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이건 내가 맡은 최초의 사건이거든."
-셜록 홈즈
<글로리아 스콧 호>(1893) / 아서 코난 도일

사람이 어떤 일을 하게 되는 데에는 - 그것을 어릴 때부터 바라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얼떨결에 택하게 되었든 간에 - 누구든지 크건 작건 사연이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추리소설 속에는 어지간한 인간승리 드라마를 능가할 만큼 기구한 사연을 가진 주인공도 등장합니다(물론 허구의 인물이니만큼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 작가들이 노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요). 그들이 어떤 과거를 지니고 있으며 어떤 연유로 범죄와 싸우는 직업을 택하게 되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에드거 앨런 포가 창조한 오귀스트 뒤팽은 대단히 품위 있고 명석한 두뇌의 귀족이지만 집안이 몰락한 탓에 무너질 듯이 낡아빠진 하숙집에 친구와 함께 살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뚜렷한 직업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사건을 해결하고 사례금을 받기도 하죠. 뒤팽은 불과 세 편의 단편에만 등장했으며 범죄 수사를 직업으로 삼지도 않았지만 포가 40세로 요절하지 않고 좀 더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했다면 다른 어떤 모습을 보여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의 에밀 가보리오가 발표한 세계 최초의 장편 탐정소설 <르루즈 사건>(1866)에 처음 등장한 르코크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뒤 비천한 일을 하며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인 타바레에게서 범죄자가 되거나 아니면 범죄를 막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후 프랑스 경찰 범죄수사국에 투신해 과거 어둡던 시절에 익혔던 여러 가지 수법을 이용해 범죄를 수사하게 됩니다.

'르콕 탐정' 표지

반면 같은 프랑스 작가인 모리스 르블랑이 창조한 인물 아르센 뤼팽은 르코크와 비슷한 결손 가정 출신이지만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뤼팽의 아버지는 격투기의 달인으로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그 기법을 가르치는 방랑자였고 어머니인 앙리에뜨는 자상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고 하네요. 그러나 뤼팽이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사기죄로 갇혀 있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뤼팽이 범죄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이때 범죄자의 가족인 어머니가 사회로부터 받은 냉대에 대한 반발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편, 셜록 홈즈는 우연찮은 일로 자신의 재능을 심각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가 왓슨에게 회고한 바에 따르면, 홈즈는 대학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가 놀라운 관찰력과 추리력을 발휘해 그의 아버지의 신상에 대해 정확하게 짚어 냅니다. 그리고는 잠시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란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사실과 거짓을 간파하는 게 자네에긴 식은 죽 먹기로군. 그게 바로 자네가 갈 길일세’라는 찬사를 듣지요(<글로리아 스콧 호>에서). 자신의 능력을 한낱 취미 정도로만 생각해 오던 홈즈는 추리력을 이용하는 것이 어엿한 직업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이 때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홈즈는 이들 중 누구일까요? '글로리아 스콧'의 삽화(시드니 패짓의 그림)

20세기 초반까지 등장한 천재적인 탐정은 대체로 이렇게 타고 난 재능을 직업으로 살린 인물들이었지만, 가스등에서 전기등으로 변하고 마차가 자동차로 변하는 시대가 되면서 차츰 판도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즉 적어도 두뇌 면에서 천재라기보다는 보통 사람 수준의 주인공들이 나타난 것이죠.

특히 귀족 등 신분 격차가 유럽보다 덜하던 미국에 등장한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웬만큼 지성을 갖추었지만 성격이 원만하다고 하긴 어려운 인물들이었습니다. 대쉴 해밋은 워낙 과작(寡作)을 한 터라 등장인물의 사생활이나 과거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뒤를 이은 레이먼드 챈들러나 로스 맥도널드의 주인공은 비교적 자세한 경력이 알려져 있습니다. 챈들러가 창조한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는 원래 지방검사국 소속의 경찰이었지만 상관의 부당한 명령에 복종할 수 없어 사표를 던지고 한결 자유스러운, 하지만 권력은 없는사립탐정이 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로스 맥도널드가 창조한 사립탐정 루 아처 역시 말로우와 비슷한 경력을 지녔습니다. 아처 역시 지방검사국 소속 경찰이었으나, 경찰들의 부패를 참지 못해 사직하고 탐정의 길로 나섭니다.

루 아처는 '루 하퍼'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영화에 등장했습니다(폴 뉴먼이 연기).

20세기 중반의 미국 작가들은 경찰에 대해 뭔가 불신감을 품고 있었는지 이런 패턴은 자주 반복되었지만, 70년대 이후 약간씩 변화가 생겨났는데, 훗날 등장한 여성 하드보일드 탐정들의 경력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지요. 현대 미국 여성 하드보일드 계의 양대 작가인 수 그래프튼과 새러 패러츠키의 인물들이 대표적. 그래프튼의 주인공 킨지 밀혼은 20세에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일선에 배치되었지만 규칙에 얽매이는 생활이 싫어 퇴직하고 탐정 면허를 얻어 개업합니다. 한편 패러츠키의 주인공 V.I. 워쇼스키는 원래 변호사였으며 역시 변호사인 동료와 결혼했지만 자신의 이상(理想)과 어긋나는 법조계와 여자의 자립심을 무시하는 남편에게서 모두 결별하고 사립탐정이라는 직업을 택했습니다.

