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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3.30 테마로 읽는 미스터리 <27> 가짜 후계자들 (4)

진짜보다 더 진짜다울까?

중년의 삶이란 언제나 젊은 시절 꿈의 패러디라고 누가 말했던가?

 - <Better Off Dead>(1951), 헬렌 맥클로이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모든 작품은 코난 도일이 썼다’

위의 문장은 맞는 말일까요? 답부터 밝히자면 ‘아니오’입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모든’ 작품을 쓴 것은 아닙니다. 셜록 홈즈라는 명탐정을 탄생시킨 사람은 분명히 코난 도일이지만 그 이외의 많은(셀 수 없을 정도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홈즈를 등장시켰습니다. 홈즈 이야기는 조금 뒤에 설명하겠지만, 특정 작가가 창조해 낸 주인공을 다른 작가가 차용해 작품을 쓰는 것은 대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패러디(parody), 다른 하나는 패스티쉬(pastiche)입니다. 우리나라도 90년대 후반부터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용어들이 일반인에게도 익숙해졌는데, ‘패러디’도 그런 용어 중 하나입니다. 패러디란 원래 작품을 약간 비꼬거나 희화(戱畵)한 풍자물이지요. 한편 패스티쉬는 원래 작품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으로 모방하는 것으로 안작(贋作)이라고도 합니다. 오마주니 헌정작이니 뭐 파고 들어가면 더 많겠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로만…

셜록 홈즈 시리즈는 추리소설이면서 모험소설이기도 하고 스파이소설(브루스 파팅턴 설계도, 최후의 인사 등)이기도 하며 공포소설(배스커빌 가문의 사냥개, 서섹스의 흡혈귀 등), SF 소설(기어다니는 사람 등)이기도 합니다. 이런 넓은 스펙트럼과 확실한 캐릭터, 그다지 어렵지 않은 문장과 약간은 정형화된 패턴. 이 정도의 멍석이 깔려 있다면 ‘나도 한 번쯤은…’ 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겠죠.

유명해지면 모조품이 금방 나오는 것처럼, 등장하자마자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명탐정 홈즈의 모방 작품은 일찌감치 등장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소설가이며 도일의 친구이기도 한 로버트 바(Robert Barr)는 홈즈의 이름을 절묘하게 바꾼 ‘셜로 콤즈(Sherlaw Kombs)’가 등장하는 단편 <The Great Pegram Mystery>를 1892년 발표했습니다. ‘진짜’ 홈즈가 등장하는 첫 번째 단편인 <보헤미아의 추문>이 발표된 것이 1891년이니, 불과 1년이라는 짧은 사이에 등장한 것이지요.

'The Great Pegram Mystery'의 삽화(오른쪽이 셜로 콤즈). 홈즈와 별로 다른 점이 없어 보입니다

한편 괴도 뤼팽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모리스 르블랑도 자신의 단편 <한 발 늦은 셜록 홈즈>(1904)에 홈즈를 등장시켰습니다. 문제는 홈즈를 멍청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어 놓았던 것이죠. 유능한 인물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다가 정작 뤼팽과의 대결에서는 거듭 실수를 저지르고 뒤통수를 맞으니 도일의 심기가 편할 리는 없었습니다. 르블랑은 도일의 항의를 받자 머리글자만 앞뒤로 돌려 ‘에를록 쇼메스 Herlock Sholmes’라는 이름으로 바꿔놓았는데, 나중 작품 <기암성>(1905)에서는 총을 마구 쏘아 대는 인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게다가 자신은 첫 번째 뤼팽 시리즈(홈즈가 등장한 지 20년 후 발표)를 쓸 때까지만 해도 코난 도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해 홈즈 팬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아르센 뤼팽 대 에를록 쇼메스' 영어판 표지

어쨌든 장 단편을 통틀어 60여 편의 오리지널 홈즈 시리즈를 남긴 도일은 ‘홈즈’라는 이름에 저작권 설정 등의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탓에 지금까지 7천여 편 이상의 ‘가짜’ 홈즈 시리즈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목록만으로도 책을 한 권 만들 수 있을 것 같군요.

한편, 홈즈 못지않은 명성을 얻은 뤼팽도 다른 작가의 작품에 등장했습니다. 르블랑이 작고한 후 프랑스의 서스펜스 작가인 피에르 부알로와 토마 나르스자크가 합작으로 모험소설에 가까운 속편을 발표했는데, 여기서는 뤼팽이 범죄자라기보다는 모험가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뤼팽 역시 르블랑이 생각조차 못했을 아시아에서 수모를 당했다. 뤼팽은 에도가와 란포의 <황금가면>에서 일본의 보물을 노리고 프랑스 대사로 변장해 잠입에 성공하지만, 명탐정 아케치 고고로(明智小五郞)와의 대결에서 보기 좋게 패해 도망치는 망신을 당합니다.

유명하기로는 이들에 뒤지지 않는 007 제임스 본드도 모방품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몇 가지 흥미 있는 패러디를 살펴보죠.

