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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09 테마로 읽는 미스터리 <20> 표절 시비 (6)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원작 그림이 가진 열정과 자연스러움- 즉 elan(열의) -은 흉내 낼 방법이 없지.
모사품은 아무리 원작과 닮았더라도 둘 사이에는 큰 심리적 차이가 있어.
모사품에는 진지함이 결여되고 너무 완벽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 흔적이 남아 있다네.
   
- 파일로 밴스
<카나리아 살인사건> (1927) S.S. 밴 다인
 
인터넷 이용은 일상생활이 되어버린지 이미 오래로군요. 그러면서 개인이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이 많아지자 예전에는 드물었던 일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표절 문제입니다. 여러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들을 '복사 및 짜깁기'해서 학교 숙제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하네요. 이렇게 타인의 노력을 어려움 없이 가로채는 비양심적인 표절 행위는 학술 논문이나 음악, 방송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문학 부문에서도 꽤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심지어 일간지 신춘문예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을 정도니까요. 대신 인터넷의 엄청난 전파력 덕분에 빨리 들통나기도 합니다만

특히 추리소설은 작품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비슷한 트릭을 사용하기만 해도 오해를 살 여지가 있습니다. 작가 입장에서는 기발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다른 작품에 나온 비슷한 아이디어가 사용된 것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비슷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라고 해서 모조리 표절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추리소설이 표절로 의심받는 경우는 트릭이 비슷할 때, 혹은 상황이나 구성이 비슷할 때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1926)은 범인의 의외성만으로 평가하자면 역대 최고 작품 중 하나인데, 놀랍게도 그보다 9년 전 거의 비슷한 트릭을 사용한 작품이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스웨덴 해군 장교이자 소설가인 새뮤얼 아우구스트 두제가 1917년 발표한 <스미르노 박사의 일기>가 바로 그것인데, 일기 형식으로 서술된 이 작품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크리스티의 ‘세계적 명성’ 밑에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스미르노 박사의 일기


한편 엘러리 퀸은 크리스티의 작품 제목 때문에 집필하던 작품을 중단한 적도 있습니다. 제목의 표절을 피했다고나 할까요. 퀸은 서구의 전래동요 ‘마더 구즈(Mother Goose)’중에서 ‘10명의 인디언’을 제재로 삼아 <The Indian Club Mystery>라는 제목으로 집필 중이었는데, 크리스티가 먼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발표하는 바람에 도중에서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각각 죽이고 싶은 상대가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상대를 바꿔 범행을 저지른다’는 아이디어는 누구든 한번쯤 상상해 볼 수 있었는지 여러 작가가 사용했습니다. <태양은 가득히>로 유명한 여성 작가 패트리셔 하이스미스가 데뷔작 <낯선 승객>(1950)에서 사용한 이 아이디어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던 니콜라스 블레이크의 <A Penknife in My Heart>(1958)에서 다시 나왔습니다. 비슷한 소재라는 것을 알게 된 블레이크는 하이스미스에게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등장인물의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훗날 프레드릭 브라운의 <교환 살인>(1962), 로렌스 블록의 단편 <핸드볼 코트에서 만난 이방인>(이 작품은 <낯선 승객>과 제목마저 흡사하군요)등이 나왔지만 이미 보편화된 소재라 별다른 시비가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TV 드라마 <CSI>에서도 이런 에피소드를 다루기도 했지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낯선 승객'


일본 추리소설계의 선구자인 에도가와 란포도 몇 차례 표절 시비에 휩쓸린 일이 있습니다. 그의 데뷔작이 된 단편 <2전 동화>(1923)의 원고를 읽은 잡지사 편집진은 ‘초보 작가치고는 너무 뛰어난 작품’이라 외국 작품의 아이디어를 베낀 것이 아닌지 잠시 의심했다고 합니다. 물론 소재가 일본어 암호였기 때문에 순수 창작물임을 인정받고 오히려 잡지사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행운을 얻게 되었지요. 그러나 란포의 이름이 유명해진 뒤, 그의 단편 <화승총(火繩銃)>이 멜빌 데이비슨 포스트의 밀실을 다룬 단편 <둠도프 사건>(1911)과 유사한 트릭을 사용한 것이 알려지며 약간 표절 시비가 일었습니다. 그러나 란포의 해명에 의하면 <화승총>은 대학 재학 중이던 1915년 잡지에 투고했으나 채택되지 않은 사실상 그의 처녀작으로, 아이디어 자체는 그의 창작이 아니라 미국의 사건 실화집에서 얻은 것임을 밝히며 표절 시비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런 모양의 화승총이었을까요?


트릭의 유사성은 판정이 매우 미묘해서 심사 기준에 의해 희비가 엇갈리기도 합니다. 경마를 소재로 한 <짙은 갈색 파스텔(焦茶色のパステル)>로 28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받은 오카지마 후타리는 1년 전 다른 작품으로 응모해 최종심사까지 올라갔다가 아쉽게 탈락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트릭의 유사성 때문이었지요. 1년 전의 심사위원들은 ‘마권(馬券)을 이용해 훔친 말의 몸값을 받으려 한다’는 트릭이 여류 작가 나츠키 시즈코의 단편 <5천만 엔짜리 남자>에서 쓰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독창성이 결여되었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7년 후 유사한 트릭을 사용한 아베 사토루의 <사라진 항적(消された航跡)>은 요코미조 세이시 상 당선작으로 결정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확실히 줄을 잘 서야 세상살이도 편해지겠군요.

