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스 스타우트'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4.20 테마로 읽는 미스터리 <30> 맛있는 미스터리 (5)
  2. 2010.12.09 테마로 읽는 미스터리 <11> 왓슨 역 (6)

영리한 자만이 즐기며 먹는 법을 안다 

소화할 수 있을지 식사 전에 숙고해야 한다
- 소프 헤이즐(채식주의자 탐정)
 - <Sir Gilbert Murrell's Picture>(1912), 빅터 화이트처치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마치 고전적 추리소설 속에 나올 법한 이 말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뒤팽이나 홈즈 같은 위대한 명탐정을 예상하셨을 지도 모르지만, 탐정과는 전혀 관계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19세기의 미식가이자 유명한 법률가인 브리야 사바랭(Jean-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이 그의 저서 <미식예찬(Physiologie du goût)>에 남긴 말입니다. 사바랭이 음식으로 범죄를 해결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음식 취향만으로도 인간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장담은 훗날 등장하게 될 사립탐정의 대담함을 능가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맨 윗줄의 '영리한 자만이…' 역시 그가 남긴 말입니다.

브리야 사바랭(오른쪽 위)

사람이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듯 추리소설과 요리의 관계는 끊을 수 없습니다. 음식에 독을 넣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기록이 남아 있으며, 심지어 어떤 작품에서는 음식 재료가 사람을 죽이는 흉기로 사용되기도 하죠. 하지만 이런 끔찍한 범죄 장면 이외에도 추리소설에서는 요리에 대한 장면이 많이 등장해 관심 있는 독자의 눈길을 끌곤 합니다.
사건을 조사할 때는 배가 부르면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식사를 거를 정도였던 전설적인 명탐정 홈즈를 미식가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건 해결 후 여유가 생기면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는 장면이 작품 속에서는 드물지 않아 훗날 셜록 홈즈 연구가들에 의해 <Dining with Sherlock Holmes>, <Sherlock Holmes Cookbook> 등의 요리 관련 서적이 출간되기도 하였습니다.

홈즈가 차린 것은 음식이 아니로군요('해군 조약'- 시드니 파젯의 그림)


미식가 탐정의 선구자로는 밴 다인의 <벤슨 살인사건>, <그린 살인사건>등에서 활약하는 박식함의 대명사 파일로 밴스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가 처음 등장하는 <벤슨 살인사건>에서 밴스는 “먹는다는 것은 사람의 지적 향상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안내인의 한 사람이지. 야만인은 야만인처럼 요리해 먹는다네.…(중략) 요리 예술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문화적 영광도 최고가 되었지. 음식 예술이 저하하면 인간 문명도 쇠퇴한다네.”라는 말로 고급 요리에 대한 특별한 시각을 보여줍니다. 파일로 밴스 시리즈로 막대한 수입을 올린 밴 다인은 실생활에서 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최고급 와인과 식사를 즐기는 등 사치스럽게 살아 온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그 탓인지 작고한 후 남은 재산이 전혀 없어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요리에 대해 전문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한 작가로는 네로 울프 시리즈를 쓴 렉스 스타우트를 들어야겠군요. 지금까지 등장한 탐정 중 최고의 미식가로 자타가 공인하는 네로 울프는 탐정 업무의 조수 아치 굿윈뿐만 아니라 정원사, 요리사 등을 고용하고 있는데, 굿윈은 자신보다 요리사인 프리츠 브레너의 월급이 더 많다고 불평을 하고 있을 정도로 요리에 대한 집착은 대단합니다. 그런 울프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요리장이 너무 많다(Too Many Cooks)>(1938)입니다. 이 작품에서 울프는 ‘15인의 명(名) 요리장’ 행사에 참석해 ‘고급 요리에 미친 미국의 공헌’에 대해 연설하러 갔다가 살인 혐의를 쓴 요리장 벨린의 누명을 벗겨 줍니다. 그런데 무엇으로든 신세를 갚겠다는 벨린에게 울프가 요구한 것은 금전적인 보수가 아니라 벨린 특유의 소시지 요리법(소시스 미뉴이 Saucisse minuit)이었습니다. 하지만 꼼짝 않고 맛있는 음식만 찾는 결과인지, 울프의 체중은 무려 300파운드(약 130kg)에 달한다고 하네요.

