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키, 매부리코 '미로의 해결사'

 

셜록 홈즈

 

작품 속의 어떤 인물이 너무나 유명해지면 마치 실제로 존재했던 것처럼 여겨지거나 어떤 분야의 대명사가 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를테면 현실을 무시한 몽상가는 ‘돈키호테’,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에 비유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주류 소설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탐정들이 등장했던 미스터리 작품 세계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다. 마른 체격에 큰 키, 날카로운 눈빛과 매부리코, 그리고 예리한 추리력으로 상징되는 셜록 홈즈가 바로 그 주인공. 미스터리에 그다지 관심 없는 사람에게도 그의 이름은 탐정의 대명사로서 묵직한 무게를 느끼게 한다.

 

 


‘주홍색의 연구’에서 독자들에게 첫 선을 보인 홈즈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의사인 친구 왓슨과 함께 런던 베이커 거리 221b의 하숙집에 살면서 수많은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그의 머리 속에는 범죄와 관련된 모든 필요한 지식이 들어 있는 반면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관심이 없다. 취미는 바이올린 연주와 화학 실험. 정부의 모처에서 일하는 일곱 살 위의 형 마이크로프트가 유일한 그의 혈육이다. 격투기나 봉술 등에 능할 뿐만 아니라 변장술에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해 왓슨을 자주 놀라게 한다.

 

 

 

 

56개의 단편,4개의 장편에 등장하는 홈즈는 개개의 작품으로 물론 유명하지만 죽었다가 살아난 에피소드는 자주 화제에 오른다. ‘최후의 사건’에서 홈즈는 그가 상대한 최강의 악당 모리어티 교수와 함께 스위스의 라이헨바흐 폭포에 떨어져 ‘죽은 것으로’ 잠시 알려졌다. 그러나 홈즈의 팬들은 그가 죽었다는 것을 참지 못하고 항의한 덕택에 결국 ‘빈 집의 모험’에서 부활해 늘그막까지 범죄자 혹은 독일 스파이들까지 상대하게 된다.


 

원작자인 도일은 홈즈의 사생활이나 가족 관계에 대해 별달리 자세한 묘사를 하지 않았지만, 셜로키언(Sherlockian)이라고 불리는 홈즈의 극성스러운 팬들은 가공 인물인 홈즈를 실존인물처럼 여기면서 전기(傳記)를 만들 만큼 치밀한 연구를 했다. 윌리엄 베어링 굴드의 ‘셜록 홈즈 전기’가 그 대표적인 저작이다. 여기에는 홈즈가 실종된 기간 동안의 행적을 비롯, ‘보헤미아의 추문’에 등장했던 아름다운 여가수 아이린 애들러와의 관계 등을 자세히 기록했다. 한편 미스터리 연구가인 펠릭스 몰리는 모리어티 교수가 폭포에서 죽지 않고 '히틀러'라는 가명으로 독일에 숨어들었다는 설을 제시했으며, 미스터리 작가 렉스 스타우트는 왓슨이 여자였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가 창조한 탐정 네로 울프가 홈즈의 아들이라는 설을 은근히 흘리기도 했다.

 

 

홈즈의 모델은 도일이 다니던 대학의 스승 조셉 벨 박사였다. 벨 박사는 환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병명은 물론 생활 습관까지 알아맞힐 정도의 관찰력과 직관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한편 홈즈의 이름은 도일의 친구인 올리버 웬델 홈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조셉 벨 박사

 

 

도일은 자신의 주인공인 홈즈에 특별한 저작권을 설정하지 않아 수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주인공으로 또는 조연으로 등장시키고 있기도 하다. 프랑스의 작가 모리스 르블랑은 자신의 주인공 뤼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무단으로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켰으며, SF작가 폴 앤더슨은 ‘타임 패트롤’의 한 에피소드에 홈즈를 등장시킨다. 홈즈가 너무 유능한 까닭에 머나먼 미래에서 온 인물들조차 그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이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다.

 

어쨌든 홈즈의 팬들이 좋아해야 할지 기분 나빠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19세기의 신화적인 명탐정은 세기를 훌쩍 건너 뛴 21세기에도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계속 작품에 등장할 추세다.

 

 

홈즈의 출현은 탐정물들에 대한 자극이 되었으며, 한동안 장편보다는 단편에 더 중요성을 두게 하는 역할을 했다. 홈즈가 영감을 준 모든 작품들을 열거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스포츠투데이 2000년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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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때로는 휴식이 필요하다

추리소설을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휴가중인 형사는 절대 무리하지 않습니다.
- 밥 이든
- <중국 앵무새>(1926) / 얼 데어 비거스

 

어느덧 여름입니다.

일년 사계절 중에서도 유독 휴가철이라고 불리는 계절이기도 하죠. 나머지 계절이 휴가를 즐기기에 모자랄 것은 없겠지만 뜨거운 한여름보다는 못하기 때문일까요.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데다가 설날이나 추석 등의 명절 연휴가 있어서 보통 직장인들의 여름휴가는 일주일에서 열흘 남짓 정도지만 외국, 즉 서구의 여름휴가는 훨씬 긴 편입니다. 요즘은 별로 쓰이지 않는 것 같은 바캉스라는 단어도 원래 제법 긴, 즉 최소한 한 달 이상의 휴가를 의미한다는데, 서구 쪽은 이렇게 기간도 긴데다가 타국으로의 여행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덕택에 유명한 휴양지나 이국적인 장소를 무대로 한 추리소설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그런 덕분에 명탐정들은 휴가지에서마저 골치 아픈 일과 마주치곤 했지요. 요즘은 무선인터넷이나 스마트폰 같은 문명의 이기(혹은 족쇄일지도?) 탓에 휴가를 떠나서도 일한다는 분도 적지 않은 것 같은데, 잠시만이라도 범죄로부터 떨어져 쉬고 싶어 하는 명탐정들에게도 그런 비슷한 일은 예외 없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인공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임에 틀림없겠지요. 사건이 없으면 명탐정도 필요가 없어질 테니까요.

과거를 돌이켜보면 휴가는 작품 속의 탐정들보다 추리소설 초창기의 작가들에게 더 필요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의 작품이 성공하면 많은 돈을 벌어 인생의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요즘 작가들과는 달리 별로 수입이 좋지 않았던 옛날 작가들은 고생만 하다가 요절한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19세기의 프랑스 작가 에밀 가보리오는 신문에 매일 연재를 했는데, 하루치 연재 분량이 거의 짧은 단편 분량과 맞먹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부담이 만만치 않았고, 결국 과로로 인해 40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약’이란 말은 언제나 허망하긴 합니다만, 만약 그가 쉬엄쉬엄 글을 쓰면서 오랜 기간 동안 글을 쓸 수 있었더라면 영국보다 프랑스에서 추리소설 선풍이 먼저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에밀 가보리오

탐정들 중 가장 긴 휴가를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셜록 홈즈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작가인 코난 도일은 명탐정 홈즈 시리즈를 쓰는데 지친 나머지 홈즈가 범죄의 화신 모리어티 교수와 스위스의 폭포에서 격투를 벌이다가 함께 떨어져 죽은 것으로 끝나는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홈즈 팬들의 반발이 너무 크자 도일은 생각을 바꿔 홈즈가 운 좋게 폭포에 빠지지 않고 혼자 살아남은 것으로 설정했으며, 공백 기간인 1891년부터 1894년까지 티벳과 페르시아, 이집트 등을 여행한 뒤 유럽을 거쳐 런던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하여 후속 작품과 이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3년 동안의 공백은 나중 홈즈의 모방 작품을 쓴 작가들에 의해 갖가지 이야기, 즉 티벳에서 설인(雪人)의 정체를 밝혔다거나 유럽에서는 여배우 아이린 애들러와 눈이 맞아 아들을 하나 두게 되었다는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들이 문자 그대로 쏟아져 나오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다양한 홈즈 배우들

애거서 크리스티는 여행을 무척 즐긴 데다 고고학자 맥스 맬로윈과 결혼한 덕택에 젊은 시절에는 1년의 1/3 정도를 탐사․발굴 여행으로 보냈습니다. 크리스티는 이러한 잦은 여행을 바탕으로 하여  <오리엔트 특급 살인>(1934), <메소포타미아의 살인>(1936), <나일 강의 죽음>(1937), <백주(白晝)의 악마>(1941)등 휴양지나 해외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작품을 여러 편 썼습니다. 이들 작품들의 기본적 특징을 들자면 대부분 엘큐울 푸아로가 등장하는데, 크리스티의 또 다른 주인공 미스 마플은 워낙 마을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국, 그것도 중동까지 보내기는 어려웠겠지요. 그렇지만 미스 마플은 <카리브 해의 죽음>에서 서인도 제도의 카리브 해에서 휴가를 즐기다가 누군가의 죽음과 마주칩니다. 사건 수사로 돈을 버는 사람도 아닌데 참, 복도 없지요.

이집트를 관광중인 애거서 크리스티(오른쪽)

영국의 여성작가 조이스 포터가 만들어 낸 괴짜 주인공 윌프레드 도버 경감은 주인공 치곤 무능한(?) 편이지만, 다른 명탐정들과 마찬가지로 사건을 피해가지 못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도버 4 – 절단>(1967)에서 런던 경찰청의 도버 경감은 여름휴가를 떠나는 도중 하필이면 아내가 자살하는 사람을 목격하는 바람에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사건을 맡게 됩니다. 무척 심통을 부리던 도버 경감은 그의 직속 부하도 휴가를 떠나다가 현장에 끌려오다시피 나타난 것을 보고 위안을 삼으면서 심술궂은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죠. 

