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 소개의 마지막으로 일본 쪽의 책들을 소개합니다. 추리소설의 인기가 높은 나라여서인지 오래 전부터 여러 저자에 의해 꾸준히 출간되고 있습니다. 번역가이자 문학연구자였던 야나기다 이즈미(柳田泉, 1894-1969)가 1938년 출간한 <수필 메이지 문학(随筆 明治文学)>에서 번역문학과 탐정소설 출판 역사를 다루었으니, '역사책의 역사'도 꽤 오래된 셈입니다. 서구 역사서와는 달리 일본 역사서는 잡지 연재를 엮은 책이 눈에 많이 뜨입니다.



* 에도가와 란포(江戸川乱歩, 1894~1965)는 여러 방면 - 창작, 평론, 전문지 출간, 협회 창설 등- 에서 일본 추리소설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는데, 역사서 방면에서도 <탐정소설 40년(探偵小説四十年)>(1961)으로 한 획을 긋고 있습니다. 란포는 1949년 잡지 <신청년>에 <탐정소설 30년>이란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는데, <신청년>이 폐간되자 다른 잡지 <보석>으로 옮겨 <탐정소설 35년>으로 제목을 바꿔 1956년까지 12년 동안 연재했습니다. 그라고 1961년 단행본으로 나올 때 4년 남짓 동안의 일을 덧붙여 <탐정소설 40년>으로 출간되었습니다. 30년, 35년, 40년은 그가 작가로 나선 이후의 세월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사실 <일본 미스터리 사전>(2000) 등에서는 이 책을 역사서로 분류합니다만, 본인이 '기록체 자서전'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자기 중심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고 일본 추리소설의 역사 전체를 다룬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약간 애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인기작가였으며 오랫동안 추리문학계의 중심에 있었던 그의 회고, 즉 작가로서의 인생 자체가 일본 추리소설의 역사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습니다. 

<탐정소설40년>. 1970년 에도가와 란포 전집으로 재출간.


* 일본 추리문학계에서 평론가로 활동했고 제1회 에도가와 란포 상 수상자(수상작은 <탐정소설사전>(1955). 당시는 신인작가 공모상이 아니었습니다)이기도 한 나카지마 가와타로(中島河太郎, 1917-1999)의 <일본추리소설사(日本推理小説史)> 역시 잡지 연재물을 엮은 저작입니다. 1959년 <별책 퀸 매거진>에 4회 연재 후 폐간되어 <보석>으로 옮겨 다시 연재하여 1권이 1964년에 출간되었는데, <보석>을 비롯해 <추리계>, <추리문학>, <환영성> 등 연재한 잡지마다 폐간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뒷부분은 책으로는 나오지 않았는데, 1990년대 들어와서야 도쿄소겐사를 통해 두 권이 더 출간되었습니다(1994년 2권, 1996년 3권). 1950년대 이전까지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약간 아쉽지요. 일본의 작품뿐만 아니라 초기 외국 추리소설 수용사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본추리소설사>(1964)


* 읽는 재미만으로 따지자면 야마무라 마사오(山村正夫, 1931~1999)의 <추리문단전후사(推理文壇戦後史)>를 최고로 꼽을 만합니다. 17세에 추리소설가로 데뷔했고, 탐정작가클럽(일본추리작가협회의 전신)의 유일한 20대 작가였을 정도로 일찌감치 선배 작가들과 교류한 덕택에 이런 생생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책도 역시 잡지에 연재한 것을 엮은 것인데, 모두 네 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명 작가들의 일화를 통해 2차대전 이후 일본 추리문학계의 흐름을 그리고 있습니다. 1권은 1973년, 2권은 1978년, 3권은 1980년, 4권은 1989년에 나왔으며 다행히 연재한 잡지 <소설추리>가 건재한 덕택에 옮겨다니는 수난은 겪지 않았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작가들이란 정말 별난 사람들이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것 같을 정도로 다양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습니다.


<일본추리문단전후사> 1~4권


* 문예평론가인 이토 히데오(伊藤秀雄, 1925~)는 <메이지의 탐정소설(明治の探偵小説)>(1986), <다이쇼의 탐정소설(大正の探偵小説)>(1991), <쇼와의 탐정소설(昭和の探偵小説)>(1993), <근대의 탐정소설(近代の探偵小説)>(1994) 등 일련의 초기 추리소설 역사를 다룬 책을 집필했습니다. 이들 중 <메이지의 탐정소설>은 1987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평론부문상을 수상했지요. 이들 중 <근대의 탐정소설>은 앞의 세 권을 집약했다고 볼 수 있는 책인데, <일본의 탐정소설>(유재진 외 옮김, 도서출판 문, 2011)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판이 나와 있습니다. 다만 작가와 작품해설 위주라 좀 딱딱한 편이고, 서구 작가 이름 표기에 다소 오류가 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네 권중 <다이쇼의 탐정소설>이 빠졌습니다 ㅠㅠ


* 하세베 후미치카(長谷部史親, 1954~)의 <일본 미스터리 진화론-이 걸작을 놓치지 마시라(日本ミステリー進化論-この傑作を見逃すな)>(1993)은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일본 추리소설의 현재를 다루고, 2장에서는 일본 추리소설의 과거 역사를 다룬 다음 3장에서는 일본의 대표적 작가 27명과 그들의 대표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책 전체에서 역사 관련 부분인 1, 2장은 1/3 정도로(약 150페이지), 간단하게 읽을 만합니다.

* 군더더기 없이 간결, 명확하게 일본 추리소설의 역사를 알아보는데는 야마마에 유즈루(山前 譲, 1956~)의 <일본 미스터리의 100년(日本ミステリーの100年)>(2001)이 최고입니다. 처음부터 문고판으로 나온 작은 책이지만 크기와 달리 내용은 대단히 알찹니다. 1901년부터 2000년까지 100년간 1년 단위로 끊어 추리문학계 및 사회적 사건 연표, 해당 년도의 우수한 작품 추천, 각종 수상작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으며 1년도 빠짐없이 흐름을 깔끔하게 정리한 내용 덕택이 이것 한 권만 읽으면 일본 추리소설 역사를 거의 꿸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고하라 히로시(鄕原宏, 1942~)의 <이야기 일본 추리소설사(物語日本推理小説史)>(2010)도 제목처럼 일본 추리소설 역사를 '이야기'처럼 엮어간 책입니다. 잡지 <소설현대>에 연재한 글을 묶은 것으로,  일종의 문학사(文學史)이면서도 논문이나 학술서 분위기가 아닌, 딱딱함 없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24장)인 '쇼와에서 헤이세이로'에서는 일본 추리소설의 역사가 아주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각 장마다 참고문헌이 따로 나와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색인이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역사서들이 있고,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은 정말 부럽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어서 이에 못지 않은 책이 나오길 기대할 따름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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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곳

진실은 바보같다
-기디언 펠 박사
 - <The Crooked Hinge>(1938), 존 딕슨 카

 

추리소설에서 다루는 지능적 범죄에는 철벽같은 알리바이, 시체(및 범행) 숨기기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밀실입니다.

