라이스도 술꾼 주인공을 만들어 냈습니다. 뒤죽박죽 희극식 작품에 등장하는 주정뱅이 변호사 존 J.말론은 과거 하드보일드 탐정들을 풍자한 듯이 보이는데, 그는 캐비넷 서랍 안에 ‘기밀(Confidential)’과 ‘비상 (Emergency)’이라고 붙여 놓은 술병을 숨겨 놓고 있으며, 아름다운 여자와 노닥거리는 것을 즐깁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보다 술이 덜 깼을 때 머리가 더 잘 돌아간다니 아무래도 별난 인물입니다.

J.J. 말론은 이렇게 생겼을까요 (물론 뒤에 있는 남자)


한편 웨이드 밀러가 <Guilty Bystander>(1947) 등에 등장시킨 맥스 서즈데이는 아내와 헤어지고 나서 주정뱅이가 된 탐정입니다. 에드 맥베인이 커트 캐넌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일련의 단편에 등장하는 주정뱅이 탐정 커트 캐넌(작가와 이름이 같습니다)도 이와 비슷한 쓰라린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뉴욕의 잘 나가는 사립탐정이었던 그는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자 친구를 반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팬 끝에 탐정 허가증을 빼앗기고 아내도 잃고 말지요. 결국 알코올중독자가 된 그는 뉴욕 뒷골목에 살게 되었지만 무허가 탐정으로 서민층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커트 캐넌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미국 추리작가협회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커더 역시 비슷한 경력을 가졌습니다. 뉴욕 시경 소속의 유능한 형사였던 스커더는 수사 중 쏜 총탄이 무고한 소녀의 생명을 빼앗자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경찰을 사직합니다. 그 후 아내와도 이혼하고 알코올중독자가 되어버린 그는 싸구려 호텔에 살면서 무허가 사립탐정 일을 하며 살아가다가 알코올중독자 치료모임에 들어가 금주(禁酒)를 시작하며 음지에서 양지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8백만 가지 죽는 방법'에서 매트 스커더(왼쪽, 제프 브리지스가 연기했습니다)


그나저나 술 하면 문득 떠오르는 작가는 나카지마 라모입니다. <가다라의 돼지>에서 어린 딸을 잃고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민족학자 오우베 교수가 등장하는가 하면 <오늘 밤 모든 바에서>에서는 알코올성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한 알코올 중독자가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작품 속에서 알코올 중독자의 묘사가 너무나 생생한 것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끊임없이 술을 마신 탓에 그 역시 삼십 대 중반에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었지요.

공연중인 나카지마 라모


주정꾼 탐정은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빈틈 하나 없는 사람보다 약한 면을 보이는 등장인물에게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좀 다르겠습니다만. (:P)

P.S. 명절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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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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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야기꾼 2011.02.03 0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에드 맥베인의 커트 케넌에 한 표!
    어린 시절 그 작품을 읽고 경도되었던 경험이....

    허나....술 먹고 댓글쓰는 건 참 ㅊ하들거미...ㅋㅎ샤댜ㅣㄹ ㅑ디

  2. 평시민 2011.02.03 02: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선요리에 붉은 포도주 썼다고 빨갱이라니..., 조금 억지가 심한 건지 이안 플레밍이 의외로 매카시스트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본드 하니 생각납니다.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 보면 두 명의 킬러가 웨이터로 위장하고 본드에게 다가오는데 본드가 "이 요리에는 보르도산 포도주가 잘 어울리는데 오늘은 무통이군." 두 웨이터는 다 떨어졌다고 대답합니다. 사실 무통이 보르도산인데 말이죠. 본드는 이들이 웨이터 치고 향수 냄새가 짙다는 점(그것도 익숙한)을 보고 의심하고 있었지만요.

  3. 카메라이언 2011.02.14 04: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카지마 라모 아저씨가 저렇게 생기셨었구나... 'ㅂ'... 수많은 직업들 중 뮤지션이기도 하셨다는 말에 궁금했었는데 (;;;) 아우 정말, 오늘 밤 모든 바에서 보면서 정말 술은 사회 악이구나 싶더라고요.

    크레이그 라이스의 책은 최근에 동서미스터리서 나온 스위트홈 살인사건을 봤는데, 안 그래도 작품 말미에 붙은 해설에서 나온 다른 소설들 읽고 너무 보고 싶더라고요. 번역이 상당히 어색한데도, 그 코믹코드가 넘넘넘 좋더라고요.