한편 기구한 사연을 가진 인물을 꼽으라면 영국의 여성 작가 P.D.제임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사립탐정 코델리아 그레이를 선정할 수 있을 겁이다. 태어난 후 불과 한 시간 만에 어머니를 잃는 것으로 시작된 힘든 어린 시절을 거친 그레이는 고생 끝에 케임브리지 대학 진학을 눈앞에 두었으나 방랑 생활을 하던 아버지의 요청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세계 각국을 유랑하지요. 아버지가 로마에서 사망한 후 런던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직 경찰 버니 프라이드의 탐정 사무소에 들어가 탐정에게서 필요한 기술을 배워 공동 경영자가 되지만 그것도 잠시 뿐. 프라이드가 불치의 암으로 고민하다가 자살하는 바람에 그레이는 불과 22세의 나이로 사립탐정사무소의 소장이 됩니다.

드라마로 제작된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주인공이 탐정이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반드시 첫 작품에서 밝혀지는 것만은 아닙니다독자들이 주인공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될 만큼 인기가 생겨야 작가도 다음 작품에서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하지요. 왕년의 홈즈가 그렇게 소개되었지요. 사실 대부분의 작가는 등장인물, 특히 주인공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배경을 만들어 놓습니다. 다만 너무 한꺼번에 드러내 놓기에는 어색하기도 하니까 조금씩 조금씩 꺼내놓는 겁니다(물론 코난 도일은 그렇게 계획적으로 쓴 것 같진 않습니다만). 최근 들어서는 위에 열거한 특별한 사연들이 너무 가식적으로 보이는지 어찌 보면 너무 평범한 계기가 소개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H.R.F.키팅의 주인공인 인도 봄베이 경찰의 고테이 경감은 어린시절부터 경찰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인물이고, 자넷 에바노비치의 여주인공 스테파니 플럼은 직장에서 해고된 후 말 그대로 돈은 필요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용의자를 소환하는 일을 하게 되는, 어쩌면 이웃의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상황이 등장합니다. 추리소설은 시리즈가 많은 만큼 탐정들이 어떻게 일을 시작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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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7.28 2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탐정이 된 사연..., 저도 연구중입니다. 극적일수록 더 좋겠지만 제가 전에 KBS <이야기 발전소>에 들고 갔던 작품은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의문사를 목격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경찰이 된 소년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지만 이러한 이야기라면 다음 편을 만들기가 어렵겠지요.


함께 살면서 각각의 길을 가

사람들이 삶의 규칙들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진보는 가능하지 않다.
예를 들자면 내 여력이 되는 한 맞서 대항할 낡은 관습이 하나 있다.
결혼이 바로 그것이다.
 - 조르주 심농 (프란시스 라카생과의 대화에서, 1975)
 

추리소설이 인기 있는 나라에서 추리작가 부부는 드문 존재가 아닙니다. 젊은 시절 문학 수업 도중 사귀는 경우도 있고 추리작가들의 모임에서 마음이 맞는 경우도 있겠고, 그 이외에 남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연도 있을 수 있겠고과정이야 어쨌든 맺어진 사람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작가는 작품을 하나 완성한 다음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평가를 받곤 하는데, 만약 작가에게 솔직할 수 있는 배우자가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면 - 특히 허점이 있어서는 안 되는 추리소설의 경우에는 - 무척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추리소설의 황금시대, 즉 1930년대에는 합작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부부가 팀을 이루어서 작품 활동을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저명한 경제학자이며 100여 편의 작품을 함께 발표한 G.D.H. 콜(George Douglas Howard Cole)과 M.I. 콜(Margaret Isabel Cole) 부부가 선구자 격입니다(콜 부인의 남동생 역시 사회학자이며 추리소설을 쓴 레이먼드 포스트게이트(Raymond Postgate)로 법정추리의 걸작 <12인의 평결(Verdict of Twelve)>(1940)을 썼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남편이 줄거리를 착상하고 집필은 아내가 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사실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고, 아쉽게도 그들의 작품 활동은 남편의 작고 후 끝나고 말았습니다.