이렇게 간단해 보이는 밀실도 쉽게 만들 수 없습니다


밀실이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누구도 드나들 수 없게 되어 있는 방을 의미하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방이 트여 있더라도 출입구가 잠겨 있는 고층건물의 옥상, 커다란 창문이 있지만 보통 사다리 정도로는 올라갈 수 없는 높은 탑의 방, 누가 지나가면 발자국이 남는 해변 모래사장, 좀 더 시야를 넓혀 보면 잠수함이나 우주선 같이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장소도 밀실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궁극적으로는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드나들 수 없는 장소라면 모두 밀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며, 작가들은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라는 3차원적 세계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마치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사건을 독자들에게 제시합니다. 그래서 밀실 범죄는 흔히 ‘불가능 범죄’라고도 합니다.

논리적인 방법으로 해결 불가능할 것 같은 사건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게 되는 법이지요. 기원전에 기록된 성서 외경의 <벨과 뱀>에서 밀실을 다루었을 정도로 역사는 무척 오래 되었습니다.

미국 작가 존 딕슨 카는 <세 개의 관>(1935)에서 주인공인 펠 박사의 입을 빌려 밀실 트릭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한편 마술사 출신 작가인 클레이튼 로슨의 <Death From a Top Hat>(1938)에서는 마술사 겸 탐정인 ‘위대한 멀리니’가 펠 박사의 밀실 강의를 이용해 약간의 내용을 더 추가하고 세분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에도가와 란포는 <탐정소설의 수수께끼(探偵小說の「謎」)>에서 밀실 트릭에 대해 정리했지요.

존 딕슨 카의 '세 개의 관'


다음 밀실 트릭들은 위 세 사람의 이론을 토대로 해서 요약한 밀실 트릭들입니다. 훗날 작품을 읽을 분들을 위해서 기본적인 해설만 했으며, 작가나 작품 제목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밀실 트릭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진짜 밀실이며 사람이 빠져나오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
  2. 밀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한 밀실이 아닌 경우

이들 커다란 두 분류를 기본으로 하여 세부적인 분류가 가능합니다.

더보기

 
덧붙이자면 밀실과 연관된 분야가 있는데, 바로 밀실을 빠져나오는 기술입니다. 이것은 밀실 트릭을 역으로 이용한다고도 할 수 있으며, 주로 교도소에서의 탈옥을 주된 소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건 제목 등에서 결론이 이미 예고된 작품이라 대표적인 작품의 제목을 소개해도 지장이 없을 것 같네요.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는 작품으로는 자크 푸트렐의 단편 <13호 독방의 문제>, 모리스 르블랑의 단편 <뤼팽의 탈옥>등이 있습니다. 또한 정통적인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알렉산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 스티븐 킹의 <쇼생크 탈출>도 탈옥 기법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1891년 선을 보인 이즈라엘 쟁윌의 <빅 보우 미스터리>는 밀실을 다룬 최초의 장편 분량 소설로서 영국의 신문에 연재되며 호평을 받았고, 프랑스에서는 가스통 르루가 본격적인 밀실을 다룬 작품 <노랑방의 수수께끼>(1907)을 써서 현재까지도 밀실 작품 중에서도 고전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한편 코난 도일도 셜록 홈즈 시리즈 중 하나인 단편 <얼룩 끈>(1892)에서 밀실 사건에 도전합니다.

이즈라엘 쟁윌의 '빅 보우 미스터리'


존 딕슨 카는 ‘밀실의 거장(The Master of the Locked Room)’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가지고 있지요. <유다의 창>(1938), <세 개의 관>, <비틀어진 경첩>등은 밀실을 다룬 그의 걸작입니다. 카의 전기 <존 딕슨 카: 기적을 해명한 사나이(John Dickson Carr: The Man Who Explained Miracles)>(1994)를 집필한 더글러스 G. 그린은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습니다: “밀실을 다룬 걸작들의 목록은 언제나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정교한 해결 방법을 고안해 낸 존 딕슨 카의 작품들로, 그 자신만의 작품 영역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다른 작가들에 의한 밀실 작품들이다.”

존 딕슨 카의 전기 '기적을 해명한 사나이' 표지

밀실 트릭의 대부분은 현대적 상식으로 바라볼 때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흔히 볼 수 없는 특수한 장치를 쓰거나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기법 같은 아이디어만으로는 독자에게 호응을 얻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지요. 하워드 헤이크래프트는 <오락을 위한 살인>에서 추리작가가 되려면 피해야 하는 항목을 열거한 바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밀실이었습니다: “밀실은 피하라. 오늘날 그것에 신기함과 흥미를 갖게 할 수 있는 것은 천재 밖에 없다.”

허나 얼마 전 세상을 떠난 H.R.F.키팅은 ‘밀실 트릭은 추리소설을 쓰려고 생각했던 일이 있는 작가에게는 어떤 의미에서는 궁극적인 유혹’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고전적인 작품들은 트릭의 효용성을 떠나 여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으며, 실력 있는 작가들은 간결한 트릭만으로도 독자의 의표를 찌르고 있습니다. 밀실 트릭은 모든 트릭 중에서도 가장 단순하면서도 궁극적이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여전히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요즘도 밀실을 소재로 한 작품이 자주 나오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46번째 밀실>이나 이시모치 아사미의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등 여러 작품이 번역되어 있으니 쉽게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밀실을 끝없이 추구하는(?) 아리스가와 아리스


키팅은 밀실에 대한 매력을 단 한 줄의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불가능 범죄는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해 내는 것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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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4.07 19: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제대로 된 밀실물을 써 보고 싶습니다만 밀실도 당위성이 있어야 만드는 법이니 스토리상 제대로 연결되도록 해야죠, 그런 면에서 본다면 다카기 아키미쓰의 <문신살인사건>을 보면 범인이 밀실을 만든 이유가 아주 기가 막히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참, 클레이튼 로슨의 <모자에서 튀어나온 죽음>도 빨리 국내에 소개되었으면 좋겟습니다.

  2. 카메라이언 2011.04.08 0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헤헷 전 지금 연재 중인 붉은깃발의섬~을 밀실로 범벅해 놓았다는. 밀실 넘넘 사랑해요. 딕슨 카의 밀실은 구부러진 경첩에서 졌다고 느꼈었다는. 정말 화딱지 났었어요. 못 맞춰서. 으흑흑. 나빠. ㅠ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원작 그림이 가진 열정과 자연스러움- 즉 elan(열의) -은 흉내 낼 방법이 없지.
모사품은 아무리 원작과 닮았더라도 둘 사이에는 큰 심리적 차이가 있어.
모사품에는 진지함이 결여되고 너무 완벽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 흔적이 남아 있다네.
   