트릭의 유사성만큼은 아니지만 상황이나 플롯이 비슷한 경우도 드물지는 않은 편입니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나이가 자신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동료나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증인들을 찾아 나서지만 증인들은 사라지거나 살해되며 차츰 집행 날짜가 다가온다…

음, 언젠가 읽은 것 같다고 기억하실 분도 계실 것 같군요. 이것은 서스펜스의 거장 윌리엄 아이리쉬의 대표작 <환상의 여인>과 조너던 라티머의 <처형 6일 전> 등 두 작품의 골격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줄거리만 소개해 놓으면 뭔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시겠죠. 아무래도 훨씬 유명한 아이리쉬의 작품을 라티머가 베껴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라티머의 작품이 무려 7년이나 앞서 발표한 것입니다. 물론 이 두 작품은 소재만 비슷할 뿐 내용에서는 큰 차이가 있고 해결 방식도 각각 독창적이라서 읽어보신다면 표절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으실 겁니다.

영화 '환상의 여인' 포스터


표절로 보기 애매한 상황이 또 있군요. 자기 작품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이죠. 코난 도일은 1924년 단편 <세 사람의 가리데브>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30여 년 전에 발표했던 <붉은 머리 클럽>(1891)과 <증권 중개인>(1893)을 섞어 놓은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렇지만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작품을 변형해서 쓴 작품이기 때문에 홈즈 연구자들의 불만을 제외하고는 별 논란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 힘이 떨어진 도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최근(이라 해도 이미 꽤 되었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표절 이야기로는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의 트릭 만화 <김전일>에서 사용된 것이 기억나는군요. 사실 이건 표절이라기보다 트릭을 그냥 갖다 썼기 때문에 주제에서 핀트가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시마다 소지는 이 사건에 대해 특별히 소송을 걸거나 하는 일의 행동을 하진 않았지만, “유례가 없는 트릭이라고 자부하고 있어, 트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영상화등의 2차사용은 지금까지 거절해 왔다. 때문에 트릭을 유용하는 텔레비전 기획은 절대로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김전일>시리즈의 이 에피소드는 원작만화로는 볼 수 있지만(트릭에 관해서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TV 드라마로 제작된 것은 비디오 등에서 빠지게 되어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점성술 살인사건>은 워낙 잘 알려진 작품이었기 때문에 만화나 드라마 등에서 시마다 소지의 허락을 당연히 받은 것으로 알고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믿기 어려운 소문도 전해지긴 합니다.

'점성술 살인사건' 도용을 다룬 기사


표절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는 모든 작품에 대해 다 알면 좋겠지만, 전 세계의 추리소설을 모두 읽기는커녕 구할 수도 없을 겁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요즘 나온 새로운 트릭이라고 해 봐야 사실은 과거의 트릭을 약간 뒤틀어 변형한 정도에 불과한 만큼 ‘기발한 아이디어를 이야기의 핵심으로 삼지 않는 것이 좋다’는 영국 작가 H.R.F.키팅의 충고는 아이디어를 짜 내느라 고심하는 작가가 머릿속에 새겨두어야 할 만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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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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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2.10 0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표절 시비 하니 절대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제가 2008년 KBS <이야기 발전소>에 한 화가가 죽은 뒤 유령이 되어 다른 화가의 몸에 빙의하여 그림을 계속 그려 나간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지어서 나갔고 좋은 점수를 낸 적이 있는데 그 날 시청자 게시판에 그 이야기가 MBC의 모 드라마와 내용이 거의 같다는 표절 의혹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드라마에 대하여 전혀 몰랐거든요. 다행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아찔한 경험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그 드라마를 보고 표절하여 이야기를 냈다면 그건 제 양심이 아니라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2. 카메라이언 2011.02.14 05: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헉 매회 요즘 제가 읽으려고 하거나, 읽었거나, 읽다 중단한 책들 이야기가 나와서 뜨끔뜨끔 한다니깐요. 'ㅂ'... ...;;;;; 이번엔 환상의 여인에서 흠칫. 아는 언니께 읽겠다고 4 개월 전에 얻어놓고 여전히 책장에 꽂아놓은 채 방치. (;;;) 이번에야 말로 홈스 패스티쉬 모음집 베이커가의 살인 끝까지 읽고 나면 읽어야겠어요. 'ㅂ';;; 카나리아 살인사건도 옆에 쌓아놓고 모른 척했는데 어서 읽어야겠 ;;;

    그나저나 베이커 가의 살인 책 보고 한 분께서 저도 써보라고 해서 함 써보려고요. ㅋㅋㅋ 잼날 것 같아요. ]서울에 사는 셜록홈스가 아니라 설록수(설록차??) 이야기라도? 탐정 설록수가 설록차 창립자를 살인자로 몰릴 위기에서 구해줘서 새로 나오는 생수 이름을 설록수로 지었다는 결론? ㅋㅋㅋ<--기발한 아이디어를 이야기의 핵심으로 삼지 말라는 이야기 방금 전에 보고서 이런다 ;;;;; 표절시비나 조심해야 ;;;;; 쿨럭 ;;;

  3. 허니문 차일드 2011.02.15 1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얼마 전 문학동네에서 펴낸 <편집된 죽음>이란 책을 봤습니다. 오래된 친구가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콩쿠르상 수상이 결정되던 날 복수의 수레바퀴가 돌아간다는... (이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그 복수의 방법이 바로 표절시비입니다. 그 책의 원제가 바로 <별쇄본>이죠. 작가 하나 묻어버리는 게 일도 아니더군요. 내용 중에 바로 표절에 관한 의식이 있었느냐, 아니면 정신병에 의한 무의식 표절이냐는 내용이 나옵니다. 음악도 기본 몇 가닥 멜로다가 동일하면 표절판정이 나오는데 무의식 중에 나오는 표절도 무시 못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초이님도 대단하시네요. 이 글 한 편 쓰기 위해 얼마나 공부를 하셨을까요. ^^ 많이 보고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