G.D.H.콜, M.I콜 부부

스웨덴 출신의 페르 발루(Per Wahlöö)와 마이 흐웨발(Maj Sjöwall 발음과 표기가 굉장히 어렵네요. 여기를 참조했습니다.) 부부도 비슷한 길을 갔습니다. 신문기자 출신인 남편 발루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쓰기 이전 이미 두 편의 경찰소설을 발표한 바 있으며 아내인 흐웨발은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요. 이들은 스톡홀름 경찰국 ‘마르틴 베크 경감’ 시리즈를 발표했는데, 초기 이들의 작품은 에드 맥베인의 <87 분서>시리즈를 방불케 하는 정통적 수사물이었지만 나중에는 숨은 권력을 비판하는 사회적인 스타일로 차츰 변화했으며 당시 스웨덴의 사회를 엿볼 수도 있는 방대한 드라마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총 10권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집필할 예정이었으나 1975년 남편인 발루가 먼저 사망하는 바람에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렇지만 흐웨발은 혼자서 열 번째 작품인 <테러리스트 (Terrorist)>를 발표, 시리즈를 어렵게 마무리했습니다. 흐웨발은 10년 이상 소설 집필에서 손을 떼고 있다가 1990년 네덜란드 추리작가인 토머스 로스와의 합작인 <그레타 가르보를 닮은 여인 (Kvinnan Som Liknade Greta Garbo)>을 발표해 독자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스웨덴 우표에 실린 흐웨발과 발루 부부

명성만으로 따져볼 때 가장 화려한 부부 작가로는 로스 맥도널드와 마가렛 밀러 부부를 첫손에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캘리포니아 출신이지만 캐나다에서 성장한 맥도널드는 캐나다 태생의 동갑나기 밀러와 1938년 결혼, 1983년 작고하기까지 45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작품 스타일은 판이하게 다르지요. 남편은 하드보일드의 거장, 아내는 심리 서스펜스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게다가 각각 미국 추리작가협회(MWA)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에드거상 거장(Grand Master)으로도 선정된 유일한 부부이기도 합니다.

로스 맥도널드, 마가렛 밀라 부부

맥도널드-밀라 부부의 선배 격인 미국 추리작가협회 창설 멤버이자 하드보일드 작가 브렛 할리데이는 세 차례 결혼했던 상대가 모두 추리작가였다는 놀라운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아내인 캐슬린 롤린스와는 함께 작품을 쓰기도 했으며, 두 번째 아내인 헬렌 맥클로이는 기자 출신으로 여자로서는 최초로 미국 추리작가협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화려한 경력을 가진 작가입니다. 세 번째 아내인 메리 새비지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추리작가였습니다.

브렛 할리데이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웨스턴, SF, 공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발표하며, 장․단편에 모두 능할 뿐만 아니라 예리한 미스터리 평론가이기도 한 빌 프론지니는 오직 추리소설 한 분야에만 몰두하는 여성 작가 마르시아 멀러의 배우자이기도 합니다. 이들 커플은 종종 함께 작품을 썼는데, 그들의 합작품 중 <더블(Double)>에는 독특하게도 서로의 주인공, 즉 프론지니의 이름 없는 탐정과 멀러의 샤론 맥콘이 등장해 협조하며 사건을 해결합니다.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진 다음에 결혼한 두 사람은 결혼 전의 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멀러-프론지니 부부의 합작 'Double'

최근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작가 부부로는 조너던 켈러맨과 페이 켈러맨 부부가 있습니다. 각각 정신과 의사와 치과의사였던 두 사람은 특이하게도 결혼 이후 작가생활을 시작해 명성을 얻었습니다.

페이(왼쪽), 조너던 켈러맨 부부

가까운 일본에도 이미 작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 부부 작가가 여럿 있습니다. 서술 미스터리의 대가 오리하라 이치(析原一)와 니츠 키요미(新津きよみ) 부부는 대학 졸업 후 여행과 관련된 직장에 다니면서 습작활동을 했으며, 같은 해(1988년) 작가로 데뷔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2중 생활>이라는 공동작품도 발표했지만 각각의 스타일을 유지하며 독립적인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도 열성 팬이 적지 않은 신본격파 작가 아야츠지 유키토(綾辻行人)의 부인은 공포소설과 팬터지 소설로 유명한 오노 후유미(小野不由美)로, 공교롭게도 생일도 단 하루 차이(남편이 하루 앞이랍니다)나는 동갑나기입니다. 또 일상 미스터리를 주로 쓰는 가노 도모코(加納朋子)와 <우행록>을 쓴 누쿠이 도쿠로(貫井德郞)도 부부 사이입니다.

이들 뛰어난 부부 작가들을 살펴보노라면 한 가지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그들의 2세도 과연 추리작가로 활동할 것인가 하는 것이죠. 미술가나 음악가 등 예술가들 집안은 후손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고, 과학 계통에서도 프랑스의 베르누이 집안은 뛰어난 수학자들을 연이어 배출했다고 하는데, 추리문학계의 경우는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아 아직까지 돋보이는 가문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2대를 이어간 집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 미국의 대표적 여성작가인 수 그래프튼(Sue Grafton)은 역시 추리작가였던 아버지 C.W.그래프튼(Cornelius Warren Grafton)보다 훨씬 유명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또한 유명한 여성 추리작가 메리 히긴스 클라크의 딸 캐롤 히긴스 클라크도 추리작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과연 어머니의 명성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P)

메리 히긴스 클라크(왼쪽), 캐롤 히긴스 클라크 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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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3.23 2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부 작가라면 무엇보다도 남편은 남성 입장, 여성은 여성 입장을 나타내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부 작가, 아니, 사실은 합작도 마찬가지지만 어떤 방식으로 써 나갔을지가 더 궁금합니다. 엘러리 퀸의 경우(소문이지만) 리가 글을 쓰고 구성 등은 더네이가 했다고 합니다.