- 파일로 밴스
<카나리아 살인사건> (1927) S.S. 밴 다인
 
인터넷 이용은 일상생활이 되어버린지 이미 오래로군요. 그러면서 개인이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이 많아지자 예전에는 드물었던 일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표절 문제입니다. 여러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들을 '복사 및 짜깁기'해서 학교 숙제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하네요. 이렇게 타인의 노력을 어려움 없이 가로채는 비양심적인 표절 행위는 학술 논문이나 음악, 방송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문학 부문에서도 꽤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심지어 일간지 신춘문예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을 정도니까요. 대신 인터넷의 엄청난 전파력 덕분에 빨리 들통나기도 합니다만

특히 추리소설은 작품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비슷한 트릭을 사용하기만 해도 오해를 살 여지가 있습니다. 작가 입장에서는 기발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다른 작품에 나온 비슷한 아이디어가 사용된 것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비슷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라고 해서 모조리 표절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추리소설이 표절로 의심받는 경우는 트릭이 비슷할 때, 혹은 상황이나 구성이 비슷할 때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1926)은 범인의 의외성만으로 평가하자면 역대 최고 작품 중 하나인데, 놀랍게도 그보다 9년 전 거의 비슷한 트릭을 사용한 작품이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스웨덴 해군 장교이자 소설가인 새뮤얼 아우구스트 두제가 1917년 발표한 <스미르노 박사의 일기>가 바로 그것인데, 일기 형식으로 서술된 이 작품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크리스티의 ‘세계적 명성’ 밑에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스미르노 박사의 일기


한편 엘러리 퀸은 크리스티의 작품 제목 때문에 집필하던 작품을 중단한 적도 있습니다. 제목의 표절을 피했다고나 할까요. 퀸은 서구의 전래동요 ‘마더 구즈(Mother Goose)’중에서 ‘10명의 인디언’을 제재로 삼아 <The Indian Club Mystery>라는 제목으로 집필 중이었는데, 크리스티가 먼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발표하는 바람에 도중에서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각각 죽이고 싶은 상대가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상대를 바꿔 범행을 저지른다’는 아이디어는 누구든 한번쯤 상상해 볼 수 있었는지 여러 작가가 사용했습니다. <태양은 가득히>로 유명한 여성 작가 패트리셔 하이스미스가 데뷔작 <낯선 승객>(1950)에서 사용한 이 아이디어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던 니콜라스 블레이크의 <A Penknife in My Heart>(1958)에서 다시 나왔습니다. 비슷한 소재라는 것을 알게 된 블레이크는 하이스미스에게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등장인물의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훗날 프레드릭 브라운의 <교환 살인>(1962), 로렌스 블록의 단편 <핸드볼 코트에서 만난 이방인>(이 작품은 <낯선 승객>과 제목마저 흡사하군요)등이 나왔지만 이미 보편화된 소재라 별다른 시비가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TV 드라마 <CSI>에서도 이런 에피소드를 다루기도 했지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낯선 승객'


일본 추리소설계의 선구자인 에도가와 란포도 몇 차례 표절 시비에 휩쓸린 일이 있습니다. 그의 데뷔작이 된 단편 <2전 동화>(1923)의 원고를 읽은 잡지사 편집진은 ‘초보 작가치고는 너무 뛰어난 작품’이라 외국 작품의 아이디어를 베낀 것이 아닌지 잠시 의심했다고 합니다. 물론 소재가 일본어 암호였기 때문에 순수 창작물임을 인정받고 오히려 잡지사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행운을 얻게 되었지요. 그러나 란포의 이름이 유명해진 뒤, 그의 단편 <화승총(火繩銃)>이 멜빌 데이비슨 포스트의 밀실을 다룬 단편 <둠도프 사건>(1911)과 유사한 트릭을 사용한 것이 알려지며 약간 표절 시비가 일었습니다. 그러나 란포의 해명에 의하면 <화승총>은 대학 재학 중이던 1915년 잡지에 투고했으나 채택되지 않은 사실상 그의 처녀작으로, 아이디어 자체는 그의 창작이 아니라 미국의 사건 실화집에서 얻은 것임을 밝히며 표절 시비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런 모양의 화승총이었을까요?


트릭의 유사성은 판정이 매우 미묘해서 심사 기준에 의해 희비가 엇갈리기도 합니다. 경마를 소재로 한 <짙은 갈색 파스텔(焦茶色のパステル)>로 28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받은 오카지마 후타리는 1년 전 다른 작품으로 응모해 최종심사까지 올라갔다가 아쉽게 탈락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트릭의 유사성 때문이었지요. 1년 전의 심사위원들은 ‘마권(馬券)을 이용해 훔친 말의 몸값을 받으려 한다’는 트릭이 여류 작가 나츠키 시즈코의 단편 <5천만 엔짜리 남자>에서 쓰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독창성이 결여되었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7년 후 유사한 트릭을 사용한 아베 사토루의 <사라진 항적(消された航跡)>은 요코미조 세이시 상 당선작으로 결정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확실히 줄을 잘 서야 세상살이도 편해지겠군요.

트릭의 유사성만큼은 아니지만 상황이나 플롯이 비슷한 경우도 드물지는 않은 편입니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나이가 자신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동료나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증인들을 찾아 나서지만 증인들은 사라지거나 살해되며 차츰 집행 날짜가 다가온다…

음, 언젠가 읽은 것 같다고 기억하실 분도 계실 것 같군요. 이것은 서스펜스의 거장 윌리엄 아이리쉬의 대표작 <환상의 여인>과 조너던 라티머의 <처형 6일 전> 등 두 작품의 골격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줄거리만 소개해 놓으면 뭔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시겠죠. 아무래도 훨씬 유명한 아이리쉬의 작품을 라티머가 베껴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라티머의 작품이 무려 7년이나 앞서 발표한 것입니다. 물론 이 두 작품은 소재만 비슷할 뿐 내용에서는 큰 차이가 있고 해결 방식도 각각 독창적이라서 읽어보신다면 표절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으실 겁니다.

