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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동 별관

셜록 홈즈, 스마트폰을 만나다

“가장 흔한 범죄가 가장 불가사의 할 때가 많지. 왜냐하면 추리를 끌어낼만한 특별하거나 새로운 특징이 없기 때문일세.”  - 코난 도일 <주홍색 연구>에서



영국 드라마 <셜록>이 특별한 이유


“당신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왔군. 어떻게 아냐고? 머리는 짧고 팔은 새까맣게 탔잖아. 손목만 검게 탄 걸로 봐서 분명 긴 옷을 입었고…. 그건 바로 군의관이란 얘기지.” 

택시 안에서 홈즈가 왓슨 박사에게 추리력을 뽐내며 ‘지 자랑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홈즈.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헌팅캡을 눌러쓰고 담배 파이프를 문 매부리코의 사내가 아닙니다. 곱슬머리에 모델처럼 쫙 빠진 몸매, 슬림한 바바리코트 걸치고 머플러 휘날리는 완전 간지남입니다. 그리고 지팡이 대신 스마트폰으로 무장했군요.

올해 영국 BBC에서 만든 3부작 드라마 <셜록>의 한 장면입니다. 21세기형 셜록 홈즈는 이렇게 뽀대나게 환생했습니다.



영국 드라마 '셜록'. 홈즈 역의 베네딕트 컴버배치(왼쪽)와 왓슨 역의 마틴 프리먼

영화 '셜록 홈즈'. 홈즈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오른쪽)와 왓슨 역의 주드 로



뭐, 홈즈야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탐정인지라 수많은 패스티시와 패러디 작품이 탄생했고, 또 지겹도록 영상화 됐습니다. 그러나 이번 BBC 드라마에 눈길이 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동안 각색된 홈즈물 대부분은 19세기 후반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 (흐음, 왜 f(x)의 빅토리아가 아른아른^^;)의 배경은 살리되, 이야기 구조는 많이 바꿨습니다만 이 <셜록>은 100년 세월을 훨씬 뛰어넘어 배경을 현재의 런던으로 가져오면서도 비교적 원작 설정에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작년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 <셜록 홈즈>를 떠올리면 바로 비교가 되시리라.

예를 들면 드라마 1편 제목이 <분홍색 연구 A Study in Pink>입니다. 누가 봐도 1887년 홈즈가 첫 등장한 <주홍색 연구 A Study in Scarlet>의 오마주입니다. 왓슨은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했다가 런던으로 돌아왔고 (영국은 그때도, 최근에도 아프간과 전쟁질을 했군요) 생활고 때문에 같이 하숙할 사람을 구하는 과정에서 홈즈를 만난다는 설정도 원작을 따랐습니다. ‘Rache’라고 쓴 메시지와 독이 든 알약을 소재로 활용하는 점도 흡사합니다.

다만, 신문 광고 대신 인터넷이, 마차 대신 택시가, 코카인 대신 니코틴 패치가 활용되고 원작보다 젊고 샤방샤방한 홈즈는 좀 더 열심히 뛰어 다닙니다. 점잖은 왓슨 박사도 귀여운 이미지로 변신했는데 원작보다 비중이 줄어 좀 찌그러져 보이는 정도가 불만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한 제작진의 선택은 꽤 성공적으로 보입니다. 디테일한 극본, 세련된 편집, 적당한 활극이 버무려져 세월의 간극을 뛰어넘어 흡입력 넘치는 모던한 홈즈로 재탄생시켰으니까요. 

이 드라마를 보노라면 ‘독자(시청자)의 시선은 이야기가 아니라 캐릭터 따라 간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암튼 홈즈는 자신의 고국에서 탄생한 드라마 덕에 ‘100년 전 명탐정’의 낡은 이미지를 벗고 변신을 꾀할 수도 있겠네요. 셜로키언들이 원작 훼손이라고 달갑지 않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박제된 홈즈보다 진화한 캐릭터로 생명력을 더하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여전히 먹히는 ‘세계 최고 탐정’

홈즈가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이유는 당연히 이름만으로 절반 먹고 들어가는 캐릭터 때문이겠죠. 

아서 코난 도일에 의해 1887년 <주홍색 연구>에 첫 등장해 1927년 <셜록 홈즈의 사건집>까지 40년 동안 4편의 장편과 56편의 단편에서 활약합니다. 뛰어난 관찰력으로 증거를 수집하고 과학적, 논리적인 사건 해결법은 명탐정의 전형을 제시합니다. 약간 정형화된 소설 패턴이 되레 쉽게 몰입할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홈즈의 탄생 전후에 에드거 앨런 포가 창조한 뒤팽, 에밀 가보리오의 르콕,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 뤼팽 등이 차례로 등장하지만 홈즈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끊임 없이 출간되는 홈즈 관련 서적들



홈즈란 인물의 특징은 <주홍색 연구> 앞부분에 자세히 나옵니다.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는데 너무나 깡말라서 훨씬 더 커 보이고 눈은 날카롭고 살집이 없는 매부리코는 전체적으로 기민하고 단호한 인상이다. 각지고 돌출된 턱 또한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문학, 철학, 천문학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고 정치는 약간, 식물학 중에도 아편이나 독성 물질에 대해서는 해박하고 화학, 해부학, 범죄 관련 문헌에는 정통하다. 바이올린 연주가 수준급이고 펜싱과 권투 실력은 프로급. 가끔씩 우울증에 빠져 며칠씩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때도 있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홈즈를 창조한 아서 코난 도일은 의사입니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죽어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에든버러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소설을 몇 편 발표해 재능을 인정받지만 가족 생계 때문에 전업 작가가 되는 건 주저했다고 합니다. 스물셋에 병원을 개업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환자가 많지 않아 본격적으로 창작을 시작합니다. 


