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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17 테마로 읽는 미스터리 <38> 소수민족 주인공 (3)

이제는 자리를 잡았을까

길리스피 서장 : "당신 같은 흑인에게 버질이란 이름은 멋진 이름은 터무니없군.
                    자네가 온 곳에서는 자네를 뭐라고 부르나?"
버질 팁스 : "팁스 씨라고 부릅니다."
- <밤의 열기 속에서>(1926) / 존 볼

서구의 고전 미스터리, 20세기 초반 작품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백인 -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른바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앵글로색슨 계열의 신교도 백인) - 들입니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유럽이나 미국에선 어쩔 수 없었던(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차례 세계 전쟁이 벌어지고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가 생긴 미국에서는 WASP 이외의 소수민족 주인공들의 입지가 차츰 커져가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경찰 조직에 소속된 인물이 등장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적으로 소수민족의 지위가 향상되자 사립탐정들도 나타났습니다.
그 자신 이탈리아 이민의 후예인 작가 에드 맥베인은 <87분서> 시리즈에서 재치 있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시리즈의 주요 인물로 이탈리아계 스티브 카렐라 형사를 내세우긴 했습니다만, 이 시리즈는 독특하게도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질 않습니다. 그의 동료 형사들인 유태계의 마이어 마이어, 흑인 아서 브라운, 백인 코튼 호우즈 등 다양한 인물들이 각각의 작품 속에서 사건 해결의 주역으로 나서는 것이지요. 여러 계층 출신의 다양한 인종 형사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실력을 발휘하며 활약한 덕택으로 시리즈에 주인공의 이름 대신 <87분서>라는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집단적인 주인공 체제는 독자에게 어필하기 어려운 탓인지 맥베인 이후 뚜렷한 성공작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에드 맥베인

동양계를 제외하면 미국에서의 소수민족은 흑인, 인디언, 유태인 등이 있는데, 이들 세 민족은 1970년대 이후부터 추리소설 속에서 주인공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흑인 주인공을 살펴볼까요? 선구자로는 에드 레이시가 <흔들리는 방>(1959)에서 등장시킨 투생 무어(Toussaint "Touie" Marcus Moore)가 있지만, 존 볼이 <밤의 열기 속에서>의 주인공으로 탄생시킨 흑인 형사 버질 팁스와 어네스트 타이디먼의 <샤프트(Shaft)>에 등장하는 사립탐정 존 샤프트(John Shaft)가 본격적인 흑인 주인공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영화 '밤의 열기 속에서'에 등장한 버질 팁스(왼쪽, 시드니 포이티어가 연기).

패서디나 경찰국 소속의 팁스는 점잖고 논리적인 두뇌를 갖춘 살인사건 전문형사인데 반해 할렘 출신의 사립탐정 샤프트는 유능하지만 ‘검은 마이크 해머’라고 불릴 만큼 매우 거친 사나이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이 두 형사는 책으로도 호평 받았지만 같은 제목으로 제작된 영화가 모두 성공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에드 레이시, 존 볼, 어네스트 타이디먼은 공교롭게도 모두 백인이로군요.

존 샤프트(왼쪽, 리처드 라운드트리가 연기) - 영화 '샤프트'에서

물론 흑인 주인공을 내세운 흑인 추리작가도 있습니다. 강도죄로 교도소에 복역하던 중 대쉴 해밋의 작품을 읽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체스터 하임즈는 코핀 에드 존슨과 그레이브 디거 존스, 흔히 관(棺)짜는 에드와 무덤 파는 존스라는 살벌한 별명으로 불리는 콤비 형사가 등장하는 시리즈를 발표, 흑인 추리작가의 원조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90년대 들어서는 유태계-흑인 혼혈 작가 월터 모즐리가 2차대전 직후를 배경으로 흑인 사립탐정 이지 롤린즈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발표했는데 클린턴 대통령 자신이 애독자라고 선언할 만큼 대중적인 면과 작품성 양쪽에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흑인 추리작가협회가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월터 모즐리