영화 '환상의 여인' 포스터


표절로 보기 애매한 상황이 또 있군요. 자기 작품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이죠. 코난 도일은 1924년 단편 <세 사람의 가리데브>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30여 년 전에 발표했던 <붉은 머리 클럽>(1891)과 <증권 중개인>(1893)을 섞어 놓은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렇지만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작품을 변형해서 쓴 작품이기 때문에 홈즈 연구자들의 불만을 제외하고는 별 논란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 힘이 떨어진 도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최근(이라 해도 이미 꽤 되었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표절 이야기로는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의 트릭 만화 <김전일>에서 사용된 것이 기억나는군요. 사실 이건 표절이라기보다 트릭을 그냥 갖다 썼기 때문에 주제에서 핀트가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시마다 소지는 이 사건에 대해 특별히 소송을 걸거나 하는 일의 행동을 하진 않았지만, “유례가 없는 트릭이라고 자부하고 있어, 트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영상화등의 2차사용은 지금까지 거절해 왔다. 때문에 트릭을 유용하는 텔레비전 기획은 절대로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김전일>시리즈의 이 에피소드는 원작만화로는 볼 수 있지만(트릭에 관해서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TV 드라마로 제작된 것은 비디오 등에서 빠지게 되어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점성술 살인사건>은 워낙 잘 알려진 작품이었기 때문에 만화나 드라마 등에서 시마다 소지의 허락을 당연히 받은 것으로 알고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믿기 어려운 소문도 전해지긴 합니다.

'점성술 살인사건' 도용을 다룬 기사


표절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는 모든 작품에 대해 다 알면 좋겠지만, 전 세계의 추리소설을 모두 읽기는커녕 구할 수도 없을 겁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요즘 나온 새로운 트릭이라고 해 봐야 사실은 과거의 트릭을 약간 뒤틀어 변형한 정도에 불과한 만큼 ‘기발한 아이디어를 이야기의 핵심으로 삼지 않는 것이 좋다’는 영국 작가 H.R.F.키팅의 충고는 아이디어를 짜 내느라 고심하는 작가가 머릿속에 새겨두어야 할 만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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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2.10 0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표절 시비 하니 절대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제가 2008년 KBS <이야기 발전소>에 한 화가가 죽은 뒤 유령이 되어 다른 화가의 몸에 빙의하여 그림을 계속 그려 나간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지어서 나갔고 좋은 점수를 낸 적이 있는데 그 날 시청자 게시판에 그 이야기가 MBC의 모 드라마와 내용이 거의 같다는 표절 의혹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드라마에 대하여 전혀 몰랐거든요. 다행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아찔한 경험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그 드라마를 보고 표절하여 이야기를 냈다면 그건 제 양심이 아니라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2. 카메라이언 2011.02.14 05: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헉 매회 요즘 제가 읽으려고 하거나, 읽었거나, 읽다 중단한 책들 이야기가 나와서 뜨끔뜨끔 한다니깐요. 'ㅂ'... ...;;;;; 이번엔 환상의 여인에서 흠칫. 아는 언니께 읽겠다고 4 개월 전에 얻어놓고 여전히 책장에 꽂아놓은 채 방치. (;;;) 이번에야 말로 홈스 패스티쉬 모음집 베이커가의 살인 끝까지 읽고 나면 읽어야겠어요. 'ㅂ';;; 카나리아 살인사건도 옆에 쌓아놓고 모른 척했는데 어서 읽어야겠 ;;;

    그나저나 베이커 가의 살인 책 보고 한 분께서 저도 써보라고 해서 함 써보려고요. ㅋㅋㅋ 잼날 것 같아요. ]서울에 사는 셜록홈스가 아니라 설록수(설록차??) 이야기라도? 탐정 설록수가 설록차 창립자를 살인자로 몰릴 위기에서 구해줘서 새로 나오는 생수 이름을 설록수로 지었다는 결론? ㅋㅋㅋ<--기발한 아이디어를 이야기의 핵심으로 삼지 말라는 이야기 방금 전에 보고서 이런다 ;;;;; 표절시비나 조심해야 ;;;;; 쿨럭 ;;;

  3. 허니문 차일드 2011.02.15 1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얼마 전 문학동네에서 펴낸 <편집된 죽음>이란 책을 봤습니다. 오래된 친구가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콩쿠르상 수상이 결정되던 날 복수의 수레바퀴가 돌아간다는... (이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그 복수의 방법이 바로 표절시비입니다. 그 책의 원제가 바로 <별쇄본>이죠. 작가 하나 묻어버리는 게 일도 아니더군요. 내용 중에 바로 표절에 관한 의식이 있었느냐, 아니면 정신병에 의한 무의식 표절이냐는 내용이 나옵니다. 음악도 기본 몇 가닥 멜로다가 동일하면 표절판정이 나오는데 무의식 중에 나오는 표절도 무시 못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초이님도 대단하시네요. 이 글 한 편 쓰기 위해 얼마나 공부를 하셨을까요. ^^ 많이 보고 배우고 갑니다.


추리소설가들과 범죄자들의 꿈

대부분의 살인자들은 범죄를 너무 완벽하게 저지르려는 실수를 범한다.
<The Willow Pattern>(1965)  -  로베르트 반 훌릭

 

추리소설가와 실제 범죄자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양 쪽 모두 범죄로 수익을 올린다는 점(물론 한쪽은 머릿속으로 구상해 글로 옮기는데 그치고, 다른 한쪽은 실제로 범죄를 저지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과 완전범죄(작가는 독자에 대해서)를 실현하고 싶어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완전범죄란 과연 무엇일까요.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치밀한 계획과 실행에 의하여, 범인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거나 범죄를 입증할 수 없는 범죄

한 발 더 나아가볼까요.

일본의 추리소설가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살인산행>(1974)에서 완전범죄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종류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1. 심신 상실(心身喪失)을 이용한 범죄처럼 사회 상식적인 범죄로 보이는 행위가 있는데 범인도 증거도 갖추고 있으면서 법률적으로는 범죄에 대한 책임 추궁도 면하는 것.
2. 범행의 흔적이 명백하고 범인도 분명한데 유죄를 인정할 만큼 증거가 없는 것.
3. 미궁에 빠진 사건처럼 범행의 흔적이 있으면서 범인을 알 수 없는 것.
4. 범죄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흔적,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에 범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는 것.

하지만 작가는 범죄자와 다릅니다. 작가 마음대로 써서 범인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잡지도 못한 채 끝난다… 하기는 쉽겠지만, 그렇게 무능한 수사관이 나오는 작품이라면 틀림없이 독자에게 외면당할 겁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대체로 정의를 추구하는 탐정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지능적인 범죄자가 저지른 사건이라도 반드시 해결되고 맙니다. 결국 완전범죄가 이루어지는 작품은 드문 편이고 누구나 납득할 만큼 강한 설득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오히려 강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죠.

작품 속에서 범인이 체포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합니다. 우선 탐정이 사건을 다 해결하고도 피해자가 더 악당이었다거나 가해자에게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혹은 범인을 밝히게 되면 애꿎은 사람에게 피해가 간다거나 할 때 눈감아 주는 경우입니다. 물론 공직자인 경찰이라면 사건을 그렇게 쉽사리 처리할 수는 없지만, 사립탐정이나 아마추어 탐정들은 가끔 그런 선심을 베풀 때가 있습니다(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이런 사건은 공식적으로 미해결 사건으로는 남겠지만 수수께끼는 풀렸으니 완전범죄라고 하기엔 뭔가 미흡한 점이 있지요.

