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엘로이'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2.16 테마로 읽는 미스터리 <21> 감방 속의 작가 (4)
  2. 2010.12.29 테마로 읽는 미스터리 <14> 겨울 (4)

그들은 창살 뒤에서 무엇을 했을까

자본가들은 돈을 모으고 교도소로 가지요.
작가들은 교도소로 간 다음 돈을 법니다.
-고든 크로스
     - <화형법정> (1937) 존 딕슨 카
 

꽤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사설 보안경비업체가 사원을 모집하면서 박사급의 고급인력뿐만 아니라 강절도범 등 전과자를 모집한다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첨단 컴퓨터 범죄를 막기 위해 해커(hacker)를 키우자는 의견도 심심치 않게 나오곤 하죠. 이건 바로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이론에 따른다는 것인데,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흥미로운 일이긴 합니다.

소설가 사이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써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범죄를 다루는 추리소설의 경우 범죄자가 훨씬 실감나는 작품을 쓸 수 있을까요? ‘아니오’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에 등장한 추리소설가 중 교도소 신세를 겪은 작가는 극소수에 불과하겠고 또한 그들이 모두 성공한 작가가 되었을 리는 없겠지만, 사실 근대 추리소설의 뿌리는 어느 탈옥수의 회고록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 범죄자였으며 나중에는 프랑스 수사국의 책임자가 되는 프랑수아 외젠 비도크(François Eugène Vidocq)는 웬만한 소설의 주인공보다 훨씬 극적인 인생을 살아간 인물이었습니다. 빵집 아들로 태어난 비도크는 프랑스 대혁명 시절에 입대, 5년 동안 군인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정식 제대특명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도망병이 되어 체포당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 감방에 있던 위조지폐범 두 명이 그들의 죄를 비도크에게 뒤집어 씌우기까지 했지요. 억울하게 중형을 선고받은 비도크는 그로부터 10년 동안 옥살이와 탈옥을 거듭하며 반평생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도크의 '회고록'

그는 이 기간 동안 프랑스의 거의 모든 교도소에 수감되는 경험을 했고 한편으로는 범죄자의 생리와 수법을 파악하게 되었으며 또한 변장의 명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평생을 숨어서 사느니 차라리 경찰의 정보원이 되기로 결심한 그는 1년 9개월의 옥살이를 자청해 교도소 안에서 스파이 노릇을 했으며, 형기를 마친 다음에는 정식으로 경찰 전속 탐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의 범죄가 극심하게 증가하자 비도크는 개심한 전과자들을 모아 특별 팀인 범죄수사국을 창설하는데, 이들은 대단한 활약을 벌여 창설 8년 만에 파리의 범죄율을 40%나 떨어뜨렸습니다. 이러한 눈부신 공적으로 비도크는 루이 18세에 의해 위조지폐 사범이라는 무고한 죄에 대해 완전한 사면을 받았습니다.

비도크는 50대에 접어들어 갑자기 책의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4권으로 이루어진 그의 저서 <회고록>은 자신의 경험을 위주로 썼다고는 해도 과장된 부분이 많아 허풍이라고 혹평받기도 하며 심지어는 창작물이라는 말까지 듣지만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우, 영국의 윌키 콜린즈, 프랑스의 에밀 가보리오 등 근대 추리소설의 기초를 세운 작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현대 추리소설의 시조로 인정받는 포우는 공교롭게도 음주 난동으로 필라델피아의 교도소에 잠시 구금되어 있을 때 이 책을 읽었다고 그의 편지에서 밝히고 있네요.

1896년 2월 미국에서는 윌리엄 시드니 포터(William Sidney Porter)라는 은행 출납계원이 854달러를 횡령한 혐의로 체포당합니다. 그는 병든 아내를 이유로 보석절차를 받아 잠시 집으로 돌아왔으나 재판이 있기 전 온두라스로 도망쳤다가 아내가 위독해지자 돌아와서 5년형을 선고받습니다. 은행원이 되기 전 잠깐 기자 생활도 했던 그는 남아도는 시간을 이용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때가 미국 최고의 단편작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1899년 아직 복역 중이던 포터는 오 헨리(O. Henry)라는 필명으로 잡지에 단편을 발표했으며, 모범수가 되어 3년 만에 형기를 마친 그는 <마지막 잎새>, <크리스마스 선물>등 수많은 주옥같은 단편을 남겼습니다.

