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크레인'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02.02 테마로 읽는 미스터리 <19> 술 마시는 사람 (10)

애주가, 주정뱅이, 알코올 중독자

세상에는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남자가 처음으로 술을 마셨을 때,
다른 하나는 여자가 마지막 한 잔을 마셨을 때이다.
     - <The Octopus Marooned> (1908) O.헨리
 
술.
술자리는 친구, 동료, 혹은 명절날 가족들과 함께 하는 즐거운 자리일 수도 있겠지만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게는 그런 자리가 괴롭기만 하죠. 또 음주가 지나치면 좋지 못한 일(따로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요?)이 생길 때도 많습니다. 이렇게 술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괴로움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문학적 측면에서 보면 술은 매우 쓸모 있는 소도구로, 웬만한 작가라면 음주 취향만으로 등장인물의 사회적 지위와 배경을 쉽게(혹은 상투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와인을 즐기는 도시적인 인물, 생맥주를 들이키는 직장인, 칵테일을 홀짝거리는 묘령의 여인,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배 나온 중년 남자, 소주나 막걸리를 안주도 없이 들이키는 거친 사나이… 이런 전형적인 인물 설정은 예나 지금이나 커다란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추리작가와 술의 관계도 밀접합니다. 현대 추리소설의 창시자 에드거 앨런 포는 음주벽으로 유명했고, 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네가 범인이다>, <아몬틸라도 술통>등의 작품도 있지만 그가 불과 40세라는 짧은 나이에 요절한 것은 폭음으로 인해 일찌감치 건강을 해쳤던 것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드거 앨런 포


그러나 포 이후 한동안 탐정은 술을 멀리한 것 같습니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는 연신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심지어 아편이나 코카인 등의 마약까지 상용했는데 취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귀족적인’ 영국 탐정은 식탁에서 예의 바르게 가벼운 술 한 잔을 즐기는데 그쳤지요. 애거서 크리스티의 주인공 엘큐울 푸아로는 박하주, 석류주 등 독하지 않을 듯한 술을 즐겼으며 배러니스 오르치가 만들어 낸 괴상한 주인공 ‘구석의 노인’은 쉴 새 없이 손을 만지작거리고 매듭을 만들며 마치 알코올중독자 같은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그가 마시는 것은 놀랍게도 우유일 뿐이었습니다.

이언 플레밍이 만들어 낸 영국의 전설적인 스파이 007 제임스 본드도 고급 술을 즐기는 까다로운 입맛을 가졌습니다. 술에 대해 박식한 플레밍은 제임스 본드의 미각 묘사를 통해 자신의 지식을 보여주고 있지요. 영화 <007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에서는 원작 소설에는 없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련 스파이가 생선 요리와 함께 레드와인(붉은 포도주)을 주문한 것. 공산주의자인 소련 스파이는 -빨갱이라서- 포도주도 붉은 것을 마신다는 유머와 함께, 본드가 상대의 정체를 알아내는 계기가 됩니다. 원래 생선요리에는 화이트 와인(흰 포도주)을 함께 마시기 때문에 수상쩍게 여기게 되는 것이죠.

용의주도하게 와인 맛을 보는 제임스 본드(숀 코네리가 연기).


술을 많이 마시는 탐정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습니다. 귀족 같은 생활을 하던 유럽의 천재 탐정 대신 뒷골목에서 악당들과 맞붙는 현실적이며 훨씬 더 인간적인 탐정이 하드보일드 작품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드보일드의 선구자 대쉴 해밋이 만들어낸 탐정 샘 스페이드는 술을 즐기는 편인데, 사건을 의뢰 받았을 때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마십니다. 대신 강인한 외모나 성격처럼 알코올에도 강해 인사불성이 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의뢰인에게 실망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해미트의 뒤를 이은 레이먼드 챈들러가 탄생시킨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도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인데, 사무실의 책상 서랍(작품에서는 ‘깊숙한 서랍’이라고 나옵니다)에는 언제나 위스키 병과 술잔이 들어 있어 자신이 마시거나 손님에게 대접하곤 합니다.

술집에서의 필립 말로우(로버트 미첨이 연기). 영화 '빅 슬립'에서


지나간 일이니 결과론이 되겠지만 레이먼드 챈들러는 만약 술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위대한 추리소설가 대신 유능한 사업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젊은 시절 변호사를 지망했던 챈들러는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문학세계로 발을 디뎠으나 별다른 재능을 보이지 못했고, 군복무 후 은행을 거쳐 석유회사의 중역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미국을 휩쓸었을 때 이미 알코올중독 기미를 보여서 직장을 잃은 챈들러는 44세라는 나이에 본격적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으며, <빅 슬립>(1939), <안녕, 내 사랑>(1940),<기나긴 이별>(1954)등의 걸작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년 역시 포우에 못지않게 서글펐는데, 1954년 연상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진정되어가던 모습을 보이던 알코올중독이 다시 도진 것입니다. 결국 건강을 해친 그는 집필 중이던 장편 <푸들 스프링>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1959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미국 탐정이 위스키 같은 독한 술만 마시는 것은 아닙니다. 렉스 스타우트의 미식가 탐정 네로 울프는 ‘맥주와 난(蘭)’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울프는 입맛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맥주도 가려서 먹는데, 문제는 마음에 드는 맥주라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마신다는 것이죠. 저녁식사 때는 언제나 맥주를 마시는데 어쩌다가 마음만 내키면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계속 마시기 때문에, 조수인 아치 굿윈을 걱정스럽게 만듭니다.

맥주 맛을 보는 네로 울프(에드워드 아놀드가 연기).