역시 영국의 여성작가 크리스티애너 브랜드의 <위험한 여로>(1955)는 제목에 걸맞게 아름답고 환상적인 카프리 섬이라는 이탈리아 근처의 여행지에서 관광객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수수께끼 같은 살인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주인공 코크릴 경감은 휴가를 즐기러 나왔다가 연속적인 살인사건과 마주칩니다. 말레이에서 태어난 브랜드는 인도를 거쳐 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영국에 왔는데, 제법 긴 동남아시아에서의 생활 덕택인지 이국적인 배경을 묘사하는데 훌륭한 솜씨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티애너 브랜드의 '위험한 여로'

휴양지를 무대로 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주로 유럽 작품들 쪽이 많고, 미국 작품들 쪽이 적습니다. 그나마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미국의 하드보일드 탐정들이 휴가를 즐기는 장면은 본 기억이 없네요. 동료들이 많고 정기적인 수입이 있는 경찰들은 교대로 휴가를 즐길 수 있지만 혼자서 사무실을 꾸려 나가야 하는 사립탐정들은 그럴 정도의 여유가 있을 정도로 형편이 좋지는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존 D.맥도널드의 작품에 등장하는 탐정 트래비스 맥기는 ‘버스티드 플러쉬(Busted Flush)’라고 하는 길이 16미터의 요트를 거주지로 삼으면서 바람 부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휴가날짜를 잡을 필요도 없습니다. 보통 때 플로리다의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맥기는 악당들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바다와 맞서야 할 때도 있지만 재산을 모으는데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에 첨단 문명 바깥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트래비스 맥기의 배 '버스티드 플러쉬'

그런데 90년대 이후에는 변화가 온 것 같기도 합니다. 데니스 루헤인의 <신성한 관계>나 마이클 코넬리의 <트렁크 뮤직>을 보면, 주인공들이 사건을 해결한 뒤 휴양지에서 마음을 식히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더군요. 요즘 작가들은 탐정(혹은 형사)에게도 복지혜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멀리 휴가를 갈 틈이 없으면 생전 가보지 못한 곳을 배경으로 한 흥미진진한 작품을 읽으며 기분을 전환하는 것이 어떠신지요. 좋은 책 몇 권으로 한여름의 더운 날씨가 계속될 때에는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피서 방법으로서도 으뜸이 아닐까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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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7.09 2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휴가지에서의 살인 사건 역시 추리물에서 아주 중요한 배경이 될 수 있지요, 개인적으로 그러한 작품으로 크리스티의 <나일강의 죽음>과 <백주의 악마>를 좋아합니다. 저도 책을 펴면 곧장 바다 냄새가 날 정도로 생생히 휴양지 풍경을 묘사한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하나를 잘 하면 다른 것도?

자, 이제부터 원고지를 꺼내 추리소설을 쓰기로 하자.
그러나 어디까지나 여러 번 충고한 대로 한낱 부업으로서 말이다.
- <부업으로서의 추리소설>(1989) / 노 원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직업은 매우 다양합니다. 에드거 앨런 포가 창조한 최초의 탐정 뒤팽은 ‘몰락한 귀족 집안의 자제’라고 완곡하게 돌려 설명하고 있지만 지금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고학력 실업자’이겠지요. 이후 등장한 주인공들 중에는 탐정, 경찰 등 범죄를 다루는 것이 직업인 인물들도 있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처럼 살던 마을을 좀처럼 떠나지 않는 할머니라던가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같은 성직자 등 다양한 직업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인물들을 만들어낸 작가들은 원래 무슨 직업을 가졌을까요?
아마도 어릴 때부터 작가를 지망한 문학 지망생들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소름끼치는 작품 <사이코>를 쓴 로버트 블록은 그런 대표적인 작가 중 하나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미국의 고전적 공포물 작가 H.P.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아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17살 때 펄프 잡지에 첫 작품이 실리며 일찌감치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성년이 된 후에는 광고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을 가진 채 작품을 써 오다가 <사이코>의 성공에 힘입어 전업 작가가 되었습니다.

로버트 블록(1917-1994)

이렇게 블록처럼 차근차근 작가의 입지를 다져 나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반드시 이렇게 순탄한 길을 밟아온 작가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반드시 고생한 것은 아닐지라도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 못지않게 원래 직업도 다양했습니다.
우선 범죄와 늘 마주치는 법조계 인사가 추리문학계로 여럿 투신했습니다. 이들 법조계 인사들 중에는 변호사가 가장 많은데, 최고참을 꼽으면 <월장석>(1868)의 작가인 영국의 윌키 콜린즈이며, 그 뒤를 ‘엉클 애브너’ 시리즈의 멜빌 데이비슨 포스트가 이어갑니다. 변호사 페리 메이슨 시리즈의 작가 얼 스탠리 가드너는 그가 소설 대신 변호사 업무에 전념했다면 미국 역사에 남을 뛰어난 변호사가 되었으리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유능했으며 현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중 하나인 존 그리셤 역시 변호사 출신입니다. 또한 하버드 출신의 스콧 터로우나 한때 지방검사국에 근무했던 리처드 노스 패터슨 등은 현직 변호사로 활동 중인 작가들입니다.

윌키 콜린스 (1824-1889)

한편 직접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이나 탐정 출신 작가도 있습니다. 하드보일드 작가 대쉴 해미트는 유명한 핑커튼 탐정사에 14년 동안 근무했으며, 해미트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 <해미트>의 작가 조 고어즈도 3년간 로스앤젤레스의 탐정 사무소에서 재직했습니다. 경찰 출신 작가로는 영국의 존 웨인라이트와 미국의 조셉 웜보가 대표적인데(웨인라이트는 22년, 웜보는 14년 근무), 이들은 천재나 영웅 대신 인간적인 경찰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형사 크리스티 오패러를 창조한 여성 작가 도로시 유낙도 경찰 근무 경력이 10년 이상이라고 하네요.

경찰 출신 작가 조셉 웜보(1937-)

제임스 본드, 007라는 불멸의 스파이를 창조한 이언 플레밍은 2차대전 중 해군 정보부대에서 복무했기 때문에 첩보임무가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플레밍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007 시리즈를 쓰기 시작했는데, 60년대에 3백만 달러 이상의 거액을 벌어 들였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입니다.

전설적인 탐정 셜록 홈즈를 만들어낸 코난 도일이 의사였다는 것은 웬만한 추리소설 팬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도일 이후의 의사 출신 작가로는 영국의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이 있습니다. 의사이자 박물학자이며 토지 측량원 등 다양한 재능을 가진 그는 건강이 나빠져 의사 생활을 그만둔 후 홈즈의 인기에 영향을 받아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주인공으로 검시관인 손다이크 박사를 내세운 그는 <노래하는 백골>에서 범인이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을 처음부터 보여준 후 “범인이 누구인가”보다 “범인이 어떻게 잡히는가”에 중점을 두어 도치서술형 추리소설(일반적으로 도서 미스터리라고 불리죠)을 창안했으며, 또한 과학수사를 강조했습니다. 의사 출신 작가로는 하버드 의대 출신의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로빈 쿡, 마이클 파머, 일본의 가이도 다케루 등이 있는데, 그들은 의학적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추리소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가이도 다케루 (1961-)

여성 검시관이라는 흔치 않은 직업의 케이 스카페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퍼트리샤 콘웰의 약력을 보면 작가가 되기 전 검시실에서 근무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검시관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고 사무직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녀가 실제로 메스를 잡진 않았을지라도 검시실의 분위기를 충분히 묘사할 수 있을 만큼 자세히 파악하고 있음엔 틀림없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비디오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며 엄청난 양의 영화를 본 다음 영화감독의 싹을 키웠던 것으로 유명한데, 제임스 해들리 체이스는 백과사전 세일즈맨, 서점 직원으로 일하다가 하드보일드에 흥미를 느껴 많은 양의 펄프 잡지들을 탐독한 후 6주 만에 탈고한 <미스 블랜디쉬의 난>으로 순식간에 성공의 길을 걸었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폭력 묘사로 논란도 일었지만 삽시간에 5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체이스를 서점 직원에서 작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여배우 밀레느 드몽조를 앞에 두고 집필중(?)인 체이스. 글이 써질까요?

트릭이 추리소설의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면 트릭을 생명으로 삼는 마술사라면 추리소설을 잘 쓸 수 있지 않을까요? 1938년 <Death from a Top Hat>으로 데뷔한 클레이튼 로슨은 마술사인 그레이트 멀리니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는데, 작가 자신도 그레이트 멀리니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오른 마술사였으며 마술에 관한 책을 집필할 정도로 조예가 깊었습니다. 일본에도 마술사 출신 작가가 있습니다.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 작가인 아와사카 츠마오(泡坂妻夫)는 일본 마술계의 큰 상인 이시다 덴가이(石田天海)상을 받았으며, 문장(紋章)화가로도 활동하고 있어 어떤 것이 본업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군요.
직업이라고 하기는 좀 뭣하지만 범죄자 출신 작가도 있습니다. 이들은 예전에 소개한 바 있기 때문에 일화 한 토막을 대신 소개하겠습니다. <Jackrabbit Parole>(1986)을 복역 중에 집필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캐나다 출신의 스티븐 리드가 1999년 6월 브리티시 콜롬비아에서 은행 강도 현행범으로 체포되었습니다. 16살 때부터 1백 40여 차례 이상의 은행 강도 행각을 벌이며 1천5백만 달러를 훔친 리드는 항상 스톱워치를 들고 1분 30초 내에 달아났기 때문에 ‘스톱워치 갱’이라는 별명이 붙은 강도단의 두목이었습니다. 1980년 30세로 체포된 리드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자 87년 출감 후 대학에서 문예창작 강의를 하고 영화나 TV에도 출연하며 다채로운 활동을 벌여왔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다시 범행을 저지르다가 잡힌 것입니다.

2008년의 스티븐 리드

과거의 솜씨나 경력은 화려했을지 몰라도 약 20년 만에 다시 은행을 털기에는 시대에 너무 뒤떨어진 인물이 된 것 같습니다. 복역한지 18년 만인 2008년에 석방되었다고 합니다만… 역시 경험을 살려 책을 한 권 더 쓰는 것이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훨씬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군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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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7.02 10: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가들의 전직이 그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게 마련입니다. 체스터 하임즈 역시 전과자 작가로서 뉴욕 뒷골목이나 할렘을 생생하게 묘사하기로 유명하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마벨의 사랑>도 보고 싶습니다.


 

사람의 가장 가까운 벗 


모든 개들에겐 벼룩이 있지 - 그게 보통 개라면 말일세
- 파(Parr) 경찰국장
 - <The Recoil>(1930), 프레드릭 어빙 앤더슨


사람과 가장 친숙한 동물을 꼽으라면,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꽤 많은 사람이 개를 선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물론 저도 개를 무척 좋아합니다^^).

강아지는 어린 아이의 벗입니다^^

 

예전에는 개가 가축에 속했지만 요즘은 반려동물이라고 하죠? 모양이나 크기는 제 각각이지만 묘하게도 무조건 주인에게 충성한다는 점은 모두 같은 개들은 애완용에서부터 경비용, 맹도견, 썰매 끄는 개에서 심지어는 식용, 약용(!)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면으로 사랑 받고 있습니다. 또한 개에게는 충성 유전자가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전설이건 실화건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개 이야기는 웬만한 나라에는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개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벙어리 목격자>의 책머리에는 당시 키우던 테리어 종 개 피터에 대한 헌사가 실려 있습니다. 한편 다소 괴팍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하드보일드 작가 제임스 엘로이는 자신을 미친 개(mad dog)’라 불러달라고 하는데, 그러는 것이 개에게 욕이 되는 건지 칭찬이 되는 건지 알쏭달쏭하네요.

