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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9.29 테마로 읽는 미스터리 <1>알리바이 (6)

그 시각, 그 장소 '존재의 증명'

                                  

                                                                          잘못된 알리바이는 없는 것만 못하다. 
                                               -<The Fatal Trip>(1977), 마이클 언더우드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라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쁜 생각 없이 자신이나 남을 위해 거짓말을 한 번쯤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학생 시절 대리 출석을 해 주거나 친구의 부탁으로 ‘전날 밤 함께 야근을 했다’는 거짓말 등 부모나 배우자, 상사에게 이른바 알리바이(alibi)를 만들어 주는 일은 거의 모든 사람이 한 번쯤은 해 보았으리라고 생각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네요. 심각한 범죄도 아니고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니 그다지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으니까요. 라틴어 ‘alius(다른)’와 ‘ibi(장소에)’의 합성어인 알리바이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공통의 용어가 되어 일상적으로 종종 사용하고 있습니다. 

추리소설에서는 무고한 사람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것보다 지능적인 범죄자의 알리바이 분쇄를 더 많이 다루는데, 가짜 알리바이는 밀실이나 마찬가지로 일종의 ‘불가능 범죄’를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쉽게 만들기도 힘들뿐더러 훌륭하게 짜 낸다면 독자와 당당하게 머리싸움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범죄현장에 없었음을 위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트릭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단순하게 네 가지 정도로 나눠 보았습니다.
 
1. 교통수단을 치밀하게 이용하는 방법
이는 기차나 자동차, 비행기 등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해 사건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즉 언뜻 보기에 사건 당시의 도저히 사건 현장까지 왕복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이를테면 제주도에서 오후 2시에 살인사건이 벌어졌는데, 가장 유력한 용의자를 서울에서 오후 1시 30분과 2시 30분쯤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지요.

2. 시간을 조작하는 방법
장래에 증인이 되어 줄 제3자를 속이는 방법입니다. 시계를 조작한다거나 약물이나 도구를 이용해 시간을 착각하게 만드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3. 피해자의 사망 시간을 조작하는 방법
사건이 발생한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을 벌기 위해 전화나 녹음기 등 기계적인 도구를 이용해 피해자가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속이는 것입니다.

4. 우발적인 사건으로 조작
피해자가 늘 먹는 약병에 독약을 섞어 놓는다거나 자동차 혹은 집에 어떤 조작을 해 놓고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난 후에 사건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방법인데, 이는 다소 불확정적인 방법이라 알리바이 트릭으로 보지 않는 의견도 있습니다.

혹시 이런 자전거였을지도...


19세기의 프랑스 작가 부아고베(Fortune du Boisgobey)가 발표한 <잠수부(Le plongeur)>(1889)는 1820년대 남부 프랑스 지중해 연안을 무대로 한 모험소설로, 추리소설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초보적인 알리바이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어느날 밤, 바닷가의 집에서 잠수업자가 살해되고 유언장이 사라집니다. 유력한 용의자가 있었지만 당시 현장에서 25km 정도 떨어진 마을에 있었으며, 그곳에는 말이나 마차 등 교통수단이 전혀 없고 도보로 왕복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불가능해 혐의를 벗어나지요. 다만 경찰의 탐문결과 이웃집 양치기가 한밤중에 무슨 바퀴 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증언했으나 무시당합니다. 결국 사건의 진상은 한참 후에나 밝혀지는데, 범인은 마을에 숨겨두었던 자전거를 타고 범행을 저지른 후 돌아와 자전거를 강에 버린 것이었습니다. 지금 독자분들의 시점에서는 ‘지능적’이라는 표현을 꺼내기조차 어려울 수준이지만, 자전거의 발명은 18세기 후반이었던 만큼 당시로서는 첨단 교통수단을 이용한 알리바이 조작인 셈이었습니다.

교통수단을 이용해 알리바이를 조작하는 ‘여행(旅行)미스터리’는 주로 철도가 이용되기 때문에 ‘철도 미스터리’, 혹은 ‘시간표 트릭 미스터리’라고도 하는데,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런 작품에 나오는 범인은 열차, 비행기 등(교통정체의 위험이 있는 일반 도로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의 복잡한 시간표를 면밀하게 연구해 마치 톱니바퀴와도 같이 한 순간의 여유도 남기지 않고 시간을 짜 맞춰 치밀한 알리바이를 조작해내곤 하지요. 마츠모토 세이초의 <점과 선(点と線)>등 사회파 추리소설에서 시작된 철도 미스터리는 니시무라 쿄타로(西村京太郞), 모리무라 세이이치(森村誠一) 등의 작가가 주도해 왔는데, 이런 형식이 일본에서 폭발적으로 유행한 것은 전국 각지에 철도가 깔려 있고 또한 철저하게 교통시각표를 준수하는 국가적인 특징 때문일 것입니다(미국이나 영국 등에서 열차 시간표가 몇 분 틀리는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아슬아슬한 갈아타기 묘기는 현실성이 없다고 합니다). 

