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제임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7.25 테마로 읽는 미스터리 <39> 첫걸음 (1)
  2. 2010.10.28 테마로 읽는 미스터리 <5> 필명 (17)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이건 내가 맡은 최초의 사건이거든."
-셜록 홈즈
<글로리아 스콧 호>(1893) / 아서 코난 도일

사람이 어떤 일을 하게 되는 데에는 - 그것을 어릴 때부터 바라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얼떨결에 택하게 되었든 간에 - 누구든지 크건 작건 사연이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추리소설 속에는 어지간한 인간승리 드라마를 능가할 만큼 기구한 사연을 가진 주인공도 등장합니다(물론 허구의 인물이니만큼 독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 작가들이 노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요). 그들이 어떤 과거를 지니고 있으며 어떤 연유로 범죄와 싸우는 직업을 택하게 되었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에드거 앨런 포가 창조한 오귀스트 뒤팽은 대단히 품위 있고 명석한 두뇌의 귀족이지만 집안이 몰락한 탓에 무너질 듯이 낡아빠진 하숙집에 친구와 함께 살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뚜렷한 직업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사건을 해결하고 사례금을 받기도 하죠. 뒤팽은 불과 세 편의 단편에만 등장했으며 범죄 수사를 직업으로 삼지도 않았지만 포가 40세로 요절하지 않고 좀 더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했다면 다른 어떤 모습을 보여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의 에밀 가보리오가 발표한 세계 최초의 장편 탐정소설 <르루즈 사건>(1866)에 처음 등장한 르코크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뒤 비천한 일을 하며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인 타바레에게서 범죄자가 되거나 아니면 범죄를 막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후 프랑스 경찰 범죄수사국에 투신해 과거 어둡던 시절에 익혔던 여러 가지 수법을 이용해 범죄를 수사하게 됩니다.

'르콕 탐정' 표지

반면 같은 프랑스 작가인 모리스 르블랑이 창조한 인물 아르센 뤼팽은 르코크와 비슷한 결손 가정 출신이지만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뤼팽의 아버지는 격투기의 달인으로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그 기법을 가르치는 방랑자였고 어머니인 앙리에뜨는 자상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고 하네요. 그러나 뤼팽이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사기죄로 갇혀 있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뤼팽이 범죄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이때 범죄자의 가족인 어머니가 사회로부터 받은 냉대에 대한 반발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편, 셜록 홈즈는 우연찮은 일로 자신의 재능을 심각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가 왓슨에게 회고한 바에 따르면, 홈즈는 대학 친구의 집에 놀러갔다가 놀라운 관찰력과 추리력을 발휘해 그의 아버지의 신상에 대해 정확하게 짚어 냅니다. 그리고는 잠시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란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사실과 거짓을 간파하는 게 자네에긴 식은 죽 먹기로군. 그게 바로 자네가 갈 길일세’라는 찬사를 듣지요(<글로리아 스콧 호>에서). 자신의 능력을 한낱 취미 정도로만 생각해 오던 홈즈는 추리력을 이용하는 것이 어엿한 직업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이 때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홈즈는 이들 중 누구일까요? '글로리아 스콧'의 삽화(시드니 패짓의 그림)

20세기 초반까지 등장한 천재적인 탐정은 대체로 이렇게 타고 난 재능을 직업으로 살린 인물들이었지만, 가스등에서 전기등으로 변하고 마차가 자동차로 변하는 시대가 되면서 차츰 판도가 변하기 시작합니다. 즉 적어도 두뇌 면에서 천재라기보다는 보통 사람 수준의 주인공들이 나타난 것이죠.

특히 귀족 등 신분 격차가 유럽보다 덜하던 미국에 등장한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웬만큼 지성을 갖추었지만 성격이 원만하다고 하긴 어려운 인물들이었습니다. 대쉴 해밋은 워낙 과작(寡作)을 한 터라 등장인물의 사생활이나 과거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 뒤를 이은 레이먼드 챈들러나 로스 맥도널드의 주인공은 비교적 자세한 경력이 알려져 있습니다. 챈들러가 창조한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는 원래 지방검사국 소속의 경찰이었지만 상관의 부당한 명령에 복종할 수 없어 사표를 던지고 한결 자유스러운, 하지만 권력은 없는사립탐정이 되었습니다. 그 뒤를 이은 로스 맥도널드가 창조한 사립탐정 루 아처 역시 말로우와 비슷한 경력을 지녔습니다. 아처 역시 지방검사국 소속 경찰이었으나, 경찰들의 부패를 참지 못해 사직하고 탐정의 길로 나섭니다.