크리스티의 애견 '피터'. 딸인 로자먼드가 데리고 있습니다

추리소설에서 비중 있게 등장하는 개들은 흔히 두 가지 역할 중 하나, 즉 범죄를 저지르는 쪽의 개와 범죄를 해결하는 쪽의 개 중 하나를 맡게 되는데, 비록 범죄자 측면에 있는 개들이라도 어쨌든 자신의 맡은 일에 충실했음이 틀림없기 때문에 개보다는 그 주인들이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범죄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 개들을 한번 살펴볼까요. 개의 냄새 맡는 능력은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사냥감을 찾는데 쓰였으며, 현대에는 마약이나 폭발물을 찾아내거나 인명을 구조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여러 차례 개들을 등장시켰습니다. 홈즈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인 <주홍색 연구>의 첫머리에는 왓슨이 불독 새끼를 한 마리 기르고 있다고 했으며(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불독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숙집 주인인 허드슨 부인의 병든 개는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약이 독약인지 아닌지 실험하는데 쓰였습니다. <네 사람의 서명>에서는 생김새가 볼품없지만 냄새 맡는 데는 대단히 뛰어난 ‘토비’라는 잡종 개가 범인을 추적하는 역할을 했지요.
하지만 세상에는 경찰견 같은 특별한 훈련을 받은 개보다는 일반 가정에서 키우는 애완용 개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또 덩치는 작아도 잘 짖는다면 충분히 경비견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가정용 개의 평범하지 않은 행동은 사건 해결에 결정적 단서를 줄 때도 있습니다. 역시 홈즈 시리즈 중 하나인 <실버 블레이즈>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왓슨 : “달리 내가 주의해야 할 만한 것이 있을까?”
  홈즈 : “그날 밤 강아지의 낌새가 이상했던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네.”
  왓슨 : “강아지는 그날 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홈즈 :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즉,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강아지가 짖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내부 사람에 의한 범행임을 홈즈는 금방 파악한 것입니다.

앤드류 복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전과 27범의 무허가 탐정 버크(Burke)는 격투에 능하고 총도 잘 쏘지만 뉴욕의 뒷골목에 사는 만큼 집을 비울 때는 자신의 개인 팬지에게 집의 경비를 맡깁니다. 1백kg이 넘는 매스티프종 개에다가 하필이면 꽃 이름을 붙여 준 이유는 만약 개가 사람을 물었을 때, 그 개의 이름이 공격적이라면 재판에 불리하다는 변호사의 충고에 따른 것이라고 하네요(작가인 복스는 변호사입니다!). 이름만 별난 것이 아니라, 훈련도 반대로 시켜 놓았습니다. 이를테면 ‘앉아’라고 하면 덤벼들고, ‘덤벼’하면 앉게 했는데 이 모든 것이 적을 속이기 위한 것이지요.

최근에 번역된 작품 중에는 가스미 류이치의 <롱 도그 바이>라는 독특한 작품이 있군요 (제목이 어째 눈에 익다 싶으시겠는데, 레이먼드 챈들러의 <롱 굿바이>를 따온 것이죠). 이 작품의 주인공은 짐작하시다시피 애로우라는 이름의 잡종 개입니다. 개들 사이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그 주인공을 돕는 것도 개들이죠. 사람은 별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개판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스미 류이치와 애견 '하치' (작가 홈페이지에서)


악당들은 개들을 범죄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개들에게는 야성의 본능이 조금씩은 남아있기 때문에 어떤 계기에 의해 폭발하게 되면 순한 애완견에서 맹수로 변신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홈즈 시리즈 중 하나인 <배스커빌의 가문의 개>는 개를 범죄에 사용한 대표적인 작품이자 코난 도일의 최고 걸작으로 꼽힙니다. 명문 집안 배스커빌 집안의 헨리 경이 변사체로 발견되는데, 그의 얼굴은 공포로 인해 격심하게 일그러져 있고, 근처에는 거대한 개의 발자국만 남아 있습니다. 화자(話者)인 왓슨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때 안개의 둑에서 튀어나온 저 시커먼 형체와 야만스러운 얼굴보다 더 잔인하고 처참하며 흉악한 것을 꿈꿀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추리소설에 등장한 가장 무시무시한 개가 아닐까요. 이에 맞먹는 개로는 스티븐 킹의 <쿠조>에 등장하는 광견병에 걸린 세인트버나드 종 쿠조 정도를 꼽겠습니다.

이것이 배스커빌 가문의 '무서운' 개(?)의 기념엽서입니다.


훈련된 개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너무 단순해 보였는지,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한 작품도 나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조건 반사를 이용한 범죄. 소련의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는 개를 이용한 조건 반사 실험으로 1904년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이 실험 내용은 다 아시겠지만, 개에게 먹을 것을 줄 때 종을 울리는 일이 되풀이되면 나중에는 음식 없이 종만 울려도 개가 침을 흘리게 된다는 것이지요. 일본의 어느 작품(아직 번역되지 않았습니다만 제목은 좀 숨겨놓지요)에서는 이런 조건 반사를 범죄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산장(山莊)에 사는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산장의 사나이는 개를 좋아하며, 절벽 쪽에 서서 ‘야호’ 소리치는 습관이 있습니다. ‘절벽’ - ‘야호’ - ‘개’라는 세 가지를 연결시킨 악당은 궁리 끝에 손 안대고 죽이는 방법을 고안해 냅니다. 덩치 큰 세인트 버나드 종 개를 한 마리 사서, ‘야호’하며 소리친 후 개가 먹을 것을 보고 달려들어 주인의 양 어깨에 두 다리를 걸치게 하는 조건 반사 훈련을 시킨 것이지요. 과연 어떻게 될까요? 어쨌든 기발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아이디어입니다.

조르주 심농의 <황색 개>에서는 프랑스 서북부 어촌마을에서 사람들이 총에 맞고 실종되고 여러 가지 변고가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사건 현장에는 누런 개 한 마리가 어정거리죠. 마스티프 종인 것 같기도 하고 불도그 같기도 한 그 개가 총을 쏘고 사람을 잡아가고 그러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만….

어쨌든 개만큼 사실과 다르게 표현되는 짐승도 없는 것 같습니다. ‘개보다 못하다’는 말에서부터 ‘제 버릇 개 못 준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등의 속담이라던가, 화날 때 쓰는 욕에 이르기까지 흔하게 쓰는 일상용어들을 개가 알아듣는다면 무척 섭섭하지 않을까요. 개들에게 요즘 세상을 평가하라고 한다면 혹시 ‘우리들보다 못하다’ 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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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4.14 23: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물을 주제로 한 미스터리도 좋지요, 사람의 성격에 동물적인 특징을 대입해도 좋을 것 같고..., 예를 들어 범행을 하는데 이 사람이 미끼 구실, 저 사람이 사냥개 구실 등을 했다는 방법도 좋겠습니다. 저도 동물을 좋아해 동물 관련 미스터리도 써보고 싶습니다.

  2. 행인3 2011.04.24 02: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들 본질이 그런 가봐요.
    머리 나쁜 강아지로 소문난 X추를 키우는데 요놈은 자기 주인 돌아오기 한시간 전에 (어스름해지기 시작하면) 현관에 딱 앉아있어요. 눕지도 않고 대문만 바라보고 딱 앉아서 기다리는데 그걸 보고 있는데 괴롭습니다. 가끔씩 발이 저린지 섰다가 다시 앉곤 하는데 한시간을 그렇게 앉아있으니 보는 게 부담스럽고...참...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진짜보다 더 진짜다울까?

중년의 삶이란 언제나 젊은 시절 꿈의 패러디라고 누가 말했던가?

 - <Better Off Dead>(1951), 헬렌 맥클로이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모든 작품은 코난 도일이 썼다’

위의 문장은 맞는 말일까요? 답부터 밝히자면 ‘아니오’입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모든’ 작품을 쓴 것은 아닙니다. 셜록 홈즈라는 명탐정을 탄생시킨 사람은 분명히 코난 도일이지만 그 이외의 많은(셀 수 없을 정도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홈즈를 등장시켰습니다. 홈즈 이야기는 조금 뒤에 설명하겠지만, 특정 작가가 창조해 낸 주인공을 다른 작가가 차용해 작품을 쓰는 것은 대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패러디(parody), 다른 하나는 패스티쉬(pastiche)입니다. 우리나라도 90년대 후반부터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용어들이 일반인에게도 익숙해졌는데, ‘패러디’도 그런 용어 중 하나입니다. 패러디란 원래 작품을 약간 비꼬거나 희화(戱畵)한 풍자물이지요. 한편 패스티쉬는 원래 작품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으로 모방하는 것으로 안작(贋作)이라고도 합니다. 오마주니 헌정작이니 뭐 파고 들어가면 더 많겠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셜록 홈즈 시리즈는 추리소설이면서 모험소설이기도 하고 스파이소설(브루스 파팅턴 설계도, 최후의 인사 등)이기도 하며 공포소설(배스커빌 가문의 사냥개, 서섹스의 흡혈귀 등), SF 소설(기어다니는 사람 등)이기도 합니다. 이런 넓은 스펙트럼과 확실한 캐릭터, 그다지 어렵지 않은 문장과 약간은 정형화된 패턴. 이 정도의 멍석이 깔려 있다면 ‘나도 한 번쯤은…’ 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겠죠.

유명해지면 모조품이 금방 나오는 것처럼, 등장하자마자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명탐정 홈즈의 모방 작품은 일찌감치 등장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소설가이며 도일의 친구이기도 한 로버트 바(Robert Barr)는 홈즈의 이름을 절묘하게 바꾼 ‘셜로 콤즈(Sherlaw Kombs)’가 등장하는 단편 <The Great Pegram Mystery>를 1892년 발표했습니다. ‘진짜’ 홈즈가 등장하는 첫 번째 단편인 <보헤미아의 추문>이 발표된 것이 1891년이니, 불과 1년이라는 짧은 사이에 등장한 것이지요.

