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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9.29 테마로 읽는 미스터리 <42> 운명의 여인 (3)

악한 남자보다 훨씬 위험한...

모든 여자들은 마음 속에 방탕함을 가지고 있다.
 <도덕론>(1735) - 알렉산더 포프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악녀들을 이야기할 때면 떠오르는 경구(驚句)가 두 개 있습니다. “범죄의 뒤에는 여자가 있다”와 “여자를 먼저 쏘아라”라는, 여성들에게는 틀림없이 기분 나쁠 살벌한 문장들이지요.

영화 'Deadly is the Female'

현실 사회에서야 어쨌든, 추리소설에서만큼은 적어도 ‘범죄 뒤의 여성’이 거의 필수적 요소입니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남자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의 심리적인 배후에는 어떤 식으로든 간에 대부분 여성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물론 여성들이 범죄조직의 두목이라는 단순한 의미는 아닙니다^^). 게다가 요즘 작품들에서는 직접 범죄자로 등장하는 여성들도 많아졌습니다. 다만 여성이 사이코 연쇄 살인마로 나오는 경우는 공포소설 이외에서는 보기 힘든데, 이것은 FBI의 사건사례 분석 결과 연쇄살인범의 대부분이 20~30대의 백인 남성이라고 하는 점에서 납득이 가는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예외도 없는 것은 아니어서, 여성작가 첼시 케인은 미모의 연쇄살인범 그레첸 로웰을 등장시키는 3부작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아름다운 얼굴 뒤에 숨겨진 살인본능… 엇박자처럼 보이지만 뭔가 끌어들이는 힘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작가 첼시 케인(물론 왼쪽).

한편 “여자를 먼저 쏘아라”라는 말은 서독의 테러 진압부대에서 신입 대원에게 내려진 지시사항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성 테러리스트들을 연구한 같은 제목의 책이 국내에도 번역된 적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여성 테러리스트들은 사람을 총으로 쏘는데 망설임이 거의 없으며, 남성들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또한 수십 명을 죽인 여성 테러리스트들이라고 해서 광기 어린 인간인 것도 아닙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이 평범한 모습을 가진 그들의 정신 상태는 지극히 정상적이며, 테러 행위 자체를 임무수행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팜 파탈(Femme Fatal)’이라는 단어는 소설보다는 영화의 선전문구에 힘입어 낯익게 된 것 같습니다. 좀 아쉽다면 어느덧 ‘팜 파탈 = 악녀’의 공식이 되어버린 것이죠. 사실 그렇게 좁은 의미가 아니라 ‘운명의 여인’ 정도로 생각하면 될까요.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매력을 지닌 여성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운명의 여인’이라는 말은 남성의 이상형과 동의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격렬한 욕망을 억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거짓말도 잘 하지요. 또한 묘하게도 미인이 많습니다.
추리소설에서는 남성을 파멸로 몰고 가는 여성이지만 반드시 사악한 여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단순한 여자 범죄자를 팜 파탈로 볼 수는 없습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현실적인 만큼 도둑이라는 불확실한 직업을 선택하는 경우가 드물기도 하지요.
과거에도 여성 범죄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추리소설에서 ‘팜 파탈’이라는 요소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작품이 탄생한 시기와 맞물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쉴 해밋의 <몰타의 매>에서는 브리짓 오쇼네시라는 매력적인 여인이 탐정 샘 스페이드를 복잡한 사건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운명의 여인, 브리짓 오쇼네시(메리 애스터가 연기했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에서는 덩치 큰 은행 강도 무스 말로이와 그의 옛 애인 벨마 때문에 탐정 필립 말로우가 꽤 고생을 하지요. 얼 스탠리 가드너의 <벨벳 손톱 사건>에서는 변호사 페리 메이슨이 의뢰인인 버타 부인의 거짓말 때문에 살인 혐의를 받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미지의 여인 때문에 사건 속에 휘말리고, 목숨까지 위협받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묘하게도 하드보일드 탐정들에게는 - 일부 가난한 탐정들을 빼고는 - 흔히 착실한 여비서를 거느리고 있어서 작품에 등장하는 악녀들이 한층 더 사악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수많은 작품을 남긴 여성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는 여성들을 악역으로 만드는데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미리 알려주는 결과가 되므로 작품들을 언급할 수는 없지만, 남자들만을 범인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지 않은 수의 작품에서 악한 여인들을 볼 수 있는데, 그녀의 작품 중 법정 미스터리인 단편 <검찰측 증인>에서는 ‘운명의 여인’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다른 운명의 여인 크리스틴(마를레느 디트리히 분)-영화 '검찰측 증인'에서

90년대의 작품 중에서 기억에 남는 악녀로서는 스콧 스미스의 <심플 플랜>에 나오는 행크의 아내, 어디서나 볼 수 있을 평범한 여인인 사라가 떠오르네요. 그녀는 직접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고 범죄에 가담하지도 않았지만, 부지불식간에 사건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자신도 모르게 모든 사람을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악녀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무서운 것은 그들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이지요.
매력적인 악당도 많지만, 악녀는 더욱 매력적이고 어디서나 돋보일 겁니다. 그런 매력이 없다면 남의 운명을 바꿀 수도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녀들은 언제라도 누군가를 파멸시킬 수 있는 위험한 존재인 만큼 소설 속에서만 만나는 것이 좋겠군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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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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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9.30 1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매력적인 팜므파탈은 강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죠, 글쎄요, 윌리엄 아이리쉬의 <환상의 여인>에 나오는 그 환상의 여인은 팜므파탈일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지나가다 2011.10.02 11: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평시민님// 환상의 여인은,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참고인을 의미할 뿐 결코 팜므파탈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원제도 phantom lady이지요. 결코 fantastic lady라던가 attractive lady 같은 게 아닙니다. 이 블로그의 내용과는 무관한 댓글을 다신 것 같아 한마디 적어봅니다.

  2. 평시민 2011.10.03 22: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잘못 알았군요, 하지만 저는 이상하게 추리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수수께끼의 여인 하면 '환상의 여인'이 먼저 생각납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