다른 한 갈래는 악당이 주인공일 경우입니다. 악당 주인공이라면, 추리소설 애호가들은 모리스 르블랑이 창조한 프랑스의 괴도 아르센 뤼팽을 쉽게 연상하시겠지요? 뤼팽은 범죄를 예고하고 경찰을 농락하면서 그 자리를 유유자적하게 빠져나갑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는 단지 범인을 못 잡았을 뿐이지 누구의 짓인지는 뻔히 알기 때문에 이 역시 완전범죄의 범주에 넣기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가지는 작가가 조건에 맞는 완전범죄를 완성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잘 알려진 작품들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여성 작가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의 <재능 있는 리플리 씨>는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톰 리플리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시리즈의 첫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알랭 들롱 주연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원작으로, 가난한 미국 청년 리플리는 친구 디키의 부유한 생활을 부러워한 끝에 그를 살해한 후 대신 디키 행세를 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용모를 똑같이 할 수는 없지만, 머리 색깔을 바꾸는 것을 시작으로 글씨체, 행동, 그리고 사고방식까지 죽은 친구와 닮기 위해 노력하고, 또 눈치 챌만한 사람들은 죽이기까지 하는 강경한 행동까지 벌인 끝에 합법적으로 친구의 재산을 가로채는데 성공합니다.

나는 리플리인가 누구인가 - 영화 '태양은 가득히'


미국 작가 스콧 스미스가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발표한 데뷔작 <심플 플랜>(1993)은 전혀 사전 계획이 없었던 상태에서 범죄가 벌어졌다는 점에서 약간 성격을 달리 합니다.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던 젊은 회계직원 행크는 형, 그리고 형의 친구와 함께 사냥에 나섰다가 추락한 비행기를 발견하는데, 그 안에는 4백만 달러가 넘는 거액이 실려 있던 것입니다. 엄청난 돈 앞에서는 누구나 장님이 되곤 하죠. 하물며 경제적 여유가 그다지 없던 사람들이었다면 더욱 이성을 잃을 것입니다. 아무리 똑같이 나누기로 했어도 엄청난 액수의 돈은 서로를 불신하게 만들고, 급기야는 커다란 비극을 몰고 옵니다.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국 완전범죄가 되어버리긴 합니다만, 그들이 얻은 것은….

진정 돈 앞에 장사 없나 - 영화 '심플 플랜'


스위스의 역사학자 출신 작가인 장 자크 피슈테르의 첫 번째 소설 <편집된 죽음>은 앞서 소개한 작품들과는 달리 끔찍한 폭력도 없고 거액의 돈이 오락가락하는 것도 아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가장 뛰어난 완전범죄 작품으로서 꼽을 만합니다. 주인공 에드워드 램은 친구인 니콜라 파브리가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 상을 받으면서 행운의 절정에 오르는 순간 오래 전부터 계획해 오던 보복을 실행으로 옮깁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에드워드를 여러 차례 절망 속에 빠뜨렸던 니콜라가 자신의 애인마저 죽음으로 몰았다는 것을 알게 된 때부터 계획된 것이었지요. 이 작품을 최고의 완전범죄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복수극을 벌인 장본인 에드워드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심지어는 피해자 니콜라마저 그것이 복수였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편집된 죽음'


<슌킨쇼(春琴抄)>, <세설(細雪)>등의 작품을 남긴 일본의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1886∼1965)는 추리소설에도 관심이 많아 작품을 직접 쓰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1920년 발표한 단편 <도상(途上)>은 에도가와 란포가 감탄할 정도의 완전범죄를 다루었습니다. 한 샐러리맨이 아내를 죽이기 위해 택한 방법은 직접적인 폭력 등을 행사하는 대신 은근히 위험한 상황을 거듭 만든다는 것으로, 목적을 달성한 후 만약 의심을 받더라도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완전범죄가 이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란포는 이런 방법을 ‘프로버빌리티(probability)의 범죄’, 즉 확률의 범죄라고 이름 붙였으며, 얼마 후에는 그 자신도 이런 트릭을 이용한 단편 <붉은 방>(1925)을 발표했습니다.

최근 접한 작품 중에서 이쪽 방면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는 우타노 쇼고의 단편집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2005)를 들고 싶습니다. 특히 작가의 본격 추리소설에 대한 (반어법적인) 애정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여기에 수록된 세 편의 단편은 모두 밀실을 다루고 있는데, 그중 두 작품은 훌륭한 완전범죄 작품으로도 볼 만합니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그의 대표작 <나비부인 살인사건>(1946)에서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재미있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사회가 진보함에 따라 인명을 존중하게 되며, 그럴수록 살인에 대한 제재가 엄격해진다. 그러한 제재를 피하기 위해 범인들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게 되기 때문에, 완전범죄를 노린 교묘한 계획적 범죄가 발생할수록 사회는 진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회 발전을 위해서’ 지능적 범죄자가 늘어나길 바라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 아리송하긴 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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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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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갈매 2010.11.26 16: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편집된 죽음> 그런 내용이었군요. ㅠ.ㅠ 책이 어딘가 굴러다녔었는데, 알아보질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진듯.. 영화도 있었네요~ 담에 꼭 봐야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썼다는 소설도 살펴 봐야겠네요.
    우타노 쇼고는 반어/반전 트릭을 정말 잘 구사하나봐요~ <벚꽃지는~~ >만 봤는데, 결말에 가서 화들짝 놀랐었다니까요..

    읽어둘 추리소설 리스트에 올릴 작품을 새롭게 알았네요!

  2. 카메라이언 2010.11.27 18: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맞다. 편집된 죽음 나왔을 때부터 읽는다 읽는다 해놓고 아직도... -_- 영화도 소설도 봐야겠습니다. 2 그나저나 우타노 쇼고가 요즘 인기몰이가 대단하네요. 그리고 명탐정이~는 알라딘 올해의 책 후보에도 올랐던데.

    • 추리닝4 2010.11.28 14: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 본격물들이 잘 팔리는 것 같아요. <편집된 죽음>은 예전에 <표절>이란 제목으로 나왔었는데 확실히 새책이 제목도 편집도 깔끔하더라는. 두껍지 않아서 좋죠^^;;

  3. 허니문 차일드 2010.12.09 19: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편집된 죽음 메모했습니다. 심플 플랜은 책으로 무지 잼나게 봤었는데, 정말 돈 앞에서는 장사가 없더군요. 갈수록 눈덩이처럼 사건은 커지고... 마츠모토 세이초는 글 쓰기 전에 관련 취재를 정말 열심히 하는 작가 중 한 명이더군요. 오죽하면 편집자에게까지도 부탁할까요. 그런 작품은 읽고 나면 뭔가 강한 울림이 남는 것 같습니다.