'The Great Pegram Mystery'의 삽화(오른쪽이 셜로 콤즈). 홈즈와 별로 다른 점이 없어 보입니다

한편 괴도 뤼팽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모리스 르블랑도 자신의 단편 <한 발 늦은 셜록 홈즈>(1904)에 홈즈를 등장시켰습니다. 문제는 홈즈를 멍청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죠. 유능한 인물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다가 정작 뤼팽과의 대결에서는 거듭 실수를 저지르고 뒤통수를 맞으니 도일의 심기가 편할 리는 없었습니다. 르블랑은 도일의 항의를 받자 머리글자만 앞뒤로 돌려 ‘에를록 쇼메스 Herlock Sholmes’라는 이름으로 바꿔놓았는데, 나중 작품 <기암성>(1905)에서는 총을 마구 쏘아 대는 인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게다가 자신은 첫 번째 뤼팽 시리즈(홈즈가 등장한 지 20년 후 발표)를 쓸 때까지만 해도 코난 도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해 홈즈 팬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아르센 뤼팽 대 에를록 쇼메스' 영어판 표지

어쨌든 장 단편을 통틀어 60여 편의 오리지널 홈즈 시리즈를 남긴 도일은 ‘홈즈’라는 이름에 저작권 설정 등의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탓에 지금까지 7천여 편 이상의 ‘가짜’ 홈즈 시리즈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목록만으로도 책을 한 권 만들 수 있을 것 같군요.

한편, 홈즈 못지않은 명성을 얻은 뤼팽도 다른 작가의 작품에 등장했습니다. 르블랑이 작고한 후 프랑스의 서스펜스 작가인 피에르 부알로와 토마 나르스자크가 합작으로 모험소설에 가까운 속편을 발표했는데, 여기서는 뤼팽이 범죄자라기보다는 모험가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뤼팽 역시 르블랑이 생각조차 못했을 아시아에서 수모를 당했다. 뤼팽은 에도가와 란포의 <황금가면>에서 일본의 보물을 노리고 프랑스 대사로 변장해 잠입에 성공하지만,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明智小五郞)와의 대결에서 보기 좋게 패해 도망치는 망신을 당합니다.

유명하기로는 이들에 뒤지지 않는 007 제임스 본드도 모방품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몇 가지 흥미 있는 패러디를 살펴보죠.

1964년 도널드 스탠리(Donald Stanley)는 <홈즈, 007을 만나다(Holmes Meets 007)>를 잡지에 발표했는데, 3년 후 1에서 221B까지의 번호가 붙어 있는 222권의 한정판 책으로 만들어 발간했습니다(221B는 아시다시피 홈즈의 하숙집 주소입니다).

․ 윌리엄 헨리 놀스(William Henley Knoles)가 클라이드 앨리슨(Clyde Allison)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0008 시리즈는 본드 패러디 중에서 아마도 가장 구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60년대에 모두 20권이 나온 이 시리즈는 내용이 보잘것없지만, 전집이라면 값이 5천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0008' 시리즈 중 하나인 'Gamefinger'. 007 시리즈의 제목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 003 1/2은 007의 절반일까요? R.D. 매스콧(R. D. Mascott)은 1967년 <003 1/2: 제임스 본드 주니어의 모험(003 1/2: The Adventures Of James Bond Junior)>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본드의 조카인 제임스 본드 주니어가 주인공으로 활약합니다.

'제임스 본드 주니어의 모험'

․ 이름을 읽으려다 당황하게 되는 ‘I*n Fl*m*ng’의 <앨리게이터(Alligator)>(1962), 발음은 비슷하지만 철자가 다른 이언 플레밍(Ian Phleming)의 <푸시 라무르와 세 마리 곰(Pussy L’Amour And The Three Bears)>(1965), 그리고 아이 엠 플레이밍(I. M. Flaming)의 <스네이크핑거(Snakefinger)>(1966) 등은 작가의 이름까지 패러디한 작품입니다.

이런 모방 작품에 대해 달갑게 여기는 작가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코난 도일의 아들 에이드리언 도일은 추리소설가 존 딕슨 카와 함께 패스티쉬 작품을 모은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Exploits of Sherlock Holmes)>(1954)을 엮기도 했지만, 엘러리 퀸이 엮은 패러디 작품집 <셜록 홈즈의 재난(The Misadventures of Sherlock Holmes)>(1944)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항의해 결국 판매금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셜록 홈즈의 재난'

푸아로나 미스 마플을 창조한 크리스티, 캐드펠 수도사 시리즈를 쓴 엘리스 피터즈는 이와 비슷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자신의 주인공을 더 사용하지 못하게 법적인 조치를 취해 놓았지요. 그들은 평생 동안 애지중지 키워왔던 자신들의 소설 속 등장인물이 혹시라도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그러하였을 겁니다. 홈즈나 왓슨이 상상도 못할 만큼 다양한 모양으로 수많은 작품에 나타난 것을 보면 그들의 결정은 그다지 놀랍거나 이해 못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막아 놓더라도 완벽한 것이란 없습니다. 명탐정들은 워낙 개성이 강하기 때문에, 특징만 제대로 묘사해 놓으면 설령 이름이 바뀌더라도 원래 누구였는지 쉽사리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5인의 명탐정(Murder by Death)>(1976)은 이런 식의 패러디 영화로 가장 대표적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마일로 페리에, 제시카 마블스, 샘 다이아몬드, 딕과 도라 찰스턴, 시드니 왕인데 이들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엘큐울 푸아로, 미스 제인 마플, 대쉴 해밋의 샘 스페이드, 닉과 노라 찰스 부부, 얼 데어 비거스의 찰리 챈의 이름을 바꾼 것으로 추리소설 팬들이 보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제는 인터넷의 세계적 보급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패러디, 패스티쉬 작품들이 발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쓴 글을 어렵지 않게 여러 사람 앞에 내 놓을 수 있게 되었고, 이어 열성 팬들이 자신의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킨 팬 픽션(Fan Fiction)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죠. 마니아층이 두터워지면서 팬 픽션은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SF, 영화, TV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에서 넘쳐나고 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상상력도 늘어나는 것 같네요.

얼마 전 소식을 보니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영화가 제작된다고 하던데, 원작과는 달리 젊은 시절 이야기라고 하네요. 제작사가 디즈니라고 하니 도대체 어떤 내용이 될지 궁금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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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3.30 1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플의 젊은 시절이라..., 저도 한 번 써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영화로 나오는군요, 마플이 1930년도에 등장했을 때 65~70세 정도였으니 젊은 시절이라면 50여년 전인 1880년대라는 계산이 나오는데, 그 때를 배경으로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1891~1894년 셜록 홈즈의 공백기에 마플이 활동한다든지 하면 재미있을 것 같군요.

  2. 카메라이언 2011.04.03 00: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헤헷, 그러고 보니 제가 제일 처음 본 셜록 홈즈가 나오는 코난 도일이 쓰지 않은 소설은 기암성이었나 봐요. ///ㅅ/// 중학교 때였나 초등학교 때였나 ... ...

  3. 블랙애더 2011.08.10 2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디즈니의 마플 역에 제니퍼 가너 소식은 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쌓아온 이미지만으론 요즘 TV에서 나오는 다른 수사 미드(CSI, NCIS, 본즈, 탐정 몽크)랑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소설보다 더욱 극적인 사람들

"당신 여권에는 작가라고 되어 있지만, 그건 아주 융통성 있는 단어이지요."
- 피터스가 라티머에게
   - <디미트리오스의 관>(1939)  에릭 앰블러

추리소설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주인공에게 특유의 개성을 불어넣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왔습니다. 사실상 천재 탐정이 드물게 된 요즘도 주인공의 독특한 개성을 살리기 위한 작가의 노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을 만들어 낸 작가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탐정보다 더 기발하고 괴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도 같지만 실제로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인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히 숨기려는 작가도 드물지 않습니다. 장님 탐정 맥스 캐러도스 시리즈의 작가 어네스트 브라마는 출생연도까지 불분명하며(그의 출생연도는 자서전적인 소설에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사람에게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싫으며, 내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도 싫다”고 돌려보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작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추리작가협회에서는 매년 ‘여름추리소설학교’를 여는데, 그 행사에는 우리나라 작가들이 많이 참가하죠. 여기 참가한 추리소설 애호가들은 평범하고 어쩌며 소심해보이기까지 하는 작가들을 직접 만나보고 놀랐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곤 합니다. 속으로는 어떻게 기발한 범죄를 궁리하고 있습니다만 외모만으로는 어디서나 마주칠 만한 평범한 사람들이죠.

하지만 거의 은둔자처럼 살았던 브래머와는 달리 이런 저런 기벽(奇癖)이 전해져오는 유명 작가도 있습니다.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제공하려고 추리소설을 썼다’는 에드거 앨런 포는 천재적인 재능과 함께 반항적인 기질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불우한 성장 배경 탓일지는 몰라도 그는 평범함보다는 파격적인 면을 추구했습니다. 힘들게 들어간 웨스트포인트(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명령불복종’과 ‘의무 불이행’으로 퇴학당하는 등 타고난 반골 기질도 있었죠. 워낙 인생이 파란만장한 터라 그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도 여럿 있습니다. 몇 년 전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매튜 펄의 <포의 그림자>와 조엘 로즈의 <가장 검은 새>가 번역되었고, 얼마 전 출간된 앤드루 테일러의 <아메리칸 보이>는 소년 시절의 포가 등장합니다.