단편소설의 거장 O.헨리

오 헨리를 추리소설가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지만, 셜록 홈즈의 패러디인 ‘샘록 존스’ 시리즈를 쓰는가 하면 꽤 많은 수의 작품이 범죄와 연관된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되살아난 개심(改心)>(1909)에 등장하는 금고털이 지미 밸런타인은 교도소에서 만난 인물이 모델이라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오 헨리의 범죄 혐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은행 감사 때 장부의 숫자가 맞지 않자 말단 출납계 직원이었던 오 헨리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웠다는 설도 있으며, 그가 경영하고 있던 잡지 <롤링 스톤(Rolling Stone)>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횡령한 것이 사실이라는 설도 있는데 정작 본인은 죽을 때까지 그 일에 대해서 함구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미국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기반을 확립한 대쉴 해미트는 1950년대 좌익 소탕 열풍에 휘말리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고수했던 그는 반(反) 파시스트가 되어 1930년대에 미국 공산당에 입당한 경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훗날 냉전시대에 접어들어 매카시 의원의 반미(反美) 조사위원회에서 자신의 활동이나 동료를 밝히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법정 모독죄로 6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몰타의 매>(1929)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은 좌익이라는 낙인이 찍혀 도서관에서 금서로 규정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를 빨갱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심지 굳은 인물, 대쉴 해미트


한편 해미트의 작품은 한 전과자가 추리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28년 열아홉 살의 흑인 청년 체스터 하임즈는 무장 강도 혐의로 7년형을 언도받습니다. 그는 이듬해인 1929년 펄프 잡지 <블랙 마스크>에 연재된 해미트의 <붉은 수확>을 읽은 후 영감을 얻어 교도소에서 소설 습작을 시작했습니다. 1945년 첫 장편 <If He Hollers Let Him Go>를 발표한 그는 1953년 절친한 흑인작가인 제임스 볼드윈, 리처드 라이트 등이 살고 있던 프랑스로 떠나 84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유럽에 머무르면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체스터 하임즈

그가 창조해 낸 할렘의 형사 ‘코핀(Coffin: 관) 에드 존슨’과 ‘그레이브 디거(Gravedigger) 존스’ 콤비 - 어렸을 때 어느 책에서 '관 짜는 에드와 무덤 파는 존스'라고 소개한 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 는 강렬한 이미지로 미국보다 유럽의 추리소설 애독자들에게 크게 어필했는데, 그들의 인물 묘사는 작가의 생생한 경험 덕분이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블랙 달리아>와 <L.A.컨피덴셜>이 소개된 제임스 엘로이 역시 젊은 시절의 일부를 교도소에서 보냈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열 살 때 어머니가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은 그는 청소년기에 사유지 침입, 알코올 중독, 폭행 등으로 전과자가 되고 말았지요. 20대 후반에 문학에 눈을 뜬 그는 술을 끊고 골프 캐디 일자리를 얻은 다음 글을 쓰기 시작해 <Brown's Requiem>(1981)으로 데뷔합니다. 그는 2차 대전 이후의 미국의 어두운 면을 묘사한 소설들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엘로이


이렇게 한때의 어려움을 겪고 입신한 이들과는 반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다가 철창신세를 진 작가도 없지 않습니다. 영국 보수당 부의장․런던시장 후보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제프리 아처 경(卿)의 사례는 가장 유명합니다. 단거리 육상선수로 올림픽에도 출전한 바 있으며 1969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하원의원에 당선된 화려한 경력의 아처는 그로부터 5년 후 투자에 실패, 파산 위기에 몰리면서 의원직을 사퇴했으나 당시의 경험을 살린 소설 <한 푼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를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했고, 제3작 <케인과 아벨>은 미국에서 TV 미니시리즈로 제작, 방영되면서 거물급 베스트셀러 작가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한편 정치활동을 재개해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총애를 받으면서 한때 보수당 당수 물망에까지 올랐습니다.