    명절은 한참 지났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__) (--) <--세뱃돈을 받고 싶은 수작. ㅋㅋㅋ

  4. 2011.03.06 0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작가들이 사랑하는 것

“일찍이 알라누스 데 인술리스는 이렇게 노래하셨느니라. 
이 세상 만물은 책이며 그림이며 또 거울이거니” - 윌리엄 수도사
<장미의 이름>(1980)  -  움베르토 에코

 

추리소설 애호가들이 주로 읽는 책은 당연히 추리소설이겠지요. 사실 추리소설은 재미라는 면을 중시하다 보니 술술 읽히는 - ‘시속 수백 페이지’였던가, 뭐 그런 비슷한 광고를 본 것 같기도 합니다 -  바람에 한 번 잡으면 하루 이틀 만에 끝장을 보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수십, 수백 권 정도로는 많이 읽었다고 내세우기도 어렵습니다(천 단위는 되어야 할 것 같군요).

단기간의 독서량을 이야기할 때면 항상 화제에 오르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 작가 S.S.밴 다인입니다. 현학적이고 대단히 유식한 탐정 파일로 밴스를 창조했으며, 추리소설을 쓰기 전에는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라는 본명으로 문학․미술평론가로 활동했던 인물이지요. 추리소설계에게 널리 알려진 그의 ‘전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래 엄청난 독서량을 과시하고 있던 그는 1차 세계대전 직후 과로와 긴장으로 인한 신경쇠약으로 병석에 눕게 된다. 담당 의사는 그에게 신경 쓸 만한 책을 읽는 것을 금했지만, ‘추리소설 같은 대수롭지 않은 책들’을 읽는 것은 허락했다. 결국 반 다인은 병석에 누워 있던 1923년부터 1925년의 2년간 무려 2천여 권의 책을 읽었으며, 그때 두 가지 사실을 파악한다. 하나는 추리소설이 탄생한 나라는 미국인데도 당시의 영국 작가가 훨씬 뛰어났다는 것이며, 자신이라면 이들 작품보다 더 나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2년간 2천권을 읽었다'는 S.S.밴 다인


하지만 그의 전기 <일명 S.S.밴 다인(Alias S.S. Van Dine)>(1992)을 집필한 존 러퍼리에 따르면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는 허구와 사실을 밴 다인 자신이 교묘하게 조합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병을 앓은 것이나 다른 작품을 읽고 자신감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2년 동안 병석에서 읽은 2천여 권’은 과장이었으며, 의사의 집필 허락 등의 에피소드는 자기 홍보를 위해 만들어낸 신화였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계산을 해 봅시다. 2년, 즉 7백 30일 동안 2천권을 읽으려면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 두 권 반씩은 읽어야 한다는 것이니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허풍 같은 이야기가 의심 없이 아직도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면 그의 작품이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엘러리 퀸- 맨프레드 리와 프레드릭 더네이의 공동 필명- 은 ‘미스터리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명예로운 별명은 위대한 추리작가를 뜻하지만, 추리문학 전반의 독보적 공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퀸은 추리소설 전문잡지(‘미스터리 리그’와 ‘엘러리 퀸즈 미스터리 매거진’)의 발간과 방대한 추리문학 관련 문헌의 수집․정리로 추리문학의 역사를 정립하는 업적을 남긴 것이지요. 그들의 장서량은 추리문학 관련 자료로는 당대 세계 최고를 자랑했으며, 그 장서의 대부분은 텍사스 대학에 기증, 보존되어 있습니다.

작업중인 엘러리 퀸


미국의 로렌스 블록이나 영국의 H.R.F.키팅은 직업상 의무적으로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직업’은 추리작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평론가로서의 측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블록은 14년 동안 <라이터스 다이제스트(Writer's Digest)>에 서평을 썼고, 키팅도 <타임즈(The Times)>에 장기간 서평을 썼습니다. 이들은 남의 작품을 많이 읽는 것이 창작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방해가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두 사람 모두 여러 모로 도움이 되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대체로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을 써 오던 로렌스 블록은 고서점 주인을 작품 주인공으로 삼으면서 자신의 유머러스한 면을 보여주었습니다. 도둑(Burglar) 시리즈의 주인공 버니 로덴바는 평상시 고서점을 운영하고 있지만 본업(?)은 물건을 훔치는 일입니다. 하지만 버니의 책에 대한 애정은 거짓말이 아니지요.