  2. 추리닝4 2011.03.24 0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에도 부부 추리작가들 있지요. 이 회장님, 황 선배.. ^^

  3. 카메라이언 2011.03.24 03: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쿠, 쿠헉! 이 얼마나 대단한... (뭐, 뭔가 결혼을 해도 될 것 같아. ;;)

  4. 필론 2011.03.27 10: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 그래프튼의 아버지도 추리작가이셨군요.^^ 대를 이어서 추리문학을 쓰는 열정이 아름다워 보이네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경감님 눈에는 내가 아흔 살쯤 되어 보이겠지만 나 자신은 백 살도 더 먹은 기분입니다.”
  - 드루리 레인
<레인 최후의 비극>(1933)  -  엘러리 퀸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 추리소설도 마찬가지지만 - 무슨 자격증이나 허가증 같은 것은 필요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성공할수 있는지는 개인적인 능력에 따라 각각 달라지지요. 예를 들어 <사이코>의 작가 로버트 블록은 17세 때 잡지에 작품을 투고해 돈을 벌었으며, 아이러 레빈은 <죽음의 키스>(1953)로 데뷔했을 때의 나이가 24세에 불과해 천재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일찌감치 등단한 작가가 있는가 하면 물론 그 대척점에 있는 작가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죄(大罪)>시리즈로 유명한 로렌스 샌더즈는 과학기술 잡지사에 근무하다가 49세가 되던 1969년 <앤더슨의 테이프>를 발표해 미국 추리작가협회상(에드거상)의 신인상을 받았고, 1971년 <모비를 찾아라>를 발표해 이듬해 에드거상 신인상을 수상한 A.H.Z.카의 나이는 70세였는데, 이는 수상자 중 역대 최고령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뭐, 물론 이것이 성공할 수 있는 나이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24세에 데뷔하여 충격을 주었던 아이러 레빈


작가의 나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따로 한 번 살펴보기로 하구요…

그렇다면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탐정들의 나이는 어떨까요? 추리소설이라는 특성상 주인공들이 터무니없이 어린 경우는 극히 드문 편입니다. 물론 청소년이나 아동을 대상으로 쓴 작품에는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이에서부터 10대 청소년까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별개로 보아야 하겠지요. 현실에서 스무 살도 안 된 경찰이 있을 리도 없을뿐더러 세상물정은커녕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 애송이 탐정에게 자신의 심각한 사정을 허물없이 털어놓을 의뢰인이 과연 있기나 할까요?

물론 예외 없는 예외는 없는 법이라 어린 주인공이 있긴 합니다. 프랑스 작가 가스통 르루의 걸작 밀실 추리소설 <노란 방의 비밀>에 등장해 사건을 풀어나가는 신문기자 조셉 룰르타비유는 우리나라 기준으로 따지면 고등학교 3학년인 18세에 불과해 청년이라 부르기도 어색한데, 기자가 된 것은 그보다 2년 전이라고 하니 정말 19세기 프랑스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룰르타비유는 후속작에도 등장해 젊은 피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젊다못해 어린 친구가 담배까지? - 조셉 룰르타비유


하지만 룰르타비유가 막내 삼촌쯤으로 보일 만큼 훨씬 어린 주인공이 있습니다. 일본 작가 다나카 마사미(田中雅美)의 작품에 등장하는 호시카와 아츠코(星川厚子), 통칭 ‘앗쨩’으로 불리는 이 소녀는 불과 다섯 살의 유치원생입니다. <앗쨩의 추리 포켓>(1985)에 처음 등장하는, 소녀라고 하기도 어색한 이 꼬마는 유치원 친구가 버스에 치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어린이 특유의 호기심과 직감(?)으로 원기 넘치는 엄마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밝혀냅니다. 아츠코는 시리즈 진행과 함께 나이를 먹어 초등학교에 진학하는데, 아마 이보다 어린 탐정은 등장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혹시 모르지요, 어찌될지.

반면 나이 먹은 탐정은 제법 있습니다. 로렌스 샌더즈의 <대죄>시리즈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딜레이니나 피터 러브지의 피터 다이아몬드는 경찰에서 퇴직한 50대 후반의 사람들이며, 엘러리 퀸이 버나비 로스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작품에 등장하는 은퇴한 연극배우이자 아마추어 탐정 드루리 레인도 환갑을 넘은 노인입니다.