파란만장한 경력의 제프리 아처. 롤러코스터 인생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1987년 그가 매춘부와 같이 잤다는 기사가 타블로이드 일간지에 실리면서 정치적인 몰락의 구멍에 빠지게 되지요. 그는 이 기사를 보도한 데일리 스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 친구 테드 프란시스의 알리바이 입증에 힘입어 승소해 배상금 50만 파운드를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2년 후 친구인 프란시스가 아처의 부탁으로 거짓증언을 했다고 폭로, 결국 99년 11월 런던 시장 선거전에서 중도 하차하고 출당 처분을 받는 한편 위증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습니다. 법원은 그에게 적용된 5건의 기소내용 가운데 위증 등 4건의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 최장 4년의 징역형과 함께 소송비용 17만5천 파운드를 12개월 내에 납부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한편, 특히 형기 가운데 2년 이상은 반드시 실형을 살아야 한다는 판결을 내려 결국 철창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복역 중에도<교도소 일기(A Prison Diary)>를 출간했으며 2003년 7월 영국 남부 교도소에서 2년 만에 가석방되어 런던의 자택으로 귀가, 불사조 같다는 세간의 평가를 증명하려는 듯 계속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석방 이후의 작품으로 <배반의 자화상>(2005)이 번역되어 있군요.

옥살이를 한 작가들 중 성공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교도소 생활이 즐거웠다고 회상하는 작가는 아무도 없었습니다(지난해 교도소를 견학할 기회가 있었는데, 어지간하면 신세지고 싶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성공한 추리작가가 되는 길은 직접 범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남의 책을 많이 읽고 머릿속에서만 구상하는 편이 현명한 일이겠지요. 세상에는 하도 별난 범죄가 많고 또 추리소설도 엄청나게 많으니 활자를 통한 간접경험만 해도 모자랄 게 없을 것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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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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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야기꾼 2011.02.18 11: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국 추리소설가 중에도 교도소에 다녀 온 양반이 있지요. 황세연 작가.
    불특정 다수에 대한 살인, 명의 도용, 좌중을 썰렁하게 하는 농담 남발 혐의로....는 아니고요,
    군복무를 교도소에서 했다고 합니다. ㅎㅎ

  2. 카메라이언 2011.02.19 03: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야야... 엄청나네요. 어렸을 때엔 여러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을 보며 '교도소(수녀원, 절)는 밥도 주고 하니까 어쩌면 글 쓰기에 이상적인 곳일지도 몰라.'라는 로망(?)을 꿈꾸기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떻게 저딴 생각을 했었는지. (;;;) 왠지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나면서, 대작가님들의 어마어마한 이야기에 입을 쩌억 벌리고 갑니다. 그리고, 오 헨리 님의 샘록 존스 시리즈 너무 궁금한데요. <--설록수 준비하고 있다 보니 호기심이 마구마구!

    • 평시민 2011.02.19 21: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 찾아보기는 힘들어졌지만 도서관에서라도 <꼭두각시 인형>을 검색해 보십시오, 오 헨리의 추리소설 단편집이고 샘록 존스 시리즈도 세 편 실려 있습니다. 패러디물이라 그런지 억지 개그물이긴 하지만요.

    • 카메라이언 2011.02.21 01: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혹시나 아는 덕후가 갖고 있을까 싶어 물었더니, 이 덕후도 없더군요. (;;;) 도서관에 가야겠어요. 국립도서관인가, 어디에 한 권 있다는데... 과연 볼 수 있으려나. ㄱㅡ;;;;


흰 눈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은

이제 또 다른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스패터 시의 사람들이
그해 겨울에 일어났던 일들을 잊어버리려면 꽤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호그 연속살인>(1979)  -  윌리엄 디앤드리어

 

추리소설의 계절은 흔히 여름이라고 합니다…만 그것은 작품 외적인 입장, 즉 ‘여름의 무더위를 쫓기 위해 추리소설을 읽는다’는 시장 구조적인 시점에서 나온 말입니다. 어쩌면 작가에게는 오히려 겨울 쪽이 매력을 갖춘 계절처럼 보이긴 합니다. 고전적인 수수께끼 풀이 추리소설에서는 겨울이라는 계절만이 가진 요소, 특히 눈은 훌륭한 배경 및 소재가 되곤 하지요.