루 아처는 '루 하퍼'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영화에 등장했습니다(폴 뉴먼이 연기).

20세기 중반의 미국 작가들은 경찰에 대해 뭔가 불신감을 품고 있었는지 이런 패턴은 자주 반복되었지만, 70년대 이후 약간씩 변화가 생겨났는데, 훗날 등장한 여성 하드보일드 탐정들의 경력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지요. 현대 미국 여성 하드보일드 계의 양대 작가인 수 그래프튼과 새러 패러츠키의 인물들이 대표적. 그래프튼의 주인공 킨지 밀혼은 20세에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일선에 배치되었지만 규칙에 얽매이는 생활이 싫어 퇴직하고 탐정 면허를 얻어 개업합니다. 한편 패러츠키의 주인공 V.I. 워쇼스키는 원래 변호사였으며 역시 변호사인 동료와 결혼했지만 자신의 이상(理想)과 어긋나는 법조계와 여자의 자립심을 무시하는 남편에게서 모두 결별하고 사립탐정이라는 직업을 택했습니다.

한편 기구한 사연을 가진 인물을 꼽으라면 영국의 여성 작가 P.D.제임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사립탐정 코델리아 그레이를 선정할 수 있을 겁이다. 태어난 후 불과 한 시간 만에 어머니를 잃는 것으로 시작된 힘든 어린 시절을 거친 그레이는 고생 끝에 케임브리지 대학 진학을 눈앞에 두었으나 방랑 생활을 하던 아버지의 요청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세계 각국을 유랑하지요. 아버지가 로마에서 사망한 후 런던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직 경찰 버니 프라이드의 탐정 사무소에 들어가 탐정에게서 필요한 기술을 배워 공동 경영자가 되지만 그것도 잠시 뿐. 프라이드가 불치의 암으로 고민하다가 자살하는 바람에 그레이는 불과 22세의 나이로 사립탐정사무소의 소장이 됩니다.

드라마로 제작된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주인공이 탐정이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반드시 첫 작품에서 밝혀지는 것만은 아닙니다독자들이 주인공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될 만큼 인기가 생겨야 작가도 다음 작품에서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하지요. 왕년의 홈즈가 그렇게 소개되었지요. 사실 대부분의 작가는 등장인물, 특히 주인공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배경을 만들어 놓습니다. 다만 너무 한꺼번에 드러내 놓기에는 어색하기도 하니까 조금씩 조금씩 꺼내놓는 겁니다(물론 코난 도일은 그렇게 계획적으로 쓴 것 같진 않습니다만). 최근 들어서는 위에 열거한 특별한 사연들이 너무 가식적으로 보이는지 어찌 보면 너무 평범한 계기가 소개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H.R.F.키팅의 주인공인 인도 봄베이 경찰의 고테이 경감은 어린시절부터 경찰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인물이고, 자넷 에바노비치의 여주인공 스테파니 플럼은 직장에서 해고된 후 말 그대로 돈은 필요하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용의자를 소환하는 일을 하게 되는, 어쩌면 이웃의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상황이 등장합니다. 추리소설은 시리즈가 많은 만큼 탐정들이 어떻게 일을 시작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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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평시민 2011.07.28 2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탐정이 된 사연..., 저도 연구중입니다. 극적일수록 더 좋겠지만 제가 전에 KBS <이야기 발전소>에 들고 갔던 작품은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의문사를 목격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경찰이 된 소년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지만 이러한 이야기라면 다음 편을 만들기가 어렵겠지요.




이름 뒤에 숨어있는 비밀


"난 필명이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 웨스트레이크가 한 말을 결코 잊을 수가 없어요. 그는, 맑은 날에는 그가 글을 썼고, 날씨가 궂은 날에는 스타크가 일을 떠맡았다고 했습니다." 
                                     -<다크 하프 The Dark Half>(1989), 스티븐 킹

자기의 본래 모습조차 잊어버렸다고 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괴도 아르센 뤼팽은 각각의 변장에 어울리는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아마 열 개는 충분히 넘은 것 같지만 스무 개까지는 안 되는 것 같네요. 뭐,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인물이니까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마는 너무 많으면 작가인 모리스 르블랑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테지요.