하지만 그들마저 젊은이로 보이게 하는 탐정도 있습니다. L.A.모스의 <늙은 탐정(The Old Dick)>(1981)에 등장하는 제이크 스패너는 78세의 괴짜 골초 영감님으로 자신의 마지막 사건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공원에서 일광욕하거나 시시한 소설을 읽으며 소일하던 왕년의 사립탐정 스패너에게 40년 전 그가 형무소로 보냈던 폭력단 두목 살 피콜로가 찾아와 유괴된 손자의 몸값 75만 달러를 주는데 동행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사건은 예상 밖의 방향으로 전개되고 맙니다.

제임스 시겔
의 <묘비명(Epitaph)>(2001)의 주인공도 70세를 넘긴 전직 탐정 윌리엄 러스킨입니다. 그는 과거 동료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그 동료가 죽기 전까지 사건을 맡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사건을 이어받기로 합니다. 약간의 질투심으로 시작된 조사에서 윌리엄은 50년 전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미해결 대량살인사건을 알게 되고, 또 최근 발생하고 있는 실종사건이 과거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에게도 위험이 다가옵니다.

어떤 탐정은 작가와 함께 나이를 먹어갑니다. 로스 맥도널드의 주인공 루 아처는 <움직이는 표적>(1949)에 처음 등장했을 때 작가의 나이와 비슷한 30대 중반이었지만 4반세기가 지난 후의 마지막 작품 <블루 해머(The Blue Hammer)>(1976)에서는 20대의 여성이 딸처럼 보일 만큼 원숙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올해 초 세상을 떠난 로버트 파커의 주인공, 보스턴의 사립탐정 스펜서 역시 처음에는 독신 생활을 즐기는 3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시리즈가 이어지면서 어느덧 40대에 접어들어 삶의 연륜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알리바이의 A(A is for Alibi)>, <강도의 B(B is for Burglar)> 등 알파벳 순서대로 시작되는 작품을 쓰는 여성작가 수 그래프튼은 데뷔작에서 27세였던 여탐정 킨지 밀혼이 대략 두 작품 반마다 한 살씩 나이를 먹게 해 시리즈 마지막 작품이 될 <0의 Z(Z is for Zero)>(제목을 미리 정해 놓았다고 하는군요)에서는 40세가 되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았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21편이 나왔으니 앞으로 다섯 편 남았군요. 성공의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후속 작품의 계획까지 세우는 것은 무척 세심하거나 야망이 대단한 작가가 아니라면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추리소설을 처음 쓸 때부터 알파벳으로 스물여섯 편의 시리즈를 쓰겠다고 결정한 그래프튼은 그런 점에서도 대단한 작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26번째 작품을 기대합니다 - 수 그래프튼


한편 아무런 생각 없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의 나이를 언급했다가 혹시라도 인기를 얻어 작품이 이어진다면 호기심 많은 독자들은 등장인물의 사생활까지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가장 화제가 된 것은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가 아닐까 싶군요. 크리스티는 작품마다 빈틈없이 치밀한 구성으로 독자를 감탄시켰지만 주인공의 나이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탓에 훗날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크리스티는 데뷔작이자 푸아로가 등장하는 첫 작품 <스타일즈 저택의 괴사건>을 1920년에 발표한 후 197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 이상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고, 푸아로가 세상을 떠나는 내용을 담은 <커튼>을 유작으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습니다. 푸아로의 죽음은 뉴욕 타임즈에까지 부고가 실렸는데, 거기에 실린 그의 추정 연령은 무려 120세였던 것입니다!

뉴욕 타임즈에 실린 푸아로의 부고 기사


심지어 크리스티의 평전(評傳)을 쓴 H.R.F.키팅은 푸아로가 1904년 벨기에 경찰에서 은퇴했다는 기록에 따라 당시 60세였다면 1970년 중반까지 살아있었으니 130세 이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줄리언 시먼즈는 <위대한 탐정들(The Great Detective)>에서 푸아로가 퇴직했을 때 40대였다며 100세를 넘겼다는 설에 반론을 제기했지요. 결국 푸아로의 나이는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일찌감치 모습이 굳어진 주인공은 나이를 먹지 않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독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을 꼽자면 제임스 본드, 이름보다 007이라는 번호로 더 잘 알려진 첩보원이지요. 작가 이언 플레밍이 세상을 떠난지 한참 되었습니다만, 영화에 등장하는 본드의 나이는 점점 젊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50년 이상 87번 관서(분서라고도 많이 번역되었네요) 시리즈를 발표했던 에드 맥베인은 등장인물의 나이에 대해 별로 고민이 없었습니다. 어떤 인터뷰(1992년입니다)에서는 이렇게도 말했지요.

질문: 인물들의 나이-예를 들어 쌍둥이(사실상의 주인공인 스티브 카렐라의 아들입니다)- 를 조금씩 먹게 하는 것은 어떻게 결정하십니까?