와인을 마시는 사람으로는… 역시 프랑스가 자랑하는 메그레 경감을 들 수 있겠군요. <Maigret a Vichy>(1968)에서는 휴가차 비시로 간 메그레 경감이 젊은 의사와 술 이야기를 나누는데, 하루에 와인을 1리터 정도를 마신다고 하니 거의 음료수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개 집에서는 와인, 나가면 맥주를 마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애주가가 어느 선을 넘어서면 술꾼이 되고, 그걸 더 넘어서면 알코올중독자가 되죠. 그런데 그런 탐정도 있습니다.


1930년대 중반 조나단 라티머가 창조한 사립탐정 빌 크레인은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데, 문제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아무데서나 쓰러져 잠이 들기까지 한다는 것이죠. 재치있고 머리도 좋아 어떤 궁지에서든 잘 빠져나오긴 하지만, 술만 아니면 궁지에 빠질 일도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탐정 빌 크레인은 이렇게 생겼습니다-영화 '시체실의 여인' 포스터


<스위트홈 살인사건>으로 알려진 여류 작가 크레이그 라이스도 술꾼 주인공을 만들어 냈습니다. 뒤죽박죽 희극식 작품에 등장하는 주정뱅이 변호사 존 J.말론은 과거 하드보일드 탐정들을 풍자한 듯이 보이는데, 그는 캐비넷 서랍 안에 ‘기밀(Confidential)’과 ‘비상 (Emergency)’이라고 붙여 놓은 술병을 숨겨 놓고 있으며, 아름다운 여자와 노닥거리는 것을 즐깁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보다 술이 덜 깼을 때 머리가 더 잘 돌아간다니 아무래도 별난 인물입니다.

J.J. 말론은 이렇게 생겼을까요 (물론 뒤에 있는 남자)


한편 웨이드 밀러가 <Guilty Bystander>(1947) 등에 등장시킨 맥스 서즈데이는 아내와 헤어지고 나서 주정뱅이가 된 탐정입니다. 에드 맥베인이 커트 캐넌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일련의 단편에 등장하는 주정뱅이 탐정 커트 캐넌(작가와 이름이 같습니다)도 이와 비슷한 쓰라린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뉴욕의 잘 나가는 사립탐정이었던 그는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하자 친구를 반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팬 끝에 탐정 허가증을 빼앗기고 아내도 잃고 말지요. 결국 알코올중독자가 된 그는 뉴욕 뒷골목에 살게 되었지만 무허가 탐정으로 서민층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커트 캐넌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미국 추리작가협회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로렌스 블록의 매튜 스커더 역시 비슷한 경력을 가졌습니다. 뉴욕 시경 소속의 유능한 형사였던 스커더는 수사 중 쏜 총탄이 무고한 소녀의 생명을 빼앗자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경찰을 사직합니다. 그 후 아내와도 이혼하고 알코올중독자가 되어버린 그는 싸구려 호텔에 살면서 무허가 사립탐정 일을 하며 살아가다가 알코올중독자 치료모임에 들어가 금주(禁酒)를 시작하며 음지에서 양지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8백만 가지 죽는 방법'에서 매트 스커더(왼쪽, 제프 브리지스가 연기했습니다)


그나저나 술 하면 문득 떠오르는 작가는 나카지마 라모입니다. <가다라의 돼지>에서 어린 딸을 잃고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민족학자 오우베 교수가 등장하는가 하면 <오늘 밤 모든 바에서>에서는 알코올성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한 알코올 중독자가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작품 속에서 알코올 중독자의 묘사가 너무나 생생한 것은 그가 젊은 시절부터 끊임없이 술을 마신 탓에 그 역시 삼십 대 중반에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었지요.

공연중인 나카지마 라모


주정꾼 탐정은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빈틈 하나 없는 사람보다 약한 면을 보이는 등장인물에게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좀 다르겠습니다만. (:P)

P.S. 명절 잘 보내세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추리닝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이야기꾼 2011.02.03 0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에드 맥베인의 커트 케넌에 한 표!
    어린 시절 그 작품을 읽고 경도되었던 경험이....

    허나....술 먹고 댓글쓰는 건 참 ㅊ하들거미...ㅋㅎ샤댜ㅣㄹ ㅑ디

  2. 평시민 2011.02.03 02: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생선요리에 붉은 포도주 썼다고 빨갱이라니..., 조금 억지가 심한 건지 이안 플레밍이 의외로 매카시스트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본드 하니 생각납니다.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 보면 두 명의 킬러가 웨이터로 위장하고 본드에게 다가오는데 본드가 "이 요리에는 보르도산 포도주가 잘 어울리는데 오늘은 무통이군." 두 웨이터는 다 떨어졌다고 대답합니다. 사실 무통이 보르도산인데 말이죠. 본드는 이들이 웨이터 치고 향수 냄새가 짙다는 점(그것도 익숙한)을 보고 의심하고 있었지만요.

  3. 카메라이언 2011.02.14 04: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카지마 라모 아저씨가 저렇게 생기셨었구나... 'ㅂ'... 수많은 직업들 중 뮤지션이기도 하셨다는 말에 궁금했었는데 (;;;) 아우 정말, 오늘 밤 모든 바에서 보면서 정말 술은 사회 악이구나 싶더라고요.

    크레이그 라이스의 책은 최근에 동서미스터리서 나온 스위트홈 살인사건을 봤는데, 안 그래도 작품 말미에 붙은 해설에서 나온 다른 소설들 읽고 너무 보고 싶더라고요. 번역이 상당히 어색한데도, 그 코믹코드가 넘넘넘 좋더라고요.

    명절은 한참 지났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__) (--) <--세뱃돈을 받고 싶은 수작. ㅋㅋㅋ

  4. 2011.03.06 0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