올해는 눈이 별로 오지 않았다고 방정을 떨었더니 웬걸, 한바탕 쏟아지고 또 내릴 분위기네요


눈에는 다양한 특성이 있습니다. 함박눈, 싸락눈, 진눈깨비 등 많은 이름이 있을 정도로 하늘에서 내려올 때부터 가지각색이고 땅에 떨어진 후에도 녹거나 얼어붙거나 아니면 얼지도 녹지도 않고 어중간할 때도 있기 때문에 변화무쌍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뛰어난 작가들은 눈을 트릭으로서의 도구가 아니라 사건의 중요한 배경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배경’이라는 말은 너무 단순한 표현인데, 눈이 내린다는 것은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햇볕이 화창하다’, ‘이슬비가 내린다’ 등의 날씨와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웬만큼 내린 눈은 흔적을 남겨주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교통수단의 움직임을 차단할 수 있는 위력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사람 키 정도로 눈이 쌓이게 되면 발자국 트릭 같은 것은 아예 엄두도 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태풍이나 홍수처럼 주변 사물을 어디론가 날려 보내지는 않는다는 것도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엄청난 폭설이 등장하는 작품 중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열네 번째 장편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먼저 떠오릅니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프랑스의 칼레까지 유럽 대륙을 횡단하는 특급열차 오리엔트 특급(Orient Express)열차가 폭설 때문에 한밤중 유고슬라비아 국경 근처의 철길에서 꼼짝 못하게 되고, 그 무렵 만원이던 1등석 침대차 안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기차가 멈춘 곳은 외진 곳이라 누구도 열차로 몰래 들어오거나 밖으로 달아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침대차 안에 타고 있던 열 세 명의 승객 중 누군가가 범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승객 모두에게는 각각의 알리바이가 있어서 사건이 미궁에 빠질 것 같지만 하필이면 그 열 세 명 중에 푸아로라는 명탐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고로 사건은 뭐, 고비가 있지만 순조롭게 해결되지요. 이 작품에서는 폭설이 기차를 고립시키기 위한 배경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만, 독특한 범인의 설정은 이 작품을 영원한 걸작의 위치에 올려놓았습니다.

승객들을 모아놓고 질문을 던지는 명탐정 푸아로(중앙).


‘눈 속의 고립’이라는 상황은 범인이 당장 누구인지는 알 수 없더라도 어딘가로 도망치지는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탐정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만약 악당 쪽이 주도권을 잡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실 이렇게 되면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공포소설이 되는 셈이지요. 스티븐 킹은 <샤이닝>(1977)과 <미저리>(1987)에서 그러한 무서움을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샤이닝>은 한겨울동안 로키산맥 외진 곳에 자리 잡은 오래된 호텔을 관리하게 된 주인공 잭 토렌스가 이른바 오두막집 열병(Cabin Fever, 고립된 곳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신경증) 증세로 차츰 미쳐가면서 아내와 아들의 목숨마저 위협하게 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미치게 된 이유는 단순히 외딴 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만(호텔에 존재하던 유령 탓이었지요), 어쨌든 사방이 눈으로 뒤덮여 며칠도 아닌 몇 달 동안 꼼짝 못하게 된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편할 것 같진 않습니다. 한편 <미저리>에는 유령보다 더 무서운 집착을 가진 여인이 등장합니다. 눈길에서 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를 당한 소설가 폴 쉘던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미저리 체스테인’의 팬인 애니라는 여인에게 운 좋게(?) 구조되지만 그의 행운은 당분간 거기서 멈추고 맙니다. 아니, 그것은 행운이 아니었지요. 그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소설을 써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다리가 부러진 데다 바깥은 눈이 와서 도망갈 수조차 없고 난감할 따름입니다.