그런데 영국의 추리소설가 존 크리시(John Creasey)는 비록 얼굴 생김새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는 없었을망정 이름의 숫자는 뤼팽을 압도합니다. 추리소설을 쓸 때는 존 크리시를 비롯해 고든 애쉬, 패트릭 길, J.J.매릭, 제레미 요크 등을 사용했으며 웨스턴 소설(서부극 소설입니다)을 쓸 때는 텍스 라일리, 지미 와일드, 켄 레인저 등, 그리고 로맨스 소설을 쓸 때는 마가렛 쿡, 엘리제 퍼캠프스 등 여성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작품 표지에 올라간 이름은 무려 28개,그리고 6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습니다.

존 크리시 - 스물여덟개의 이름을 가진 사나이


실제 이름 대신 쓰는 가짜 이름은 범죄자들이 사용하면 가명(假名), 연예인들이 사용하면 예명(藝名), 작가들이 사용하면 필명(筆名) 등 다양하게 일컬어지는데(그러고 보니 이름 자체에도 다양한 이름이 많군요), 작가들이 필명을 쓰는 이유는 본명이 추리소설에 별로 어울리지 않게 평범하다거나, 유명인의 이름과 같거나 비슷하다던가, 발음이 어렵다던가, 혹은 이름을 숨기고 싶다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무명작가인 케네스 밀러(Kenneth Millar)는 추리소설을 쓰는 아내 마가렛 밀러(Margaret Millar)보다 늦게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네 권의 작품을 발표한 후 이미 유명했던 아내의 작품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존 로스 맥도널드(John Ross Macdonald)라는 필명을 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미 자리를 잡은 유명 추리작가 존 D.맥도널드(John D.MacDonald)와 혼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결국 그가 선택한 이름은 로스 맥도널드(Ross Macdonald)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그는 하드보일드의 거장이 되었고, 지금은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요. 역시 사람의 앞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영국의 계관 시인이며 옥스포드 대학 교수였던 세실 데이 루이스(Cecil Day-Lewis)는 낡은 지붕의 수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이 즐겨 읽던 추리소설을 직접 쓰기로 했는데, 본명으로 글을 쓰기가 부담스러워 니콜라스 블레이크(Nicholas Blake)라는 필명을 사용했습니다. 처녀작인 <증거의 문제(A Question of Proof)>(1935)가 성공하면서 작가가 누구인지 금방 밝혀졌으나, 평생 본명으로는 추리소설을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스티븐 킹은 웨스트레이크의 작품 이미지에서 착상해 <다크 하프(The Dark Half)>(1989)를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소설가 새드 보먼트(Thad Beaumont)는 조지 스타크(George Stark)라는 이름으로 폭력적인 범죄소설을 쓰고 있는데, 이 이름은 바로 도널드 웨스트레이크(Donald Westlake)의 필명 리처드 스타크(Richard Stark)에서 따온 것입니다. 웨스트레이크는 본명으로 <뉴욕을 털어라 (The Hot Rock)>(1970)와 같은 밝고 유쾌한 분위기의 작품을 쓰지만 스타크란 필명으로는 <인간 사냥 (The Hunter, 리 마빈이 주연한 <포인트 블랭크 Point Blank>, 멜 깁슨 주연의 <페이백 Payback> 등 두 차례나 영화로 제작된 바 있습니다)>(1962)과 같은 어둡고 폭력적인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웨스트레이크의 필명은 스타크 이외에도 앨런 마셜, 터커 코우 등 15개가 더 있습니다.