셜록 홈즈를 창조한 아서 코난 도일


그는 의과대학을 다닐 때 스승이었던 조셉 벨에게서 영감을 받아 홈즈를 탄생시킵니다. 벨 박사는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의 직업과 고향, 가족 관계 등을 잘 맞췄다고 합니다. 구두에 묻은 흙이나 몸의 피부병 같은 걸 이용해서요.

초절정 인기를 구가하던 홈즈는 1893년 <마지막 사건>에서 숙적 모리어티 교수와 함께 스위스의 한 폭포에 떨어지면서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코난 도일이 자신보다 더 인기 있는 홈즈에 실증을 느껴 ‘살해’했다는 설인데요, 결국 독자들 압력에 못 이겨 9년 만에 부활합니다.  

이런 대중의 열렬한 환영 이면에는 당시 런던이라는 도시의 특수성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수도는 각 대륙에서 몰려든 이민자들로 급팽창합니다. 빈민촌이 늘자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런던 경찰은 범죄자 검거에 늘 허덕댑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소한 실마리를 통해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 사건을 척척 해결해내는 홈즈는 런던의 영웅이었던 셈이지요.

  

셜록 홈즈의 이름으로…

홈즈의 재창조가 활발했던 이유는 코난 도일이 저작권을 설정해 놓지 않은 점도 한몫 했습니다. 코난 도일 친구인 로버트 바란 사람이 ‘셜로 콤즈’ 라는 짝퉁 소설을 냈을 정도입니다. 

참 양심 없는 양반입죠. 모리스 르블랑은 자신의 괴로 뤼팽 작품에 홈즈를 무능한 탐정으로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참 질투 많은 양반입죠.


홈즈가 첫 등장한 ' 주홍색 연구'와 한국 작가의 패스티시 작품 '경성탐정록'



유명 작가들이 홈즈를 차용해 쓴 작품도 꽤 됩니다.

1944년 엘러리 퀸과 존 딕슨 카는 패러디집 <셜록 홈즈의 재난>이란 책을 냅니다. 이에 코난 도일의 셋째 아들 에이드리언이 분노하면서 서점에서 책이 회수하는 소동까지 벌어졌습니다. 

아버지 작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에이드리언은 직접 홈즈 시리즈를 쓰기로 결심합니다. 존 딕슨 카와 공동으로 1954년에 단편집 <셜록 홈즈 미해결 사건집>을 발표합니다. 책은 잘 팔렸다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 또한 짝퉁. 그런 이유 때문인지 가족들조차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스티븐 킹이 쓴 <닥터스 케이스>란 작품에도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홈즈가 등장합니다. 왓슨이 사건을 먼저 해결한다니 아! 놀라운 반전. 홈즈가 아흔 넘게 산 것으로 설정해 그의 노년의 삶을 그린 미치 컬린의 <셜록 홈즈 마지막 날들>도 유명하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니콜라스 메이어의 <셜록 홈즈 7퍼센트의 용액>에서는 마약에 중독된 홈즈가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치료를 받는다는군요. 

홈즈가 개 이름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아예 주인공을 왓슨 박사와 악당 모리어티 교수로 설정한 작품도 있다니 홈즈의 인기를 실감케 합니다.


한국형 셜록 홈즈도 있습니다. 바로 한동진, 한상진 형제가 작년에 발표한 단편집 <경성탐정록>입니다. 

설정이 재밌습니다. 1930년대 식민지 경성을 배경으로 열혈 조선 청년 설홍주와 중국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러온 왕도손의 활약을 그렸습니다. 주인공 이름에서 바로 홈즈와 왓슨이 연상이 되시리라.
한국적 정서와 익숙한 지명이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운수 좋은 날>, <광화사>같은 단편 제목들은 현진건, 김동인의 소설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국내작가 작품 중에서는 흔하지 않는 본격 미스터리물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미니시리즈 <셜록>이 1편 인기에 힘입어 내년에 시즌2가 나온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도 ‘국민 명탐정’ 한명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봤습니다. 국민 캐릭터 ‘뽀로로’도 만들었으니 언젠가 가능하겠지요? 비유가 좀 거시기한감요^^;


사소한 태클; 베이커 거리는 부자 동네랍니다.
코난 도일이 홈즈를 썼을 땐 100번지까지 밖에 없다가 1930년대 들어 홀수 번지가 생겼답니다. 홈즈의 방은 온갖 값비싼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명품 바이올린을 헐값에 구입한 이유는 설명되어 있지만 불독도 키우고 허드슨 부인은 손님이 올 때마다 차를 내옵니다. 궁핍해 하숙 동거인을 구한다는 설정이 설득력을 잃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홈즈와 떨어질 수 없는 소품이 사냥모자와 파이프(블로그 왼쪽 위 그림 참고)인데요.
원작에는 이것들에 대한 묘사가 명확하지 않은데 삽화가가 즐겨 그린 탓에 이미지가 굳어져버렸습니다. 홈즈처럼 멋을 아는 남자가 도시에서 사냥모자를 쓰는 일은 거의 없었겠죠. 파이프도 마찬가지로 연극배우인 윌리엄 질렛이 사용해 유명해진 것이랍니다 (:C)