소년 시절의 포가 등장하는 '아메리칸 보이'


코난 도일은 젊은 시절 심령술, 신비학(神秘學), 강령술(降靈術)에 관심을 가졌다가 나이를 먹은 후에는 관심 수준을 넘어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습니다. 지극히 과학적인 상식을 지닌 홈즈라는 탐정을 만들어 냈으며, 원래 의사였던 그가 말년에 심령술 신봉자가 된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만…. 도일이 심령론을 신봉할 것을 공언하고 그 선전과 전도에 나선 것은 제1차 대전 끝 무렵부터였으므로, 그런 미신적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전쟁 중에 장남 킹슬리를 비롯한 많은 친지를 잃고 마음의 균형을 잃은 탓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도일은 고고학 사상 최고의 사기극으로 일컬어지는 ‘필트다운 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필트다운 인 사건’이란 1912년 아마추어 고고학자 찰스 도슨이 영국 필트다운에서 발견한 원시인 두개골 화석이 사람과 오랑우탄의 턱뼈를 인위적으로 합성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 근 40년이나 지나서야 밝혀진 사건이지요.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주모자로 지목되었던 찰스 도슨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 확실한 진상이 드러나지 않은 이 사기극의 주모자로 도슨을 비롯한 주변의 고고학자들을 꼽고 보고 있지만 약 70년 후 이 사건을 연구한 미국의 고고학자 존 윈슬로(John Winslow)는 당시 필트다운 근처에 살았고 1912년에는 공공연히 발굴현장 근처를 자주 방문했던 코난 도일을 조심스럽게 용의자로 보고 있습니다. 도일은 장난을 꾸밀만한 기술, 지식, 기회를 모두 갖춘 인물로서 신비학을 부정하는 과학자들을 한 번쯤 골려주겠다는 동기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도일의 작품 <잃어버린 세계>에 나오는 가상 지역의 지도와 필트다운 근교의 지형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며, 소설 속에는 뼈의 위조나 장난에 대한 의미심장한 대화가 나오는 것을 볼 때 필트다운의 사기극은 <잃어버린 세계>의 플롯을 기초로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윈슬로에 따르면 도일은 이 사건이 밝혀지기를 바라는 듯 여러 가지 어처구니없는 실마리 - 이를테면 크리켓 경기에 사용하는 배트 모양의 용도불명의 코끼리 다리뼈(코난 도일은 뛰어난 크리켓 선수였습니다), 턱뼈가 발견된 곳에서 3km이상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어금니 등 -를 던져 놓았지만 과학자들은 이들을 무신경하게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과연 도일이 범인이었다면 그의 장난이 성공해서 즐거워했을지 아니면 어이없어했을지 궁금합니다.

밀실을 다룬 고전 <노란 방의 비밀>과 뮤지컬로 유명한 <오페라의 유령>의 원작자 가스통 르루도 자신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못지않은 기발한 장난기가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기자였던 르루는 형무소에 있던 귀족과의 인터뷰를 위해 서류를 위조, 동료 기자들을 따돌리고 당당히 특종을 따 낸 일화가 있습니다. 또한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르루의 작품 집필 때의 습관도 유명합니다. 그가 서재 안에 틀어박혀서 작품을 쓸 때면 온 집안은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생활해야만 했습니다. 작품을 끝내는 순간 그는 창문으로 뛰어가 총을 쏩니다. 그러면 그 신호에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부엌으로 달려가 접시들을 깨뜨리고 냄비들을 두들기며 온 집안이 떠나갈 듯이 한바탕 시끄러운 소리들을 내며 집안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작품을 끝냈으니 화끈하게! 가스통 르루의 캐리커쳐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원작자인 여성 작가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역시 기발한 재능과 독특한 장난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와 가까운 곳에 살았던 추리작가 도로시 솔즈베리 데이비스의 기억에 의하면, 어떤 만찬에 참석한 하이스미스는 느닷없이 주머니에서 애완용 뱀 두 마리(민달팽이라는 이야기도 있네요)를 테이블에 꺼내 놓고 주변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놀라는 모습을 태연스럽게 살펴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생애의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낸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1995년 작고할 때 예상대로(?) 놀라운 유언장을 남겼습니다. 데뷔작인 <낯선 승객>(1950)을 쓸 때 머물렀던 뉴욕 주 북부의 한 예술인 공동체 마을에 3백만 달러라는 그녀의 유산을 모두 기증한 것이지요. 이 일은 마을 공동체 1백년 역사상 한 사람의 기증으로서는 최고액의 선물이었다고 합니다.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의 젊은 시절. (작품집의 표지입니다)


2차대전 이후 일본 추리문학계에서 큰 활약을 보인 다카키 아키미츠의 성공은 미신과도 같은 믿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일본의 패전 후 직업을 얻지 못해 2년 동안이나 실업자로 지내던 그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소설, 그것도 장편소설을 쓰면 성공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점괘가 나왔습니다. 그때까지 문학 수업 같은 것은 해 본적도 없었던 그에게는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었지만 점괘를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학생 시절 추리소설을 즐겨 읽었던 그는 추리소설을 선택했으며, 전쟁 후 물자 부족으로 원고지도 없어 잡다한 종이에 약 6백매 정도의 장편을 3주 정도 걸려 단숨에 써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부푼 꿈을 안고 출판사 이곳저곳에 원고를 가져갔지만, 인쇄용지도 부족한 판국에 이름도 없는 젊은이가 쓴 장편소설을 상대해 주는 곳이 있을 리가 없지요. 여기서 그는 다시 한 번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대가(大家)에게 이 원고를 보내면 인정받을 것이고, 그럼 성공할 것이다’라는 낙관적인 점괘가 다시 나오자 그는 원고지에 깨끗하게 다시 쓴 후 당대 최고의 추리작가 에도가와 란포에게 원고를 보낸 것이죠. 란포는 이 무명 청년의 작품을 읽은 후 참신한 내용에 감탄해서 출판을 주선해 주었습니다. 바로 이 작품은 일본 추리소설 역대 베스트 10에 들어가는 <문신 살인사건>(1948)이며 주인공으로 등장한 가미즈 교스케는 최고의 천재 탐정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수많은 추리소설을 썼을 뿐만 아니라 <점의 인생론>, <방위학(方位學)입문>, <상성(相性)판단>등 일련의 점술 관련 서적을 집필하며 점술의 전면적 신봉자임을 밝혔습니다.

점을 신봉했던 다카키 아키미츠

사실 그의 점에 대한 믿음은 고등학교 시절 부친이 많은 빚을 남긴 채 급서(急逝)하고 자신은 폐결핵에 걸려 고생하게 되었을 때, 부친의 친구에게 손금 점을 본 후 점괘가 절반 이상 들어맞는 것을 보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는군요.

어쩌면 작가들의 인생만 살펴봐도 웬만한 소설보다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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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3.10 0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글을 쓸 때의 버릇은 특별히 없습니다만, 굳이 하나 든다면 밤에 써야 더 잘 써지더군요.

  2. 시무언 2011.03.10 01: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코난 도일같은 경우는 실제로 사건을 해결하기도 했죠. 그것도 어찌보면 괴짜고...

  3. 카메라이언 2011.03.10 03: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머나, 어쩜 좋아요. 전 너무 평범한 것 같아요. 꺅. ==33 후다닥 도망.

  4. 갈매 2011.03.11 15: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특이한 기벽이, 기질이 있어야 작가가 되는 것일까요? ^^

  5. 행인2 2011.03.11 22: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패트리셔 하이스미스 선생, 정말 멋집니다^^
    '태양은 가득히'나 '낯선 승객'이나 정말 대단한 작품인데.

  6. myungworry 2011.03.14 2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패트리셔 하이스미스....예쁘군요. 물론 소설도 좋습니다만.

  7. Miss Baby 2011.05.21 14: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카키 아키미츠의 문신살인사건 북리뷰를 하기 위해 작가 리서치하는 도중 재밌는 내용을 발견했네요:-) 출처 밝히고 내용을 발췌했습니다만, 읽어보시고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코멘트 달아주세요.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블로그 자체에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아서 많이 읽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http://jaera1990.blog.me/130109318644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원작 그림이 가진 열정과 자연스러움- 즉 elan(열의) -은 흉내 낼 방법이 없지.
모사품은 아무리 원작과 닮았더라도 둘 사이에는 큰 심리적 차이가 있어.
모사품에는 진지함이 결여되고 너무 완벽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 흔적이 남아 있다네.
   
- 파일로 밴스
<카나리아 살인사건> (1927) S.S. 밴 다인
 
인터넷 이용은 일상생활이 되어버린지 이미 오래로군요. 그러면서 개인이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이 많아지자 예전에는 드물었던 일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표절 문제입니다. 여러 홈페이지에 있는 내용들을 '복사 및 짜깁기'해서 학교 숙제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하네요. 이렇게 타인의 노력을 어려움 없이 가로채는 비양심적인 표절 행위는 학술 논문이나 음악, 방송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문학 부문에서도 꽤 오래 전부터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심지어 일간지 신춘문예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도 있을 정도니까요. 대신 인터넷의 엄청난 전파력 덕분에 빨리 들통나기도 합니다만

특히 추리소설은 작품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비슷한 트릭을 사용하기만 해도 오해를 살 여지가 있습니다. 작가 입장에서는 기발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다른 작품에 나온 비슷한 아이디어가 사용된 것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비슷한 느낌이 드는 작품이라고 해서 모조리 표절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추리소설이 표절로 의심받는 경우는 트릭이 비슷할 때, 혹은 상황이나 구성이 비슷할 때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1926)은 범인의 의외성만으로 평가하자면 역대 최고 작품 중 하나인데, 놀랍게도 그보다 9년 전 거의 비슷한 트릭을 사용한 작품이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스웨덴 해군 장교이자 소설가인 새뮤얼 아우구스트 두제가 1917년 발표한 <스미르노 박사의 일기>가 바로 그것인데, 일기 형식으로 서술된 이 작품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크리스티의 ‘세계적 명성’ 밑에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스미르노 박사의 일기


한편 엘러리 퀸은 크리스티의 작품 제목 때문에 집필하던 작품을 중단한 적도 있습니다. 제목의 표절을 피했다고나 할까요. 퀸은 서구의 전래동요 ‘마더 구즈(Mother Goose)’중에서 ‘10명의 인디언’을 제재로 삼아 <The Indian Club Mystery>라는 제목으로 집필 중이었는데, 크리스티가 먼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발표하는 바람에 도중에서 포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각각 죽이고 싶은 상대가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상대를 바꿔 범행을 저지른다’는 아이디어는 누구든 한번쯤 상상해 볼 수 있었는지 여러 작가가 사용했습니다. <태양은 가득히>로 유명한 여성 작가 패트리셔 하이스미스가 데뷔작 <낯선 승객>(1950)에서 사용한 이 아이디어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던 니콜라스 블레이크의 <A Penknife in My Heart>(1958)에서 다시 나왔습니다. 비슷한 소재라는 것을 알게 된 블레이크는 하이스미스에게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공교롭게도 등장인물의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훗날 프레드릭 브라운의 <교환 살인>(1962), 로렌스 블록의 단편 <핸드볼 코트에서 만난 이방인>(이 작품은 <낯선 승객>과 제목마저 흡사하군요)등이 나왔지만 이미 보편화된 소재라 별다른 시비가 벌어지지는 않았습니다. TV 드라마 <CSI>에서도 이런 에피소드를 다루기도 했지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낯선 승객'


일본 추리소설계의 선구자인 에도가와 란포도 몇 차례 표절 시비에 휩쓸린 일이 있습니다. 그의 데뷔작이 된 단편 <2전 동화>(1923)의 원고를 읽은 잡지사 편집진은 ‘초보 작가치고는 너무 뛰어난 작품’이라 외국 작품의 아이디어를 베낀 것이 아닌지 잠시 의심했다고 합니다. 물론 소재가 일본어 암호였기 때문에 순수 창작물임을 인정받고 오히려 잡지사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행운을 얻게 되었지요. 그러나 란포의 이름이 유명해진 뒤, 그의 단편 <화승총(火繩銃)>이 멜빌 데이비슨 포스트의 밀실을 다룬 단편 <둠도프 사건>(1911)과 유사한 트릭을 사용한 것이 알려지며 약간 표절 시비가 일었습니다. 그러나 란포의 해명에 의하면 <화승총>은 대학 재학 중이던 1915년 잡지에 투고했으나 채택되지 않은 사실상 그의 처녀작으로, 아이디어 자체는 그의 창작이 아니라 미국의 사건 실화집에서 얻은 것임을 밝히며 표절 시비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런 모양의 화승총이었을까요?