로버트 파커가 창조한 탐정 스펜서 역시 요리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확실할 때는 무엇이든 요리해서 먹어라’는 신조 때문에 혼자서도 거창한 요리를 만드는 그는 권투와 조깅 등으로 체력관리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중년의 나이에도 탄탄한 몸집을 유지한다는 것이 네로 울프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에서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요리, 술, 식당 등을 소개한 <스펜서의 요리>라는 책도 나왔습니다.

일본에서 발간된 '스펜서의 요리'

많이 먹는다는 점에서 보자면 무능하기로 악명 높은 도버 경감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조이스 포터가 창조한 이 먹성 좋은 인물은 어지간히 배가 불러도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여전히 손을 뻗치는 습성 때문인지 240파운드(약 108kg)라는 거구를 유지합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이를 능가하는 인물이 있는데, 중견 작가 야마무라 마사오(山村正夫)의 작품에 등장하는 다키 렌타로(滝連太郞)라는 아마추어 탐정입니다. 학생 시절 럭비선수였던 그는 키가 2m에 달하는 장신으로 앉은자리에서 초밥 50개를 먹어치우는가 하면 한 끼 식사에 보통 사람의 3인분을 먹는 왕성한 식욕 때문에 ‘걸어 다니는 위장’이라는 별명을 가졌습니다. 대학 사학과의 조교로 재직 중인 그는 은사에게서 ‘연구자로는 장래성이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추리력만큼은 놀라운 재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데, 많이 먹을수록 나른해지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배가 불러야 머리회전이 더 좋아진다니 정말 별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워낙 요리 장면이 많다 보니 따로 책이 발간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자신이 창조한 네로 울프 못지않은 미식가였던 렉스 스타우트가 직접 집필한 <The Nero Wolf Cookbook>(1973)에는 아침과 점심식사, 더운 날과 추운 날의 저녁식사, 후식, 손님접대요리에 이르기까지 200여종 이상의 요리법이 나와 있습니다(물론 ‘소시스 미뉴이 요리법’도 포함되어 있지요). 한편 미국 추리작가협회(MWA)는 작가들 특유의 요리법을 모아 <Plots and Pans>(1989)를 발간했습니다. 전채요리에서 후식까지 요리 풀코스가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는데, 완벽한 조리법에서 아무렇게나 만드는 듯한 조리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전혀 요리에 실력이 없는 독자라도 기자 플레치(Fletch) 시리즈의 작가 그레고리 맥도널드의 달걀 샌드위치 정도는 쉽사리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요리 방법이란 ‘빵 사이에 달걀 프라이를 넣는 것’인데, 작가는 절반 혹은 1/4로 자르지 않고 그대로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네요… 무척 심오해 보입니다. 어쨌든 이 책을 보면 의외로 많은 추리작가가 요리에 관심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잘 살펴보면 스티븐 킹의 빵 만드는 법, 개빈 라이얼의 피자, 메리 히긴스 클라크의 아보카도 샌드위치 등 요리와 작품 스타일과는 전혀 관계없어 보입니다. 후속작(?)인 <A Taste of Murder>, <A Second Helping of Murder>도 나왔습니다.

미국의 추리작가들은 이렇게 요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들입니다


여성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에도 요리 이야기는 빠지지 않습니다. 미국 여성추리작가협회(Sisters in Crime)는 <Desserticide>(1995)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Desserticide’라는 제목은 ‘후식(dessert)’과 ‘죽임(cide)’의 합성어인데, 제목뿐만 아니라 ‘독이 든 사과 케이크(Poisoned Apple Cake)’, ‘달콤한 복수 초콜렛 바(Sweet Revenge Chocolete Bars)', ‘연쇄살인범 과자(Serial Killer Cookie)', 티라미수(Tiramisu)를 변형한 ‘테러-미수(Terror-Misu)'등 살벌하고 기발한 이름이 붙은 요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여주인공들을 개별적으로 살펴보면, 새러 패러츠키의 V.I.워쇼스키와 수 그래프튼의 킨지 밀혼은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지만 식사 습관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워쇼스키는 혼자서라도 다양한 요리를 해 먹을 정도지만, 킨지 밀혼은 샌드위치나 샐러드를 만드는 것이 고작이며 평상시에는 패스트푸드를 즐기곤 하죠. 퍼트리샤 콘웰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검시관 케이 스카페타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요리를 한다’고 할 정도로 요리에 관한한 선배들을 능가합니다. 또한 작품에 나온 요리를 바탕으로 <Food to Die for: Secrets from Kay Scarpetta's Kitchen>(2001)이라는 요리책이 나올 정도인데, ‘마이애미 스타일 칠리’(하트 잭), ‘초콜렛 피칸 파이’(시체농장) 등이 실려 있습니다.