눈 속의 산장이 보이는 '미저리' 오디오북 커버


눈이 많이 내리는 때를 살펴보니 그것은 12월과 1월로 이어지는, 즉 ‘연말연시’라고 불리는 시점입니다. 1년 365일 중 불과 며칠에 지나지 않고 물리적으로도 그다지 특별한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점(해가 바뀐다는 것)을 맞이한다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의미를 두곤 합니다. 아마도 크리스마스라는 세계적으로 가장 대중화된 명절이 있고, 새해맞이 행사 역시 어느 나라에나 다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들뜬 사람들 사이에서 사고나 범죄는 발생하고, 때가 때인 만큼 당사자나 주변 사람은 평상시보다 훨씬 강한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인지 크리스마스나 신년 축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적지 않을뿐더러 인상적인 작품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애거서 크리스티의 <푸아로의 크리스마스>는 뭔가 즐거울 것 같은 느낌의 제목과는 달리 밀실 상태의 방에서 피투성이 시체가 발견되는 살벌한 분위기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제임스 엘로이의 <L.A.컨피덴셜>은 크리스마스이브에 경찰서 유치장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지면서 시작됩니다. ‘피투성이 크리스마스’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과거의 정신적 상처와 야심을 숨긴 젊은 형사 세 사람의 운명을 크게 바꾸는 방아쇠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피투성이 크리스마스' 사건 - 영화 'L.A.컨피덴셜'에서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 42번째 작품 <자장가(Lullaby)>에서는 10대 베이비시터 소녀가 새해 전날 살해됩니다. 살인을 주로 담당하는 형사들에게 사람의 죽음이란 그다지 드물거나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하필 이런 즐거운 때에 불행한 소식을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전해 주는 일은 평상시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죽은 소녀의 부모에게는 이 날이 더 이상 새해의 전날이 아니라 딸의 기일(忌日)이라는 가슴 아픈 날로 돌변하는 것이니까요. 새해로 접어드는 새벽 3시 무렵 주인공인 카렐라 형사가 소녀의 집 현관을 노크한 후, 부모가 문을 열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하는 것으로 작가는 그 장면을 마무리 짓습니다. 독자들의 상상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제프리 디버의 <악마의 눈물>에서도 ‘모두가 새해를 맞이하는 축제 준비로 여념이 없는 한 해의 마지막 날’ 무차별 총격사건이 벌어집니다. 한 번이 아니라 그날 중 세 차례 더 학살극을 벌이겠다는 범인의 예고에 필적 전문가 파커 킨케이드를 비롯한 수사진이 막으러 나섭니다(시리즈 작품이 아니지만, 낯익은 인물이 깜짝 등장해서 즐거움을 주네요. 그 ‘낯익은 인물’은 연말인데도 아무 약속도 없고 아무 데도 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옛날 일을 한번 살펴볼까요? 코난 도일은 1887년 12월 <비튼>지 크리스마스 특집호에 셜록 홈즈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주홍색 연구>를 발표했는데, 작품의 고료로 불과 25파운드밖에 못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도 독자들에게 외면당해 실의가 컸습니다. 

셜록 홈즈가 이 잡지를 통해 처음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주홍색 연구>에 주목한 미국 잡지 <리핑코트>지가 도일에게 새 작품 원고를 청탁했고, 이때 쓴 두 번째 장편 <네 사람의 서명>은 1890년 1월호에 실리게 됩니다. 푸대접받던 도일의 작품들은 드디어 미국과 영국 양쪽에서 호평을 받기 시작했고 그의 운명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하지요. 도일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연말의 분위기를 가장 잘 탄 작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다만 <주홍색 연구>나 <네 사람의 서명>은 잡지의 연말 특집에 실렸어도 내용은 전혀 크리스마스나 새해 분위기와 상관이 없었습니다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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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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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이 2010.12.30 15: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상한 눈사람 사건>이랑 <고리키 공원> 읽어보고 싶네요.
    눈사람 속에 시신을 숨겼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은 있는데 생각해보니 작품으로 읽어본 적은 없군요. 엄청 재밌을 것 같아요.
    (김전일 만화에서 눈사람(아니면 그냥 눈?)속에 시신 숨긴 이야기가 있었는 거 같아요.)

    지난 글 덕분에 이번 겨울에 <심플 플랜>을 재밌게 읽었습니다.(우와우와~ 스콧 스미스!)

  2. 카메라이언 2011.01.03 0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_</~

    그리고... ... 눈+살인... ... 눈의 살인... ...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제목인데요? 호호 '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