트릭의 유사성은 판정이 매우 미묘해서 심사 기준에 의해 희비가 엇갈리기도 합니다. 경마를 소재로 한 <짙은 갈색 파스텔(焦茶色のパステル)>로 28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받은 오카지마 후타리는 1년 전 다른 작품으로 응모해 최종심사까지 올라갔다가 아쉽게 탈락한 경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트릭의 유사성 때문이었지요. 1년 전의 심사위원들은 ‘마권(馬券)을 이용해 훔친 말의 몸값을 받으려 한다’는 트릭이 여류 작가 나츠키 시즈코의 단편 <5천만 엔짜리 남자>에서 쓰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독창성이 결여되었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7년 후 유사한 트릭을 사용한 아베 사토루의 <사라진 항적(消された航跡)>은 요코미조 세이시 상 당선작으로 결정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확실히 줄을 잘 서야 세상살이도 편해지겠군요.

트릭의 유사성만큼은 아니지만 상황이나 플롯이 비슷한 경우도 드물지는 않은 편입니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나이가 자신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동료나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증인들을 찾아 나서지만 증인들은 사라지거나 살해되며 차츰 집행 날짜가 다가온다…

음, 언젠가 읽은 것 같다고 기억하실 분도 계실 것 같군요. 이것은 서스펜스의 거장 윌리엄 아이리쉬의 대표작 <환상의 여인>과 조너던 라티머의 <처형 6일 전> 등 두 작품의 골격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줄거리만 소개해 놓으면 뭔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시겠죠. 아무래도 훨씬 유명한 아이리쉬의 작품을 라티머가 베껴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라티머의 작품이 무려 7년이나 앞서 발표한 것입니다. 물론 이 두 작품은 소재만 비슷할 뿐 내용에서는 큰 차이가 있고 해결 방식도 각각 독창적이라서 읽어보신다면 표절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으실 겁니다.

영화 '환상의 여인' 포스터


표절로 보기 애매한 상황이 또 있군요. 자기 작품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이죠. 코난 도일은 1924년 단편 <세 사람의 가리데브>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30여 년 전에 발표했던 <붉은 머리 클럽>(1891)과 <증권 중개인>(1893)을 섞어 놓은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렇지만 남의 것이 아닌 자신의 작품을 변형해서 쓴 작품이기 때문에 홈즈 연구자들의 불만을 제외하고는 별 논란이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 힘이 떨어진 도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최근(이라 해도 이미 꽤 되었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표절 이야기로는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의 트릭 만화 <김전일>에서 사용된 것이 기억나는군요. 사실 이건 표절이라기보다 트릭을 그냥 갖다 썼기 때문에 주제에서 핀트가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시마다 소지는 이 사건에 대해 특별히 소송을 걸거나 하는 일의 행동을 하진 않았지만, “유례가 없는 트릭이라고 자부하고 있어, 트릭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영상화등의 2차사용은 지금까지 거절해 왔다. 때문에 트릭을 유용하는 텔레비전 기획은 절대로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김전일>시리즈의 이 에피소드는 원작만화로는 볼 수 있지만(트릭에 관해서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TV 드라마로 제작된 것은 비디오 등에서 빠지게 되어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점성술 살인사건>은 워낙 잘 알려진 작품이었기 때문에 만화나 드라마 등에서 시마다 소지의 허락을 당연히 받은 것으로 알고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믿기 어려운 소문도 전해지긴 합니다.

'점성술 살인사건' 도용을 다룬 기사


표절 시비를 피하기 위해서는 모든 작품에 대해 다 알면 좋겠지만, 전 세계의 추리소설을 모두 읽기는커녕 구할 수도 없을 겁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요즘 나온 새로운 트릭이라고 해 봐야 사실은 과거의 트릭을 약간 뒤틀어 변형한 정도에 불과한 만큼 ‘기발한 아이디어를 이야기의 핵심으로 삼지 않는 것이 좋다’는 영국 작가 H.R.F.키팅의 충고는 아이디어를 짜 내느라 고심하는 작가가 머릿속에 새겨두어야 할 만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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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2.10 0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표절 시비 하니 절대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제가 2008년 KBS <이야기 발전소>에 한 화가가 죽은 뒤 유령이 되어 다른 화가의 몸에 빙의하여 그림을 계속 그려 나간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지어서 나갔고 좋은 점수를 낸 적이 있는데 그 날 시청자 게시판에 그 이야기가 MBC의 모 드라마와 내용이 거의 같다는 표절 의혹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드라마에 대하여 전혀 몰랐거든요. 다행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아찔한 경험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그 드라마를 보고 표절하여 이야기를 냈다면 그건 제 양심이 아니라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2. 카메라이언 2011.02.14 05: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허헉 매회 요즘 제가 읽으려고 하거나, 읽었거나, 읽다 중단한 책들 이야기가 나와서 뜨끔뜨끔 한다니깐요. 'ㅂ'... ...;;;;; 이번엔 환상의 여인에서 흠칫. 아는 언니께 읽겠다고 4 개월 전에 얻어놓고 여전히 책장에 꽂아놓은 채 방치. (;;;) 이번에야 말로 홈스 패스티쉬 모음집 베이커가의 살인 끝까지 읽고 나면 읽어야겠어요. 'ㅂ';;; 카나리아 살인사건도 옆에 쌓아놓고 모른 척했는데 어서 읽어야겠 ;;;

    그나저나 베이커 가의 살인 책 보고 한 분께서 저도 써보라고 해서 함 써보려고요. ㅋㅋㅋ 잼날 것 같아요. ]서울에 사는 셜록홈스가 아니라 설록수(설록차??) 이야기라도? 탐정 설록수가 설록차 창립자를 살인자로 몰릴 위기에서 구해줘서 새로 나오는 생수 이름을 설록수로 지었다는 결론? ㅋㅋㅋ<--기발한 아이디어를 이야기의 핵심으로 삼지 말라는 이야기 방금 전에 보고서 이런다 ;;;;; 표절시비나 조심해야 ;;;;; 쿨럭 ;;;

  3. 허니문 차일드 2011.02.15 13: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얼마 전 문학동네에서 펴낸 <편집된 죽음>이란 책을 봤습니다. 오래된 친구가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콩쿠르상 수상이 결정되던 날 복수의 수레바퀴가 돌아간다는... (이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그 복수의 방법이 바로 표절시비입니다. 그 책의 원제가 바로 <별쇄본>이죠. 작가 하나 묻어버리는 게 일도 아니더군요. 내용 중에 바로 표절에 관한 의식이 있었느냐, 아니면 정신병에 의한 무의식 표절이냐는 내용이 나옵니다. 음악도 기본 몇 가닥 멜로다가 동일하면 표절판정이 나오는데 무의식 중에 나오는 표절도 무시 못할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초이님도 대단하시네요. 이 글 한 편 쓰기 위해 얼마나 공부를 하셨을까요. ^^ 많이 보고 배우고 갑니다.


흰 눈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은

이제 또 다른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스패터 시의 사람들이
그해 겨울에 일어났던 일들을 잊어버리려면 꽤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호그 연속살인>(1979)  -  윌리엄 디앤드리어

 

추리소설의 계절은 흔히 여름이라고 합니다…만 그것은 작품 외적인 입장, 즉 ‘여름의 무더위를 쫓기 위해 추리소설을 읽는다’는 시장 구조적인 시점에서 나온 말입니다. 어쩌면 작가에게는 오히려 겨울 쪽이 매력을 갖춘 계절처럼 보이긴 합니다. 고전적인 수수께끼 풀이 추리소설에서는 겨울이라는 계절만이 가진 요소, 특히 눈은 훌륭한 배경 및 소재가 되곤 하지요.

올해는 눈이 별로 오지 않았다고 방정을 떨었더니 웬걸, 한바탕 쏟아지고 또 내릴 분위기네요


눈에는 다양한 특성이 있습니다. 함박눈, 싸락눈, 진눈깨비 등 많은 이름이 있을 정도로 하늘에서 내려올 때부터 가지각색이고 땅에 떨어진 후에도 녹거나 얼어붙거나 아니면 얼지도 녹지도 않고 어중간할 때도 있기 때문에 변화무쌍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뛰어난 작가들은 눈을 트릭으로서의 도구가 아니라 사건의 중요한 배경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배경’이라는 말은 너무 단순한 표현인데, 눈이 내린다는 것은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햇볕이 화창하다’, ‘이슬비가 내린다’ 등의 날씨와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웬만큼 내린 눈은 흔적을 남겨주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교통수단의 움직임을 차단할 수 있는 위력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사람 키 정도로 눈이 쌓이게 되면 발자국 트릭 같은 것은 아예 엄두도 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태풍이나 홍수처럼 주변 사물을 어디론가 날려 보내지는 않는다는 것도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엄청난 폭설이 등장하는 작품 중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열네 번째 장편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먼저 떠오릅니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프랑스의 칼레까지 유럽 대륙을 횡단하는 특급열차 오리엔트 특급(Orient Express)열차가 폭설 때문에 한밤중 유고슬라비아 국경 근처의 철길에서 꼼짝 못하게 되고, 그 무렵 만원이던 1등석 침대차 안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기차가 멈춘 곳은 외진 곳이라 누구도 열차로 몰래 들어오거나 밖으로 달아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침대차 안에 타고 있던 열 세 명의 승객 중 누군가가 범인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승객 모두에게는 각각의 알리바이가 있어서 사건이 미궁에 빠질 것 같지만 하필이면 그 열 세 명 중에 푸아로라는 명탐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고로 사건은 뭐, 고비가 있지만 순조롭게 해결되지요. 이 작품에서는 폭설이 기차를 고립시키기 위한 배경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만, 독특한 범인의 설정은 이 작품을 영원한 걸작의 위치에 올려놓았습니다.