오늘은 맑은 날인가요 궂은 날인가요 -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두 명이 함께 작품을 쓸 때면 대개 ‘누구와 누구’라는 식으로 쓰지만, 필명 하나를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미국의 추리작가 엘러리 퀸이 떠오르네요. 작품 속 탐정의 이름이자 작가의 이름이기도 한 엘러리 퀸은 사촌 형제 사이인 프레드릭 더네이(Frederic Dannay)와 맨프레드 리(Manfred B. Lee)의 합작 필명이란 것은 추리소설 팬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요. 하지만 ‘더네이’나 ‘리’도 본명이 아닌데, 그들의 원래 이름은 대니얼 네이던(Daniel Nathan)과 맨포드 레포프스키(Manford Lepofsky)입니다. <로마 모자의 수수께끼>로 데뷔한 그들은 바나비 로스(Barnaby Ross)라는 필명으로도 <Y의 비극>등의 걸작을 발표한 뒤, 이름이 밝혀지기 전까지 퀸과 로스로 각각 행세하며 장난기 넘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컴퓨터의 덫(コンピュ-タの熱い罠)>(1986)을 쓴 오카지마 후타리(岡嶋二人)는 이름에서부터 ‘두 사람(二人)’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의미 그대로 도쿠야마 준이치(德山諄一)와 이노우에 이즈미(井上泉) 두 사람의 합작 필명입니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은 성(性)을 숨기기 위해 필명을 쓴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처럼 여겨지지만 20세기에만 해도 여성 작가들은 남성 작가들의 전유물인 미스터리를 발표하기 위해서는 남자 이름을 써야만 했습니다. 영국 여성작가 루시 비어트리스 맬리슨(Lucy Beatrice Malleson)은 앤소니 길버트(Anthony Gilbert), J.키머니 키스(J.Kimeny Keith)라는 필명으로, 미국 시카고 출신의 여성작가 조지애너 앤 랜돌프(Georgiana Ann Randolph)는 크레이그 라이스(Craig Rice), 마이클 배닝(Michael Venning)이라는 남성적인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했지요.

필명은 아니지만 영국 작가 필리스 도로시 제임스(Phyllis Dorothy James)는 여성이라는 선입견을 벗어나기 위해 약자를 써서 P.D.제임스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우리나라에 번역된 어느 작품에서는 P.D.를 Ph.D로 오해했는지 ‘제임스 박사’라고 소개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일본의 문학평론가이자 야구광인 오오이 히로스케(大井廣介)는 타지마 리마코(田島莉茉子)라는 이름으로 <야구 살인사건(野球殺人事件)>이라는 작품을 내 놓았습니다. 1970년대 이전만 해도 일본에서는 여성 작가가 드물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

1930년대 활약한 미국 작가 풀턴 아워즐러(Fulton Oursler, 1893-1952)는 추리소설을 쓸 때는 이름을 앤소니 애봇(Anthony Abbot)이라는 필명으로 바꾸고, 작품은 모두 ‘about’으로 시작하는 제목을 지었습니다. 작가의 이름이나 작품 제목이 모두 ‘A’로 시작되기 때문에 도서관의 10진 분류법에 의해 정리하면 항상 목록 앞부분에 오도록 한 것이지요. 이와는 좀 다르지만, 본명이 재니스 영 브룩스(Janice Young Brooks)인 미국의 여성작가 질 처칠(Jill Churchill)은 알파벳 순으로 진열된 서점 책꽂이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근처에 자리 잡기 위한 필명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필명은 어떤 방법으로 지을까요?

존 크리시가 기디언 경감 시리즈를 발표할 때 썼던 ‘J.J.매릭(J.J.Maric)’이란 필명은 자신의 이름 존(‘J’ohn), 부인 진(‘J’ean), 두 아들 마틴(‘Mar’tin)과 리처드(‘Ric’hard)등 가족 이름을 합쳐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신데렐라의 함정(Piège pour Cendrillon)>(1962), <긴 일요일의 약혼식(Un long dimanche de fiançailles)>(1991)등의 작품이 소개된 프랑스 작가 세바스띠앙 자프리조(Sebastien Japrisot)의 본명은 장 밥티스트 로시(Jean-Baptiste Rossi)인데, 그는 자신의 이름 철자 순서를 바꿔(애너그램 anagram이라고도 합니다) 새 이름을 만들어 냈습니다.  

국내 추리작가 중 가장 독특한 필명을 가진 분을 꼽아보자면 바로 원로 추리작가인 노원 선생님입니다. 원래 언노운(Unknown: '알려지지 않은','알 수 없는')을 한글로 차용한 안노운(安老雲)을 필명으로 사용하려 했다가 더 짧고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노원(No One: 한자명은 盧媛→盧遠→魯元으로 세 차례 바뀝니다)’으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단편 <미스터리 클럽의 살인>에는 안노운 경감이 등장해 한 가닥 흔적을 남기고 있지요.