'케이 스카페타의 부엌 비결'^^

덧붙여 <요리장이 너무 많다>에서 네로 울프가 그렇게 원했던 소시스 미뉴이 요리법-번역판에서는 모두 누락되어 있습니다-을 소개합니다.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실제로 만들어 볼 수는 없었는데(물론 핑계입니다^^), 과연 어떤 맛일지 궁금하군요. 만들어 보신 분이 있으시다면 나중에 소감이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P)

소시스 미뉴이 요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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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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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야기꾼 2011.04.21 09: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테라사와 다이스케의 <절대미각 식탐정>이란 만화가 떠오르네요.
    정말 만화답게 엄청난 식탐을 자랑하던....얼마 전 완결이 되어서...아쉬워요.
    무라카미 하루키도 소설에서 음식을 참 맛나게 표현하던데...
    하루키 소설을 읽으면 샌드위치와 맥주가 땡긴다는..

    소시스 미뉴이는..어떤 맛일까요...꾸..꿀꺽..

  2. 평시민 2011.04.21 13: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식은 역시 추리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테마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도 중간중간 요리나 가사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돋보이며 미국의 코지 미스터리를 보면 음식에 대한 묘사가 훌륭한 작품이 많이 있습니다. 저 역시 한국 요리를 다룬 추리소설에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3. hansang 2011.04.22 08: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장르문학에 등장하는 요리에 대한 짤막한 단상을 블로그에 올렸던 적이 있는데 아주 반갑네요. 제 졸문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운 좋은 글이기도 하고요. 잘 읽었습니다.

  4. 갈매 2011.04.22 1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이거슨.. 진정한 맞춤 포스팅!!!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저같은 초보에게 안성맞춤입니다.
    조만간 <too many cooks>는 꼭 읽어보겠어요.

    스카페타 시리즈는 저도 대학때 대여섯권 읽었는데..하도 오래되서, 이제 그녀가 요리를 즐겼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 오리털 잠바였던가, 오리털 이불이었던가, 그 오리털의 출처를 찾아 범인을 잡던 에피소드만 살짝 기억이 나네요. ^^;;


    저기 나오는 책들-특히 요리책들 <plots and fans> 등이 지름신을 불러일으키는군요!
    언급된 소설도 다 읽어보고 싶고~~

    아. 세상은 넓고, 책은 많고, 먹어볼 요리도 많고!

    평시민님, 한국요리를 다룬 추리소설이라, 이거 재밌겠네요!!! 기대하겠습니다~~

  5. 갈매 2011.04.22 11: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트위터 친구인 @searcherJ(Jung-youn, Yim)님이 링크를 소개하자 제게 궁금하다며 보내오신 멘션인데..
    해결 좀 해주세요~~ ^^

    "우와~ 이거 너무 재밌어요! 예전 탐정영화중에 유명 요리평론가들이 요리방법으로 연쇄살인 당하는 영화가 있었는데 혹시 아시나요? 갑자기 너무 보고 싶어요~"



왓슨, 당신이 없으면 섭섭하지

“그(네로 울프)는 날 해고할 수 없을 것이다.  혼자선 아무 것도 못하다가 결국 굶어 죽을 테니까.”
                                                                             - 아치 굿윈
<Instead of the Evidence>(1949)  -  렉스 스타우트

 소설이든 영화든 모든 드라마에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기둥임이 분명하지만, 그를 뒤에서 받쳐주는 조연이 없다면 그 작품은 마치 양념이 안 된 요리처럼 싱겁고 밋밋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낯선 섬에 홀로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도 후반부에서 식인종 프라이디가 등장하는 변화가 없었더라면 그저 섬에서 고생스레 혼자 살아간 사나이의 이야기라는 따분한 내용 정도로만 그치지 않았을까요.