  4. 이프리드 2011.05.14 09: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멋진 포스트를 읽고
    '우와~ 최고다~ 근데 왜 아를레 작품이 빠졌지?'
    하는 마음에 글을 써봅니다~
    아직 본격 개장^?^은 안 했지만 준비 중인
    제 블로그(http://blog.naver.com/hifreed)와
    하우미에도 올려봅니다~

    -----------------------------------------

    어린 시절 읽었던 가장 충격적이었던 완전범죄 소설은
    여성 작가 카트린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였습니다...
    완전범죄엔 성공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에 의해
    범인이 잡히게 되는 <눈에는 눈을>도 이 작가의 작품이죠

    란포가 말한 '프로버빌리티 범죄'가 구현되는 작품으로 책 후기에서도 언급되는
    제 생각에는 가장 비애가 깊게 배인 심리 서스펜스 미스터리의 명작
    <여자 살인 이야기>(아일즈 또는 버클리로 불리는 대작가의 작품이죠)에서도
    습관적으로 완전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주인공이 그 희생물이 되어가는 과정이
    섬뜩하고도 슬프게 그려지니 이 또한 완전범죄 소설이라 불러야겠죠

    (완전범죄를 그럴 듯하게 계획한 주인공이 우연에 의해 오히려 자신의 파멸을 부르고
    그 결과가 완전범죄로 되어 다른 사람이 이득을 보는 독특한 추리단편['너기 바'(사이먼 브레트)]이나
    희생자를 절묘하게 유인하는 심리트릭과 함께, 공범의 협력에 의해 완전범죄가 확고히 수립되는
    절묘한 추리단편['좋은 죽음이 되시기를!'(안토니아 프레이저)] 등도 있고
    완전범죄를 시도하지만 어설픈 데가 많아서 오히려 피해자에게 역습당하는 <백모살인사건>이나
    완전범죄로 보이는 범죄의 헛점을 차근차근 깨나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놀라움을
    지극히 현실적인 수사과정으로 보여주는 크로프츠의 소설들도 생각납니다)

    단편의 귀재 로이 비커즈의 <미궁과 사건부>는 완전범죄를 성공시킨 자들이
    어이없는 우연이나 미궁과 형사들의 마구잡이식 추리에 의해 그 파탄을 뒤늦게 드러내는 과정이
    독특하고 재미있게 그려지는데, 이 역시 완전범죄 소설인 동시에 완전범죄의 불가능성을
    권선징악적으로(^^;;) 역설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직접 살인하지 않고,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 나오는 이아고처럼
    다른 사람의 심리를 조종해 간접살인을 창출하는 게 가장 섬뜩한 완전범죄일지도 모릅니다
    증거가 없으니, 그 위대한 탐정 포와로조차도 결국 <커튼>에서
    이아고같이 완전범죄를 계속 저지르는 범죄자를 스스로 죽이고
    자신도 죽어야 하는 비극이자 한계를 맞이하죠(드루리 레인의 죽음도 생각나지만 좀 국면이 다르죠)

    최근 끝난 드라마 <싸인>에서 범죄자인 권력층 여성은 사실 허점도 좀 있는 범죄를 저지르지만
    권력의 힘으로 결국 자신의 범죄를 입증할 수 없는 완전범죄로 만들어버리더군요;;
    그래서 한국의 스카페타 또는 CSI나 본즈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윤지훈도
    결국 포와로 비슷하게 자신의 죽음으로 함정을 파서야 범인을 잡을 수 있으니,
    완전범죄를 다루는 방법도 참 다양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작품들을 보면 '미스터리' 작가로도 볼 수 있지만
    켄지-제나로 시리즈만 놓고 보면 주인공 탐정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이
    절묘한 추리보다는 액션 돌파와 사회문제 고발의 알레고리적 접근으로 주로 이뤄지니
    엄밀한 의미에선 '스릴러'
    (캐릭터의 비정함, 액션, 단문 등에선 미스터리의 한 계열인 하드보일드물과 어느 정도 겹치고
    희생자의 심리를 잘 그리는 점에선 역시 미스터리의 한 계열인 서스펜스물과 겹치며
    분위기나 세계관에선 누아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추리보다는 외적 긴장감[스릴] 조정-유지와 치열한 추격플롯 및
    독자에게 쾌감을 지속 공급하기 위한 다양한 액션/전투장면 제공 그리고
    희생자의 처지로 몰리는 주인공들이 오히려
    약자의 힘겨운 위기극복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정통 서스펜스물보다는
    훨씬 강력한 수단과 행동 및 조력자를 활용해 위기를 부순다는 점에선
    스릴러 장르로 봐야겠죠)
    작가로 보는 게 더 정확할 데니스 루헤인의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도 범인은 결국 어느 정도 완전범죄에 가까운 범죄를 성공시키고 살아남는데
    (물론 주인공의 엄포에 나름 내면적 공포를 겪게 되긴 하지만)
    강력한 악과 맞설수록 스릴이 더 커지는 장르인 스릴러에서는
    완전범죄 전문가나 모든 범죄를 완전범죄화시킬 수 있는 권력이 있는 조직이
    퍼즐미스터리나 하드보일드미스터리보다는 더 쉽게 등장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스터리 장르보다 스릴러 장르에 더 가깝다고 보는
    스파이물에서도, 존 르 카레나 로버트 리텔 등의 작품에서는
    조직이 저지르는 그 수많은 범죄들에 의해 사람이 죽거나 폐인이 되어도
    그 범죄들의 책임자가 벌을 받는 경우는 드무니,
    이런 '결과적 완전범죄' 내지 '사회적 완전범죄'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탐정들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스릴러의 불가능없다형 액션전사나 그래픽 노블의 슈퍼히어로들이 아니고서야...
    (아마도 결과적 완전범죄의 실현 가능성과 그 결과의 무시무시함을
    미스터리 소설이나 스릴러 소설이 아닌 다른 장르에서 가장 확실히 보여준 작품은
    앨런 무어의 그래픽 노블 <왓치멘>이 아닐까요...)