한편 애당초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던 인디언은 오히려 흑인보다 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바호족이 살던 오클라호마에서 태어난 토니 힐러맨은 나바호 혈통을 이어받은 경찰 조 리프혼 서장과 짐 치 경사가 등장하는 시리즈를 발표하고 있는데,  작품에는 한때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았던 그의 인디언 민속과 신앙에 대한 지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토니 힐러맨

이외의 인디언 혈통을 가진 주인공으로는 빌 밸린저의 <스파이> 시리즈 주인공 CIA 요원 조아퀸 호크스(Joaquin Hawks), 브라이언 가필드의 작품에 등장하는 나바호족 출신 고속도로 순찰대원 샘 워치맨(Sam Watchma) 등이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거의 같은 백인으로 보이지만 WASP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유태인 탐정도 그다지 흔하진 않습니다. 이들도 70년대 들어와서야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로저 L.사이먼(Roger L. Simon)이 쓴 『사람의 덫(The Big Fix)』(1973)의 주인공 모우지즈 와인(Moses Wine)이 그 대표적 인물이죠. 60년대 학생운동을 하다가 좌절한 히피 출신 이혼남 와인은 대마초를 상용한다고 공언한 첫 번째 인물이며 현실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어 젊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작가 사이먼은 현실감을 더하기 위해 와인의 사립탐정 면허 신청서를 만들어 책에 실었는데,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이름이 면허증에 쓰여 있어 눈길을 끕니다.

로저 L.사이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은 스크린에서만큼은 차츰 허물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즘은 거의 도식화되다시피 한 ‘정치적 공정함(Politically Correct)’ 때문에 백인들만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영화들은 거의 없으며, 흔히 버디 무비라는 불리는 두 명의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액션 영화에는 대체로 백인과 흑인 콤비가 등장합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다 보니 소설을 영화화 할 때도 원작에는 백인이었던 인물이 흑인으로 둔갑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잘 알려진 영화 중에서 예를 들자면, 존 그리셤의 <펠리컨 브리프>에서 주인공 다비 쇼를 돕는 신문기자 그레이 그랜섬이 있습니다. 그는 소설 속에서 운동 부족으로 다리가 허옇다는 농담을 듣는 백인이었지만 영화에서는 미남 흑인배우 덴젤 워싱턴이 그 역을 맡았습니다. 덴젤 워싱턴은 <본 콜렉터>에서 제프리 디버가 창조한 링컨 라임 역도 맡은 바 있는데, 링컨 라임 역시 원작에서는 백인입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떠오르는 태양>의 주인공 존 스미스는 영화에서 이름도 흑인 티가 나는 웹 스미스로 바뀌었고 흑인 배우 웨슬리 스나입스가 연기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백인에서 흑인으로의 변환은 ‘정치적 공정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시의 흑인 스타 배우를 투입해 흥행 실적을 올리려는 의도가 훨씬 크다고 여겨집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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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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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무언 2011.07.19 13: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양인은 반대로 백인화되기도 하지요. 21의 경우 실화의 주인공은 동양인이었지만 영화에선(...)

  2. 평시민 2011.07.19 19: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추리소설 작가들은 인종 문제에 관한 편견은 적은 것 같아 좋습니다. "중국인은 주요 인물로 등장시키지 마라"라는 말을 남긴 녹스도 있지만요.

  3. 그럼에도 2017.01.01 15: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흑인과 히스패닉, 유대계야 이제 서구권에서 흔하게 받아들여지지만
    과연 동양계는 언제쯤 벽이 허물어질까요?

    동양계는 21세기 오늘날까지도 그 비중이나 캐릭터성 면에서 결코 주류가 아닌
    작고 뚱뚱한, 대머리, 변태, 별종, 수다쟁이 혹은 재미없는, 눈치없는, 이상한 오컬트 문화에 심취했거나 무술을 하는,
    재능은 있되 비호감인 너드거나 호감은 가되 유약한 인물들이 대부분이죠.

    이건 마치 한국이나 일본 작품에서 다른 유색인종들을 메인스트림에 껴주지 않는 것과도 마찬가지긴 합니다만.
    아마 얼마나 걸릴지가 아니라 동양인에 대한 편견과 제약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