추리소설에도 당연히 주인공이 있고 조연도 빠지지 않는데, 친구 역, 애인 역, 지나가는 사람 역 등등 그런 것 이외에 추리소설에만 있는 특별한 역할이 있습니다.

내가 빠지면 섭섭하지요 - 영화 '셜록 홈즈'에서 왓슨 역을 맡은 주드 로


고전적 추리소설(일반적인 수수께끼 풀이 추리소설)에서는 ‘피해자-범인-탐정’이라는 필수적 등장인물 이외에 보통 ‘왓슨 역(Watson Character)’이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명칭은 전설적인 명탐정 셜록 홈즈의 하숙집 룸메이트이며 그의 사건을 기록해 온 의사 존 왓슨(John Watson)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데서 유래한 것이지만, 사실 이런 역할을 처음 등장시킨 것은 코난 도일이 아니라 현대 추리소설의 창시자 에드거 앨런 포우였습니다. 포우는 아마추어 탐정 뒤팽이 등장하는 3편의 단편 소설, 즉 <모르그 거리의 살인>,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 <도둑맞은 편지>에서 단지 ‘나’라고만 알려진 이름 없는 인물을 등장시켰는데, 이 ‘나’라는 인물은 사건을 설명하면서 친구인 뒤팽의 추리를 묘사합니다. 이것이 ‘왓슨 역’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할은 대개 정적인 작품에서나 가능하며, 1인칭의 하드보일드 형식이나 쉴 새 없이 액션이 전개되는 작품에서는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왓슨 역의 인물은 다양한 역할을 합니다. 보통 작품의 화자(話者)가 되어(1인칭 시점) 사건의 흐름을 기록하면서 사건의 주변 상황을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대목에서 어느 정도의 지성을 지닌 독자가 물어볼 만한 질문을 탐정에게 던지는 것이죠. 이것은 작가가 독자와의 머리싸움을 하기 위한 아주 편리한 방법으로, 탐정이 생각하고 있는 사항 가운데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일러줄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진범인이 누구인지 탐정이 알아낸 순간을 감추어 놓고 이야기 줄거리의 막판에서 그것을 밝히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왓슨 역할의 인물은 보통 독자보다 다소 머리가 나쁜 것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탐정의 능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구실을 합니다.

왓슨 역할의 인물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뭐니 뭐니 해도 코난 도일의 작품에 등장하는 진짜 왓슨입니다. 런던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왓슨은 군의관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의병 제대한 후 런던으로 돌아옵니다. 친척도 친구도 없던 그는 하숙방을 찾다가 셜록 홈즈를 만나게 되어 베이커 거리 221B 번지 하숙방의 룸메이트가 되고 <주홍색의 연구>사건 수사에 참여합니다. 왓슨은 훗날 결혼해서 하숙방을 떠나기도 하고, 아내가 죽은 후 다시 홈즈와 함께 살기도 하며 생활에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홈즈 시리즈의 거의 모든 작품의 기록자가 되었습니다(<사자의 갈기>, <표백된 병사>등 일부 단편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비록 조연이고 화려함은 없지만 그는 주인공인 홈즈 못지않게 유명해졌으며, 작가인 도일은 홈즈보다 오히려 그의 사생활에 대해 자세히 묘사했습니다. 도일 역시 의사였던 만큼 왓슨을 묘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겠지요.

홈즈 시리즈가 인기를 얻은 이후 - 이른바 단편소설의 황금기 - 에 나타난 많은 작가들은 개성있는 주인공과 함께 왓슨 역할을 하는 인물을 등장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R.A. 프리먼의 손다이크 박사와 저비스, 자크 푸트렐의 ‘생각하는 기계' 반 두젠 교수와 허친슨 해치 기자, G.K.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와 전직 도둑 플랑보우, 어네스트 브라마의 시각장애인 탐정 맥스 캐러도스와 하인 루이스 칼라일 등… 이들 가지각색의 직업과 성격을 가진 탐정과 조수들은 근본적으로 홈즈-왓슨 관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형식이었습니다.

다만 왓슨만큼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사람은 드물긴 했고, 가끔 어정쩡한 형태의 조연도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오르치 남작부인의 <구석의 노인> 시리즈에 등장하는 여성 기자 폴리 버튼은 쉴 새 없이 매듭을 만지작거리는 정체불명의 노인을 찻집에서 만나 난해한 사건에 대한 설명을 일방적으로 들은 후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사건의 결말을 듣고 놀라기만 합니다. 명색이 사건기자라고 하는 폴리는 평상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사건에 대해 모를 때가 태반으로, 사건의 시작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과 추리까지 탐정 역할을 하는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작품 속에서 그녀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의하기 애매해질 지경입니다.