오래된 책을 수집하는 주인공은 버니뿐만이 아닙니다. 미국 작가 빌 프론지니가 만들어낸 이름 없는 탐정(유명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의 유일한 취미는 오래된 펄프 잡지(1920년대 무렵 발간되었던 염가판 잡지)의 수집으로, 5천 권 이상의 잡지가 자신의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을 보면서 뿌듯해 하는 별난 인물입니다.

책 읽는데 장소를 가릴 필요는 없지만 독서실 겸 서재가 있으면 금상첨화입니다. 서재는 항상 조용하고,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아도 남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곳이지요. 그래서 악당들은 그곳을 범행 장소로 노리기도 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걸작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서 로저 애크로이드가 살해된 곳이 그의 서재였으며, 니콜라스 블레이크의 <종장(終章)>에서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한 여성 소설가가 죽은 곳은 출판사였습니다. 고서점이 등장하는 인상적인 작품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이 있습니다. 필립 말로우는 협박범으로 여겨지는 고서점의 주인을 찾아가기 전 도서관에서 <벤 허>의 희귀본에 대해 조사하고 이웃 서점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으며 분주하게 돌아다니지요.

서점에서 탐문중인 필립 말로우 - 영화 '빅 슬립'에서


<죽음의 예약(Booked to Die)>, <깨어난 서적외판원(Bookman's Wake)>등 제목에서 책 냄새가 물씬 풍기는 존 더닝의 작품에는 콜로라도의 고서점 주인이자 전직 경찰인 클리포드 제인웨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전도유망한 추리작가였던 더닝은 출판사와 충돌, 절필을 선언하고 30대의 나이에 고서점을 개업해 10년 이상 동안 운영해오다가 50대에 접어들어 <죽음의 예약>으로 복귀했는데, 고서에 대한 깊은 지식을 피력하는 제인웨이는 작가의 또 다른 모습인 셈입니다.

존 더닝보다 훨씬 먼저 고서점을 운영했던 작가가 있군요. 이 작가는 대학을 졸업한 후 무역회사에 취직했지만 매일 같은 업무를 반복하는 것이 지겨워 1년 만에 튀어나와 타자기 판매, 조선소 전기담당부, 잡지 편집, 포마드 제조업 지배인 등등 평균 반 년 정도마다 직업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25세가 되던 해 2월, 자본이 별로 없이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동생 두 명과 함께 고서점을 개업합니다. 하지만 수입은 시원치 않았고, 결국 경영난으로 2년을 못 채우고 폐업하고 맙니다. 얼마 후 신문사 편집부에 들어간 그는 그로부터 3년 뒤 <2전짜리 동전>을 발표한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작가활동으로 일본 추리문학계의 최고봉이 됩니다. 이쯤 되면 그가 누구인지 아시겠지요. 바로 에도가와 란포입니다.

서재의 에도가와 란포

한때 정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제기된 적이 있습니다. ‘추리작가가 추리소설을 많이 읽을수록 참신한 추리소설을 쓰기 어려울까’라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물어보아도 그렇고 해외 작가들의 인터뷰 등을 보면 딱 부러진 답이 나오진 않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키팅과 블록은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고 하지만 일부러 추리소설을 잘 읽지 않는다는 작가도 있으니까요. 답을 내긴 어렵겠지만, 뜬금없는 결론을 내리자만 작가들도 독자들만큼 책을 사랑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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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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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카메라이언 2010.12.02 02: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이렇게 재미난 포스팅이 올랑오다니. ㅎㅎ 너무 좋아요. 그 때 해주셨던 이야기가 정리되어서. ㅎㅎㅎㅎ 그나저나 저는 책은, 많이 읽을 수록 좋다, 가능하다면 많이 베끼고, 생각하고, 주변에 추천해야 한다는 주의예요. 좋은 책은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읽는 순간 뭔가가 번쩍거린달까요. ㅎㅎ

  2. 평시민 2010.12.03 1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 작가는 영향받을까봐 일부러 책을 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저는 표절을 막기 위해서 많이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작가가 우연히 같은 플롯이나 트릭을 쓰게 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기 때문이죠.

    • 추리닝4 2010.12.06 0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인적으로 많이 읽는게 창작에 도움된다고 생각하지만,너무 과하면 자기검열때문에 힘들어질 수도 있단 얘길 해^^...남편이 부인 죽이고, 부인이 남편 죽이는 설정 수백편을 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