승객들을 모아놓고 질문을 던지는 명탐정 푸아로(중앙).


‘눈 속의 고립’이라는 상황은 범인이 당장 누구인지는 알 수 없더라도 어딘가로 도망치지는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탐정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만약 악당 쪽이 주도권을 잡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실 이렇게 되면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공포소설이 되는 셈이지요. 스티븐 킹은 <샤이닝>(1977)과 <미저리>(1987)에서 그러한 무서움을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샤이닝>은 한겨울동안 로키산맥 외진 곳에 자리 잡은 오래된 호텔을 관리하게 된 주인공 잭 토렌스가 이른바 오두막집 열병(Cabin Fever, 고립된 곳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신경증) 증세로 차츰 미쳐가면서 아내와 아들의 목숨마저 위협하게 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미치게 된 이유는 단순히 외딴 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만(호텔에 존재하던 유령 탓이었지요), 어쨌든 사방이 눈으로 뒤덮여 며칠도 아닌 몇 달 동안 꼼짝 못하게 된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편할 것 같진 않습니다. 한편 <미저리>에는 유령보다 더 무서운 집착을 가진 여인이 등장합니다. 눈길에서 차를 몰고 가다가 사고를 당한 소설가 폴 쉘던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미저리 체스테인’의 팬인 애니라는 여인에게 운 좋게(?) 구조되지만 그의 행운은 당분간 거기서 멈추고 맙니다. 아니, 그것은 행운이 아니었지요. 그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소설을 써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다리가 부러진 데다 바깥은 눈이 와서 도망갈 수조차 없고 난감할 따름입니다.

눈 속의 산장이 보이는 '미저리' 오디오북 커버


눈이 많이 내리는 때를 살펴보니 그것은 12월과 1월로 이어지는, 즉 ‘연말연시’라고 불리는 시점입니다. 1년 365일 중 불과 며칠에 지나지 않고 물리적으로도 그다지 특별한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점(해가 바뀐다는 것)을 맞이한다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의미를 두곤 합니다. 아마도 크리스마스라는 세계적으로 가장 대중화된 명절이 있고, 새해맞이 행사 역시 어느 나라에나 다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빛이 있는 곳에는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들뜬 사람들 사이에서 사고나 범죄는 발생하고, 때가 때인 만큼 당사자나 주변 사람은 평상시보다 훨씬 강한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인지 크리스마스나 신년 축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적지 않을뿐더러 인상적인 작품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애거서 크리스티의 <푸아로의 크리스마스>는 뭔가 즐거울 것 같은 느낌의 제목과는 달리 밀실 상태의 방에서 피투성이 시체가 발견되는 살벌한 분위기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제임스 엘로이의 <L.A.컨피덴셜>은 크리스마스이브에 경찰서 유치장에서 폭력사태가 벌어지면서 시작됩니다. ‘피투성이 크리스마스’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과거의 정신적 상처와 야심을 숨긴 젊은 형사 세 사람의 운명을 크게 바꾸는 방아쇠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피투성이 크리스마스' 사건 - 영화 'L.A.컨피덴셜'에서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 42번째 작품 <자장가(Lullaby)>에서는 10대 베이비시터 소녀가 새해 전날 살해됩니다. 살인을 주로 담당하는 형사들에게 사람의 죽음이란 그다지 드물거나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하필 이런 즐거운 때에 불행한 소식을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전해 주는 일은 평상시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죽은 소녀의 부모에게는 이 날이 더 이상 새해의 전날이 아니라 딸의 기일(忌日)이라는 가슴 아픈 날로 돌변하는 것이니까요. 새해로 접어드는 새벽 3시 무렵 주인공인 카렐라 형사가 소녀의 집 현관을 노크한 후, 부모가 문을 열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하는 것으로 작가는 그 장면을 마무리 짓습니다. 독자들의 상상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제프리 디버의 <악마의 눈물>에서도 ‘모두가 새해를 맞이하는 축제 준비로 여념이 없는 한 해의 마지막 날’ 무차별 총격사건이 벌어집니다. 한 번이 아니라 그날 중 세 차례 더 학살극을 벌이겠다는 범인의 예고에 필적 전문가 파커 킨케이드를 비롯한 수사진이 막으러 나섭니다(시리즈 작품이 아니지만, 낯익은 인물이 깜짝 등장해서 즐거움을 주네요. 그 ‘낯익은 인물’은 연말인데도 아무 약속도 없고 아무 데도 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옛날 일을 한번 살펴볼까요? 코난 도일은 1887년 12월 <비튼>지 크리스마스 특집호에 셜록 홈즈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주홍색 연구>를 발표했는데, 작품의 고료로 불과 25파운드밖에 못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도 독자들에게 외면당해 실의가 컸습니다. 

셜록 홈즈가 이 잡지를 통해 처음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주홍색 연구>에 주목한 미국 잡지 <리핑코트>지가 도일에게 새 작품 원고를 청탁했고, 이때 쓴 두 번째 장편 <네 사람의 서명>은 1890년 1월호에 실리게 됩니다. 푸대접받던 도일의 작품들은 드디어 미국과 영국 양쪽에서 호평을 받기 시작했고 그의 운명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하지요. 도일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연말의 분위기를 가장 잘 탄 작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다만 <주홍색 연구>나 <네 사람의 서명>은 잡지의 연말 특집에 실렸어도 내용은 전혀 크리스마스나 새해 분위기와 상관이 없었습니다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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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이 2010.12.30 15: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상한 눈사람 사건>이랑 <고리키 공원> 읽어보고 싶네요.
    눈사람 속에 시신을 숨겼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은 있는데 생각해보니 작품으로 읽어본 적은 없군요. 엄청 재밌을 것 같아요.
    (김전일 만화에서 눈사람(아니면 그냥 눈?)속에 시신 숨긴 이야기가 있었는 거 같아요.)

    지난 글 덕분에 이번 겨울에 <심플 플랜>을 재밌게 읽었습니다.(우와우와~ 스콧 스미스!)

  2. 카메라이언 2011.01.03 0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_</~

    그리고... ... 눈+살인... ... 눈의 살인... ...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제목인데요? 호호 'ㅂ'


“가장 흔한 범죄가 가장 불가사의 할 때가 많지. 왜냐하면 추리를 끌어낼만한 특별하거나 새로운 특징이 없기 때문일세.”  - 코난 도일 <주홍색 연구>에서



영국 드라마 <셜록>이 특별한 이유


“당신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왔군. 어떻게 아냐고? 머리는 짧고 팔은 새까맣게 탔잖아. 손목만 검게 탄 걸로 봐서 분명 긴 옷을 입었고…. 그건 바로 군의관이란 얘기지.” 

택시 안에서 홈즈가 왓슨 박사에게 추리력을 뽐내며 ‘지 자랑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홈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헌팅캡을 눌러쓰고 담배 파이프를 문 매부리코의 사내가 아닙니다. 곱슬머리에 모델처럼 쫙 빠진 몸매, 슬림한 바바리코트 걸치고 머플러 휘날리는 완전 간지남입니다. 그리고 지팡이 대신 스마트폰으로 무장했군요.

올해 영국 BBC에서 만든 3부작 드라마 <셜록>의 한 장면입니다. 21세기형 셜록 홈즈는 이렇게 뽀대나게 환생했습니다.



영국 드라마 '셜록'. 홈즈 역의 베네딕트 컴버배치(왼쪽)와 왓슨 역의 마틴 프리먼

영화 '셜록 홈즈'. 홈즈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오른쪽)와 왓슨 역의 주드 로



뭐, 홈즈야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탐정인지라 수많은 패스티시와 패러디 작품이 탄생했고, 또 지겹도록 영상화 됐습니다. 그러나 이번 BBC 드라마에 눈길이 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동안 각색된 홈즈물 대부분은 19세기 후반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 (흐음, 왜 f(x)의 빅토리아가 아른아른^^;)의 배경은 살리되, 이야기 구조는 많이 바꿨습니다만 이 <셜록>은 100년 세월을 훨씬 뛰어넘어 배경을 현재의 런던으로 가져오면서도 비교적 원작 설정에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작년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 <셜록 홈즈>를 떠올리면 바로 비교가 되시리라.

예를 들면 드라마 1편 제목이 <분홍색 연구 A Study in Pink>입니다. 누가 봐도 1887년 홈즈가 첫 등장한 <주홍색 연구 A Study in Scarlet>의 오마주입니다. 왓슨은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했다가 런던으로 돌아왔고 (영국은 그때도, 최근에도 아프간과 전쟁질을 했군요) 생활고 때문에 같이 하숙할 사람을 구하는 과정에서 홈즈를 만난다는 설정도 원작을 따랐습니다. ‘Rache’라고 쓴 메시지와 독이 든 알약을 소재로 활용하는 점도 흡사합니다.

다만, 신문 광고 대신 인터넷이, 마차 대신 택시가, 코카인 대신 니코틴 패치가 활용되고 원작보다 젊고 샤방샤방한 홈즈는 좀 더 열심히 뛰어 다닙니다. 점잖은 왓슨 박사도 귀여운 이미지로 변신했는데 원작보다 비중이 줄어 좀 찌그러져 보이는 정도가 불만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한 제작진의 선택은 꽤 성공적으로 보입니다. 디테일한 극본, 세련된 편집, 적당한 활극이 버무려져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흡입력 넘치는 모던한 홈즈로 재탄생시켰으니까요. 

이 드라마를 보노라면 ‘독자(시청자)의 시선은 이야기가 아니라 캐릭터 따라 간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암튼 홈즈는 자신의 고국에서 탄생한 드라마 덕에 ‘100년 전 명탐정’의 낡은 이미지를 벗고 변신을 꾀할 수도 있겠네요. 셜로키언들이 원작 훼손이라고 달갑지 않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박제된 홈즈보다 진화한 캐릭터로 생명력을 더하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여전히 먹히는 ‘세계 최고 탐정’

홈즈가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이유는 당연히 이름만으로 절반 먹고 들어가는 캐릭터 때문이겠죠. 