폴리 기자, 당신이 왓슨 역할인 것 틀림없어요? - 구석의 노인


‘미스터리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는 명탐정 푸아로와 함께 퇴역 군인인 존 헤이스팅즈라는 인물을 등장시켰습니다. 머리는 뛰어나지는 않지만 선량하고 성실한 사나이 헤이스팅즈는 푸아로와 함께 여러 사건에 등장하지만 크리스티는 코난 도일과는 달리 그를 영구적인 고정 배역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크리스티가 창조한 또 다른 뛰어난 탐정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시리즈에는 고정적으로 왓슨 역할을 맡은 인물이 없었습니다. 뭐 직업 탐정이 아닌 이상 그런 사람이 있기는 어렵겠지요.

헤이스팅스(오른쪽, 휴 프레이저 분)과 푸아로(데이빗 수셰)


렉스 스타우트는 사립탐정 네로 울프와 조수 아치 굿윈 사이에 독특한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천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네로 울프는 대단히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것에는 틀림없으나 움직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거나 증거 조사 등의 일은 조수인 아치 굿윈이 도맡아 합니다. 두 사람 모두 불평도 많고 비꼬기도 잘하며 심술궂기로는 우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이지만 누구보다도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이기도 하죠.

에도가와 란포가 창조한 아케치 코고로에게는 초기에 그와 친구인 듯한 인물이 화자로 등장합니다만 어느 순간에 말없이 사라져버리지만,  그가 쓴 어린이 대상 소설에서는 아케치 탐정의 제자인 고바야시 소년이 소년 탐정단을 이끌며 조수 역할(?)을 해서 과거 일본 어린이들의 우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차츰 드물어지던 왓슨 역은 1980대 중반 이후의 신본격 작가들의 작품에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시마다 소지의 미타라이 기요시를 돕는 이시오카 카즈미가 대표적이지요.

그중 독특한 인물을 꼽자면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들 수 있겠네요. 그의 작품에는 작가와 이름이 같은 아리스가와 아리스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학생 시리즈'에서는 선배인 에가미 지로를, '작가 시리즈'에서는 임상범죄학자 히무라 히데오를 보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세 사람… 음, 조금 헷갈립니다만 이 두 개의 시리즈는 분리된 세계로 '작가 아리스'는 학생 시리즈를 쓰고, '학생 아리스'는 작가 시리즈를 쓴다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진짜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 독자와의 머리싸움은 여전히 매력이 있는 만큼 가장 중요한 요소인 왓슨 역할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탐정 옆에 고정출연(?)하는 왓슨 역은 없더라도 경찰이건 관계자이건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거의 빠지지는 않습니다.

내가 빠지면 되겠습니까? - '셜록'에서 왓슨 역을 맡은 마틴 프리먼


최근 제작된 드라마 <셜록>에서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왓슨은 빠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의 매력은 영원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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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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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허니문 차일드 2010.12.09 1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탐정물에 있어 주연과 조연이 서로 끈을 당기고 밀어주는 역할은 독자에게 또 하나의 재미를 주는 것 같습니다. 갈수록 애정도 깊어지고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필명도 엘러리 퀸처럼 주인공과 작가를 동일시하는 데서 착안했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저도 조만간 제 소설에 허니문 or 차일드가 나올 것 같습니다. ㅎㅎㅎ 잘 읽었습니다.

  2. 카메라이언 2010.12.13 1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왓슨왓슨왓슨 ㅠㅠㅠㅠㅠㅠㅠ오늘 새벽에 셜록 kbs더빙방송 끝나서 안타까워했는데 너무너무 반가워요. 중간에 포와로와 헤이스팅스도 케이블서 해줄때 줄기차게 봤던 기억이 나서 아아아아. 왓슨은 정말 약방의 감초!!

  3. 레이 2010.12.13 17: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왓슨 없는 셜록은 찐빵 없는 앙꼬죠.
    맨 밑에 왓슨 사진과 설명이 어울려 웃음이~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