교묘한 알리바이 조작은 탐정의 순간적인 기지(機智)만으로 풀릴 때가 거의 없으며, 말 그대로 끈기 있는 조사만으로 해결됩니다. 그래서 알리바이 트릭을 해결하는 주인공들의 성격은 대체로 비슷한 편입니다. 알리바이 깨기의 대표주자로 불리는 F.W.크로프츠(F.W.Crofts)의 프렌치 경감(Inspector French)이나 니시무라 교타로의 도츠가와 쇼조(十津川 省三)경부는 지독할 만큼 끈기가 있으며, 가정적이며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이 두 사람이 시리즈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크로프츠는 첫 작품인 <통(The Cask)>(1920)에서부터 네 번째 작품인 <그루트 공원의 살인(Groote Park Murder)>(1923)까지 각각 다른 주인공을 등장시켰으며 프렌치 경감은 다섯 번째 작품인 <프렌치 경감 최대의 사건(Inspector French's Greatest Case)>(1925)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제목에 ‘최대의 사건’이라는 말이 붙긴 했지만 그다지 큰 사건도 아니었던 것을 보면 프렌치 경감 역시 1회성 주인공이었던 것 같긴 합니다. 그러나 크로프츠는 프렌치 경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작품에 등장시키며 알리바이 깨기의 상징 같은 인물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한편 교타로의 도츠카와 경감은 처음 등장할 때 <붉은 범선(赤い帆船)>(1973), <사라진 유조선(消えたタンカ-)>(1975), <사라진 승무원(消えた乘組員)>(1976)등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바다의 범죄를 주로 다루었습니다. 작가가 대학시절 요트부에서 활동했던 경력에 힘입은 것으로 보이는데, 바다에서 활동하던 도츠카와 경감은 <침대특급살인사건(寢臺特急殺人事件)>(1978)부터 철도 범죄를 다루게 됩니다. 교타로 역시 도츠카와 경감을 시리즈 주인공으로 할 생각이 없었는지, 초기 작품들에서는 그의 혈액형이 O형이라고 했다가 바로 다음 작품에서는 B형으로 바뀌고, 부하인 카메이(龜井) 형사는 그보다 나이가 많았다가 적어지는 사소한 실수가 눈에 뜨이기도 하지요.

두 주인공을 만들어낸 작가들은 기차와 관련된 공통점이 있습니다. 크로프츠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나 열일곱 살 때 토목기사 견습생이 되어 철도 관련 직업에 오래 종사해오다가 50세부터 소설에만 전념하게 되었으며, 교타로는 어린 시절 기차를 탔다가 빠른 속도에 매료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읽을 줄도 모르는 열차 시간표를 마냥 들여다보고 있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곡예를 하는 듯 치밀한 알리바이 조작은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 즉 예를 들어 기차가 1분간만 연착하더라도 다음 교통수단과의 연결이 안 돼 실패할 가능성이 큰데, 범인의 모든 알리바이 조작은 항상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약간의 억지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탐정이 어떻게 그 조작을 깰 것인가 흥미 있게 바라보곤 하는 것입니다.

알리바이 트릭은 이른바 본격추리소설의 기본이라 최근까지도 주된 트릭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그중 대표작을 들자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容疑者Xの憲身)>(2005)이 있습니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대표작이기도 하지요.
 

두 명의 천재, 유가와(왼쪽)와 이시가미 -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에서

천재적인 수학자 - 현재는 수학교사로 살아가는 - 이시가미는 자신이 짝사랑하던 여인의 우발적 살인을 숨기기 위하여 알리바이 조작에 나섭니다. 그러나 그의 대학 동창이자 천재적인 물리학자 유가와가 이 사건 수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과연 이시가미의 완전범죄 시도, 알리바이 트릭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덧붙임 : <용의자 X의 헌신> 영화를 소개하고 보니 알리바이를 주제로 삼은 영화가 있었던 것이 생각이 나네요. 제목도 아예 <알리바이 (The Alibi)>(2005)인데, 고객을 상대로 갖가지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는 알리바이 컨설턴트가 사건에 말려들어가는 유쾌한 영화였습니다.   (:P)

알리바이 컨설턴트 레이 엘리엇(오른쪽) - 영화 '알리바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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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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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딸기 2010.09.29 2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재미있게 읽었어요.
    <용의자 X의 헌신>도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추리소설 읽으면서 '한개도 못 맞추는' 저같은 독자들에겐 아주 유용(?)하면서도 재미난 이야기로군요!

  2. 이야기꾼 2010.10.06 15: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얼마 전에 케이블 티비에서 <알리바이> 비슷한 시놉의 드라마를 제작했던 것 같아요.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3. 뎅뎅 2010.10.06 21: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호호, 자전거에서 빵 터졌네요. 저는 주인공과 함께 한참을 고민했는데, 주인공 혼자만 알고넘어간 일들이 나중에 등장할 때마다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곤 합니다. 아아 이러면 안되는 것이지요?

  4. 손선영 2010.10.06 2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전거 댓글 탓인지 <외딴섬 퍼즐>이 스윽 스쳐갑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당^^

  5. 비체 2011.02.05 0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구석의 노인> 제목이 생각이 나지 않아 네이버 검색하다 들어오게 되었네요 ㅋ
    한창 추리소설 왕창 읽다가 알려진 작가는 어지간히 읽어서
    뭐 다른 작가는 없는가... 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정말 반가운 곳이군요 ㅋ

    아, 덤으로, 태클은 아닙니다만...

    라틴어로 ibi는 '장소에'가 아니라 '거기에'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there에 해당하는 말이죠.
    alius와 ibi의 합성어...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아마 그러리라고 생각됩니다.
    다만 합성어라고 적혀 있으면 왠지 후대에 만들어 낸 조어라는 느낌이 드는데
    (그리스어 tele를 사용해 만든 텔레비전, 텔레폰 처럼 말이죠..)
    실제로 옛날 라틴어에도 alibi라는 단어가 있답니다.
    부사인데, 뜻은 elsewhere, in another place
    즉 '다른 어딘가에' 정도가 되겠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