맥베인 : 쌍둥이는 “사춘기”를 향해 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 자신도 그들이 도대체 몇 살인지 모르겠군요. 다음 책을 쓸 때 살펴봐야겠습니다. 카렐라와 다른 사나이들은 모두 30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전부예요.

이렇게 마음을 편하게 먹은 덕에 그가 수많은 좋은 작품을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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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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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0.12.23 13: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재미있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제가 만든 탐정의 나이를 먹게 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소년탐정 김전일이나 코난은 전혀 나이를 먹지 않죠), 사극이라면 <로마 서브 로사>시리즈의 고르디아누스처럼 나이를 먹게 해야겠지만 현대물에서는 계속 그 나이를 유지시키기로 했습니다.

  2. 레이 2010.12.23 19: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나이하면 김전일과 명탐정 코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군요~

    작가와 함께 나이를 먹는 탐정, 이거 좋네요. 진짜 살아있는 것 같아요. 점차 성숙해가는 모습도 흥미로울 것 같고요.
    알파벳 시리즈 내용이 어떤지 궁금하네요. 국내에도 소개될 날이 오길... 계속 쓰시고 계실 작가분께 감탄하고 갑니다.

  3. 카메라이언 2010.12.23 23: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키키키킥 너무 재미있게 보고 가요. 포와로는 혹시 알고 보면 장삼봉이랑 같은 수준의 선인? 키키키킥. 역시 명탐정 코난이 젤 웃겨요. ㅋㅋㅋㅋ

  4. 평시민 2010.12.25 09: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 장편 주인공이라..., 그러고 보니 저와 나이가 비슷했습니다.




이름 뒤에 숨어있는 비밀


"난 필명이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 웨스트레이크가 한 말을 결코 잊을 수가 없어요. 그는, 맑은 날에는 그가 글을 썼고, 날씨가 궂은 날에는 스타크가 일을 떠맡았다고 했습니다." 
                                     -<다크 하프 The Dark Half>(1989), 스티븐 킹

자기의 본래 모습조차 잊어버렸다고 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괴도 아르센 뤼팽은 각각의 변장에 어울리는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마 열 개는 충분히 넘은 것 같지만 스무 개까지는 안 되는 것 같네요. 뭐,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인물이니까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마는 너무 많으면 작가인 모리스 르블랑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테지요.

그런데 영국의 추리소설가 존 크리시(John Creasey)는 비록 얼굴 생김새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는 없었을망정 이름의 숫자는 뤼팽을 압도합니다. 추리소설을 쓸 때는 존 크리시를 비롯해 고든 애쉬, 패트릭 길, J.J.매릭, 제레미 요크 등을 사용했으며 웨스턴 소설(서부극 소설입니다)을 쓸 때는 텍스 라일리, 지미 와일드, 켄 레인저 등, 그리고 로맨스 소설을 쓸 때는 마가렛 쿡, 엘리제 퍼캠프스 등 여성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작품 표지에 올라간 이름은 무려 28개,그리고 6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존 크리시 - 스물여덟개의 이름을 가진 사나이


실제 이름 대신 쓰는 가짜 이름은 범죄자들이 사용하면 가명(假名), 연예인들이 사용하면 예명(藝名), 작가들이 사용하면 필명(筆名) 등 다양하게 일컬어지는데(그러고 보니 이름 자체에도 다양한 이름이 많군요), 작가들이 필명을 쓰는 이유는 본명이 추리소설에 별로 어울리지 않게 평범하다거나, 유명인의 이름과 같거나 비슷하다던가, 발음이 어렵다던가, 혹은 이름을 숨기고 싶다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무명작가인 케네스 밀러(Kenneth Millar)는 추리소설을 쓰는 아내 마가렛 밀러(Margaret Millar)보다 늦게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네 권의 작품을 발표한 후 이미 유명했던 아내의 작품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존 로스 맥도널드(John Ross Macdonald)라는 필명을 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미 자리를 잡은 유명 추리작가 존 D.맥도널드(John D.MacDonald)와 혼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결국 그가 선택한 이름은 로스 맥도널드(Ross Macdonald)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그는 하드보일드의 거장이 되었고, 지금은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요. 역시 사람의 앞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영국의 계관 시인이며 옥스포드 대학 교수였던 세실 데이 루이스(Cecil Day-Lewis)는 낡은 지붕의 수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즐겨 읽던 추리소설을 직접 쓰기로 했는데, 본명으로 글을 쓰기가 부담스러워 니콜라스 블레이크(Nicholas Blake)라는 필명을 사용했습니다. 처녀작인 <증거의 문제(A Question of Proof)>(1935)가 성공하면서 작가가 누구인지 금방 밝혀졌으나, 평생 본명으로는 추리소설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스티븐 킹은 웨스트레이크의 작품 이미지에서 착상해 <다크 하프(The Dark Half)>(1989)를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소설가 새드 보먼트(Thad Beaumont)는 조지 스타크(George Stark)라는 이름으로 폭력적인 범죄소설을 쓰고 있는데, 이 이름은 바로 도널드 웨스트레이크(Donald Westlake)의 필명 리처드 스타크(Richard Stark)에서 따온 것입니다. 웨스트레이크는 본명으로 <뉴욕을 털어라 (The Hot Rock)>(1970)와 같은 밝고 유쾌한 분위기의 작품을 쓰지만 스타크란 필명으로는 <인간 사냥 (The Hunter, 리 마빈이 주연한 <포인트 블랭크 Point Blank>, 멜 깁슨 주연의 <페이백 Payback> 등 두 차례나 영화로 제작된 바 있습니다)>(1962)과 같은 어둡고 폭력적인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웨스트레이크의 필명은 스타크 이외에도 앨런 마셜, 터커 코우 등 15개가 더 있습니다.