    끝으로, 최근 한국 장르소설 중에서 최근 속간되고 있는 작품 중 하나인 <마검왕>
    -나민채 작가의 장르퓨전 소설(무협, 판타지, 현대액션물 등이 섞여 있더군요)-에선
    군 참모 출신으로 풍부한 인맥과 정보력을 가지고 권력층이나 갱단 등과의 협상을 전문으로 하는
    21세기 미국 현실에서 보면 충분히 있을 법한 현실적 탐정이 나오던데
    결국 주인공은 탐정에게도 도움받지 못하고 갱단의 공격에 홀로 맞서야 하게 됩니다
    아마 어떤 범죄든 완전범죄(라기보다는 죄의 결과에 책임지지 않을 수 있는 권력으로 범죄 덮기)
    화할 수 있는 이들이 존재하는 현실에선, 아마 이런 현실적 탐정들도 꽤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계 각지를 돌며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국내외 분쟁 해결을 교섭하는
    '분쟁교섭인'[추리만화 <Q.E.D>의 신비한 여성 조연 어니 클레이너의 새 직업]이나
    영화 <네고시에이터>의 전문 협상인도 생각나고, 만화 <마스터 키튼>의 주인공은 탐정 역이긴 하지만
    보험사의 민간조사원도 하고 간혹 분쟁교섭인 역할도 하니까요)




이름 뒤에 숨어있는 비밀


"난 필명이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 웨스트레이크가 한 말을 결코 잊을 수가 없어요. 그는, 맑은 날에는 그가 글을 썼고, 날씨가 궂은 날에는 스타크가 일을 떠맡았다고 했습니다." 
                                     -<다크 하프 The Dark Half>(1989), 스티븐 킹

자기의 본래 모습조차 잊어버렸다고 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괴도 아르센 뤼팽은 각각의 변장에 어울리는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마 열 개는 충분히 넘은 것 같지만 스무 개까지는 안 되는 것 같네요. 뭐,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인물이니까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마는 너무 많으면 작가인 모리스 르블랑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테지요.

그런데 영국의 추리소설가 존 크리시(John Creasey)는 비록 얼굴 생김새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는 없었을망정 이름의 숫자는 뤼팽을 압도합니다. 추리소설을 쓸 때는 존 크리시를 비롯해 고든 애쉬, 패트릭 길, J.J.매릭, 제레미 요크 등을 사용했으며 웨스턴 소설(서부극 소설입니다)을 쓸 때는 텍스 라일리, 지미 와일드, 켄 레인저 등, 그리고 로맨스 소설을 쓸 때는 마가렛 쿡, 엘리제 퍼캠프스 등 여성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작품 표지에 올라간 이름은 무려 28개,그리고 6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존 크리시 - 스물여덟개의 이름을 가진 사나이


실제 이름 대신 쓰는 가짜 이름은 범죄자들이 사용하면 가명(假名), 연예인들이 사용하면 예명(藝名), 작가들이 사용하면 필명(筆名) 등 다양하게 일컬어지는데(그러고 보니 이름 자체에도 다양한 이름이 많군요), 작가들이 필명을 쓰는 이유는 본명이 추리소설에 별로 어울리지 않게 평범하다거나, 유명인의 이름과 같거나 비슷하다던가, 발음이 어렵다던가, 혹은 이름을 숨기고 싶다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무명작가인 케네스 밀러(Kenneth Millar)는 추리소설을 쓰는 아내 마가렛 밀러(Margaret Millar)보다 늦게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네 권의 작품을 발표한 후 이미 유명했던 아내의 작품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존 로스 맥도널드(John Ross Macdonald)라는 필명을 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미 자리를 잡은 유명 추리작가 존 D.맥도널드(John D.MacDonald)와 혼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결국 그가 선택한 이름은 로스 맥도널드(Ross Macdonald)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그는 하드보일드의 거장이 되었고, 지금은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요. 역시 사람의 앞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영국의 계관 시인이며 옥스포드 대학 교수였던 세실 데이 루이스(Cecil Day-Lewis)는 낡은 지붕의 수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즐겨 읽던 추리소설을 직접 쓰기로 했는데, 본명으로 글을 쓰기가 부담스러워 니콜라스 블레이크(Nicholas Blake)라는 필명을 사용했습니다. 처녀작인 <증거의 문제(A Question of Proof)>(1935)가 성공하면서 작가가 누구인지 금방 밝혀졌으나, 평생 본명으로는 추리소설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스티븐 킹은 웨스트레이크의 작품 이미지에서 착상해 <다크 하프(The Dark Half)>(1989)를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소설가 새드 보먼트(Thad Beaumont)는 조지 스타크(George Stark)라는 이름으로 폭력적인 범죄소설을 쓰고 있는데, 이 이름은 바로 도널드 웨스트레이크(Donald Westlake)의 필명 리처드 스타크(Richard Stark)에서 따온 것입니다. 웨스트레이크는 본명으로 <뉴욕을 털어라 (The Hot Rock)>(1970)와 같은 밝고 유쾌한 분위기의 작품을 쓰지만 스타크란 필명으로는 <인간 사냥 (The Hunter, 리 마빈이 주연한 <포인트 블랭크 Point Blank>, 멜 깁슨 주연의 <페이백 Payback> 등 두 차례나 영화로 제작된 바 있습니다)>(1962)과 같은 어둡고 폭력적인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웨스트레이크의 필명은 스타크 이외에도 앨런 마셜, 터커 코우 등 15개가 더 있습니다.

오늘은 맑은 날인가요 궂은 날인가요 -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두 명이 함께 작품을 쓸 때면 대개 ‘누구와 누구’라는 식으로 쓰지만, 필명 하나를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미국의 추리작가 엘러리 퀸이 떠오르네요. 작품 속 탐정의 이름이자 작가의 이름이기도 한 엘러리 퀸은 사촌 형제 사이인 프레드릭 더네이(Frederic Dannay)와 맨프레드 리(Manfred B. Lee)의 합작 필명이란 것은 추리소설 팬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요. 하지만 ‘더네이’나 ‘리’도 본명이 아닌데, 그들의 원래 이름은 대니얼 네이던(Daniel Nathan)과 맨포드 레포프스키(Manford Lepofsky)입니다. <로마 모자의 수수께끼>로 데뷔한 그들은 바나비 로스(Barnaby Ross)라는 필명으로도 <Y의 비극>등의 걸작을 발표한 뒤, 이름이 밝혀지기 전까지 퀸과 로스로 각각 행세하며 장난기 넘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컴퓨터의 덫(コンピュ-タの熱い罠)>(1986)을 쓴 오카지마 후타리(岡嶋二人)는 이름에서부터 ‘두 사람(二人)’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의미 그대로 도쿠야마 준이치(德山諄一)와 이노우에 이즈미(井上泉) 두 사람의 합작 필명입니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은 성(性)을 숨기기 위해 필명을 쓴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처럼 여겨지지만 20세기에만 해도 여성 작가들은 남성 작가들의 전유물인 미스터리를 발표하기 위해서는 남자 이름을 써야만 했습니다. 영국 여성작가 루시 비어트리스 맬리슨(Lucy Beatrice Malleson)은 앤소니 길버트(Anthony Gilbert), J.키머니 키스(J.Kimeny Keith)라는 필명으로, 미국 시카고 출신의 여성작가 조지애너 앤 랜돌프(Georgiana Ann Randolph)는 크레이그 라이스(Craig Rice), 마이클 배닝(Michael Venning)이라는 남성적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했지요.