'안노운'이 되실 뻔한 노 원 선생님


일본 추리문학계의 거두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의 본명은 히라이 타로(平井太郞)인데, 에드거 앨런 포우의 이름과 흡사하게 들리는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추리소설의 원조인 포우의 이름을 빌린 작가답게 그는 일본 추리문학계의 선구자로서 추리작가협회의 조직 및 위상 확립에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요즘 눈에 띄는 독특한 필명의 작가는 <불야성(不夜城)>(1996)으로 알려진 하세 세이슈(馳星周)입니다. 그의 필명은 국내 독자들에게 일본식 발음으로는 별 의미가 없겠지만, 한자를 거꾸로 읽어보면 옳커니 할 독자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세 세이슈는 홍콩 영화의 팬인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주성치(周星馳)의 이름을 거꾸로 해서 자기의 필명으로 삼은 것이지요. 코믹한 배우의 이름을 빌리긴 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웃음기라고는 거의 없이 어둡고 진지합니다.

성공하려면 이분에게 이름을 얻어가야... 시마다 소지


시마다 소지(島田荘司)는 <점성술 살인사건(占星術殺人事件)>(1981)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신본격(新本格)작가들의 대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신인 작가들을 추천하고 독려했습니다. <십각관의 살인사건>을 쓴 아야츠지 유키토(綾辻行人), <벚꽃 피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의 작가 우타노 쇼고(歌野晶午), <살육에 이르는 병>의 작가 아비코 다케마루(我孫子武丸),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의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法月綸太郞)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시마다 소지는 점성술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성명학(姓名學)에도 일가견이 있어 이들의 필명을 다 지어주었다고 하는군요.

그나저나 작가로서 성공하려면 작품도 중요하지만 이름을 잘 지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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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리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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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뎅뎅 2010.10.28 16: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저도 주성치 왕팬인데. 필명은 하나도 없는 저는 한때 별명이 한 스무개남짓 됐던 적도 있습니다. 실없는 오라버니가 저를 닥치는대로 부르다가 그만... 그때 다 적어나 둘 걸, 지금은 대여섯개 밖에 생각이 안나요.

    • 추리닝4 2010.10.29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명성 자자한 그 오라버니 어릴때부터 언어유희를 꽤 즐기셨군. 합류걸님^^; .. 다른 얘기지만 나는 네이버에서 '최코치'란 닉네임을 쓰는데 많은 사람들이 헬스장 관련 일 하는 사람인 줄 알더라는 ㅠㅠ

  2. 갈매 2010.10.28 17: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마다 소지!
    재밌네요. 우타노 쇼고며 아야츠지 유키토의 필명을 지어줬다니. 이들의 이름이 다 필명이었던 거군요.
    저도 좋은 필명 하나 얻으면 글이, 팍팍 써지려나??

  3. 카메라이언 2010.10.30 13: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할아버지의 소설 '뉴욕을 털어라'와 '페이백'은 와앗, 정말 거리가 있는데요! '뉴욕을 털어라'는 정말 가볍던데! 새삼 놀랍니다. 아아, 그나저나 시마다 소지 넘넘 좋아하는데 저렇게 생기셨구나. 사진은 처음 봤어요. 와 멋져멋져 꺅꺅!

  4. 이야기꾼 2010.10.30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필명하면 <류삼> 씨라는..ㅎㅎ
    그나저나 요새 류삼씨는 뭐하시나...

  5. 붕붕 2010.11.05 1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류삼', '삼류'...
    아 그렇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6. 필론 2010.12.08 17: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Bill Bass와 John Jefferson이 한팀으로 Jefferson Bass란 이름으로 Body Farm 시리즈를 내는것이나, 요즘 화제가 되는 드라마 캐슬의 캐릭터가 실제 작가처럼 책을 낸 Richard Castle의 경우도 특이한 경우인것 같습니다.

    • 추리닝4 2010.12.09 14: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리처드 캐슬 이름으로 출간하는 아이디어는 괜찮은 것 같아요..극중에서 함께 포커 치던 제임스 패터슨 옹이 생각납니당 ㅋㅋ 필론님 블로그와 링크 완료^^

    • 필론 2010.12.09 14: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임스 패터슨이 (시즌 2에서는 마이클 코넬리가) 카메오로 등장한다는 것도 드라마 캐슬의 매력인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