오늘은 맑은 날인가요 궂은 날인가요 -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두 명이 함께 작품을 쓸 때면 대개 ‘누구와 누구’라는 식으로 쓰지만, 필명 하나를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미국의 추리작가 엘러리 퀸이 떠오르네요. 작품 속 탐정의 이름이자 작가의 이름이기도 한 엘러리 퀸은 사촌 형제 사이인 프레드릭 더네이(Frederic Dannay)와 맨프레드 리(Manfred B. Lee)의 합작 필명이란 것은 추리소설 팬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요. 하지만 ‘더네이’나 ‘리’도 본명이 아닌데, 그들의 원래 이름은 대니얼 네이던(Daniel Nathan)과 맨포드 레포프스키(Manford Lepofsky)입니다. <로마 모자의 수수께끼>로 데뷔한 그들은 바나비 로스(Barnaby Ross)라는 필명으로도 <Y의 비극>등의 걸작을 발표한 뒤, 이름이 밝혀지기 전까지 퀸과 로스로 각각 행세하며 장난기 넘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컴퓨터의 덫(コンピュ-タの熱い罠)>(1986)을 쓴 오카지마 후타리(岡嶋二人)는 이름에서부터 ‘두 사람(二人)’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의미 그대로 도쿠야마 준이치(德山諄一)와 이노우에 이즈미(井上泉) 두 사람의 합작 필명입니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은 성(性)을 숨기기 위해 필명을 쓴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처럼 여겨지지만 20세기에만 해도 여성 작가들은 남성 작가들의 전유물인 미스터리를 발표하기 위해서는 남자 이름을 써야만 했습니다. 영국 여성작가 루시 비어트리스 맬리슨(Lucy Beatrice Malleson)은 앤소니 길버트(Anthony Gilbert), J.키머니 키스(J.Kimeny Keith)라는 필명으로, 미국 시카고 출신의 여성작가 조지애너 앤 랜돌프(Georgiana Ann Randolph)는 크레이그 라이스(Craig Rice), 마이클 배닝(Michael Venning)이라는 남성적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했지요.

필명은 아니지만 영국 작가 필리스 도로시 제임스(Phyllis Dorothy James)는 여성이라는 선입견을 벗어나기 위해 약자를 써서 P.D.제임스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우리나라에 번역된 어느 작품에서는 P.D.를 Ph.D로 오해했는지 ‘제임스 박사’라고 소개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의 문학평론가이자 야구광인 오오이 히로스케(大井廣介)는 타지마 리마코(田島莉茉子)라는 이름으로 <야구 살인사건(野球殺人事件)>이라는 작품을 내 놓았습니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일본에서는 여성 작가가 드물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1930년대 활약한 미국 작가 풀턴 아워즐러(Fulton Oursler, 1893-1952)는 추리소설을 쓸 때는 이름을 앤소니 애봇(Anthony Abbot)이라는 필명으로 바꾸고, 작품은 모두 ‘about’으로 시작하는 제목을 지었습니다. 작가의 이름이나 작품 제목이 모두 ‘A’로 시작되기 때문에 도서관의 10진 분류법에 의해 정리하면 항상 목록 앞부분에 오도록 한 것이지요. 이와는 좀 다르지만, 본명이 재니스 영 브룩스(Janice Young Brooks)인 미국의 여성작가 질 처칠(Jill Churchill)은 알파벳 순으로 진열된 서점 책꽂이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근처에 자리 잡기 위한 필명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필명은 어떤 방법으로 지을까요?

존 크리시가 기디언 경감 시리즈를 발표할 때 썼던 ‘J.J.매릭(J.J.Maric)’이란 필명은 자신의 이름 존(‘J’ohn), 부인 진(‘J’ean), 두 아들 마틴(‘Mar’tin)과 리처드(‘Ric’hard)등 가족 이름을 합쳐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신데렐라의 함정(Piège pour Cendrillon)>(1962), <긴 일요일의 약혼식(Un long dimanche de fiançailles)>(1991)등의 작품이 소개된 프랑스 작가 세바스띠앙 자프리조(Sebastien Japrisot)의 본명은 장 밥티스트 로시(Jean-Baptiste Rossi)인데, 그는 자신의 이름 철자 순서를 바꿔(애너그램 anagram이라고도 합니다) 새 이름을 만들어 냈습니다.  