1964년 도널드 스탠리(Donald Stanley)는 <홈즈, 007을 만나다(Holmes Meets 007)>를 잡지에 발표했는데, 3년 후 1에서 221B까지의 번호가 붙어 있는 222권의 한정판 책으로 만들어 발간했습니다(221B는 아시다시피 홈즈의 하숙집 주소입니다).

․ 윌리엄 헨리 놀스(William Henley Knoles)가 클라이드 앨리슨(Clyde Allison)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0008 시리즈는 본드 패러디 중에서 아마도 가장 구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집니다. 60년대에 모두 20권이 나온 이 시리즈는 내용이 보잘것없지만, 전집이라면 값이 5천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0008' 시리즈 중 하나인 'Gamefinger'. 007 시리즈의 제목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 003 1/2은 007의 절반일까요? R.D. 매스콧(R. D. Mascott)은 1967년 <003 1/2: 제임스 본드 주니어의 모험(003 1/2: The Adventures Of James Bond Junior)>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본드의 조카인 제임스 본드 주니어가 주인공으로 활약합니다.

'제임스 본드 주니어의 모험'

․ 이름을 읽으려다 당황하게 되는 ‘I*n Fl*m*ng’의 <앨리게이터(Alligator)>(1962), 발음은 비슷하지만 철자가 다른 이언 플레밍(Ian Phleming)의 <푸시 라무르와 세 마리 곰(Pussy L’Amour And The Three Bears)>(1965), 그리고 아이 엠 플레이밍(I. M. Flaming)의 <스네이크핑거(Snakefinger)>(1966) 등은 작가의 이름까지 패러디한 작품입니다.

이런 모방 작품에 대해 달갑게 여기는 작가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코난 도일의 아들 에이드리언 도일은 추리소설가 존 딕슨 카와 함께 패스티쉬 작품을 모은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Exploits of Sherlock Holmes)>(1954)을 엮기도 했지만, 엘러리 퀸이 엮은 패러디 작품집 <셜록 홈즈의 재난(The Misadventures of Sherlock Holmes)>(1944)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항의해 결국 판매금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셜록 홈즈의 재난'

푸아로나 미스 마플을 창조한 크리스티, 캐드펠 수도사 시리즈를 쓴 엘리스 피터즈는 이와 비슷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자신의 주인공을 더 사용하지 못하게 법적인 조치를 취해 놓았지요. 그들은 평생 동안 애지중지 키워왔던 자신들의 소설 속 등장인물이 혹시라도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그러하였을 겁니다. 홈즈나 왓슨이 상상도 못할 만큼 다양한 모양으로 수많은 작품에 나타난 것을 보면 그들의 결정은 그다지 놀랍거나 이해 못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막아 놓더라도 완벽한 것이란 없습니다. 명탐정들은 워낙 개성이 강하기 때문에, 특징만 제대로 묘사해 놓으면 설령 이름이 바뀌더라도 원래 누구였는지 쉽사리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5인의 명탐정(Murder by Death)>(1976)은 이런 식의 패러디 영화로 가장 대표적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마일로 페리에, 제시카 마블스, 샘 다이아몬드, 딕과 도라 찰스턴, 시드니 왕인데 이들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엘큐울 푸아로, 미스 제인 마플, 대쉴 해밋의 샘 스페이드, 닉과 노라 찰스 부부, 얼 데어 비거스의 찰리 챈의 이름을 바꾼 것으로 추리소설 팬들이 보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또한 이제는 인터넷의 세계적 보급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패러디, 패스티쉬 작품들이 발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쓴 글을 어렵지 않게 여러 사람 앞에 내 놓을 수 있게 되었고, 이어 열성 팬들이 자신의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킨 팬 픽션(Fan Fiction)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죠. 마니아층이 두터워지면서 팬 픽션은 추리소설뿐만 아니라 SF, 영화, TV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에서 넘쳐나고 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상상력도 늘어나는 것 같네요.

얼마 전 소식을 보니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영화가 제작된다고 하던데, 원작과는 달리 젊은 시절 이야기라고 하네요. 제작사가 디즈니라고 하니 도대체 어떤 내용이 될지 궁금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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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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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3.30 1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플의 젊은 시절이라..., 저도 한 번 써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영화로 나오는군요, 마플이 1930년도에 등장했을 때 65~70세 정도였으니 젊은 시절이라면 50여년 전인 1880년대라는 계산이 나오는데, 그 때를 배경으로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1891~1894년 셜록 홈즈의 공백기에 마플이 활동한다든지 하면 재미있을 것 같군요.

  2. 카메라이언 2011.04.03 00: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헤헷, 그러고 보니 제가 제일 처음 본 셜록 홈즈가 나오는 코난 도일이 쓰지 않은 소설은 기암성이었나 봐요. ///ㅅ/// 중학교 때였나 초등학교 때였나 ... ...

  3. 블랙애더 2011.08.10 2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디즈니의 마플 역에 제니퍼 가너 소식은 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쌓아온 이미지만으론 요즘 TV에서 나오는 다른 수사 미드(CSI, NCIS, 본즈, 탐정 몽크)랑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