필명은 아니지만 영국 작가 필리스 도로시 제임스(Phyllis Dorothy James)는 여성이라는 선입견을 벗어나기 위해 약자를 써서 P.D.제임스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우리나라에 번역된 어느 작품에서는 P.D.를 Ph.D로 오해했는지 ‘제임스 박사’라고 소개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의 문학평론가이자 야구광인 오오이 히로스케(大井廣介)는 타지마 리마코(田島莉茉子)라는 이름으로 <야구 살인사건(野球殺人事件)>이라는 작품을 내 놓았습니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일본에서는 여성 작가가 드물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1930년대 활약한 미국 작가 풀턴 아워즐러(Fulton Oursler, 1893-1952)는 추리소설을 쓸 때는 이름을 앤소니 애봇(Anthony Abbot)이라는 필명으로 바꾸고, 작품은 모두 ‘about’으로 시작하는 제목을 지었습니다. 작가의 이름이나 작품 제목이 모두 ‘A’로 시작되기 때문에 도서관의 10진 분류법에 의해 정리하면 항상 목록 앞부분에 오도록 한 것이지요. 이와는 좀 다르지만, 본명이 재니스 영 브룩스(Janice Young Brooks)인 미국의 여성작가 질 처칠(Jill Churchill)은 알파벳 순으로 진열된 서점 책꽂이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근처에 자리 잡기 위한 필명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필명은 어떤 방법으로 지을까요?

존 크리시가 기디언 경감 시리즈를 발표할 때 썼던 ‘J.J.매릭(J.J.Maric)’이란 필명은 자신의 이름 존(‘J’ohn), 부인 진(‘J’ean), 두 아들 마틴(‘Mar’tin)과 리처드(‘Ric’hard)등 가족 이름을 합쳐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신데렐라의 함정(Piège pour Cendrillon)>(1962), <긴 일요일의 약혼식(Un long dimanche de fiançailles)>(1991)등의 작품이 소개된 프랑스 작가 세바스띠앙 자프리조(Sebastien Japrisot)의 본명은 장 밥티스트 로시(Jean-Baptiste Rossi)인데, 그는 자신의 이름 철자 순서를 바꿔(애너그램 anagram이라고도 합니다) 새 이름을 만들어 냈습니다.  

국내 추리작가 중 가장 독특한 필명을 가진 분을 꼽아보자면 바로 원로 추리작가인 노원 선생님입니다. 원래 언노운(Unknown: '알려지지 않은','알 수 없는')을 한글로 차용한 안노운(安老雲)을 필명으로 사용하려 했다가 더 짧고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노원(No One: 한자명은 盧媛→盧遠→魯元으로 세 차례 바뀝니다)’으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단편 <미스터리 클럽의 살인>에는 안노운 경감이 등장해 한 가닥 흔적을 남기고 있지요.

'안노운'이 되실 뻔한 노 원 선생님


일본 추리문학계의 거두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의 본명은 히라이 타로(平井太郞)인데, 에드거 앨런 포우의 이름과 흡사하게 들리는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추리소설의 원조인 포우의 이름을 빌린 작가답게 그는 일본 추리문학계의 선구자로서 추리작가협회의 조직 및 위상 확립에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요즘 눈에 띄는 독특한 필명의 작가는 <불야성(不夜城)>(1996)으로 알려진 하세 세이슈(馳星周)입니다. 그의 필명은 국내 독자들에게 일본식 발음으로는 별 의미가 없겠지만, 한자를 거꾸로 읽어보면 옳커니 할 독자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세 세이슈는 홍콩 영화의 팬인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주성치(周星馳)의 이름을 거꾸로 해서 자기의 필명으로 삼은 것이지요. 코믹한 배우의 이름을 빌리긴 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웃음기라고는 거의 없이 어둡고 진지합니다.

성공하려면 이분에게 이름을 얻어가야... 시마다 소지


시마다 소지(島田荘司)는 <점성술 살인사건(占星術殺人事件)>(1981)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신본격(新本格)작가들의 대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신인 작가들을 추천하고 독려했습니다. <십각관의 살인사건>을 쓴 아야츠지 유키토(綾辻行人), <벚꽃 피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의 작가 우타노 쇼고(歌野晶午), <살육에 이르는 병>의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我孫子武丸),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의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法月綸太郞)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시마다 소지는 점성술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성명학(姓名學)에도 일가견이 있어 이들의 필명을 다 지어주었다고 하는군요.

그나저나 작가로서 성공하려면 작품도 중요하지만 이름을 잘 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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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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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뎅뎅 2010.10.28 16: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저도 주성치 왕팬인데. 필명은 하나도 없는 저는 한때 별명이 한 스무개남짓 됐던 적도 있습니다. 실없는 오라버니가 저를 닥치는대로 부르다가 그만... 그때 다 적어나 둘 걸, 지금은 대여섯개 밖에 생각이 안나요.

    • 추리닝4 2010.10.29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명성 자자한 그 오라버니 어릴때부터 언어유희를 꽤 즐기셨군. 합류걸님^^; .. 다른 얘기지만 나는 네이버에서 '최코치'란 닉네임을 쓰는데 많은 사람들이 헬스장 관련 일 하는 사람인 줄 알더라는 ㅠㅠ

  2. 갈매 2010.10.28 17: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마다 소지!
    재밌네요. 우타노 쇼고며 아야츠지 유키토의 필명을 지어줬다니. 이들의 이름이 다 필명이었던 거군요.
    저도 좋은 필명 하나 얻으면 글이, 팍팍 써지려나??

  3. 카메라이언 2010.10.30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할아버지의 소설 '뉴욕을 털어라'와 '페이백'은 와앗, 정말 거리가 있는데요! '뉴욕을 털어라'는 정말 가볍던데! 새삼 놀랍니다. 아아, 그나저나 시마다 소지 넘넘 좋아하는데 저렇게 생기셨구나. 사진은 처음 봤어요. 와 멋져멋져 꺅꺅!

  4. 이야기꾼 2010.10.30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필명하면 <류삼> 씨라는..ㅎㅎ
    그나저나 요새 류삼씨는 뭐하시나...

  5. 붕붕 2010.11.05 1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류삼', '삼류'...
    아 그렇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6. 필론 2010.12.08 17: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Bill Bass와 John Jefferson이 한팀으로 Jefferson Bass란 이름으로 Body Farm 시리즈를 내는것이나, 요즘 화제가 되는 드라마 캐슬의 캐릭터가 실제 작가처럼 책을 낸 Richard Castle의 경우도 특이한 경우인것 같습니다.

    • 추리닝4 2010.12.09 14: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리처드 캐슬 이름으로 출간하는 아이디어는 괜찮은 것 같아요..극중에서 함께 포커 치던 제임스 패터슨 옹이 생각납니당 ㅋㅋ 필론님 블로그와 링크 완료^^

    • 필론 2010.12.09 14: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임스 패터슨이 (시즌 2에서는 마이클 코넬리가) 카메오로 등장한다는 것도 드라마 캐슬의 매력인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