국내 추리작가 중 가장 독특한 필명을 가진 분을 꼽아보자면 바로 원로 추리작가인 노원 선생님입니다. 원래 언노운(Unknown: '알려지지 않은','알 수 없는')을 한글로 차용한 안노운(安老雲)을 필명으로 사용하려 했다가 더 짧고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노원(No One: 한자명은 盧媛→盧遠→魯元으로 세 차례 바뀝니다)’으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단편 <미스터리 클럽의 살인>에는 안노운 경감이 등장해 한 가닥 흔적을 남기고 있지요.

'안노운'이 되실 뻔한 노 원 선생님


일본 추리문학계의 거두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의 본명은 히라이 타로(平井太郞)인데, 에드거 앨런 포우의 이름과 흡사하게 들리는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추리소설의 원조인 포우의 이름을 빌린 작가답게 그는 일본 추리문학계의 선구자로서 추리작가협회의 조직 및 위상 확립에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요즘 눈에 띄는 독특한 필명의 작가는 <불야성(不夜城)>(1996)으로 알려진 하세 세이슈(馳星周)입니다. 그의 필명은 국내 독자들에게 일본식 발음으로는 별 의미가 없겠지만, 한자를 거꾸로 읽어보면 옳커니 할 독자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세 세이슈는 홍콩 영화의 팬인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주성치(周星馳)의 이름을 거꾸로 해서 자기의 필명으로 삼은 것이지요. 코믹한 배우의 이름을 빌리긴 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웃음기라고는 거의 없이 어둡고 진지합니다.

성공하려면 이분에게 이름을 얻어가야... 시마다 소지


시마다 소지(島田荘司)는 <점성술 살인사건(占星術殺人事件)>(1981)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신본격(新本格)작가들의 대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신인 작가들을 추천하고 독려했습니다. <십각관의 살인사건>을 쓴 아야츠지 유키토(綾辻行人), <벚꽃 피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의 작가 우타노 쇼고(歌野晶午), <살육에 이르는 병>의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我孫子武丸),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의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法月綸太郞)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시마다 소지는 점성술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성명학(姓名學)에도 일가견이 있어 이들의 필명을 다 지어주었다고 하는군요.

그나저나 작가로서 성공하려면 작품도 중요하지만 이름을 잘 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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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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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뎅뎅 2010.10.28 16: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저도 주성치 왕팬인데. 필명은 하나도 없는 저는 한때 별명이 한 스무개남짓 됐던 적도 있습니다. 실없는 오라버니가 저를 닥치는대로 부르다가 그만... 그때 다 적어나 둘 걸, 지금은 대여섯개 밖에 생각이 안나요.

    • 추리닝4 2010.10.29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명성 자자한 그 오라버니 어릴때부터 언어유희를 꽤 즐기셨군. 합류걸님^^; .. 다른 얘기지만 나는 네이버에서 '최코치'란 닉네임을 쓰는데 많은 사람들이 헬스장 관련 일 하는 사람인 줄 알더라는 ㅠㅠ

  2. 갈매 2010.10.28 17: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마다 소지!
    재밌네요. 우타노 쇼고며 아야츠지 유키토의 필명을 지어줬다니. 이들의 이름이 다 필명이었던 거군요.
    저도 좋은 필명 하나 얻으면 글이, 팍팍 써지려나??

  3. 카메라이언 2010.10.30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할아버지의 소설 '뉴욕을 털어라'와 '페이백'은 와앗, 정말 거리가 있는데요! '뉴욕을 털어라'는 정말 가볍던데! 새삼 놀랍니다. 아아, 그나저나 시마다 소지 넘넘 좋아하는데 저렇게 생기셨구나. 사진은 처음 봤어요. 와 멋져멋져 꺅꺅!

  4. 이야기꾼 2010.10.30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필명하면 <류삼> 씨라는..ㅎㅎ
    그나저나 요새 류삼씨는 뭐하시나...

  5. 붕붕 2010.11.05 1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류삼', '삼류'...
    아 그렇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6. 필론 2010.12.08 17: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Bill Bass와 John Jefferson이 한팀으로 Jefferson Bass란 이름으로 Body Farm 시리즈를 내는것이나, 요즘 화제가 되는 드라마 캐슬의 캐릭터가 실제 작가처럼 책을 낸 Richard Castle의 경우도 특이한 경우인것 같습니다.

    • 추리닝4 2010.12.09 14: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리처드 캐슬 이름으로 출간하는 아이디어는 괜찮은 것 같아요..극중에서 함께 포커 치던 제임스 패터슨 옹이 생각납니당 ㅋㅋ 필론님 블로그와 링크 완료^^

    • 필론 2010.12.09 14: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임스 패터슨이 (시즌 2에서는 마이클 코넬리가) 카메오로 등장한다는 것도 드라마 캐슬의 매력인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