아서 코난 도일에 의해 1887년 <주홍색 연구>에 첫 등장해 1927년 <셜록 홈즈의 사건집>까지 40년 동안 4편의 장편과 56편의 단편에서 활약합니다. 뛰어난 관찰력으로 증거를 수집하고 과학적, 논리적인 사건 해결법은 명탐정의 전형을 제시합니다. 약간 정형화된 소설 패턴이 되레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홈즈의 탄생 전후에 에드거 앨런 포가 창조한 뒤팽, 에밀 가보리오의 르콕,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 뤼팽 등이 차례로 등장하지만 홈즈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끊임 없이 출간되는 홈즈 관련 서적들



홈즈란 인물의 특징은 <주홍색 연구> 앞부분에 자세히 나옵니다.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는데 너무나 깡말라서 훨씬 더 커 보이고 눈은 날카롭고 살집이 없는 매부리코는 전체적으로 기민하고 단호한 인상이다. 각지고 돌출된 턱 또한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문학, 철학, 천문학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고 정치는 약간, 식물학 중에도 아편이나 독성 물질에 대해서는 해박하고 화학, 해부학, 범죄 관련 문헌에는 정통하다. 바이올린 연주가 수준급이고 펜싱과 권투 실력은 프로급. 가끔씩 우울증에 빠져 며칠씩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도 있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홈즈를 창조한 아서 코난 도일은 의사입니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죽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에든버러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소설을 몇 편 발표해 재능을 인정받지만 가족 생계 때문에 전업 작가가 되는 건 주저했다고 합니다. 스물셋에 병원을 개업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환자가 많지 않아 본격적으로 창작을 시작합니다. 


셜록 홈즈를 창조한 아서 코난 도일


그는 의과대학을 다닐 때 스승이었던 조셉 벨에게서 영감을 받아 홈즈를 탄생시킵니다. 벨 박사는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의 직업과 고향, 가족 관계 등을 잘 맞췄다고 합니다. 구두에 묻은 흙이나 몸의 피부병 같은 걸 이용해서요.

초절정 인기를 구가하던 홈즈는 1893년 <마지막 사건>에서 숙적 모리어티 교수와 함께 스위스의 한 폭포에 떨어지면서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코난 도일이 자신보다 더 인기 있는 홈즈에 실증을 느껴 ‘살해’했다는 설인데요, 결국 독자들 압력에 못 이겨 9년 만에 부활합니다.  

이런 대중의 열렬한 환영 이면에는 당시 런던이라는 도시의 특수성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수도는 각 대륙에서 몰려든 이민자들로 급팽창합니다. 빈민촌이 늘자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런던 경찰은 범죄자 검거에 늘 허덕댑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소한 실마리를 통해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 사건을 척척 해결해내는 홈즈는 런던의 영웅이었던 셈이지요.

  

셜록 홈즈의 이름으로…

홈즈의 재창조가 활발했던 이유는 코난 도일이 저작권을 설정해 놓지 않은 점도 한몫 했습니다. 코난 도일 친구인 로버트 바란 사람이 ‘셜로 콤즈’ 라는 짝퉁 소설을 냈을 정도입니다. 

참 양심 없는 양반입죠. 모리스 르블랑은 자신의 괴로 뤼팽 작품에 홈즈를 무능한 탐정으로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참 질투 많은 양반입죠.


홈즈가 첫 등장한 ' 주홍색 연구'와 한국 작가의 패스티시 작품 '경성탐정록'



유명 작가들이 홈즈를 차용해 쓴 작품도 꽤 됩니다.

1944년 엘러리 퀸과 존 딕슨 카는 패러디집 <셜록 홈즈의 재난>이란 책을 냅니다. 이에 코난 도일의 셋째 아들 에이드리언이 분노하면서 서점에서 책이 회수하는 소동까지 벌어졌습니다. 

아버지 작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에이드리언은 직접 홈즈 시리즈를 쓰기로 결심합니다. 존 딕슨 카와 공동으로 1954년에 단편집 <셜록 홈즈 미해결 사건집>을 발표합니다. 책은 잘 팔렸다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 또한 짝퉁. 그런 이유 때문인지 가족들조차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스티븐 킹이 쓴 <닥터스 케이스>란 작품에도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홈즈가 등장합니다. 왓슨이 사건을 먼저 해결한다니 아! 놀라운 반전. 홈즈가 아흔 넘게 산 것으로 설정해 그의 노년의 삶을 그린 미치 컬린의 <셜록 홈즈 마지막 날들>도 유명하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니콜라스 메이어의 <셜록 홈즈 7퍼센트의 용액>에서는 마약에 중독된 홈즈가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치료를 받는다는군요. 

홈즈가 개 이름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아예 주인공을 왓슨 박사와 악당 모리어티 교수로 설정한 작품도 있다니 홈즈의 인기를 실감케 합니다.


한국형 셜록 홈즈도 있습니다. 바로 한동진, 한상진 형제가 작년에 발표한 단편집 <경성탐정록>입니다. 

설정이 재밌습니다. 1930년대 식민지 경성을 배경으로 열혈 조선 청년 설홍주와 중국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러온 왕도손의 활약을 그렸습니다. 주인공 이름에서 바로 홈즈와 왓슨이 연상이 되시리라.
한국적 정서와 익숙한 지명이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운수 좋은 날>, <광화사>같은 단편 제목들은 현진건, 김동인의 소설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국내작가 작품 중에서는 흔하지 않는 본격 미스터리물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미니시리즈 <셜록>이 1편 인기에 힘입어 내년에 시즌2가 나온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도 ‘국민 명탐정’ 한명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봤습니다. 국민 캐릭터 ‘뽀로로’도 만들었으니 언젠가 가능하겠지요? 비유가 좀 거시기한감요^^;


사소한 태클; 베이커 거리는 부자 동네랍니다.
코난 도일이 홈즈를 썼을 땐 100번지까지 밖에 없다가 1930년대 들어 홀수 번지가 생겼답니다. 홈즈의 방은 온갖 값비싼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명품 바이올린을 헐값에 구입한 이유는 설명되어 있지만 불독도 키우고 허드슨 부인은 손님이 올 때마다 차를 내옵니다. 궁핍해 하숙 동거인을 구한다는 설정이 설득력을 잃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홈즈와 떨어질 수 없는 소품이 사냥모자와 파이프(블로그 왼쪽 위 그림 참고)인데요.
원작에는 이것들에 대한 묘사가 명확하지 않은데 삽화가가 즐겨 그린 탓에 이미지가 굳어져버렸습니다. 홈즈처럼 멋을 아는 남자가 도시에서 사냥모자를 쓰는 일은 거의 없었겠죠. 파이프도 마찬가지로 연극배우인 윌리엄 질렛이 사용해 유명해진 것이랍니다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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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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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뎅뎅뎅 2010.10.26 16: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이 드라마 2편까지 봤는데요. 홈즈의 낭창낭창한 몸매와 까칠한 성격이 마음에 들더군요. 스마트폰으로 날씨 검색할 때 가끔 홈즈 생각을 합니다요. 쿄쿄~
    근데 M르블랑이었나요? 셜록 홈즈 철자를 바꿔서 혈록 쇼움즈인지 하는 탐정이 루팡이랑 대결했던 기억이 나네요. 어릴 때는 홈즈보다는 루팡 팬이었는데, 요즘은 루팡은 별로 안 땡깁니다.

    • 추리닝4 2010.10.27 14: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전 전철에서 <셜록>보다가 홈즈 그 놈 넘 멋지다면서 내게 문자 보낸걸로 아는데 기억하시는지 ㅎㅎ..나이 탓인지 홈즈고 뤼팽이고 다 싫고 걸그룹 <시크릿>이 최고라는^^;

  2. 최망최망 2010.10.26 22: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배 근데 저는 언제부터인가 셜록 홈즈=이대근 국장으로 인식이 되어서, 홈즈만 보면 흠칫 놀래요. 언젠가 이국장이 남색 바바리 입고 긴 우산 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계시는 걸 봤는데, 홈즈가 따로 없었다는...

    그나저나, 셜록 다운받아놨는데, 봐야겠네요.

    • 추리닝4 2010.10.27 14: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 바바리와 우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이 국장과 홈즈는 싱크로율이 그다지^^; 요즘 현직 판사가 쓴 추리소설 <어둠의 변호사>시리즈가 반응이 좋은데 거기 고진이라는 꽤 멋진 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나와. 창백한 지식인의 느낌이랄까. 이 국장이 탐정이라면 그 캐릭터에 가까운듯(이 국장 이 댓글 보면 곤란하데^^;;;;)

    • 갈매 2010.10.28 11: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그닥 싱크로율이 높지 않다는데 한표!
      이 국장 요즘, 다른 블로그 탐방도 다니시는 듯.. ㅋㅋㅋㅋ 언젠가 보실지도~~~ ㅋㅋ

      오옹. 궁금하군요.. 어둠의 변호사를 비롯하여,
      저 <경성탐정록> 등등.

      저는 어릴 때 홈즈 시리즈 중 일부가 동화전집에 있었는데.. 그중에 <얼룩끈>을 읽다가 오싹오싹해서 잠도 못자고 덜덜덜 떨던 기억이.. ㅋ

  3. 카메라이언 2010.10.27 0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으흐흐 저도 시즌 1 다 봤어요. 아 어찌나 재미있던지. 시즌 2 기대기대기대입니다.

    그나저나, 저도 집에 셜록홈즈 미해결 사건집 있어요. 경성탐정록은 얼마 전 다른 집에 입양보냈다는. 곧 2 나오겠죠? 나와야 하는데요? 어서 출판사에서 좀 출간 좀 해주셔야 할텐데요?

    그나저나, 홈즈를 오마쥬하는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1994년부터 연재 중인 명탐정코난도 빼놓을 수 없죠. 모리어티교수를 연상시키는 검은 조직과의 끈질긴 인연이라던가, 도대체가 끝날 생각이 없는 듯한 단편위주의 에피소드하며 흐흐흐... 아서 코난 도일 경이 본다면 깜짝 놀라지 않았을까 합니다.

    • 추리닝4 2010.10.27 14: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셜록 홈즈 미해결 사건집은 절반 정도 읽고 방치. 코난 도일이 안썼다니깐 그닥 집중하지 않게 되더라는. 기분탓이겠죠ㅎㅎ 경성탐정록과 같이 사진 찍으려고 방 다 뒤졌는데 그 책 안보이더라고요^^;..김전일이나 코난 참 재밌죠. 일본에는 트릭만 전문으로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당^^

  4. 샐리* 2010.12.29 2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아, 저도 최근에 셜록 에피소드 3편을 끝냈습니다.
    시즌2를 기다리기가 너무 힘이 드네요. 재미있는 리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